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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을 진정으로 올려드리는 4가지 진짜 의미!
충현교회 한규삼 목사의 2부 설교(11. 3) 중, 3분영상 입니다
본문: 디모데전서 1장 17절
제목: 벅찬 가슴의 고백
👉🏻 https://youtu.be/1ndsJlEjiCk
[충현교회 홈페이지]👉🏻 http://www.choonghyunchurch.or.kr/
[설교 요약]👉🏻 교역자팀
[디자인]👉🏻 백민아 디자이너 [편집]👉🏻 슈퍼커넥팅
[기도 부탁드립니다]👉🏻 본 채널이 성경적이고, 정확한 복음이 전파되는 통로로만 사용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
👉🏻 본 영상에서 저작권 위반이 확인되거나, 의심이 된다면 꼭 말씀해 주시기 바라며, 관련한 어떤 문의를 주셔도 무방합니다(담당: 동유창 010-4724-9422 / 카카오톡 ID : dongnim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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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고백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이시며 약속하신 대로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나의 아버지이심을 고백합니다. 나는 예수 …
Source: home.kmou.ac.kr
Date Published: 11/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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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서 – 네이버 블로그
나의 신앙고백. . 예문 : 부모님의 믿음과 사랑 안에서 모태신앙으로 성장했습니다. 사춘기와 청년기에 잠시 갈등하고 방황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3/2021
View: 9770
나의 신앙 고백 –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나의 신앙 고백 신관(神觀) 제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하여 이 세상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또한 섭리 …
Source: changmoolee.tistory.com
Date Published: 9/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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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고백 – YES24
나의 신앙고백. : 사도신경으로 나의 믿음을 세우다. 황명환 저 | 두란노 | 2019년 07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6 리뷰 17건 | 판매지수 996.
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9/4/2022
View: 3993
나의 신앙고백 황명환 지음 – 두란노서원
흔들리지 않는 가장 든든한 신앙의 기초사도신경을 마음에 … 나의 신앙고백 표지 … 사도들의 고백 속에 기독교의 정수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Source: duranno.com
Date Published: 7/3/2022
View: 6973
나의 신앙 고백 (채희탁) – 평화의교회
나의 신앙 고백 (채희탁) … 나는 1939년 1월 7일 경상북도 문경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 나는 이력서에 종교는 항상 기독교라고 적었다.
Source: churchpeace.org
Date Published: 12/26/2021
View: 3333
특별총회와 나의 신앙고백 – UM News
특별총회와 나의 신앙고백. 글쓴이: 김평안 목사, 화이트피쉬베이 연합감리교회 올린날: 2019년 3월 18일ㅣWhitefish Bay, WI …
Source: www.umnews.org
Date Published: 9/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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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고백과 간증 – 브런치
제자훈련 생활 숙제 | 쉽지 않은 순교적 삶을 살다 가셨지만,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과 시몬 베드로가 부러울 때가 적어도 한 번씩은 있다.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3/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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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고백 – 황명환 – Google Books
나의 신앙고백. Front Cover. 황명환. 두란노서원, Jul 10, 2019 – Religion · 0 Reviews. Reviews aren’t verified, but Google checks for and removes fake content …
Source: books.google.com
Date Published: 10/6/2021
View: 6775
나의 신앙고백 – 인터파크도서
나의 신앙고백. 사도신경으로 나의 믿음을 세우다. 황명환 저 두란노서원 2019.07.10. 판매지수 16. 별점9.6. 할인가. 6,300 원 정가7,000원 10%↓할인.
Source: mbook.interpark.com
Date Published: 12/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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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나의 신앙 고백서
- Author: 슈퍼커넥팅-지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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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11. 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Hx8HXBKSXKU
나의 신앙 고백
믿음의 대화 와 정보의 교환 을 환영합니다. 특히 찬양 에 관한 정보의 교환을 기대합니다. 전자우편 이나 게시판 을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가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이시며 약속하신 대로 믿는 이들에게 성령 을 보내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 하시며 나의 아버지 이심을 고백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하며 하나님 아버지는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 하심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과 하나님나라 와 영원히 사는 것 과 우리 몸의 부활 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거 와 하나님나라의 성장 이 나의 삶의 최고의 목표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이러한 증거가 그리스도의 교회 를 통하여 되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됨을 기뻐하며 자랑합니다. 하나님은 설명이나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찬양의 대상 이라고 믿으며 찬양하는 인생을 살기로 작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오심과 함께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으며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향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성령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의 현실에 존재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 이며 그리스도의 몸 을 이루고 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모든 것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기로 작정합니다. 빌립보서 3:7-8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신앙고백서 : 네이버 블로그
나의 신앙고백
예문 :
부모님의 믿음과 사랑 안에서 모태신앙으로 성장했습니다.
사춘기와 청년기에 잠시 갈등하고 방황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에 큰 찔림을 받고 예수님만이 나의 인생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눈물로 감사드리며 유일하신 삼위하나님 만 나의 주인 되심을 신앙고백했습니다.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와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 안에서, 섬김과 헌신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온유하고 겸손한 믿음으로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 따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일평생 항상 주님께 순종하며 말씀 안에서 기도하며 살기를 다짐합니다. 아멘.
– 신앙고백서 작성법입니다
1. 예수 믿기 전 나의 모습
2.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
3.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시기, 어떻게?
4.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의 변화된 나의 모습
5.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 또는 구원의 은혜와 감격
신앙고백서 작성요령과 예문(세례, 입교자)
1. 작성요령
아래와 같은 순서로 작성하되 분량은 원고지 8-10매(A4용지 2페이지 정도)로 한다.
a. 신앙생활을 하기 전의 자신, 곧 교회에 다니기 전의 자신의 생활과 배경.
b.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동기와 과정
c. 신앙생활을 하고 난 후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와 현재의 상태.
d. 자신이 믿는 바 신앙내용을 기술한다. 이 부분이 핵심부분이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해 주셨는지를 쓰고 그것에 대한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장래의 소망과 영생, 천국에 대한 자신의 믿음도 기술한다. (아래의 예문을 참조하실 것)
2. 신앙고백서 예문
a. 나는 어린 시절부터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나의 삶은 교회에서 가르쳐 준 것들이 내 생각에 옳다고 믿고 있던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14살 때부터는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고 나처럼 교회에 가지 않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이것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 갔습니다. 차츰 마음속에는 고독감이 차올랐고 목적이 없는 삶에 대한 회의를 떨쳐 버리기 위해 술을 더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살아야 할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었고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졌습니다.
b. 이런 방황 가운데 나는 정말로 하나님이 계신다면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서 우연히 교회의 집회 광고를 보게 되었고 그것은 나의 마음을 끌어 당겼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 저는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자신도 젊었을 때 내가 찾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의 의미와 목표를 찾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펴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의 목적도 의미나 행복도 결코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 값을 다 갚아 주셨고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요청하는 것, 즉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날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실 때 나도 조용히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제 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시고 저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 이 기도를 드렸을 때도 나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평안해졌습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과 살아 계셔서 실제로 매일매일 그 계획 가운데로 나를 인도하심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내겐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있고 때때로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저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감사하고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전처럼 술을 이용하여 현실을 도피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대로 나의 삶은 완전히 새로워 졌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너무 행복합니다.
d. 나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분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나를 위해 대신 죄 값을 감당해 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분이 내 삶의 주인임을 고백합니다. 지금도 나와 동행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고 순간순간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앞으로 남은 삶 동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는 아직 모르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할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서든지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내 삶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를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위 예문은 하나의 본보기일 뿐입니다. 자신의 고백을 위와 같은 형식으로 진실하게 쓰십시오. 신앙고백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울산한빛교회에서-
나의 신앙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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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고백
신관(神觀)
제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하여 이 세상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또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지극히 작은 한 사건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셔서 만유를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과거의 일이든 현재의 일이든 장래의 일이든 모두 다 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그 어떤 천사이든 영적인 존재이든 모두 다 하나님 아래에 있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며 시간이 있기 전부터 영원토록 계시는 영원하신 분이시며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시지 아니하신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며 하나님은 전지하시어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일은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엄위하시어 모든 불의와 악독과 거짓을 용납하실 수 없으시며 죄에 대하여서는 진노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하셔서 은혜를 한 없이 베푸시기를 즐겨 하시는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저의 하나님은 저를 지으사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창세 이전부터 저를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실 것을 정하셨고 때가 되자 부르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제 속에 중생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사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로 말미암은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시고 이 세상 사는 동안 저를 정결케 하시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영화롭게 하시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락을 누리게 하실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서 영광과 존귀와 찬송과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한 유일하신 주님이십니다.
기독관(基督觀)
제가 믿는 예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한 위이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십니다. 때가 되었을 때 성자 하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인성을 취하셔서 이 땅에 사람과 꼭 같은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살면서 우리와 똑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저의 죄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기에 아무런 모자람이 없으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저를 대신 하여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저의 죄가 용서함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죄만을 짓다가 영원한 심판과 멸망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제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는 무덤에 삼일간 있다가 다시 살아나시어 죽음의 권세에 대한 승리를 확정하시고 장차 온 우주 가운데 일어나게 될 변화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저 역시 장차 부활하여 신령한 몸을 입게 되고 죄와 죽음의 지배가 완전히 종식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를 파멸에서 건져 내신 구원자이시며 저를 부르사 제자로 삼으사 순종과 믿음을 요구하시며 예수 자신을 닮게 하시는 분이시며 저를 다스리시며 이끄시는 저의 왕이십니다.
성경관(聖經觀)
신구약 66권의 성경은 모두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음을 믿습니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진리임을 확고히 믿으며 무엇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저에게 나타내시기 위해 기록하게 하신 특별한 계시임을 믿습니다. 신약은 물론 구약까지도 모두 성경 전권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임을 믿습니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이며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께서 저를 위한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앞으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통치하실 것인지를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저 자신의 오성과 능력으로만 깨달을 수 없는 일이며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을 듣고 읽는 저의 마음 속에 감동을 주시고 깨닫게 하실 때에야 비로서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발견하고 이를 영접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깨닫게 해 주는 책이 아니라 또한 저의 삶 속에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믿습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앞에 저는 머리를 숙이고 자기의 생각과 경험이 어떠하든지 때로 저의 생각과 경험과 반대된다 하더라도 신적 권위를 지닌 말씀으로 믿으며 항상 순종하기를 힘쓰는 자 되기를 소원합니다. 성경의 약속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으며 이 약속들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습니다.
교회관(敎會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임을 믿습니다. 교회는 인간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성립하고 조직된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세우신 기관으로서 성도는 반드시 교회에 속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특정인의 사적인 소유물이 결코 될 수 없으며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했으며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내에 각양 은사를 부어 주셔서 교회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힘과 지혜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그 은사를 교회를 위해 봉사의 기회로 삼아 드릴 때 그 교회는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는 줄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저에게도 교회를 섬길 은사를 주셨음을 믿고 이 은사를 잘 보존하고 개발하여 주와 복음을 위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교회 내에 질서와 사역을 위해 직분을 두도록 하셨으며 이 직분에 합당한 자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세워 모두에게 유익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행하여 할 사명은 가장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일이며,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나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일이며,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펴는 일이며, 성도 간에 서로 교제하며 위로하고 격려하여 이 세상에서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낙오되는 없도록 서로를 붙들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내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일과 거센 죄악의 탁류가 흐르는 세상 속에서 죄와 싸우는 영적인 싸움을 싸워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일임을 믿습니다.
죄관(罪觀)
죄는 하나님을 거역함이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입니다. 죄는 로마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정의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대하여 취해야할 태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자기 자신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존재인양 하나님과 의도적으로 분리를 꾀하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는 모든 악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 없이 사는 삶 즉 불경건함이며 이 불경건함으로부터 말미암아 모든 도덕적인 죄들, 거짓말, 시기, 미움, 살인, 부정직함, 약속을 깨트림, 게으름, 불신 등이 나옵니다. 죄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는데 아담이 죄를 범하여 타락한 본성이 유전되는 것이 원죄이며 스스로 범한 죄가 자범죄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며 그 자신의 부패한 본성으로 기인하는 죄를 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추거나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죄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는 죽음이라는 저주를 이 세상에 가져왔으며 죽음의 저주는 죄를 통해 세상에 곧곧에 펴져 피조 세계를 지배해 왔습니다. 죄는 저의 가장 큰 원수이며 저를 불행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며 죄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지극히 혐오스럽기에 죄를 이길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날마다 간구합니다.
내세관(來世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 세상을 갱신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 일시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그 때가 가까이 될 때에 일어나게 될 여러 가지 징조들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징조들이 이 시대에서 현저히 일어나게 있는 것을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시기가 임박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제가 해야 할 것은 깨어 있어 다가올 때를 준비하고 있는 것임을 믿습니다. 시대의 죄악과 타락함에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고 항상 거룩하게 살고자 죄와 싸우며 또한 사랑이 식은 시대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다짐합니다. 또한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받들어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새롭게 하실 때 더 이상 죄와 죽음의 권세가 힘을 쓰지 못하고 완전히 멸망당하게 될 것과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심판을 받아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이 낮아지게 될 것이며, 세상에서 무시 받고 핍박 받던 주의 자녀들은 높아지게 될 것이며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천국의 실재만큼이나 지옥이 실재한다는 것을 믿으며, 최종적으로 누가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인지는 오직 주의 심판과 판결에 따를 것이며 지옥은 꺼지지 않는 유황불이 타는 곳으로 묘사된 성경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는 곳입니다. 반면 성도들은 계시록에 묘사된 천상 교회의 모습과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며 그 동안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흘린 모든 눈물이 씼음 받고 위로 받을 것이며 고린도전서 13장 말씀과 같이 주님을 대면하는 보는 것과 같이 보게 됨으로 인해 지극히 큰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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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고백
사도신경은 라틴어로 ‘심볼룸 아포스톨로룸(Symbolum Apostolorum)’ 또는 ‘심볼룸 아포스톨리쿰(Symbolum Apostolicum)’이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사도들의 심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심벌은 상징, 표지, 암호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속에 들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도록 만든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심벌은 ‘사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신앙을 밖으로 표현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신앙고백(Apostles’ Creed), 이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 p.12
신앙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건 신앙이 아닙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저 깨달으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은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하고, 지식과 모순되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신앙을 견고하게 붙잡아줍니다. 진리의 표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 위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믿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 그 핵심이 중요합니다. 사도신경을 기독교 신앙의 변할 수 없는 원칙이자 기준이라고 말하는 건 앞서 말한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할 때 우리는 지적으로 충족되고 영혼이 소생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영혼이 확신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전진시킬 수 있습니다. — p.17
아버지는 사랑하는 분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부성애, 모성애라고 합니다. 이 부성애와 모성애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세상에 보내면서 그 생명을 잘 길러내기 위해 아버지에게는 부
성애를, 어머니에게는 모성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그렇듯 아끼고 사랑하며 기르는 겁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의 부성애와 모성애를 한데 모아도 하나님의 사랑에는 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보다 더 사랑하고,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삶이 고달픈 것이지, 이 세상에 문제가 많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 처해 있어 힘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아닙니다. 정말 문제는 우리의 고백이 확실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 고백에 우리 삶의 전부를 걸지 않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 p.23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많은 사람이 “나는 창세기부터 시작해 구약을 다 믿지만 동정녀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 마태복음에서 걸려”라고 말합니다.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역사는 믿으면서 동정녀 탄생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창세기도 못 믿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걸리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걸린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결국 믿음을 시작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 p.41
혹시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기독교 복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종교는 ‘보텀업(bottomup)’ 방식을 취합니다. 즉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허무함만 남을 뿐입니다. 아무리 높은 데까지 올라가려고 노력해도 하늘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복음은 철저한 ‘톱다운(top-down)’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이 땅으로 내려오신 위대하고 감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길이기에 하나님은 그 높은 보좌를 버리고 직접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며,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애쓰고 계십니다. 사도신경은 이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너무나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예수님의 은혜에 힘입어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 p.45
대체 성령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 말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우리가 믿는다는 사도신경의 고백이 저절로 이뤄진다고 생각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십자가 사건이 우리 사건이라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셨음을 고백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 이성과 의지의 결과라고 생각합니까? 절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이런 고백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 p.53
성령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동등한 ‘인격적’ 하나님입니다. 어떤 능력이나 힘, 에너지 같은 객체가 아니라 인격을 가진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격자이신 성령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시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밝히 알게 해주시는 분이지 절대 자아를 잃어버리게 만들거나 미친 짓을 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귀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닮은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 p.59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불거진 문제는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혼동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분명히 밝히지만, 교회의 주인은 목사도 아니고 봉사를 많이 한 장로도 아니며 교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헷갈려 하기 때문에 교회들이 복잡해진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만 고백하면 교회에 문제가 생길 일이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면 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 p.72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기도하고 축복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육체적·정신적 교제를 넘어서는 차원 높은 영적 교제이기에 그렇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선물임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 p.90
나의 신앙고백
흔들리지 않는 가장 든든한 신앙의 기초
사도신경을 마음에 새기다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당신이 믿는 신앙의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우리는 흔히 “믿음이 좋다”, “믿음이 없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정작 무엇을 근거로 그 말을 하는지는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다. 믿음은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믿음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믿는 믿음의 근거가 확실해야 한다. 이 책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었던 사도들의 고백인 사도신경을 우리 믿음의 근거로 둬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다. 사도들의 고백 속에 기독교의 정수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순식간에 읊조려 버리고 말았던 사도신경을 정확히 해부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속에 담긴 믿음의 보석을 다시 취하도록 한다. 이 책을 통해 “사도신경은 우리를 냉담한 지성의 소유자나 나약한 감성의 소유자가 되지 않게 하고, 올바른 믿음 위에 서게 하는 든든한 반석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이 내 말이 되길 바란다.
저자 소개_황명환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말씀 선포라고 믿는 황명환 목사는 군더더기 없이 진리만을 전하고자 마음과 정성을 쏟는다.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설교에 하나님의 뜻만 드러나도록 핵심을 짚어 진리를 선포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고전 2:2)한 목회자로서 “우리는 능력도 자랑할 것도 없으며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며 그 안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씀 가운데 늘 강조한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자아를 깨뜨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종하도록 늘 권면한다.
그의 설교는 복음에 대한 확고한 자세, 인문학과 신학의 절묘한 조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상, 그리고 삶에서의 구체적인 적용이 합쳐진 영적 설교로 이름이 높다. 그는 새벽에도 밤에도 기도의 무릎을 꿇는다. 바쁨이 핑계가 되어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도록 누구보다도 오래 기도의 자리에 머물러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신대원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구약학(Th. M), 윤리학과 기독교 문화(Th. D)를 공부했으며, 현재 수서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2007년 세상과 교회의 소통을 위해 수서문화재단을 만들어 문화사역을 감당하고, 2018년에는 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개봉하였다. 2017년에는 죽음과 천국에 대한 연구를 통해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하는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천국을 바라보며 순례자로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고 가르치기 위해 EPOL(Eternal Perspective Of Life)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종말론에 관한 비교연구”,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연구”, “죽음이해에 관한 유형론적 연구”가 있으며, 저서로는 《죽음, 새로운 삶의 시작》, 《허무》, 《자유》, 《그곳을 떠나라》, 《그것을 지키라》, 《그분을 섬기라》,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인 1, 2, 3》, 《인터로뱅》 등 다수가 있다.
목차
프롤로그
C h a p t e r 1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도들의 심벌, 사도신경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 끈
모든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앙의 지침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에 대한 믿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고백
C h a p t e r 2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에 담긴 기독교의 핵심 사상
종교 통합의 흐름 속에서 지켜져야 할 핵심 가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
참 인간으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하나님의 전능하심
종교의 가르침과 기독교 복음의 차이
C h a p t e r 3
성령을 믿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케 하시는 이
믿음이 없다, 능력이 없다 핑계치 마라
우리를 돕기 원하시는 인격적인 분
교회를 탄생시키고 성도의 미래를 주관하시는 성령
존재의 변화를 이끌어내시는 하나님
은사보다 열매가 중요하다
C h a p t e r 4
교회는 어떤 곳인가
‘개신교’와 ‘가톨릭’은 올바르게 사용되고 있는 용어인가
시몬 베드로라는 ‘한 개인’과 그의 ‘신앙고백’
교회의 진정한 주인은 오직 예수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는 위대한 능력
‘거룩한 공교회’가 의미하는 세 가지
바른 교회가 되려면
C h a p t e r 5
성도는 누구인가
영적 사귐,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
외로운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
죄의 용서, 기독교 복음의 핵심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담긴 세 가지 주제
스스로 죄를 해결하려는 인간의 헛된 몸부림
새로운 출발은 스스로 죄인임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데서 시작된다
C h a p t e r 6
우리의 미래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은 뒤 우리 몸은 어떻게 되는가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인간의 노력
성경이 말하는 영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
인생의 성공을 위해 기억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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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은 라틴어로 ‘심볼룸 아포스톨로룸(Symbolum Apostolorum)’ 또는 ‘심볼룸 아포스톨리쿰(Symbolum Apostolicum)’이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사도들의 심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심벌은 상징, 표지, 암호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속에 들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도록 만든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심벌은 ‘사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신앙을 밖으로 표현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신앙고백(Apostles’ Creed), 이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 12쪽
신앙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건 신앙이 아닙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저 깨달으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은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하고, 지식과 모순되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신앙을 견고하게 붙잡아줍니다. 진리의 표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 위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믿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 그 핵심이 중요합니다. 사도신경을 기독교 신앙의 변할 수 없는 원칙이자 기준이라고 말하는 건 앞서 말한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할 때 우리는 지적으로 충족되고 영혼이 소생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영혼이 확신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전진시킬 수 있습니다. ? 17쪽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많은 사람이 “나는 창세기부터 시작해 구약을 다 믿지만 동정녀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 마태복음에서 걸려”라고 말합니다.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역사는 믿으면서 동정녀 탄생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창세기도 못 믿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걸리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걸린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결국 믿음을 시작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 41쪽
대체 성령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 말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우리가 믿는다는 사도신경의 고백이 저절로 이뤄진다고 생각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십자가 사건이 우리 사건이라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셨음을 고백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 이성과 의지의 결과라고 생각합니까? 절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이런 고백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 53쪽
성령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동등한 ‘인격적’ 하나님입니다. 어떤 능력이나 힘, 에너지 같은 객체가 아니라 인격을 가진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격자이신 성령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시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밝히 알게 해주시는 분이지 절대 자아를 잃어버리게 만들거나 미친 짓을 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귀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닮은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 59쪽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불거진 문제는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혼동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분명히 밝히지만, 교회의 주인은 목사도 아니고 봉사를 많이 한 장로도 아니며 교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헷갈려 하기 때문에 교회들이 복잡해진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만 고백하면 교회에 문제가 생길 일이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면 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 72쪽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기도하고 축복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육체적·정신적 교제를 넘어서는 차원 높은 영적 교제이기에 그렇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선물임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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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고백 (채희탁) – 평화의교회
나의 신앙 고백 (채희탁)
(2013년 회지 “평화의울림“에 개제된 글입니다)
나는 1939년 1월 7일 경상북도 문경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에도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그 해에 서울로 이사를 왔으며 신암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1950년 6.25가 터졌는데 3개월간 북한 점령 하에 서울에서 살았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고향 문경-부산으로 피난 내려왔다. 휴
전과 더불어 서울로 와서 중학 3학년에 다녔다. 그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면서 안병무, 이영환, 함석헌 대 선배들을 뵐 기회를 가졌다.
군사 독재 치하에서는 시인 고은, 한빛교회 이해동 목사, 문익환 목사 등과 같이 어울리다 내 개인 기업체가 사찰을 받는 어려움도 겪었다. 개인 사업체의 어려움은 관료 정치, 부정부패와 제대로 타협치 못하는 내 성격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1991년 마지막 피난처가 된 미국으로 이민을 결행했다. 이민 수속에서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는데 부적격으로 판정날 순간에 기적 같이 VISA가 나왔다. 대신 내 이름의 성 표시가 Chae에서 Choe로 바뀌었다.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North Carolina에서 20년(그곳의 Bethel교회 김정일 목사는 잊을 수 없는 분이다)을 살았고, LA로 옮겨왔다. 그리고 평화의교회에서 15개월 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장장 73년이라는 세월 나는 교회를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이력서에 종교는 항상 기독교라고 적었다.
그런데 나는 정말 기독교인인가? 구원을 받았는가? 이런 생각으로 나를 돌아보게 된 것은 박신화 목사가 리더가 되어 보그의 <내가 만난 하나님>이란 책을 중심으로 그룹 토론을 시작하고부터였다.
나는 여태까지 구원, 천당/지옥 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교회에 출석하며 설교를 듣고 때로는 감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60년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나에게 당부하신 “착하게 살아라, 또 성경을 읽어라”는 유언을 지키기 위하여 성서 신•구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 한 자 한 구절 한 구절 써서 장장 20여 권의 노트를 채웠다. 그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단지 내가 죽기 전에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는 하나님을 만났는가?’라는 질문에 노출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역사 속의 예수는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73년 교회 생활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믿음이 없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음보다 더 중한 것은 사랑이라”하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지금 믿음이 필요함을 안다.
그래서 이제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을 주소서. 그 믿음은 산을 옮겨 바다를 메울 수 있다 했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에게 평화를 주소서. 그리하면 나의 마음의 하나님 사랑이 더욱 영역을 확고하게 넓혀 나의 마음속에 자리할 것을 믿습니다. 아멘.
(채희탁)
특별총회와 나의 신앙고백
편집자의 말: 이 기고문은 지난 특별총회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생각을 나누는 특별총회 시리즈 2편으로, 이번 주는 우리 교단의 가장 젊은 목회자 중의 한 사람인 김평안 목사의 2019 특별총회 결과와 성소수자 사역 등에 관한 생각을 나눈다.
설교단에서 펑펑 울고야 말았습니다. 지난 특별 총회가 끝난 후 첫 주일, 한 주간 동안 가슴으로 기도하며 써 내려간 설교를 나누는데, 정말이지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특별총회에서 54표 차이로 통과된 전통주의 플랜은, 이미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함께 해왔던 다른 지체에게 “너는 이상하다. 너는 필요 없다. 나가라” 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모든 지체들에게 “너는 저 죄인들과 함께 할 거냐? 그럼 너도 나가라”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전통주의 플랜을 잘못 읽고 있다 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분명히 이 통과된 안은 각 연회와 감독, 이어서는 목회자들과 개체 교회에게 인간의 성정체성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 밝히라고, 그리고 그것이 전통주의 플랜에서 말하는 것과 같지 않으면,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합헌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4월 사법위원회에서 재검토된다고 알고 있지만, 아픈 상처가 이것으로 치료되지는 못합니다.
위헌 판정을 받았음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며 살아온 이들에게 해를 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서로를 잇고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도,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한 가지 이슈보다 덜 중요합니까?
죄인이었으나 은혜로 새 생명을 얻고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겠다고 다짐한 헌신은 이 한 가지 이슈에 대한 대응으로 그 참과 거짓을 다른 이들로부터 판단 받는 것인가요?
물론, 많은 분이 이것은 동성애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여기느냐는 질문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 아니면 역사적 문맥적 해석, 그 어떤 것이든, 과연 성경을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내쫓는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맞는 걸까요?
“성경에 따르면, 너는 틀렸다. 그러니 나가라” 이렇게 하면, 남은 이들은 더욱 정결하고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나요?
마가복음 9장(38-41절)을 보면, 제자 요한이 예수께 말하기를 그와 그의 동료 제자들이 자신들의 ‘그룹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을 막아냈다고 합니다.
요한은 저들이 하던 일, 곧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일을 그만두게 하여, 마치 저들을 정화시킨 듯 말합니다.
그리고 저들을 배척한 일을 자랑하듯 예수께 말합니다. 요한은 분명히 예수께 칭찬을 기대하고 있는 눈치입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요한을 나무라시며 저들을 배척하지 말라 하십니다.
자신이 속한 예수 제자 공동체를 지켜내고 싶다는 선한 뜻이 요한에게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예수 제자 공동체가 그분의 이름으로 ‘사람을 살리고 해방시키며 생명을 더 풍성히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열려있으며, 또한 그렇게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믿기는, 예수님의 시선은 한 번도 문을 닫고 안과 밖을 나누려 하지 않고, 언제나 담을 허물어 안과 밖 구분 없이 함께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여된 사명 중 벽을 세우고 그 안에 있는 이들을 이른바 ‘안전’하게 하는 것과 벽을 허물고 끊임없이 손을 내밀어 사역과 선교, 그리스도의 친교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번 특별총회의 결정은, 한 교회 안에서조차 벽을 만들어 자신이 더 예수님의 뜻에 가까이 있다 주장하고서는 “내 뒤에 서지 않으려거든 떠나라” 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다. 한 가족이다. 서로 달라도, 그리스도의 여러 다른 지체로 똑같이 귀하다.”
이번 특별총회의 결정에서, 그 신앙고백을 찾을 수 있나요?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 모두를 사랑한다. 어떤 주제들에 대해서 우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사랑한다. LGBTQ 성소수자들과 그들의 가족들도 사랑한다.”라고 전통주의 플랜 지지자분들 중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많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그 사람들을 곁에 두기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들이 자신들의 진심을 말한다고 믿어주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특별총회가 끝난 이제 우리는 모두는, 우리 사랑하는 연합감리교회가 처한 어려움이 해결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단의 역사에서, 갈라져 나가라며 한 교회 안에서 다른 지체에 상처 준 것이 처음은 아니지요.
그 칼끝이 그 칼끝이 북미원주민들에게, 흑인들에게, 그리고 여성들에게 향해있을 때, 우리 연합감리교회에는 회개와 화해를 호소하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 호소의 울림을 더 크게 해준 분들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서로 간에 막힌 담을 허물자는 외침이었습니다.
한인연합감리교회 공동체가 그런 목소리와 행동이 되어달라고 호소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다가, 예수님의 시선에 등을 돌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회의 전통을 지키려다가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요 그 몸 안에서 서로를 해하여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잃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일이 특별총회에서 벌어진 것 같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습니다.
베다니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이웃들이 친구 나사로를 잃어가는 상실에 울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보시며 우셨습니다(요 11).
오늘도 애통해 하는 무리를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함께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보는 또 다른 한 장면 (눅 19),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셨다며 그 도시를 보고 우셨습니다.
교단의 특별총회가 이 기회의 때에, 주께서 누구를 통해서든 그분의 뜻을 드러내 보이시며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잊고, 배척과 분열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진정 이 교회를 바라보시며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약속하신 대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과 생명의 사역에 함께 하자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음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배척될 이는 아무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든 이를 환대하는 연합감리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막 9:41). 아멘.
김평안 목사는 위스콘신연회의 화이트피쉬베이 연합감리교회의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
나의 신앙고백과 간증
쉽지 않은 순교적 삶을 살다 가셨지만,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과 시몬 베드로가 부러울 때가 적어도 한 번씩은 있다. 그들은 너무나도 뚜렷하게 예수님을 전인격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체험하였다.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 보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나, 무리와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중 혼자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눈이 멀었다 낫지를 않나… 이런 스토리를 현장감에서 압도적으로 누를 만한 직접적인 체험 한 번 해보는 게 내 평생소원이다.
개인 간증의 세가지 요소
지난주 제자훈련 모임에서 1) 예수님을 믿기 전의 자기 형편, 2)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 그리고 3)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일어난 변화로 개인 간증을 구성 지을 수 있다고 배웠다. 목사님이 생활 숙제로 배운 것을 토대로 개인 간증을 써오라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인생 최대의 고난인 췌장암 4기 확진을 1년 전에 들은 내 경우에는 이런 변화의 과정이 수평선 위에 그어진 일차적 타임라인 형식보다는, 반복성 원형 도표인 것 같다.
굳이 표현하자면 대충 이런거?
그것은 간략하게 1) 솔직히 내가 처한 상황이 답답하고 싫고, 죽음은 두렵고, 이 와중에 침묵하시는 예수님이 원망스럽다는 마음가짐에서, 2) 침묵하셔도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성품을 말씀을 통해 보고 듣고 기억해내고 결국 오해를 푸는 것, 그리고 마침내 3) ‘죽음, 그것 두렵지 않다’의 평안한 마음 상태로 내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다.
21세기 사람인 나는 불과 100년 전 시인 윤동주처럼 나라를 잃은 아픔도, 이름을 개명해야 했던 고충도, 그 어떤 종교적 탄압을 받은 경험도 없다. 화목한 크리스천 가정 안에서 성장하였고, 모든 것이 풍족하였고, 십 대 때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경험마저도 교육적 사회적 측면에서 큰 축복이었다. 인생을 참 쉽게 살았던 나에게 남의 얘기만 같던 암이 그것도 암 중 가장 악질이라는 췌장암 4기라는 병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내가 걸린 췌장암은 매우 희귀종이라 일 년에 미국에서 약 500명 정도가 걸린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현대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내가 가진 암세포의 확진은 100% 가능한데, 완치는 전혀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 전지전능하고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렇다면 이런 어려운 상황에 어디 계신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질문을 C.S. Lewis가 필명으로 썼던 그의 책에서 더 잘 조목조목 따진다.
Meanwhile, where is God? This is one of the most disquieting symptoms. When you are happy, so happy that you have no sense of needing Him, so happy that you are tempted to feel His claims upon you as an interruption, if you remember yourself and turn to Him with gratitude and praise, you will be—or so it feels—welcomed with open arms. But go to Him when your need is desperate, when all other help is vain, and what do you find? A door slammed in your face, and a sound of bolting and double bolting on the inside. After that, silence. You may as well turn away. The longer you wait, the more emphatic the silence will become. There are no lights in the windows. It might be an empty house. Was it ever inhabited? It seemed so once. And that seeming was as strong as this. What can this mean? Why is He so present a commander in our time of prosperity and so very absent a help in time of trouble?
– From A Grief Observed by C. S. Lewis © 1961 by N. W. Clerk
1) 예수님을 믿기 전의 자기 형편
죽음의 문턱에서 나는 매일 밤, ‘밤 사경’에 두려움과 씨름을 한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 췌장암 4기라는 거친 풍랑을 만난 나는 예수님이 진짜가 아니면 어쩌지 하는 의구심이 매일 밤 내 머릿속을 침범함을 느낀다. 모태신앙이면 그런 의심이 없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믿었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느낌도 나의 머리를 자주 방문하는 단골손님이다. 철저한 버림받음. Complete separation. 철저히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받는 느낌이다. 이쯤 되면 예수님이 아주 미워 보인다. 예수님은 또 어쩜 그리 환청이 심하신지, 할 수만 있다면 보청기를 사드리고 싶을 정도다. 매일 밤 예수님께 이런 나의 두려움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있자면, “해탈의 경지” 가까운 무엇인가에 이르게 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삶을 포기함이지, 건강한 자세가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 과정은 어쩌면 정신적 자살행위와도 같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내 건강, 내 꿈, 내 가족,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인 등등)을 철저히 부수적으로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만 계시다면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내 삶이 마무리되어도 여한이 없다고 억지로 인정하는 그 순간, 그것은 어쩌면 매우 신앙심이 깊은 한 종교인의 고백 같지만 실상은 자기 최면과도 같은 정신적 자살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어떻게 내 건강과 내 소중한 것들이 소중하지 않겠나?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갇혀서 (아직도)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일종의 정신적 자살을 선택하는 모습이 예수님을 믿기 전의 내 형편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마치 저 위 어딘가에서 예수님이 보시고 감동을 받으셔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봐 하는 수박 겉핥기식 기도고 샤머니즘과 별반 다를 게 없다.
2)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는 과정은 한 템포 쉬고 예수님을 재발견하고 만나서 오해를 푸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성경책이라는 도구가 있다. 나도 항암치료로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개인 카톡 답이 늦는 편이다. 아무리 친한 지인이라도 힘들다는 핑계로 전화를 받지 않을 때도 수두룩 하다. 그런 내가 무슨 면목으로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나무라겠는가? 멀지 않은 훗날, 예수님을 만나서 ‘왜 그렇게 제 기도를 읽씹 하셨어요?’라고 물어보면 왠지 ‘넌 왜 그렇게 성경책 안 읽었냐?’하실 것 같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이 침묵하셔도 존재하시는 것을 믿기에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모습들을 조용히 묵상하며 그분의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성품을 기억해 낸다.
산속 깊은 곳으로 수련회를 가면 해가 지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는 손전등으로 멀리 앞길을 비추기보다 한 치 앞 내 발 앞을 비춰야 전진할 수 있다. 내 발에 등, 그리고 더 멀리 내 길에 빛이 되는 게 바로 이 성경 말씀이라면 결국 침묵하시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예수님과 만나려면 아쉬운 사람인 내가 이 성경을 읽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성경을 읽다 보면, (굳이 성경이 아니라 역사를 보더라도) 과거에나 현재나 여러 고통과 고난들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성경을 더 깊이 묵상하다 보면, 그런 아픔들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예수님은 치유사역의 일인자였다. 치유하시는데 인색한 분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인간 모두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서서히 내 생사의 문제가 다소 초라해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고난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가 어떤 것인지 논리적으로 정리가 되고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내 필요를 구하는 것은 베이스고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하면 예수님과의 오해가 어느 정도 풀리고 있다는 증거다.
3)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일어난 변화
예레미야애가 3장 22-3절에서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저자가 고백을 하는데, 내가 얼핏 듣기로는 이때 이미 저자의 국가 예루살렘은 멸망하였고 저런 희망적인 고백은 터무니없을 때다. 그렇다면 저자는 미친 걸까? ‘정신적 자살’을 한 걸까? 나는 저자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저런 고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믿고 일어난 변화는 내적의 변화다. 1년 전 췌장암 확진을 듣기 전의 내 모습이나 지금이나 겉으로는 엇비슷하다. 체중도 거의 유지 중이고 생활습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찬양 시간에 손 들고 방방 뛰려면 뭔가 부끄럽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예수님을 믿은 다음의 변화는 적어도 나에게는 어떤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평안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포기했을 테니까.
나는 하나님이 췌장암을 주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유전적 요소와 불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식습관, 그리고 잦은 흡연 정도라고 생각한다. 병을 주시지는 않으셨지만, 하나님은 나의 모든 상황을 기획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또 원하시면 나를 완치시키실 능력도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굳이 그러실 이유도 없으신 분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이라면,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인색하다고 비판하고 원망해야 정상일 거다.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궁휼하지 않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니까.
그러나, 믿음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그리고 고난은 믿음을 더 강하게 해준다. 편안함 속에서 점점 더 예수님과 멀어지고 있던 교만한 나를 고난은 겸손하게 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암”무것도 없어지니까 그제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마치 걸음마 때듯이. 체감상 지금 예수님은 절대적 부재 가운데 계심이 거의 99% 확실한데, 그게 아니라 나의 풍랑을 저 먼치 언덕 위에서 지켜보고 계심을 믿는 것. 예수님의 침묵하심이 그의 부재가 아닌 것을 성경말씀을 통해 기억하는 것. 바라는 것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니 그 단계에 이르는 순간, 그제야 라디오에서 나오는 외국 찬양의 가사가 내 신앙고백이 된다. “Even if the healing doesn’t come, and life falls apart, and dreams are still undone; you are God, you are good, forever faithful One.”
2017년 새해에 “온유야 아빠야”의 저자 장종택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간증을 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린 온유가 사경을 헤매는 최악의 상황에서 들었던 음성은 다른 게 아니라 “너는 나를 아직도 믿느냐?”였다고…
통계에 따르면 췌장암 4기 확진 후 평균 수명은 12개월에서 14개월이다. 확진 시기가 작년 2월이었으니 나는 이제 막 13개월 차 인 셈이다. 오늘내일 죽음을 맞이하여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닐 타이밍이다. 내 나이면 예식장 추산을 따져볼 나이에 제대로 된 장례식 비용을 구글링 해보고, 암에 오염된 내 장기들은 그렇다 쳐도 각막은 기증해도 되지 않나를 지식인에 검색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아직도 어이가 없고 황당하다. 내 마지막 임종의 순간은 어떨까? 고통 속에서 일그러진 모습이 아니면 좋겠는데.
그러나 이런 검색들, 질문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서 파생되지 않는다. 어쩌면 가보지 않은 도시에 대한 호기심 또는 흥미와도 같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사후세계, 그리고 좀 더 담대히 말하자면, 하나님을 드디어 대면할 때 내가 가진 여러 궁금한 것들이 해결될 때, 옆에 사이다나 한 병 있었으면, 더할나위 없이 완벽할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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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은 라틴어로 ‘심볼룸 아포스톨로룸(Symbolum Apostolorum)’ 또는 ‘심볼룸 아포스톨리쿰(Symbolum Apostolicum)’이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사도들의 심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심벌은 상징, 표지, 암호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속에 들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도록 만든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심벌은 ‘사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신앙을 밖으로 표현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신앙고백(Apostles’ Creed), 이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 12쪽
신앙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건 신앙이 아닙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저 깨달으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은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하고, 지식과 모순되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신앙을 견고하게 붙잡아줍니다. 진리의 표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 위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믿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 그 핵심이 중요합니다. 사도신경을 기독교 신앙의 변할 수 없는 원칙이자 기준이라고 말하는 건 앞서 말한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할 때 우리는 지적으로 충족되고 영혼이 소생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영혼이 확신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전진시킬 수 있습니다. ? 17쪽
아버지는 사랑하는 분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부성애, 모성애라고 합니다. 이 부성애와 모성애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세상에 보내면서 그 생명을 잘 길러내기 위해 아버지에게는 부
성애를, 어머니에게는 모성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그렇듯 아끼고 사랑하며 기르는 겁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의 부성애와 모성애를 한데 모아도 하나님의 사랑에는 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보다 더 사랑하고,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삶이 고달픈 것이지, 이 세상에 문제가 많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 처해 있어 힘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아닙니다. 정말 문제는 우리의 고백이 확실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 고백에 우리 삶의 전부를 걸지 않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 23쪽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많은 사람이 “나는 창세기부터 시작해 구약을 다 믿지만 동정녀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 마태복음에서 걸려”라고 말합니다.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역사는 믿으면서 동정녀 탄생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창세기도 못 믿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걸리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걸린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결국 믿음을 시작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 41쪽
혹시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기독교 복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종교는 ‘보텀업(bottomup)’ 방식을 취합니다. 즉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허무함만 남을 뿐입니다. 아무리 높은 데까지 올라가려고 노력해도 하늘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복음은 철저한 ‘톱다운(top-down)’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이 땅으로 내려오신 위대하고 감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길이기에 하나님은 그 높은 보좌를 버리고 직접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며,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애쓰고 계십니다. 사도신경은 이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너무나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예수님의 은혜에 힘입어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 45쪽
대체 성령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 말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우리가 믿는다는 사도신경의 고백이 저절로 이뤄진다고 생각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십자가 사건이 우리 사건이라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셨음을 고백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 이성과 의지의 결과라고 생각합니까? 절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이런 고백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 53쪽
성령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동등한 ‘인격적’ 하나님입니다. 어떤 능력이나 힘, 에너지 같은 객체가 아니라 인격을 가진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격자이신 성령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시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밝히 알게 해주시는 분이지 절대 자아를 잃어버리게 만들거나 미친 짓을 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귀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닮은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 59쪽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불거진 문제는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혼동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분명히 밝히지만, 교회의 주인은 목사도 아니고 봉사를 많이 한 장로도 아니며 교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헷갈려 하기 때문에 교회들이 복잡해진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만 고백하면 교회에 문제가 생길 일이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면 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 72쪽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기도하고 축복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육체적?정신적 교제를 넘어서는 차원 높은 영적 교제이기에 그렇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선물임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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