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길 목사 아들 |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참된 회개의 능력👉 3분 메시지 113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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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교회 개척한 아들 목사에게 “교만한 꼴통” – 뉴스앤조이

개척 교회 설립 감사 예배에 나타난 아버지 목사가 담임목사인 아들을 겨냥해서 … 이날 설교한 홍정길 목사를 비롯해서 순서를 맡은 선배 목사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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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11/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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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고향] (1)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의 함평 – 국민일보

홍 목사를 안다는 이들은 함평의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6·25전쟁 전후 장사 수완이 좋아 돈을 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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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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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목사 “아들의 마지막 메시지는 ‘감사’였다”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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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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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목사들, 예수 잘 믿으시오” – NEW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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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m.com

Date Published: 1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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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목사 “나는 가짜 목사였다… 제자훈련, 모순적” – 기독일보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가 중앙일보 일요일판인 중앙선데이와 부활절 … 가장 안타까운 건 아들에게 평생의 멍에를 물려줬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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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1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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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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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의 수목장을 떠나며 홍정길 목사가 남긴 한 마디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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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daily.co.kr

Date Published: 6/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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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홍정길 목사 아들

  • Author: CGNTV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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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1. 1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9k6INUui77k

아버지가 교회 개척한 아들 목사에게 “교만한 꼴통”

▲ 아버지 남영우 목사가 인사말을 하는 장면이다. 영상을 먼저 본 다음 본문을 읽기 바란다. (영상 제공 주날개그늘교회)

“정말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버지로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우리 아들은 꼴통입니다.” 개척교회 설립 감사 예배에 나타난 아버지 목사가 담임목사인 아들을 겨냥해서 ‘교만하기 짝이 없고, 꼴통이다’ 하고 독설을 날렸다. 축제장이 한순간에 얼음장으로 돌변할 만한 발언이었다. 교인들은 좋아 죽겠단다. 박장대소를 하며 공감했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동의했다. 목사 아버지와 목사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일산은혜교회(강경민 목사)가 주날개그늘교회라는 이름으로 분립 개척하고, 3월 6일 설립 감사 예배를 드렸다. 개척교회 교인들과 일산은혜교회 교인들과 외부 손님 등 200여 명으로 예배 장소가 차고 넘쳤다. 이 교회 초대 담임은 남오성 목사다.

남오성 목사의 아버지 남영우 목사(부천 새로운제자교회 원로)는 인사말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예정에 없었는데 사회자가 즉석에서 요청한 것이다. 자신에게 순서를 부탁하지 않은 아들이 괘씸해서였을까. 힘차게 출발하는 아들을 축복하고 응원해도 모자랄 텐데, 아버지는 원망과 유감을 가득 담은 말을 쏟아 냈다.

사연이 궁금해서 3월 15일 경기도 부천에서 부자를 같이 만났다.

아버지는 지금부터 34년 전인 1982년, 부천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개척하기 전에는 평범한 감리교회 권사였다. 20가지가 넘는 직업을 돌고 돌다가 마지막에는 제법 큰 경양식집을 운영했다. 느닷없이 소명의식을 느끼고는 신학교에 들어갔다. 교회를 개척했을 때 아버지는, 1학년 초짜 신학생이었고 39살 노땅 가장이었다. 아들 남오성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나이 제한 때문에 감리교회에 속할 수 없었다. 여러 교단을 알아보다가 성결교회에 둥지를 쳤다. 아버지는 현신애 권사와 이천석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병을 고치고 예언하고 방언했다. 성령과 은사와 기도 운동이 목회 삼발이였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유명 부흥사들과 교류했다. 수많은 부흥사 단체 임원을 맡았고, 부흥회 일정을 광고하는 교계 신문에는 아버지 얼굴이 자주 등장했다.

한 번 입은 와이셔츠는 두 번 갈아입지 않았다. 당시에는 부흥회 강사가 묵는 숙소에 와이셔츠와 속옷을 챙겨 놓는 것이 관례였다. 그걸 집에 가지고 와서 한 번씩만 입어도 남아돌 정도였다. 군대에 있던 아들을 면회할 때 당시 가장 비싼 자가용을 타고 나타나 위병소를 지키던 군인들이 ‘높은 분이 오셨다’고 연락하는 등 호들갑을 떨게 만들었다.

교회는 시동을 걸자마자 질주했다. 1년 만에 100명이 되었다. 상가 25평 공간에서 시작했지만 이내 더 넓은 곳으로 옮겼다. 개척 5년 뒤인 87년, 지금 위치에 예배당을 지었다. 잘나갈 때 교인 숫자가 1,000명에 육박했다.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 강사로 명망을 날렸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브레이크 없는 질주의 종착지는 재앙이다.

교단에서 급성장하는 교회였지만, 목사가 나이는 많고 서열은 한참 뒤다. 부러움과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이단 시비도 겪었다. 교단을 옮길까 하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났다. 재정 비리가 터졌는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적반하장으로 교인들을 선동했다.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절대 카리스마 아래에서 숨죽이던 교인들도 흔들렸다. 결국은 수백 명이 교회를 떠났다. 충격을 받았고, 기가 완전히 꺾였다.

목회의 기뿐 아니라 육체의 기도 꺾였다. 99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중환자실에 실려 갔다. 다행히 살아났으나, 뇌졸중, 뇌출혈, 심장질환, 중풍이 차례로 덮쳤다. 그때부터 외부 활동은 다 중단했다. 그리고 목회에만 전념, 주차장과 후생관 부지를 매입하고, 식당을 짓고 교육관을 세웠다.

아들 남오성은 89년 연세대 신학과에 들어갔다. 신학이라는 분야보다는 연세대라는 타이틀에 끌렸다. 아버지는 동상이몽이었다. 아들이 신학과에 들어가자마자 후계자로 낙점, “이 교회는 아들이 물려받습니다” 하고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아들은 뜨악했다. 학교 타이틀 때문에 점수에 맞추어 신학과를 갔을 뿐, 사명감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 귀로 듣고 저 귀로 흘려보냈다. 아버지 역시 아들에게 목회의 소명이 있는지 없는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아들이 이 교회를 물려받는 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데모하다 걸리면 집에서 쫓겨날 줄 알라고, 쓸데없는 일 만들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잔소리했다. 공염불이었다. 학교에서 제적 통지서가 날아왔다.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 안 가고 야학에서 어려운 애들을 가르치다가 그리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다. 하지만 아들은 운동권에서 활동하다가 짤린 것이다.

퇴학당한 아들은 고려대에 가고 싶다면서 학원 수강료를 내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고대 떨어지면 신학교 가는 것’을 조건으로 돈을 주었다. 하나님은 공부하는 아들보다 기도하는 아버지의 편을 들었다. 사회학과에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약속대로 성결대 신대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도 공부보다는 운동이 체질에 맞았다. 학교가 있는 안양에서 운동에 전념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운동권 학생 복교 조치’ 덕분에 연세대 졸업장을 받았다.

성결대를 다니는 동안 군대를 갔다 왔다. 제대 후, 다른 건 몰라도 영어는 붙잡아야 할 것 같아서 미국에 날아가 1년 동안 어학연수를 했다. 그리고 직장에 들어갔다. 도무지 회사 생활이 적성에 안 맞았다. 인생 전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신학 공부를 결심하고 성결대 신대원을 마친 다음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듀크대학에 갔다.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119를 타고 중환자실로 갈 때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만류했다. “내가 쓰러지면 이 교회를 어쩌란 말이냐.” 아들은 냉정하게 손을 뿌리쳤다. 이 정도 청개구리 행보면 설립 감사 예배 때 아버지에게 독설 아니라 독화살을 맞아도 싸다.

뭐든지 ‘거꾸로 행보’를 고수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유학비를 보냈다. 교회를 물려주기 위한 스펙 쌓기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물론 교인들이 바친 헌금이었다. 미국에서 교회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을 밟을 단계인데, 아들이 귀국했다. 아버지는 학비를 보내 주지 못해서 할 수 없이 돌아왔다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들의 기억은 다르다. 당시 전액 장학생이었던 그가 귀국한 이유는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불통 부자다.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귀국한 아들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국내 명문대를 나왔고, 미국 유학을 했고, 신학교 교수가 된 아들은, 아버지 교회에서 청소년, 대학 청년, 장년 예배 설교를 자주 했다. 세습할 스펙은 차고 넘쳤다. 아들의 신선한 설교를 교인들은 좋아했다. 주일예배 대표 기도 때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남오성 전도사님’을 위해 빼먹지 않고 기도하던 교인들은, 아들이 교회를 물려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세습으로 가는 길에는 한 조각의 장애물도 없었다. 뭐든지 ‘거꾸로 행보’만이 문제일 뿐이다. 어느 날, 남 목사는 아버지에게 교회를 떠나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처럼 아들도 일방적으로 맞선포를 한 것이다. 청천벽력이었다. 설립 감사 예배 때 탄식했듯이,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자 아버지는 닭 쫓던 개 처지가 되어 잠을 못 자고 눈물을 흘렸다.

남영우 목사에게는 ‘세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내가 죽을 고생을 해서 쌓은 재산과 명예와 지위이기 때문에 혈육인 아들에게 넘겨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자리를 아들이 물려받는 것 자체를 그저 당연하게 생각했다.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다거나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들이 학생 때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빨갱이였는데, 목사가 된 뒤에는 교회를 힘들게 만드는 빨갱이로 거듭났다. 아버지 교회를 떠나서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이 되고, 얼마 후 일산은혜교회 청년부 담당 목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갈수록 멀어져 가는 아들을 결국 포기했다. 목회 32년 만인 2014년에 은퇴하면서 자식이 아니라 남에게 후임 자리를 넘겼다.

아들은 뭐든지 아버지의 생각과 정반대로 갔다. 베트남 참전 교관 출신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군사 문화로 무장한 아버지는, 집안의 장군이고 아내와 자식은 하사관과 사병들이었다. 가족에게 자상한 아버지와 남편이 아니었다. 아들의 졸업식 사진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오직 교회밖에 몰랐고, 목회에 목숨을 걸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아들의 골수에는 자연스럽게 저항 기질이 새겨졌을 것이다.

정치관, 사회관도 같을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을 보면 아버지는 폭력 데모꾼이 나쁜 놈들이었고, 아들은 폭력 경찰이 나쁜 놈들이었다. 독재 정권이 무력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꼴을 견디지 못하는 아들 눈에는, 아버지 역시 교회에서 절대 독재자였다. 둘 사이의 균열은 깊어지고 넓어졌다.

아들이 아버지 교회를 떠나서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충격이었고, 절망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했다. 자기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데, 매스컴에도 사람들 입에도 제법 오르락내리락한다. 일간지에 쓰는 아들의 글을 통해 목회관도 엿보았다. 설교도 인터넷으로 들었다. 한편으로는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있어 보였다. 확실히 아버지보다는 똑똑하고 시대를 앞서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변화는 아들에게도 있었다. 운동권으로 투쟁하고 사회과학 책을 탐독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시대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삶은 시대를 장악해서 지배하는 정신이나 가치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사를 전공하면서 재확인했다.

집안 가장으로, 교회 목사로, 사회 구성원으로 아버지의 삶은,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가부장과 권위주의 문화와 맞물려 있다.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일하면서 목격한 수많은 사례는 그러한 확신의 무수한 실증들이었다. 전에는 아버지 개인이 미웠는데, 공부를 하면서 이해가 되고 아버지가 딱해 보였다. 자신의 걸음걸이는 아버지를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둘러싼 세상의 왜곡된 가치와 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부흥사로 잘나갈 때 일이다. 어느 목사가, 왜 목회가 안 되는지 모르겠다면서 남영우 목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남 목사는 그의 명함을 가리켰다. “이게 뭐야. 서울대 법대 나온 걸 제일 위에 놓고 목회하는 교회 이름은 맨 밑에 넣어? 서울대를 지우든지 제일 아래로 내려. 그러면 성공할 거야.” 나중에 보니까 명함을 바꾸었는데, 그때부터 복을 받아서 목회를 잘하더라고 했다.

아들은 ‘성공’이라는 가치는 동의하지 않지만, ‘서울대를 지우든 아래로 내려야 한다’는 가치는 동의한다. 아들에게 ‘서울대’는 무엇일까. 국내 명문대 출신에 미국 유학파 교수, 아버지가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목회 토양과 땅과 건물. 이게 다 ‘서울대’ 아닌가. 자신이야말로 금수저다. 아들은 그걸 독약으로 여겼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산다는 답은 아직 없지만, 어떻게 하면 교회가 죽는다는 답은 이미 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 절박함을 가지고 출발하려고 했다. 첫 번째 퇴로가 세습이었다.

일산은혜교회는 몇 년 전부터 분립 개척 준비에 들어갔다. 남 목사는 신청자를 모으는 일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당시 어머니는 암 투병을 하고 있었다. 항암 치료를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할 게 없다”고 했다. 남은 시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아, 엄마가 곧 내 곁을 떠나겠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기 위한 시험이든 사탄이 넘어뜨리기 위한 시험이든, 그걸 두려워하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이 다가오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길은 무엇일까. 어머니에게 선물하고픈 것이 하나 떠올랐다. 아버지와의 화해였다.

그날 아버지를 찾아갔다. 어머니 상태를 말씀드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아버지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자기 엄마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나? 이제 철이 좀 드는 건가? 그래도 쉬운 일이 아닌데, 기특하구나.’ 아버지는 잘잘못을 따질 게 없었다. 아버지도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함께 울었다.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병원도 다녔고 일산은혜교회도 출석했다. 어머니 소식을 들은 교인들도 함께 기도했다. 어머니의 암 투병 상황은 교인들이 교회 개척에 좀 더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여생이 불과 6개월에 불과하다던 어머니는 2년 넘게 살아 계시다.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시기 전에 새로 출발하는 교회에 모시고 싶었다. 올해 초, 어머니는 아들의 개척교회에서 드린 첫 예배에 참석했다. 아들의 개척교회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어머니의 생명을 지켜 주신 것은 아닐까.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는 아버지, 여동생와 함께 3월 6일 열린 주날개그늘교회 설립 감사 예배에 참석했다. 아들은 이날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다.

아들은 가족을 초대했지만, 아버지에게 아무런 순서도 부탁하지 않았다. 아들의 성질머리를 잘 아는 아버지도 아예 기대를 안 했다. 어쩐지, 대기실에 앉은 아버지의 표정이 떨떠름했었다.

예배 후반이다. 사회를 맡은 강경민 목사는 남오성 목사를 앞으로 불러 무릎을 꿇도록 했다. 이날 설교한 홍정길 목사를 비롯해서 순서를 맡은 선배 목사들도 앞으로 나왔다. 남 목사에게 축복의 안수기도를 하기 위해서다. 아버지 목사에게도 나오라 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두 번째로 무릎을 꿇는 순간이다.

아버지는 광고 시간에 즉석에서 독설 담은 축복의 말을 꼴통 아들에게 해 주었다. 예배 마지막 순서로 홍정길 목사가 하기로 했던 축도를 남영우 목사에게 넘겼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서를 하나도 안 맡겼는데, 안수기도에, 인사말에, 축도까지 아버지는 세 번이나 순서를 맡았다. 오늘 이 순간까지는 아들이 완승하고 아버지가 완패했는데, 이날만은 아들이 완패하고 아버지가 완승했다. 결론은 둘 다 승리.

교만하기 짝이 없고, 여태 뭐든 정반대 길로만 달리던 꼴통 아들이 이날 이후로 자랑스러워졌다. 뿌듯했다. 아들이 잘되어서 기쁜 것도 있지만, 아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멋진 목회를 하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버지 목사 말에 의하면 요즘 교단에서 세습 안 하는 교회가 하나도 없다. 아들은 물론이고 사위에게도 세습한다. 아들에게 세습하려는 목사를 만나면 뭐라고 조언하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우리 아들 이야기를 해 주면서, 아들을 믿고 다 맡기라고 말하겠다. 자식 자랑은 아니지만, 아들이 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자기가 잘하는 것도 있지만 교인들이 믿어 주기 때문 아닌가. 왜 믿겠나. 갖춘 것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닌가.” 아버지는 자식 자랑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아들의 스펙이 뒷받침이 되었다고 여긴다. 잘 가다가 도로 삼천포로 빠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다. 부정할 수도 없고, 외면할 필요도 없다. 대신 시대의 한계에 갇힌 아버지의 길을 답습하지 않고, 그 DNA를 품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아들이 필요한 시대다. 무승부가 아니다. 둘 다 승리하는 것이다.

▲ 위쪽 사진은 인터뷰를 끝낸 다음 포즈를 취하고 찍은 것이다. 아래쪽 사진을 보면 인터뷰 내내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뉴스앤조이 김종희

[목자의 고향] (1)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의 함평

아버지 믿음의 유산 나비처럼 날다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69) 목사와 길을 떠난 건 지난달 19일이었다. 홍 목사가 해외 유학생선교대회 ‘일본 코스타 2011’을 마치고 입국한 다음날이었다. 한국 복음주의 교계의 한 축인 홍 목사의 스케줄은 빡빡하다. 그런 분의 시간을 종일 요청하자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의 고향은 ‘나비축제’로 유명한 전남 함평이다. 인구 3만명이 좀 넘는 한적한 곳. 70년대 농민운동사에 남는 ‘함평고구마사건’ 외엔 딱히 기억에 없는 밋밋한 한촌이었다. 산수도 제대로 된 골 하나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

이 한촌에 복음의 양식이 들어온 것은 100여년 전. 지금은 90여 교회가 구령에 힘쓰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의 경우 54개 교회가 노회를 구성했을 만큼 복음화율이 높다.

홍 목사는 이날 함평읍내 외곽 가족묘를 찾았다. 조카 홍성표(51·사회복지시설 ‘자광원’ 원장)씨가 추석 추도 예배를 앞두고 벌초를 준비하고 있었다. 홍 목사는 부친 홍순호(1915∼95·함평교회 장로·건국유공자) 묘역에서의 기도가 유난히 깊어 보였다. 고향의 아버지는 성화(聖化)를 향한 관문이자 때론 닫힌 문이었다.

홍 목사를 안다는 이들은 함평의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6·25전쟁 전후 장사 수완이 좋아 돈을 좀 만졌기 때문이지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부잣집은 아니다. 홍순호 장로가 예수 믿으면서 물리가 남들보다 일찍 트이고 이로 인해 재물 축복을 받았다.

열두 살에 교회 종지기였던 홍 장로는 열일곱 살에 집사가 됐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멸시받던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와 몇몇 청년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전도하고 성경 공부를 했지요. 훗날 국회의원이 된 나판수 어른 등이 ‘함평 자전거부대’였습니다. 물자 귀한 시대에 서울에서 물건 떼다 팔아 돈을 벌기 시작하셨고 읍내에서 제법 큰 의신상회를 하셨습니다.”

어릴 적 홍 목사가 기억하는 집은 ‘꽃동산’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함평교회 자리. 일제 강점기 호남선 학다리역과 함평읍을 연결하는 궤도열차가 있었는데 광복 직후 그 궤도회사의 일본인 적산가옥이 두어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홍 장로 집이 됐던 것. 유리온실과 일본식 정원이 아름다운 집이었다.

홍 장로에게 재산은 ‘다섯 달란트’(마 25:16)였다. 금 다섯 달란트가 열 달란트가 되었고 또 스무 달란트가 되는 식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 돈으로 교회를 세우고 고아원을 짓는 데 썼다. 작고한 신학자 박형룡 목사, 함평읍교회 김병두 목사, 나판수 윤인식 전 국회의원, 이원설 전 한남대 총장 등과 크리스천 리더 그룹을 형성해 복음 전파에 힘썼다.

하지만 전쟁은 ‘부르주아’가 설 자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홍 장로는 가족을 남긴 채 부산으로 급히 피난을 갔고 남은 가족은 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함평은 좌우익 대립으로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곳입니다. 아버지가 말씀을 붙들고 가난한 이들 구제에 앞장섰기에 전쟁통에 화를 면했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우리 식구는 목포에서 아버지와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홍 목사는 근대 문명도시 목포에서 유달초교와 목포중학을 다니며 한 시절을 보낸다. 김지하 시인, 한화갑 전 국회의원, 이석우 경희대 명예교수와 사회사업가 윤기 등이 같이 수학한 동창이다.

한데 아버지라는 거대한 산은 소년 홍정길에게 넘지 못할 벽이자 피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밀어붙이는 아버지가 유난스러웠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목포에서 함평으로 돌아왔어요. 서울 수복 후 함평에 고아원이 생겼는데 맡아 운영할 사람이 없어서였죠. 당연히 아버지가 맡았지요. 지금의 자광원입니다. 그리고 저도 그 아이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 고아원 아이가 된 거죠. 아버지 성격상 예외가 없었거든요. 목포는 천국이었던 셈이죠.”

아버지는 새벽기도에 다녀오면 매일 예배를 드렸다. ‘제임스 딘’처럼 반항이 몸에 밴 그는 머리 숙이고 기도하다 졸기도 했다. “많이 맞았습니다. 허허.” 또 돈 많은 장로의 아들 눈에 뵈는 교회와 목자의 행태는 부조리한 현실이기도 했다. 그 무렵 이웃한 영광 염산의 바닷가에서 훗날 작가가 되는 송영(70)이 ‘촌구석 선생질’하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하염없이 바닷가만 바라보듯이 홍 목사 또한 도망치고 싶은 고향에 유폐되어 있었다. 청춘에게 고향은, 아버지는 머리 둘 곳이 못 된다. 때문에 서울행은, 철학 전공은 순전히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다.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쫓겨나 당산나무 밑에서 쪼그리고 잤던 아버지의 신앙 내력을 어린 제가 어떻게 이해했겠습니까. 목사가 됐을 때 ‘네가 목사가 되다니’하시면서 우셨어요. 무던히 속썩이던 자식놈이니 더했겠지요.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면서 꼭 같은 행동을 빠짐없이 하셨는데 의자 들고 문 밖에 나와 ‘홍 목사’ 기다리시는 거였죠.”

그가 고향에 들어서자 “우리 장조카 왔다”며 작은어머니가 반색하며 덥석 손을 잡았다. 아들 홍성표씨와 함께 ‘자광원’을 운영하는 유보영(77) 함평교회 권사였다. 홍 목사는 아버지와 교인이 함평천에서 모래 날라 지은 적벽돌 건물 자광원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젠 근대문화재급이 된 건물이다. 어릴 적 영산홍이 붉게 탔던 정원과 유리온실 갖춘 집은 성전이 돼 자광원 옆에 자리하고 있다.

이날 관절통으로 고생하는 유 권사는 ‘늙은’ 장조카 목사에게 도가니탕을 대접했다.

●홍정길 목사

고 옥한흠 하용조, 이동원 목사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복음주의 목회자. 숭실대 철학과 총신대 대학원 졸업. 대학 동기들에게 “그 친구가 목사됐어?”란 소릴 들을 정도로 반항하는 삶을 살았다. 1965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 가평 입석캠프에서 회심했다. 남서울은혜교회 목사가 된 후 강남 수서 장애인학교 밀알학교를 설립·운영하는 한편 북한 및 중국 동포 선교에 앞장섰다. 이와 함께 유학생 선교단체 코스타를 이끌고 있다. 내년 은퇴를 앞두고 경기도 가평에 선교사 은퇴마을을 준비 중이다.

●말하다

“9형제 대식구였다. 여동생 은선이 소아마비였다. 미국 갔다가 장애인도 일하는 거 보고 놀랐다.”(장애인 교육 ‘밀알학교’ 세운 이유를 설명하며)

“외할머니 기도로 목사가 됐다. 외할머니는 신사참배 반대하다 대전 감옥에 수감됐다가 풀려나 1945년 부활절에 소천하셨다. 두 달 동안 외할머니와 지냈는데 불과 네 살이었다. 한데 외손자 좋은 목사 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소리가 너무나 커 지금도 명징하다.”(목사 된 이유를 설명하며.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렸다)

“홍군은 남의 생각을 빌어서 예수 안 믿는가.”(홍 목사가 CCC 캠프에서 예수 안 믿어진다며 따지고 들자 김준곤 목사가 한 말)

“목회자는 자녀와 돈 문제 앞에서 일반 사람과 달라야 한다. 성도는 직장생활에서 일반 직장인과 다른 열매가 있어야 한다.”(크리스천의 신앙생활을 언급하며)

함평=전정희 기자 [email protected]

홍정길, “목사들, 예수 잘 믿으시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인터뷰-상] 남서울은혜교회 담임 은퇴…”한국교회 근원 맑아지면 희망 있어”

한국 복음주의 1세대를 대표하는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가 2월 12일 은퇴를 한다. 복음주의 4인방(고 옥한흠·이동원·고 하용조·홍정길) 가운데 마지막으로 홍 목사가 은퇴하면서, 복음주의 1세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 홍 목사는 지난 5일 일원동 밀알학교 이사장실을 찾아간 기자에게 유통기한이 지난 자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으러 왔느냐며 뼈있는 인사를 건넸다. 최근 실효성이 다했다고 비판받는 87년형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에 그가 있다.

1965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한 캠프에서 회심한 홍 목사는 남서울교회를 개척하여 크게 성장했지만, 1995년 밀알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에 돌연 퇴임을 결정하고 남서울은혜교회를 새로이 개척했다. 그는 대외적으로 유학생 선교 운동 단체 코스타와 캠퍼스 선교 단체 연합체인 학원복음화협의회 등의 활동을 통해 복음 전도에 앞장섰고, 장애인 밀알학교, 남북 나눔 운동 등 고통과 갈등의 현장을 목회의 사역지로 삼아 사회 선교에도 힘썼던 명실상부한 복음주의자다.

홍 목사는 37년간 목회하면서 경험한 가슴 절절한 사연, 87년 복음주의 체제에 관한 1세대 목회자로서의 생각, 통일 운동과 복지와 관련한 소신, 복음주의권 후배 목회자들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과 충고, 은퇴 후 계획까지 두 시간에 걸쳐 진심 어린 이야기를 쏟아냈다.

-37년간 목회 활동을 하면서 가장 의미 있게 관철했던 원칙은 무엇이었습니까.

밀알학교 설립 이야기로 풀어 보겠습니다. 설립을 1992년에 시작했는데 95년까지도 진척이 안 되더라고요. 어려움이 있을까 봐 땅을 살 때도 우리 교회 이름으로 사지 않고 밀알학교로 했어요. 그런데도 안 돼서 제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 때문에 포기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하나님께서 ‘네가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소유보다 자유를 훨씬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소유는 내가 묶입니다. 자유가 제한되기 때문에 모으려 하지를 않습니다. ‘주님, 제가 소유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고 나니 제 퇴직금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때까지는 제가 퇴직한다는 걸 모르고 주님께 퇴직금을 바치겠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퇴직금은 제가 그만둘 때 받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금요일에 기도하고 나서 주일에 통보하고 바로 다음 주에 일어섰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새벽마다 이름을 불러서 기도했던 교인이 태반인데, 의논해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나와 버렸어요. 주인께서 가라고 하면 가야지. 남들 생각하는 것처럼 고뇌 속에서 한 게 아니라 그냥 가라고 해서 일어난 것뿐입니다. 순종은 그때 안 하면 안 되더라고요. 주님의 음성이라고 판단됐을 때, 그대로 빨리하면 쉽습니다. 지체하다 불순종하더라고요. 시간 끌다가 주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한 것이 더러 됩니다. 제 생애를 뒤집는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목회는 경영과 다르다고 누차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에게 목회 경영과 목회 활동은 어떻게 다릅니까.

한국교회는 미국의 영향으로 목회가 경영으로 변화됐어요. 긍정적인 면을 본다면, 목회의 다양한 측면을 표준화한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회 가운데 인격과 인격이 만나 서로 교제하고 사랑하면서 만들어 내는 신앙의 전수는 사라지지 않았나 싶어요.

예를 들자면 성경 전체에서 선지자나 위대한 지도자의 자녀는 부모의 영향을 못 받고 오히려 그 부모에 누가 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것과 반대로 족장들은 좌충우돌하는 과정은 있지만 결국은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해 줍니다. 인간으로서 욕심낼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을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면,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만 주신다면 아무것도 그 위에 덧붙이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족장들은 부모와 자식의 삶이 서로 맞대고 얽혀져서 삶을 전수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은 자녀와 삶의 접촉점이 없어요. 저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격의 전수는 인격으로 하는 것이지 교육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요즘 그게 안 되니까 전부 책 읽는 데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자기도 정리 안 된 서구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합니다. 예리한 비판력을 가졌으나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상실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신앙의 전수를 세습을 합리화하는 원리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세습은 자식에게 저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뿐 아니라 자식에게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생애를 주셨습니다. 부모가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까지 전해 주는 것은 자식의 독특성을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부모로서 할 일은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주신 독특성을 아름답게 꽃피우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재벌도 세습을 하는데, 그런 가정마다 문제가 없는 곳을 못 봤습니다. 형제들이 사이좋은 집도 못 봤고요. 예수를 믿어도 똑같아요. 한평생 살다 가는데 자기가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 다 놓고 가는 세상인데 말입니다. 많이 가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것 외에 기쁨과 만족은 없습니다. 고통을 나누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자기 성취를 자녀에게 다 안겨 주는 건 자녀에 대한 모독입니다.

-목회가 경영으로 변질되었듯이 큰 미국교회들의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을 그대로 이식하려는 문화가 교회에 여전히 있습니다. 비전을 제시하고, 성취하기 위해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습니다.

저는 목회의 비전이 없는 사람이에요. 비전은 CCC 졸업할 때 같이 졸업해 버렸습니다. 대부분 비전이라는 목표를 세워 놓고 사람 상하는 것을 불사하더라고요. 사람의 영혼이 상처입고 고통을 받는 것이 정말 비전일까요.

제가 75년부터 목회하면서 오늘까지,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해고하지 않았습니다. 못나면 못난 대로 내게 붙여 줬으니까, 오히려 이 사람이 다른 데 가서 해를 끼칠까 싶어 제가 품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저기 가서도 문제더라고요. 저는 그 사람을 알고 당할 만큼 당했기 때문에 대처 방법을 압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또 그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요.

남서울교회에 있을 때 한 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가 나가고 나니까, 효율이 안 된다고 그분을 내보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분을 데려와서 지금까지 같이 있다가, 은퇴할 때 내 후임에게 짐 안 지워 주려고 같이 은퇴했습니다.

-교인이 2000명이 넘어가니 한 사람 한 사람 기억하며 기도가 안 되더라고 고백한 적 있는데, 그때는 어떻게 목회를 하셨는지요.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성도들이 나와 같은 목표를 보도록 하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만 ‘남북 나눔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남북 나눔 운동을 하는 목표를 교인들도 알도록 제시했어요. 코스타를 하면서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호수가 아무리 흐리더라도 물 근원이 맑으면 호수는 반드시 맑아진다.’ 이런 마음으로 코스타를 했고 학복협을 만들었어요. 교인들에게도 내가 이런 활동을 하는 이유와 목표를 보여 주었죠. 그때 김인수 교수를 비롯한 많은 교인이 저와 함께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육 방향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성도들의 성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만을 두고 말하지 않습니다. 행하는 일도 온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되고, 행실도 온전해야 해요. 온전함을 추구하면서도 행한 일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로 많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해요. 하지만 좋은 생각을 하고 나쁜 행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른 생각을 하는 것과 바른 행동으로 가는 것은 또 달라요. 그런데 이것은 쉽게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많은 시간이 투여되어서만 됩니다.

(홍정길 목사는 남서울은혜교회를 목회하면서 온전한 행함을 위한 훈련 과정으로 다양한 생활 훈련 학교를 만들었다. 결혼예비학교, 신혼커플학교, 부부태교학교, 애착부모학교, 새세대엄마학교, 사춘기자녀부모학교, 크리스천부모학교, 청년기부모학교, 어머니학교, 부부학교, 평신도후반기사역훈련, 새롬평생대학…. 홍 목사는 학교들 하나하나를 세세히 설명했다. 기자가 ‘감히’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신명 나게 설명했다. 교인들에게도 이러한 기운으로 함께 공부하자, 같은 목표를 가지고 운동하자고 했겠구나 싶었다.)

‎-한국교회라는 호수의 근원을 맑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가톨릭은 세속 정치를 했고 한국교회보다 더 악한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극복했을까. 가톨릭은 세속 정치와 상관없이 많은 신부가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과 교제했던 운동을 벌였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시작된 수도원 운동이 계속 맑은 물의 근원이 됩니다.

십자군 전쟁과 함께 다 망해 가는 가톨릭에 프란체스코가 없었다면 소생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심장을 담고자 하는 프란체스코에게 놀랐습니다. 그 당시 큰 학자들도 많았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기억 못 합니다. 걸인들과 함께 한 프란체스코가 가톨릭 소생의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수도원 운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개신교는 명상, 렉시오 디비나(성경을 깊게 묵상하는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국내의 모든 글을 보면 자기 생각이 없습니다. 대학에서 배운 것 이상의 학문적 진보를 이룬 신학자가 누가 있습니까. 미국의 유명한 저술가 이상의 생각을 가진 저술가가 누가 있습니까. 도무지 자기 생각이 없습니다.

요즘 저는 후배들에게 책을 읽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를 이 시간에 세운 것은 네 생각을 하라는 것이지 남의 생각을 정리하다가 끝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고뇌와 자아 성찰이 없습니다.

-37년간 목회하시며 많은 성과를 거두셨듯이 아쉬운 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

결혼을 앞둔 큰아들에게 “네가 나와 있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어렸을 때 아빠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며 우는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새벽에 나갈 때 아이를 봤고 밤늦게 들어와서 아이 머리맡에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얼굴을 봤죠. 근데 그 아이가 나를 못 봤다는 것을 아들이 결혼할 때서야 처음 알았어요. 울면서 아이에게 사과했습니다.

(아들 이야기를 하는 홍 목사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족장들처럼 신앙의 전수가 목회의 최고 가치라 말했지만, 자신은 정작 자녀들에게 선지자처럼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회한이 담겨 있었다. 아울러 그럼에도 건강하게 자라 준 자녀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났다.)

은퇴하면 무조건 손주에게 가서 있어야겠다, 아들에게 못 한 걸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근데 손주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아빠이지 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건 만회할 수 없는 일이구나, 이 고통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안고 갈 것이지 해결될 일은 아닐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교인들에게도 아쉽지요. 제가 활동하는 코스타가 지금 세계 30곳에서 합니다. 많은 시간 국외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독립군 자식 같아요. 아빠가 나쁜 일을 하면 불평이라도 하겠는데, 밖에서 들리는 소식은 “너희 아빠 좋은 일 한다”고 다들 칭찬을 하니 말을 못 했습니다. 우리 교인들에게 저는 찾을 때 없는 아빠입니다. 성도들에게 그건 회한으로 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최근 분쟁을 겪고 있는 분당중앙교회 문제에 참여하여 화해의 설교를 하고, 중재를 위해 결정적 역할을 하셨습니다. 개 교회 문제에 중재를 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어떻게 문제를 풀어 가셨나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최종천 목사와 교회사랑 측에서 거의 동시에 중재를 요청해 왔습니다. 저는 양쪽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공통점을 만들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이쪽에서 양보할 수 있는 것과 저쪽에서 양보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양쪽 모두 양보할 수 없는 것.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일을 풀어 갔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자기주장만 하다가 주님이 원하는 일을 놓쳐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서 정말 무엇을 원하시나’ 같이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따로 많이 만났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그분들이 하는 얘기를 다 들었어요. 감사한 것은 양쪽에서 저를 동일하게 신뢰해서 어느 정도 중재가 된 것 같습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무너지는 교회를 보면서도 나서지 못해 아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무너져 가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떤 것을 준비하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결국은 원칙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주신 목회의 원칙을 자기 안에 확립하지 않으면, 급류 속에서 일을 놓치고 힘을 잃어버리죠. 내가 목회할 공간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이 격랑에 그냥 쓸려 가는 것 같습니다. 정말 피나는 자아 성찰과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한 부단한 결단이 시시각각 필요합니다. 자기 삶의 원리가 없으면 부평초처럼 떠내려갑니다. 말씀에 깊이 뿌리를 두고 서 있어야 합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기 전날 새벽, 평신도로 평생 목회자를 섬긴 아버지께서는 저를 찾아와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어요. 하나는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말하라는 거고, 다른 하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라는 거였습니다. 당신이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목사들은 잘못했다는 말을 못 하더라는 겁니다. 마치 잘못이 없는 것처럼 사는데 너는 제발 그렇게 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접을 받는 게 익숙해져서 ‘감사하다’는 말을 못 하던데, 늘 감사하는 목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님 말씀에 제가 한마디를 덧붙이겠습니다. 목사들이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요즘 신앙은 ‘예수 믿으면 천당을 간다’는 이런 단순하고 원시적인 믿음 때문에 문제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그것밖에 못 믿는다고 그랬어요. 제가 볼 때 목사들이 천국을 갈 생각을 안 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떻게 천국이 있는데 그렇게 살 수 있어요. 목사들이 예수도 안 믿고 천국도 안 믿는 시대입니다. 천국에 대한 믿음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래야 실수를 해도 주님께서 다시 회복할 힘을 주십니다.

홍정길 목사 인터뷰 기사는 내용 길이상 [상]과 [하]로 나누어 보도합니다. 이상은 인터뷰 [상]이고, 이후 [하]를 보도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 주

인터뷰 주재일 편집국장 / 정리 정재원 기자(한국 <뉴스앤조이>)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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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목사 “나는 가짜 목사였다… 제자훈련, 모순적”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가 중앙일보 일요일판인 중앙선데이와 부활절 기념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예배는 연출, 목사는 엔터테이너… 목회가 사라졌다’라는 제목의 해당 인터뷰에서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홍정길 목사는 “목회한 지 50년이 넘었지만, 교회 개척해서 처음 3년을 빼곤 목회자로 불릴 수 없을 것 같다”며 “목회의 본질은 요한복음 10장에 나와 있듯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인데, 3년이 지나 500가정이 되고 교인이 2,000명으로 불어나니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게 불가능해지더라”고 털어놓았다.

홍 목사는 “누가 양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목자라 할 수 있겠나.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목회는 사라지고 매니지먼트(management·관리)만 남게 됐다”며 “주님이 보시기에 나는 가짜 목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 한국교회가 가장 잊고 있는 것’에 대해선 “무엇보다 목회의 본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 1세대는 교인들이 교회로 몰려드는 시기였다. 하지만 지식과 경험이 없다 보니 미국의 대형교회를 벤치마킹할 수밖에 없었다”며 “문제는 그 과정에서 날로 커지는 자신의 교회를 어떻게 하면 잘 유지·관리하느냐에 모든 시선이 고정돼 버린 것이다. 교회는 목사와 교인이 인격 대 인격으로 깊이 교류하는 현장이 바탕이 돼야 하는데, 이게 결여되니 인격이 없는 목회가 돼 버렸다”고 지적했다.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서는 “당연히 구원이지만, 한국교회 복음주의자들은 구원의 반쪽만 가르쳤다”며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시켜 인간에게 새 생명을 준 게 구원의 본질이다. 또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경도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구원받은 친백성이 되라고 가르치는데, 한국교회는 후자를 잊어버렸다”며 “우리 말은 생명·삶·생활이 각각 다른 단어지만 영어는 ‘life’ 하나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나눠서 새 생명을 얻은 걸로 딱 끝나버리고 삶으로 연결하는 건 애써 외면했다. 그러면서 아주 이기적인 기독교인의 삶이 돼 버렸다. 물질·건강 축복받고, 자식들 잘 되고…. 복음의 본질은 사라지고 자기 위안의 종교만 남은 셈”이라고 비판했다.

‘교회의 대형화·세속화 논란’에 대한 질의에는 “대부분의 대형교회 예배는 연출이 돼 버렸다. 목사도 좋은 엔터테이너가 돼야 성공했다고 인정받는다. 교인들은 어떤가. 일주일에 한 번 교회 나가는 걸로 면피만 하려 하진 않은지, 일상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려는 노력 없이 십자가를 의지해 먹으려고만 하진 않은지 곰곰이 되새겨볼 때”라며 “한국교회는 실천의 종교였다. 3·1 운동도 교회가 주도하지 않았나. 당시 기독교인은 1.4%에 불과했지만, 감옥에서 숨진 사람 중엔 3분의 2나 됐다. 기꺼이 십자가를 등에 졌던 그때의 초심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라고 반문했다.

‘젊은 층의 교회 외면’에 관해선 “근본 원인은 어른들에게 있었다. 엄마 아빠가 교회 장로·권사·집사인데, 말로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서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니 자녀들이 교회에 나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영리한데, 윗세대의 말에 그냥 속아 넘어가겠나. 한국교회의 우민화가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 “교회마다 성경공부에 공을 들인다. 제자훈련이라고도 하는데, 이게 큰 모순을 낳았다”며 “목사들은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부하려면 교회에 계속 나와야 하니, 이 프로그램을 통한 네트워킹으로 교인들을 교회에 묶어두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문제는 거기서 머물렀다는 점이다. 성경공부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삶이 바뀌도록 하는 게 목적이 돼야 하는데, 목사가 먼저 본이 되는 삶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니 스승이 없는 제자훈련이 돼 버렸다”며 “한국교회도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 중 하나”라고도 했다.

교회 세습 논란에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사람이 자기 교단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순”이라며 “가장 안타까운 건 아들에게 평생의 멍에를 물려줬다는 점이다. 이전에 세습했던 2세 목사들도 요즘 많이 힘들어하더라. 그 멍에를 왜 물려주나. 자기가 이룩해 놓은 게 너무 크고 좋아서 남에게 줄 수 없다는 생각은 세상적인 욕심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부활절의 의미’에 대해선 “부활절 앞엔 반드시 고난주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도 가능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부활의 영광만 강조했지 부활 전의 고난은 소홀히 해 왔다”며 “죽음 없는 부활은 실체가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먼저 희생하고 먼저 낮아지는 일상의 삶을 통해 고난을 감내해 나갈 때 부활도 의미가 있는 법”이라고 제언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아 성찰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요즘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기 전에 30분간 어제의 삶을 하나씩 되새겨본다. 내가 말로 상처를 준 적은 없는지, 그릇된 행동을 하진 않았는지, 세상의 유혹에 넘어진 적은 없는지. 회개하다 보면 끝이 없다”며 “회개는 곧 자아 성찰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후배 목회자들에게 “이전 세대를 흉내만 내려 하지 말고 넘어서길 바란다. 그게 진정한 선배 대접”이라며 “대형교회 목사들의 성공 사례를 그대로 답습하면 기존 사고의 노예만 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다.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자기가 쌓아놓은 것과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경험을 신뢰하지 예수를 신뢰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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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홍정식 두 형제는 같은 골짜기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약 보름 동안 한국에 있었다. 병환 중에 계시는 어머님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 가족들과 상의하고 장래의 대책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최근 한국 교회의 신앙에 큰 위협이 되고 있는 김성로 목사(춘천한마음교회)의 ‘부활복음’의 위험성과 이단성을 설명하는 세미나와 긴급기자간담회를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10월 28일)에서 열게되었다.

그 외에도 “성경의 방언과 현대의 방언의 비교 분석” 등의 신앙특강 등과 예배 설교를 여러 교회에서 감당하다보니 무척이나 분주하고 바쁜 일정이 되었다. 11월 8일 밤에는 춘천의 ‘춘천 우리교회’(김원중 목사)에서 춘천 지역의 목사님들 24명을 모시고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비성경적인 위험성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성로 목사가 부활복음 간증운동을 시작한 바로 그 춘천에서 그 지역의 여러 목회자님들을 모시고 그런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었다.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 대표 림헌원 목사님, 함께 공동발제를 맡은 이창모 목사님, 논찬을 맡으신 조덕영 박사님과 함께 서울에서 한 차를 타고 아침 일찍 춘천으로 향했다. 운전하신 림헌원 목사님은 아침 일찍 출발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시면서 꼭 가 보아야 할 곳으로 들러서 가시겠다고 했다. 정확하게 어디였는지 모르겠으나,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약 30분 정도 좁고 구불구불한 시골 산길을 올라가니 보니 “와그너 사역 연구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광개토대왕 비석처럼 우람한 돌기둥이 나타났다.

“차 좀 세우세요. 내려서 사진 좀 찍어야 겠어요!”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함께 갔던 일행들도 나처럼 그 산골짜기에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 내가 그 돌 비석을 보고 흥분하고 큰 관심을 보이자 그 중의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피터 와그너가 이미 죽었는데, 이런 곳이 이제 무슨 힘을 쓰겠어요?”

도착한 곳은 신사도운동과 관련하여 자주 신문들과 책자에서 보았던 곳이다. 그 동안 신사도운동의 내막을 설명하는 글을 쓸 때 자주 언급되었던 그 문제의 장소였다. 지난 달 세상을 떠난 신사도운동의 대표자 피터 와그너의 불건전한 이단 신학사상을 한국교회에 전파하고 있는 ‘와그너 사역 연구원 설곡 캠퍼스’(Wagner Leasdership Institute, 약자 WLI)였다.

한국교회의 복음주의를 대표한다고 일반에게 알려진 유명한 홍정길 목사(남서울 은혜교회 원로)의 친 동생 홍정식 목사가 이곳의 대표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신사도 운동의 대표주자 피터 와그너는 다시 등장한 사도들의 연합체 ‘국제사도연맹’(International Coalition of Apostles)을 설립하였는데, 한국인으로서는 홍정식 목사, 김태진 목사, 그리고 한국인 2세 안재호 목사(Che Ahn, 캘리포니아 추수반석교회)가 가입되어 있다. 홍정길 목사의 동생 홍정식 목사가 피터 와그너가 설립한 ‘국제사도연맹’의 회원이라는 사실은 그가 복음을 대적하는 심각한 이단임을 의미한다.

조용해 보였고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피터 와그너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곳도 급속히 쇠퇴하고 있는 것 같은 오해에 빠질 뻔했다. 기왕에 그곳을 보았으니 강의가 이루어지는 건물에 가까이 가 보고 싶었다. 마치 어떤 짐승의 냄새를 맡고 추적하는 사냥개처럼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이고 동시에 강의가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더 높은 곳에 있는 큰 건물을 향하여 가파른 오르막길을 재촉하여 걸어 올라갔다. 그때 나에게 체중을 빼고 운동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싸인이 몸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겉보기에 너무 조용하고 사람이 없을 것 같았던 그 건물에 도착해 보니 여러 사람들이 말하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건물의 1층은 식당이었는데, 들어가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우리 일행도 식판을 들고 가서 점심을 얻어먹었다. 옆 자리에 다섯 명의 여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어 “목사님들이세요?”라고 물었더니, 모두가 목사들이라고 했다. 식사하면서 둘러보니 그곳에서 식사하는 분들의 80% 정도가 여성이었다.

“임파테이션을 받았는데 …”

옆 테이블 여자 목사들의 대화 가운데 이러한 말이 흘러나왔다. ‘임파테이션’이라는 말은 참으로 고약하고 심각한 용어이다. 신사도운동에서는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또 다시 권능을 주시는 성령이 임하는 현상을 ‘기름부음’이라고 한다. 깔깔거림, 쓰러짐, 거짓 방언, 눈물, 환상, 휘청거림 … 등이 기름부음이 임할 때 나타나는 신체적 현상이라고 가르친다.

신사도운동의 모체인 오순절 운동이 출현할 때에 바로 그와 동일한 현상들이 나타났고, 그때에는 이미 성령을 모신 신자들에게 다시 ‘성령세례’가 임하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사도운동이 도래하면서 그와 동일한 것을 ‘성령세례’라고 부르지 않고 ‘기름부음’이라고 하기 시작했다. 오순절 운동에서 주로 부흥사들이 신자들에게 안수하는 등의 형태로 ‘성령세례’ 현상이 나타났던 것처럼 신사도운동 부흥사들도 신사들에게 안수, 이마 터치 등의 방식으로 ‘기름부음’을 유도한다.

‘임파테이션’(impartation)이란 사람이 사람에게 성령의 임재인 기름부음이 임하도록 유도한다는 아주 가증스러운 귀신의 작태이다. 이것이 신사도운동의 가장 본질적인 악이다.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을 어떤 신령한(?) 인간이 마치 애완견처럼 데리고 다니고 구슬리면서 일하게 만든다는 것이 황당한 신사도운동의 임파테이션 이론이다. 저들의 임파테이션이라는 것으로 체험되는 영적인 현상들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 사탄의 장난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수하에 종속시키는 어떤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의지와 유도를 따라 하나님이 하인처럼 일하신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전혀 아니다.

전문적으로 병 고침을 행하고 다니는 유명한 치유사역자들 대부분이 신사도운동에 물든 거짓의 사람들이다. 전문적 치유집회 인도자들은 마귀의 부림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수중에 넣고 자신이 마음대로 부리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크래딧 카드를 자기 맘대로 쓰듯 치유하는 하나님을 맘대로 요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곧 저들의 치유집회이다. 하나님의 치유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치유를 일으키는 집회를 계획하고, 정기적으로 치유집회를 열면 하나님은 그때마다 곰처럼 재부를 부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요즘 이름을 날리고 있는 치유사역자들의 치유이론은 아주 가증스러운 내용들이다. 놀랍게도 치유사역자라는 사람들의 과거 행적과 이력을 조사하면 틀림없이 오래전에 더 이름난 신사도운동가, 즉 마귀의 거짓 영에 크게 사로잡힌 자들에게서 임파테이션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임파테이션’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옆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여자 목사들 사이에서 이야기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임파테이션에 능한 영적인 거장이 되고 싶어 그곳에 온 사람들인 것이다.

“임파테이션에 대해서 배우셨어요? 그거 어떻게 하는 것이지요?”

그 여자 목사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나를 경계하였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려고 동시에 자리를 떠버렸다. 어쩌면 그들 중 누가 신사도운동 킬러로 소문난 나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거짓 사도 홍정식 목사가 대표로 있는 ‘와그너 사역 연구원’ 같은 곳을 통해 생산되는 많은 여성 목사들로 인해 한국 교회가 심히 변질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많은 여성 목사들 대부분이 이미 교회개척을 하고 있거나, 앞으로 교회개척을 시도할 것이다. 모든 여성 목사들이 다 그런 것은 아지만, 일반적으로 여성 목사들에게서 미신적이고 무속적인 성향과 기질이 많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특히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신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는 여성 목사들이 앞으로 자신의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하면 한국 교회의 하늘은 요사스러운 먹구름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마귀가 만들어 가는 무당 기독교를 세우는 전사들로 쓰임 받을 위험스러운 여자 목사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점심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가다 출입구에서 또 몇 분과 이야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가슴에 명찰을 달고 있었는데, ‘사도적 교회’ … 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나는 또 관심을 보이면서 “사도적 교회라는 용어는 무슨 뜻인가요?”라고 물었다. 그곳에 있는 분들은 기존의 교회들로부터 자신들이 이단시되고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분들도 나를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고 가급적 대화를 하지 않고 떠나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친절하고 겸손한 자세를 보고 마음이 놓였는지, 한 여자 분이 그 말의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베소서 4:11절을 이야기하면서 “지금 이 시대에도 사도와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 교사가 있고 …”라는 빤한 신사도운동의 기초적인 이야기를 하셨다.

조금 대화가 더 이어지자 내가 말을 걸었을 때 먼저 자리를 떴던 목회자 부부가 돌아와서 대화에 가담해 주었다. 남자 목사님은 자신이 고신교단 소속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신사도운동에는 성령의 은사와 권능이 풍성하게 나타난다고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신사도운동 신학을 공부하고 난 후 어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 목사님은 최근 오랫동안 우줄증,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분과 상담하고 축사하였는데, 귀신이 떠나고 우울증과 불면증이 치유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하였다. 신사도운동의 거짓 영성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우울증, 불면증, 그 외의 여러 종류의 치유이적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그것은 심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고 실제로 나타난 치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적이나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어느 정도의 이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 뼈대가 되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이다. 신사도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비틀고 그릇되게 해석하고 적용하므로 마귀의 역사가 크게 나타나는 매우 비성경적인 운동이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단순히 어떤 강의 하나를 듣고자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신사도운동 신학을 공부하여 학위를 취득하는 전문 과정을 이수하는 학생들이었다. 그날은 어떤 외국인이 와서 강의를 진행했다고 하였다. 신사도운동을 공부하여 학위를 취득하려는 목회자들이 그렇게 많을 줄 미처 몰랐다. 그 동안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사상을 누르려고 엄청 외치고 떠들었는데, 그 깊은 산속의 피터 와그너의 신학을 가르치는 곳에는 아무 영향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피터 와그너가 죽었어도 신사도운동은 여전히 계속될 것 같아 보였다.

이것 외에도 더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을 눈으로 보았다. 한국 교회의 복음주의의 맏형이라고 알려진 홍정길 목사(남서울 은혜교회 원로)의 신학과 신앙의 줄기에 이단성이 들어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골짜기에서 피터 와그너의 이단사상을 전파하는 ‘와그너 신학 연구소’를 운영하는 사람은 거짓 사도 홍정식 목사이다. 그런데 홍정식 목사의 친 형님되시는 홍정길 목사가 실질적으로 건축하고 운영하는 “생명의 빛 예수마을”(생명의 빛 예배당)도 바로 그 위에 있었다. 홍정식 목사의 와그너 사역 연구소에서 걸어서 5분이면 홍정길 목사가 건축하고 운영하고 있는 시설에 갈 수가 있었다.

홍정길 목사가 건축한 예배당은 진귀하고 값비싼 외국산 나무들로 건축되었고(안내인의 설명으로는 누군가 자기 집을 지으려고 수입했다가 홍정길 목사에게 기증했다고 함), 결코 일반적인 교회당의 모습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수도원적 영성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안내하여 주는 분으로부터 은퇴선교사들을 섬기고, 본격적인 침묵수련을 하기 위한 시설을 바로 아래에 짓고 있는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오면서 보니 포크레인이 그곳에서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다음에 별도의 기사를 통해 최일도, 이동원, 홍정길 목사가 한국에 끌어들이고 있는 침묵수행, 침묵영성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것인지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홍정길 목사는 자신의 친 동생, 신사도운동의 사도 홍정식 목사를 이단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 같다. 홍정식 목사가 운영하는 신사도운동 신학교(와그너 신학 연구소)에서 불과 500미터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홍정길 목사도 자신의 요사스러운 시설을 짓고 운영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느껴졌다. 홍정길 목사가 신사도운동의 거짓 사도인 자신의 동생 홍정식 목사를 이단이라고 생각한다면 동생이 둥지를 틀고서 거짓 복음을 전하는 용사들을 길러내는 그 음침한 그 산골짜기에, 그것도 걸어서 불과 5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자신의 명상영성을 펼쳐갈 요상한 수도원 스타일의 시설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홍정길, 홍정식 두 형제는 같은 음침한 골짜기에 둥지를 틀었다. 동생은 거짓 사도가 되어 더 먼저 이단의 길로 갔고, 형은 명상을 추구하는 수도사의 영성, 관상기도에 빠졌다. 동생은 천박한 무속주의 거짓 영성에 사로 잡혔고 형은 좀 더 고상해 보이는 이교도들의 명상의 영성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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