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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4~6세기경에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 지역에 통치기구 임나일본부(일본어: 任那日本府 미마나니혼후)를 세워 지배력을 행사하였다는 폐기된 학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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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위치로 인해 일본과 가장 밀접한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반도는 일찍부터 일본 역사왜곡의 출발점이 되어왔다.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200여 년 동안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일본은 무슨 근거로 이같은 주장을 하는 것일까?
‘임나일본부’의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광개토대왕비 비문의 심층분석과 고문헌의 정확한 해석, 일본의 현지취재 등을 통해 일본 역사왜곡의 원조,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세밀히 밝혀본다.
역사스페셜 97회 – 추적! 임나일본부의 정체 (2000.12.16.방송)
http://histor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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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 – 나무위키:대문
일본의 고훈 시대에서 아스카 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4세기-6세기 중엽 사이에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일본부(日本府)라는 통치기구를 세웠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9/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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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즉, 임나일본부설은 왜왕권이 한반도의 임나지역을 정벌해 현지에 설치한 직할통치기관으로서, 왜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 가야 …
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10/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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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왜곡, 임나일본부설 – 네이버 블로그
임나일본부설이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일본이 삼국시대에 가야,백제,신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다스렸다는 설이다.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21/2021
View: 2066
‘가야 영역=임나일본부?’ …한일 학자들의 ‘고대사 배틀’ – 한겨레
사실 임나일본부설의 중요한 근거로 내세운 게 바로 ‘임나 4현’이란 한반도 남부의 옛 지역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확실히 짚어야 합니다.”.
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1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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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과 일본인의 왜곡된 역사인식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이것은 곧 한국인의 역사적 자존심을 훼손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우리의 자존심이란 고대의 선진적 한반도문화가 후진지역인 일본열도로 전파되었다는 …
Source: www.korea.kr
Date Published: 4/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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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 설치해 가야 지배했다는 說은 거짓 – 백세시대
임나일본부설이란 일본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대표적인 일본 …
Source: www.100ssd.co.kr
Date Published: 3/13/2021
View: 3468
임나일본부설 일본역사교과서 검정통과에 따른 특별법제정 …
【임나일본부설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한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본의 야욕인 정한론을 불식해야 한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동조한 한국의 …
Source: www.cha.go.kr
Date Published: 1/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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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부를 왜가 200년간 지배했을까? – 프레시안
그렇다면 임나일본부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 후소샤판 역사교과서. c프레시안. 임나란 …
Source: www.pressian.com
Date Published: 8/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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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임나일본부설 이란
- Author: KBS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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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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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임나일본부설에 따른 삼국지도의 모습.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4~6세기경에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 지역에 통치기구 임나일본부(일본어: 任那日本府 미마나니혼후[*] )를 세워 지배력을 행사하였다는 폐기된 학설이다.
흔히 근거로 들어지는 사료로는 크게 391년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 편에 신라와 백제가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의 기사, 백제의 칠지도 명문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8세기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임나일본부의 실재 여부나 그 기능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이견이 있다.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음을 밝히고 있다.[1]
다만 일본의 일부 역사 교과서에는 임나일본부설을 긍정하는 내용이 그대로 실려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2]
관련 사료 [ 편집 ]
임나(任那)는 삼국사기 강수전의 ‘임나가량(任那加良)’이나 진경(眞鏡)대사 탑비에 쓰여진 ‘임나왕족(任那王族)인 흥무대왕 김유신’ [3] 에서도 쓰고 있는 말로, 임나는 가야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가락국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 측 사료에서는 가야 전체를 가리키거나 가락국 뿐만 아니라 반파국, 안라국 등 가야 연맹체의 특정국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고 있다.
에서도 쓰고 있는 말로, 임나는 가야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가락국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 측 사료에서는 가야 전체를 가리키거나 가락국 뿐만 아니라 반파국, 안라국 등 가야 연맹체의 특정국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가 369년 가야 지방을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두고 실질적인 통치를 하다가 562년 신라에 멸망했다고 쓰여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391년)에 해당하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신묘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396년부터 404년까지 사이에 고구려가 벌인 남진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 기술한 집약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부분은 비문이 파손되고 “海”의 경우 “每”를 고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어서 비문의 일부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내습하니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논란 부분을 참고할 것)
일본에서는 손상된 글자를 “任那”라고 주장하여 “왜가 바다를 건너(渡海)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4] 반면, 한국에서는 손상된 글자에 대해 같은 기사의 바로 다음에 “영락 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고 쓰여있는 것과 당시 백제와 왜가 연합해 신라를 압박했던 상황, 광개토왕릉비의 여러 기사에서 백제와 왜가 연합하고 고구려가 왜를 궤멸시켰다고 쓰여 있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신묘년에 왜가 내습하니 백제, 왜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주장이 많다. 그밖에 고구려가 백제를 상대로 남진전쟁을 일으킨 것은 백제와 연합한 왜가 제후국인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이라는 전쟁 명분을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일본인 학자들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5]
남조(南朝) 송(宋), 제(齊), 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에 대해서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바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비판 [ 편집 ]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쓰여진 책으로써 그 내용이 의심스럽고 상호 모순되는 부분이 많아 지금은 일본의 학자들도 비판을 하는 학자가 상당히 많다.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일본서기의 대표적인 왜곡으로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에 대한 일본서기의 서술이 있다. 일본서기 382년 기록 [6] 을 보면 전쟁에서 대가야를 구원한 사람은 백제 장군인 목라근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가야제국(諸國) 평정과 대가야 구원을 마치 천왕의 명에 따라 일본에 파견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백제는 내륙국이였던 대가야를 바로 구원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내륙에 있는 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쪽 지역들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7] 이 기록을 근거로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이 가야를 200년 가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었다.
을 보면 전쟁에서 대가야를 구원한 사람은 백제 장군인 목라근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가야제국(諸國) 평정과 대가야 구원을 마치 천왕의 명에 따라 일본에 파견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백제는 내륙국이였던 대가야를 바로 구원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내륙에 있는 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쪽 지역들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 기록을 근거로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이 가야를 200년 가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었다. ‘일본’이라는 국호는 고구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7세기 이후에 사용된 것이니 만큼, 4세기에 ‘일본’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임나일본부’ 가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8]
임나일본부는 중요한 역사 기록 일텐데 고사기에는 전혀 기록이 되어 있지않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보다 8년 전 편찬된 고사기에는 신공왕후의 임나정벌과 같은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9]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데 한국의 기록에 이를 입증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다. 단지 ‘임나’라는 지명만이 광개토왕릉비, 삼국사기, 진경대사탑비에 보일 뿐이다.
왜의 가야 지배를 입증할 고고학적 유물이 전혀 없다. 만약,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면 4세기에 가야 유물이 끊기고 6세기에 왜의 유물이 출토되어야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은 4~6세기까지 가야유물이 계승된다.
5세기~6세기 전반에 걸쳐, 야마토왕조가 가까이 있는 구주왕조를 정복하고 있지 못했는데, 그 이전(4세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정복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4세기는 백제의 근초고왕 전성기로써, 백제의 전성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방을 정복할 수는 없다.
그 당시, 배의 운송 능력이 군인 25명, 말 2~3필 정도이다. 이러한 능력으로는 일본 열도로부터 한반도 남부 지방을 경영할 만한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한반도에 전달할 수 없다.
남조(南朝)의 송(宋)으로부터 받았다는 왜왕의 책봉기사 역시 왜왕이 받은 칭호의 등급이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는 점에서 해당 칭호는 별 의미가 없음이 중국 기사로 확인된다. 왜왕은 478년에 안동대장군을 받았는데, 백제왕은 420년에 그보다 두단계 높은 진동대장군을, 고구려왕은 백제왕보다 두단계 높은 정동대장군을 받았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없던 신라를 빼고, 왜왕이 중국왕조들에게서 받은 칭호는 항상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
칠지도 앞면의 후왕(侯王)은 왜왕(倭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백제가 왜의 상국이었음을 뜻하고, 뒷면에 전시후생(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은 전형적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명(下命)하는 형태의 문장이라는 점에서 칠지도는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다는 뜻으로 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대의 학설 [ 편집 ]
임나일본부설 및 관련 사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이들 학설 가운데 몇 가지를 뽑아 보면,
일본이 가야 지방에 일본부를 두고 가야를 실제로 지배했다는 설.(스에마쓰 야스카즈, 이시모다 다다시, 야기 아쓰루, 기존 일본 학계의 통설)
가야 지방의 일본인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 조정이 세운 기관이었다는 설.(이노우에 히데오)
일본과 외교 관계가 돈독했던 가야 동맹의 한 나라였다는 설.
교역을 위해 양국이 교류한 흔적(교역기관)이라는 설.(이병도, 이근우, 김태식, 요시다 아키라)
가야인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세운 나라였다는 설. (김석형)
백제가 가야를 지배하기 위해 세운 기관(백제군사령부)이었다는 설. (천관우, 김현구)
일본사에서 소위 임나일본부란 왜관의 관리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서 이 때에는 다소의 정치활동을 겸하였던 것인 듯 하거니와, 이 역시 본질적으로 규명하면 철, 금, 은, 직물, 보석, 기타 곡물의 무역취인을 주로 맡던 일종의 공적 상관이었다는 설.(이병도)[10]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한다.
이는 일제가 그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식민사관 중에서,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부터 외세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의 대표적인 산물의 하나이다.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도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 등의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은 그를 통해 태고 때부터의 일본의 조선 지배를 주장하였다.
그 뒤 메이지 연간(明治年間, 1868∼1911)에 문헌고증의 근대 역사학이 성립되면서, 국학연구의 전통을 이어받은 간[菅政友]·쓰다[津田左右吉]·이마니시[今西龍]·아유가이[鮎貝房之進] 등은 일본의 임나 지배를 전제하고 주로 임나관계의 지명 고증작업을 행하였다.
이어 스에마쓰[末松保和]는 『대일본사(大日本史)』(1933)의 한 편으로 「일한관계(日韓關係)」를 정리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학문적 체계를 갖춘 남선경영론을 완성시켰으니, 그것이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1949)였다. 그의 임나일본부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지』 위서 왜인전 서두의 문구로 보아, 3세기 중엽에 이미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즉 임나가라를 점유하고, 왜왕은 그 중계지를 통해 삼한에 통제력을 미치고 있었다.
둘째, 『일본서기』진쿠황후[神功皇后] 49년조의 7국 및 4읍 평정기사로 보아, 369년 당시 왜는 지금의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일부를 귀복시켜 임나 지배체제를 성립시키고, 백제왕의 조공을 서약받았다.
셋째, 광개토왕비문의 기사로 보아, 왜는 400년 전후해서 고구려군과 전쟁을 통해 임나를 공고히 하고 백제에 대한 복속관계를 강화하였다.
넷째, 『송서(宋書)』 왜국전에 나오는 왜 5왕의 작호로 보아, 일본은 5세기에 외교적인 수단으로 왜·신라·임나·가라에 대한 영유권을 중국 남조로부터 인정받았으며, 백제의 지배까지 송나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였다.
다섯째, 『남제서(南齊書)』 가라국전 및 『일본서기』 게이타이왕[繼體王] 때의 기사들로 보아, 일본은 5세기 후반에 임나에 대한 통제력이 완화되기 시작해 6세기 초반에는 백제에게 전라남북도 일대의 임나땅을 할양해 주기도 하고, 신라에게 남가라(南加羅) 등을 약탈당하기도 하면서 임나가 쇠퇴하였다.
여섯째, 『일본서기』긴메이왕[欽明王] 때의 기사들로 보아, 540년대 이후 백제와 임나일본부는 임나의 부흥을 꾀했으나, 결국 562년에 신라가 임나 관가를 토멸함으로써 임나가 멸망하였다.
일곱째, 그 뒤에도 일본은 임나 고지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646년까지 신라에게 임나의 조(調)를 요구해 받아내었다.
즉, 임나일본부설은 왜왕권이 한반도의 임나지역을 정벌해 현지에 설치한 직할통치기관으로서, 왜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 가야를 비롯해 백제·신라 등의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사료인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원사료 편찬과정에 상당한 조작이 가해졌다.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우며, 「광개토왕비문」이나 『송서』 왜국전의 문헌기록은 과장되게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헌사료상의 문제점 외에 그 주장의 사실관계만 검토해 보아도 임나일본부설의 한계성은 곧 드러난다. 김석형(金錫亨)의 연구에 따르면, 기나이[畿內]의 야마토세력[大和勢力]이 주변의 일본열도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가능했다고 하며, 이러한 견해는 일본학계에서도 이제 통설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야마토국가가 멀리 떨어진 남한을 4세기부터 경영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내부 성장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대외관계를 우선적으로 언급한 일본고대사 자체의 맹점이었다.
또한, 왜가 임나를 200년 동안이나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면 그 지역에 일본 문화유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지역 고분 발굴자료들에 의하면 4세기 이전의 유물문화가 5, 6세기까지도 연속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즉, 일본에 의해 지배당했다는 증거가 문화유물에 반영된 바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에서의 문헌사료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스에마쓰에 의해 학문적으로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김석형의 일본고대사 자체에 대한 반론이 1960년대에 발표되자, 그 충격에 의해 1970년대 이후 일본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노우에[井上秀雄]는 『일본서기』의 사료계통의 원전을 분석, 부레쓰기[武烈紀] 이전 기록의 신빙성을 의문시하고 그들 기록에 의한 더 이상의 상상을 배제하였다.
반면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나는 4세기 말의 왜군이나 긴메이기[欽明紀]에 나타나는 6세기 전반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은 신뢰할 수 있되 이들은 야마토왕조에서 파견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실태는 왜인으로 칭하는 임나의 지방호족이 일본의 중앙귀족이나 지방호족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한 것이고, 그들은 백제·신라의 접촉지대에 있던 일본부의 군현을 통치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임나일본부는 왜인을 자칭하는 가야의 한 지방세력에 의한 독립소국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학자의 연구결과 중에서 왜왕권의 임나지배를 부인한 최초의 것이다.
주 01)에 있던 일본부만을 가리키며, ‘일본부(日本府)’의 고훈(古訓)은 ‘야마토노미코토모치’로 그 뜻은 일본왕이 임시로 파견한 사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우케다[請田正幸]는 사료상으로 임나일본부는 6세기 전반의 안라(安羅) 에 있던 일본부만을 가리키며, ‘일본부(日本府)’의 고훈(古訓)은 ‘야마토노미코토모치’로 그 뜻은 일본왕이 임시로 파견한 사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요시다[吉田晶]도 우케다와 비슷한 입장에 서면서, 6세기 전반의 기나이 세력은 국가형성의 주체세력으로서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독점하는 것에 주안을 두고 임나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므로, 일본부는 왜왕권에서 파견된 관인(官人)과 가라제국의 한기층(旱岐層)으로 구성되어 상호간의 외교 등 중요사항을 논의하는 회의체였다고 보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기토[鬼頭淸明]는 우케다나 요시다와 같은 견해이면서도, 당시에 관인을 파견해 임나일본부에 의한 공납 수령체제를 형성시킨 주체인 왜는 야마토 왕권이 아니고 그에 선행하는 일본열도 내 별개의 정치세력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야마오[山尾幸久]는 『일본서기』의 기사들을 재검토하고 백제사와의 관련성을 첨가해, 왜왕권이 임나 경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5세기 후반 백제의 대신이면서 임나의 지배자였던 목만치(木滿致)가 왜국으로 이주한 이후부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맞이함으로써 임나에 대한 연고권을 갖게 된 왜왕권이 가야지역에 관인을 파견해 구성한 것이 임나일본부이며, 5세기 후반에는 직접 경영이었고, 6세기 전반에는 백제왕을 사이에 낀 간접 경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 오야마[大山誠一]는 6세기 전반에 백제·신라에 의해 독립을 위협받던 가야제국과 현지 거주의 일계인(日系人)이 야마토 왕조에 요청해, 게이타이왕 26년(532년으로 고증)에 아후미노게나노오미[近江毛野臣]가 파견됨으로써 임나일본부가 성립되었다고 하였다.
즉, 가야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가야제국의 왕과 야마토에서 파견된 관인이 일종의 합의체를 구성한 것이 임나일본부인데, 562년 가야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스즈키[鈴木英夫]는 임나일본부의 존립 시기와 의의를 극도로 축약한 연구를 보여주었다. 임나일본부는 가야 재지 지배층의 요청에 의해 530년에 왜왕권에서 게나노오미가 군사집단을 이끌고 안라에 파견됨으로써 성립되었으나, 이듬해 백제군대가 안라로 진주함으로써 실질적인 활동, 즉 임나 지배가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근래의 일본인학자들의 임나관계 연구경향은 종래에 비해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첫째, 『일본서기』의 5세기 이전 사료의 신빙성을 부인함으로써 임나일본부의 성립 시기를 4세기 중엽으로 설정하는 고정적 관점에서 후퇴해 대체로 6세기 전반으로 제한해 보고 있다.
둘째,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왜왕권이 임나를 군사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지배기관이 아니라, 왜왕권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독점 수용하기 위해 임나에 파견한 사신 또는 관인집단으로 보고 있다.
셋째, 임나일본부의 존립 이유를 왜의 군사적 압제에서 구한다기보다 백제·신라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야제국의 자주적 의지에서 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변화는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서 일단 진일보한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와 야마토 왕조와의 관계를 부인하는 견해에서 알 수 있듯이, 6세기 이전의 일본고대사가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점이라 하겠다.
일본열도 내의 기본적인 세력판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모든 대외관계의 주체를 기나이의 왕가로 돌려서 보려는 고정관념이 얼마나 타당할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재지세력의 자립성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주된 관심을 일본부 자체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가야지역 내의 가야인의 대응방식에는 소홀하고, 『일본서기』를 찬술한 이래 일본의 일방적인 관점이 강조되어 여전히 실태 파악의 균형을 잃고 있다.
국내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금기시해 외면하고 체계적 반론을 펴지 않고 있다가 1970년대 후반 이후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천관우(千寬宇)는 『일본서기』의 임나관계 기록들을 재해석, 기록의 주어를 왜왕이 아닌 백제왕으로 봄으로써 ‘왜의 임나 지배’가 아닌 ‘백제의 가야 지배’라는 시각으로 가야사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그는 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지역을 정벌해 백제권에 편입시킨 후, 가야 지배를 위해 설치한 파견군사령부가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5세기부터 6세기 초에는 군사령부가 김천·달성 등의 낙동강 중·상류방면에 있었고, 530년대 이후에는 진주·함안 등의 낙동강 하류방면에 있었다는 것이다.
김현구(金鉉球)는 보다 신중하게 긴메이기의 기록만을 이용해,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 통치를 위해 설치한 기관이었다는 천관우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6, 7세기 백제와 야마토 사이의 외교관계의 특징을 용병관계(傭兵關係)로 파악하였다.
즉, 4세기 후반 이후 백제는 임나에 직할령을 두고 군령(郡令)·성주(城主)를 파견해 다스렸는데, 6세기 전반에는 일본인 계통의 백제 관료와 야마토 정권으로부터의 용병을 배치시켰다는 것이다.
이근우(李根雨)는 게이타이기 이전의 4, 5세기의 상황에 대해서는 천관우의 입론을 수용하면서, 일본열도 내의 세력주체가 6세기 초에 구주(九州)의 왜왕조에서 기나이의 야마토 세력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러므로 임나일본부는 원래 구주의 왜왕조와 관련이 있는 문물 수용의 통로였고, 야마토 세력과는 무관한 것이었는데, 6세기 전반에 야마토 세력이 가야 문제에 말려들어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고권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게 된 것은 백제의 외교적 술수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근래의 국내학자들에 의한 임나관계 연구경향은 백제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특히, 540년대 이후로 가야지역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지적한 연구성과는 존중되어야 할 것이며, 임나일본부를 구주의 왜왕조와 관련시킨 것도 주목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가야가 백제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고 추정한 점은, 앞에 서술한 가야문화의 전대(前代) 계승적인 경향과 어긋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가야사 및 가야의 문화능력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료상으로 임나일본부는 백제로부터 명령을 받거나 백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반백제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이를 백제 군사령부로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에 소속된 일본인 계통의 관인을 백제의 군령·성주로 동일시하기도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그러므로 문헌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는 가야 문화의 독자성을 배경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광개토왕릉비문」의 신묘년 기사는 매우 불분명한 것이어서, 왜의 임나 지배에 대한 증빙 자료로 활용될 수는 없다.
또한 한일간에 근래의 연구 동향에서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관련 기사를 모두 조작된 전설로 처리해 이를 토대로 임나의 성립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주 02)에 있었다는 것은 인정된다. 다만 『백제본기』가 인용된 『일본서기』의 기사들을 통해,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에 있었다는 것은 인정된다.
530년대는 가야연맹이 신라와 백제의 복속 압력을 받아 맹주국인 대가야의 영도력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당시 ‘임나일본부‘를 안라국에 설치한 것은 백제였고, 관리들은 친 백제계 왜인들로 구성되었다.
성립 초기의 안라왜신관은 백제·왜 사이의 교역 대행기관의 성격을 가지며, 백제는 이를 통해 안라국(함안)·탁순국(창원)을 거쳐 왜국으로 향하는 교역로를 확보하려고 한 듯하다.
반면에 안라는 ‘일본부’의 존재를 이용해 대왜 교역 중개기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가야연맹 내에서 북부의 대가야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중심세력으로 대두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안라는 530년대 후반 국제관계의 혼란을 틈타 백제의 의사와 관계없이 ‘임나일본부’의 왜인 관리들을 재편성함으로써 기구를 장악하였다.
그러므로 540년대 이후의 사료상에 나타나는 ‘임나일본부’는 안라왕의 통제를 받는 대왜(對倭) 외무관서로 성격이 변질된 것이며, 그곳의 관리들은 친 안라계 왜인 또는 그들과 가야인 사이의 혼혈계의 인물들로서 안라를 비롯한 가야연맹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가야연맹의 제2인자였던 안라국은 왜와의 교역에서 유리한 입지 조건을 차지하고 있는 이점을 살려 자신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체제를 도모하기 위해 이를 운영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이 외무관서는 실제와 달리 ‘왜국 사절들의 주재관’처럼 표방되어, 가야연맹을 병합하려고 도모하는 백제·신라의 외교적 공세로부터 가야의 독립성을 연장시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550년을 전후해 안라의 왜인 관료 기구가 백제의 압력으로 해체되고 다시 백제의 교역 대행기관으로 변모되었다. 이에 가야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560년경 안라국이 신라에 병합되면서 결국 이른바 ‘임나일본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런데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은 7세기 중엽 이후에 성립된 것이므로 6세기 전반에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왜의 임나 지배’라는 선입견이 들어있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폐기하고, 앞으로는 ‘안라에 있던 안라의 왜인 신하들이 일을 보던 곳’이라는 관점에서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스에마쓰에 의해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비판되고 수정되어, 이제는 학설로서의 생명을 거의 잃었다.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임나관계의 연구들은 서로 근접된 인식들을 보여주고 있다.
즉, ①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6세기 전반에 한정해 취급한다든가, ②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지배가 아닌 외교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든가, ③ 임나문제에 대해 백제와 가야의 역할을 중시한다든가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6세기 이전의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진해, 그들 사이의 대외관계사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임나관계 연구는 더 이상의 규명이 어려운 단계에 와 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6세기 중엽 당시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서는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의 체계적 연구 이후에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 임나일본부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의 이 대목 또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로 채택되고 있다. 위 해석은 일반적인 해석으로, 학자들에 따라서 해석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더욱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다.
그리고 저기에서 ‘백잔○○○라’라고 되어 있는 곳을 설명하자면 백잔[百殘]은 고구려가 백제를 낮춰 부르던 이름이고, 라[羅]는 신라[新羅]나 가야의 다른 이름인 가라[駕羅]의 마지막 글자로 해석된다. 때문에 유실되어 있는 ○○○부분은 ‘백잔,신라,가라’또는 ‘백잔,가야(가락,임나),신라’라고 해석되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럼 이제 이 근거에 대해 반론하도록 하겠다. 우선 저 기록을 문자 그대로 왜가 백제,신라,가야를 다스렸다고 해석하면 광개토대왕릉비의 전후 맥락과 맞지 않다.
광개토대왕릉비부터가 장수왕이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비석인데, 거기에다가 왜의 행적을 써 놓는 것 부터가 이상할 뿐만 아니라 이 바로 뒤의 기록인 고구려의 비려 정벌 기록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뜬금없는 기록이다. 백번 양보해서 정말 왜가 백제,신라,가야를 점령했다고 해도 고구려가 그들을 그대로 놔둘리가 없다는 점, 다른 기록에는 이 큰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 때문에 사실로 믿기가 어렵다.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은 보통 저 기록을 ‘신묘년에 왜가 백제,신라,가야를 공격하자 고구려가 그들을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하거나 백제와 가야가 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해 온 것을 고구려가 격파했다는 기록으로 다르게 해석한다.
그럼 이제 광개토대왕릉비의 떡밥도 해소되었다.
‘가야 영역=임나일본부?’ …한일 학자들의 ‘고대사 배틀’
[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가야사 주제 학술 심포지엄에서
일본쪽 “임나4현 영산강 일대 위치”
한국쪽 “고고학적 물증 거의 없어”
결론 안 나 가야사 연구 소홀 아쉬움
순천 왜성의 성곽 모습. 16세기 말 정유재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쌓고 대치했던 성이다. 순천은 고대 가야의 서쪽 변방인 임나 4현의 하나로 지목되는데 옛적부터 한반도, 일본 열도의 사람과 물자가 빈번하게 왕래했던 요충지였다.
“가야의 역사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가야 대신 임나라는 명칭을 주로 씁니다. 임나의 영역을 경상도 동쪽부터 전라도 서쪽의 영산강 기슭까지 한반도 남부권 전역으로 보고 일본 교과서 지도에도 그렇게 영역을 표기해요. 문제는 이게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했던, 4~6세기 조선반도의 남부를 일본 야마토 정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강역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에요. 왜 아직도 낡은 견해를 고수하는 것일까요. 사실 임나일본부설의 중요한 근거로 내세운 게 바로 ‘임나 4현’이란 한반도 남부의 옛 지역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확실히 짚어야 합니다.”
토론자는 흥분했다. 지난 12일 전남 순천 도심의 한 호텔 회의장에선 한·일 학자들이 ‘고대사 토론 배틀’을 벌였다. 주제는 악명 높은 ‘임나일본부’와 그에 얽힌 옛 가야의 영역을 가려내는 것이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호남과 영남 경계의 가야’란 제목으로 연 학술 심포지엄의 일부였다. 포문을 연 이는 순천 운평리 가야 고분을 발굴한 이동희 인제대 교수였다.
그가 토론에서 언급한 임나 4현 내용은 7세기 일본 역사서 의 512년 게이타이 천황 6년조 기록에 나와 있다. 백제 사신의 간청으로 왜국이 지배하던 임나국의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라는 4개 현을 천황의 명으로 떼어주었다는 대목. 당시 왜곡된 사관이 반영된 기록인 만큼 현재 국내 학계는 백제가 가야의 땅을 영역화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교수는 공격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영호남에 걸친 가야의 서쪽 경계를 논할 때 임나 4현 위치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국내 학계는 전라도 동쪽 섬진강 기슭의 순천·광양·여수 일대를 실제의 임나 4현이자 가야의 서쪽 끝 가야 4현으로 봅니다. 그런데 일본 쪽 연구자들은 임나 4현을 여전히 구체적 근거도 없이 전라도 서쪽 영산강 일대에 있었다고 봅니다. 식민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이런 설을 낸 이래 100년 이상 고집하고 있어요. 일본에서 오신 발표자도 스에마쓰 견해를 따르고 있네요. 들어보니 임나 4현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회피하고만 있어요.”
그가 지목한 발표자는 다나카 아키라 사가대 명예교수. 한국 고대사에 두루 해박한 친한파 역사학자다. ‘일본에서 본 영호남 경계지역의 가야’에 대해 의 기록을 중심으로 논지를 발표했는데, 일본 학계의 고루한 견해를 답습하고 있다며 이 교수가 강하게 비판하는 질의를 제기하자 다나카는 곤혹스러운 기색을 띠었지만 차분하게 답변했다.
저는
“임나 4현 위치에 대한 제 학설은 스에마쓰 견해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보완한 것입니다.스에마쓰의 를 체계적으로 비판한 책을 내기도 했고, 일본 학계에서도 스에마쓰 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전무합니다. 스에마쓰가 임나일본부설의 입장이니까 그가 세운 임나 4현 위치설을 수정해야 한다면 학문적 태도가 아닙니다.”
그는 “에 언급된 임나 4현은 가야의 서쪽 경계를 의미하는 가야 4현과는 의미와 맥락이 다른 것”이라며 “역사적 진실과 부합하는지 여부를 떠나 를 쓴 당대 집필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게 내 입장”이라고 했다.
논란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사서와 사료의 성격을 철저히 파악하며 개별 사실에 대해 꼼꼼한 확인과 사료 분석을 거쳐야 한다고 다나카는 강조했지만, 임나 4현 영역에 대해서는 일본 학계의 설을 고수했다. 영산강 유역까지 임나 강역으로 둘 경우 입증할 가야 유적 유물 등의 고고학적 물증이 거의 없다는 국내 학자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임나란 말은 나 진경대사탑비 등 국내 옛 문헌에도 드물지만 언급된다. 그러나 등 식민사학의 임나일본부설에 자주 나와 악용된 명칭인데다, 그 지역적 범위도 한·일 사서, 학자들 견해에 따라 금관가야, 대가야, 또는 가야 전체, 신라·백제를 포함한 한반도 남부 나라 전체 등 천차만별이어서 논의의 기준점을 잡기도 어렵다. 두 한·일 학자의 토론 뒤에도 임나 4현의 구체적인 위치를 둘러싼 쟁점, ‘반파’ ‘기문’ 등 미지의 가야 소국 성격을 놓고 학자들 간에 논의가 이어졌지만 명쾌한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다. 20세기 일제강점기와 1960~70년대 고고역사학의 성장기를 거치면서 알게 모르게 임나일본부의 덫에 가려 외면하고 소홀히 했던 가야사 연구 역량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좌장으로 토론을 지켜본 이영식 인제대 교수가 총평을 말했다. “임나 명칭을 갖고 한·일 학자들이 왈가왈부하게 된 것만 해도 큰 진전입니다. 과거엔 자체를 거짓말 사서라고 해서 인용하는 것조차 꺼렸는데, 이제 가야 지역 고고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일본 쪽 임나 자료들도 비판적으로 활용하고 공유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오늘 자리는 한·일 학계의 관심이 새롭게 모아지면 가야사도 알찬 내실을 갖출 수 있음을 나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노형석 기자 [email protected]
순천 왜성의 천수대 터(주춧돌 보이는 곳) 위에서는 멀리 광양만과 매립지 위에 들어선 공단이 보인다.
임나일본부설과 일본인의 왜곡된 역사인식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연구실장
최근 임나일본부설이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에 대한 국내 언론의 불쾌감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곧 한국인의 역사적 자존심을 훼손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우리의 자존심이란 고대의 선진적 한반도문화가 후진지역인 일본열도로 전파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역으로 고대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고 하니 역사왜곡도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백제문화를 비롯하여 가야, 신라, 고구려 등 한반도제국은 일본고대국가형성과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것은 일본열도에서 발견된 수많은 물적 증거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은 어떤가. ‘임나일본부’를 근대의 조선총독부와 같은 기구로 이해했던 시대가 있었고, 현재도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믿고 싶어하는 침략주의적 정서가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한국침략은 여러차례에 걸쳐 저질러져 왔다. 고려~조선조에 걸친 수많은 왜구의 만행,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재난, 한국강제병탄 등 한국민을 처절한 도탄에 빠트리기를 반복적으로 해왔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일선동조론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진 민족말살정책은 그 역사적 근거로서 고대의 한민족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며, 근대에 들어서 본가인 일본이 이를 회복시켰다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국학운동시민연합과 우리역사바로알기가 개최한 ‘고대사 말살을 획책하는 일본의 역사왜곡 저지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 (c)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들이 주장하는 고대의 근거란 720년에 편찬된 일본 천황가의 역사를 기술한 ‘일본서기’에 있다. 이 책은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의 예속하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임나일본부’이다. 4세기 후반 신공황후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가야 7개 나라를 정복하고, 이를 임나관가라고 하는 천황의 직할령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보다 앞서 신공황후는 신라, 고구려, 백제를 복속시켜 번국으로 삼았다는 이른바 삼한정벌론도 나온다. 천황가 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편찬된 ‘일본서기’에는 이러한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수많이 나온다. 이것은 일본지배층의 세계관, 한반도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시의 시점에서 현실과 미래의 추구해야 할 기대심리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일본과 우호관계에 있었던 가야,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됐다는 사실이 신라적시관으로 전화되어 한반도복속사관이 끊임없이 이어져 간다. 한국침략이 본격화되는 근대에 들어서는 신공황후가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과 맞물려 일본 최초의 화폐의 주인공으로 도안되었고, 교과서 등 모든 역사서적에 한국을 지배한 인물로서 등장하게 된다. 역사적 가공의 인물이 현실의 지배정책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21세기에 새롭게 나타나는 임나일본부설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이미 폐기된 분야이다. 그러나 이러한 망령들이 일본의 우익교과서에 새로운 형태로 재등장하고,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일제 강점기에 표기된 임나라는 용어가 수정되지 않고 임나일본부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로서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역사왜곡은 한 나라의 민족혼을 빼앗는 행위이기도 하다. 평화공존을 추구해야 할 현재의 국제사회에서 과거의 침략주의적 근성이 죄의식 없이 재생되는 일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올바른 역사인식에 기초한 올곧은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새삼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임나일본부 설치해 가야 지배했다는 說은 거짓
한국사를 둘러싼 논쟁들 <8> 임나일본부설 사실인가
▲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후반 일본이 고대국가 가야에 일본부를 두고 지배했다는 설로 수많은 모순이 발견돼 2010년 한일 공동 연구 끝에 근거없다고 결론이 났다. 사진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사용된 ‘일본서기’
‘일본’이란 국호는 8세기 등장… 3세기에 한반도 지배했다는 건 안 맞아
‘일본서기’ 기록을 내세우지만 한‧일 공동연구 결과 “근거없다” 결론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고대 가야사 연구‧복원사업을 정책과제에 꼭 포함시켜줬으면 좋겠다.”
지난 6월 1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본인 표현대로 ‘뜬금없이’ 가야사 이야기를 꺼냈다. 도종환 신임 문체부 장관도 6월 7일 한 인터뷰에서 “일본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임나일본부설의 임나가 가야라고 주장하는 국내 역사학자들의 논문이 많은데 여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하며 가야사 연구·복원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했다.
대통령과 문체부 장관의 발언으로 고구려‧백제‧신라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던 가야가 역사학계의 관심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낙동강 하류지역에 있던 여러 국가들의 연맹 왕국 또는 그 지역에 위치한 각 국가들의 명칭을 말한다. 주로 경남도 대부분과 경북도 일부 지역을 영유했던 고대 국가를 일컫는다.
이런 가야를 말할 때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이란 일본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대표적인 일본의 한국사 왜곡 사례 중 하나이다. 고대 한반도 남부 전체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도 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600년대부터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도된 후 일제의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크게 4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이 책은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임나일본부’이다. 4세기 후반 신공황후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가야 7개 나라를 정복하고, 이를 임나관가라고 하는 천황의 직할령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신공황후가 정벌한 7국의 지명을 고증한 결과 그곳이 당시의 가야지역이었으며 따라서 임나는 가야를 지칭한다는 게 임나일본부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국호가 700년대 이후 생겨난 점, 630년까지 임나가 존재해 야마토 조정에 조공을 했다는 기록과 달리 마지막 가야왕국인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된 역사적 사실 등 수많은 오류가 발견되면서 신빙성을 잃었다.
▲ ‘광개토대왕비문’의 모습.
1883년 일본 사학자들은 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광개토대왕 비문(碑文)에서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 이위신민’(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羅 以爲臣民·○는 알 수 없는 글자)을 발견하고, 이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반해 남북한 역사학계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 而爲臣民’의 문장을, ‘파’(破)까지 한 문장으로 끊어 ‘왜’가 아닌 ‘고구려’를 주어로 ‘고구려가 신묘년에 일본을 무찔렀다’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중국 남조(南朝)·송(宋)·제(齊)·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왜왕의 책봉기록도 내세웠다. 기록에 따르면 왜왕은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렸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한국문헌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조차 의심됐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됐다.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해 전혀 언급된 바가 없으며 고고학적 근거도 없기 때문에 당시 가야에서 군사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일본이 아니라 백제라고 주장해 왔다.
한발 더 나아가 북한 사학자 김석형은 분국설(分國說)을 제기했다. 삼한·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했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됐다는 주장했다.
양국 간의 팽팽한 논쟁이 지속되던 중 2001년 일본 후소샤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 한·일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후 지속적인 연구 끝에 양국 공동위원회는 2010년 3월 23일 발표한 제2기 최종연구보고서에서 4~6세기 당시 야마토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활동하면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배성호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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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 일본역사교과서 검정통과에 따른 특별법제정 대응책 필요성
제목 임나일본부설 일본역사교과서 검정통과에 따른 특별법제정 대응책 필요성
등록일 2021-04-03
작성자 류금열
조회수 384
임나일본부설 일본역사교과서 검정통과에 따른 특별법제정 대응책 필요성
【임나일본부설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한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본의 야욕인 정한론을 불식해야 한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동조한 한국의 일부 주류 사학계에서 역사왜곡의 불식을 제거하지 않을 때 외부로부터 역사침략에 대응은 요원하다.
○일본이 치밀하고 집요하게 임나일본부를 한반도에 토착하려는 의도는 식민지배의 명분을 수립하는 것이다.
○임나일본부는 가야권역에 국한된 국소적인 지역이 아니라 임나쇠체(任那衰替)의 과정에서 삼한정벌의 번국, 7국 4읍, 임나십국을 포괄한다.
○임나일본부는 조선총독부와 같은 식민통치기관으로 삼한정벌은 곧 삼국을 지배한 역사적인 명분을 구축하면서 정벌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임나일본부를 일본에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본 교재로 채택하여 학습할 때 야기되는 문제점은 하시라도 한국 정벌의 야욕은 촉발할 수밖에 없는 적대관계가 수립된다.
○임나일본부는 단순히 역사왜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토침략으로 비화될 요소가 내포하므로 국토수호에 관한 문제가 대두된다.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한반도에 토착하기 위하여 우륵의 12곡을 임나제국에 비정하면서 대가야연맹, 후기가야, 사국시대 등 임나를 은폐하기 위한 학술논저가 한국의 주류 학술기관에 의하여 정설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역사침략의 정점을 이룬 것이다.
○그 결과 경남 의령군에서는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 십국 중 사이기국을 정설로 수용하면서 악성 우륵의 고향으로 선양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를 수용하고 있어 망국적인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즉, 의병의 날은 의령 곽재우 의병장으로 인하여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나 사이기국을 수용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며, 치욕적인 역사도 여지없이 각인된다. 현재에서 지나온 과거로 회귀하여 일제강점기 식민역사의 치욕을 지울 수 없지만, 그 시대 암흑기의 식민역사를 관조하면서 시비를 비평하여 교훈을 새길 수 있는 지남이 된다.
○동양이라는 굴레에서 한중일의 문화역사는 유사성을 동반하지만, 토속적인 풍토와 언어가 다르며, 통치이념이 상이하기 때문에 의식구조가 상이할 수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이면서 대립하는 원인은 작금에 이르러 일본이 일방적으로 한국을 지배한 역사왜곡을 반추하여 침략의 명분을 구축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지 못하고 동조할 때 역사적으로 일본에 복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명치유신의 성공으로 정한론(征韓論)의 제기 과정에서 수립한 명문화 헌법에서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헌법 제1장 천황(天皇) 제1조에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은 만세일계(萬歲一系)로 천황이 통치한다.”하여 천황의 칙서는 명령이기 때문에 황국신민(皇國臣民)의 단일 통치 지배를 확립했다.
○반면에 조선은 《효경(孝經)》에 “신체발부는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게 효(孝)의 시작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효의 사상에서 단발령(斷髮令)이 시행하면서 봉기한 동기는 일신의 수구적인 보위에서 선진문물의 개국이라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지 못했다. 오늘날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없는 바와 같이 외형적인 문화는 사조(思潮)에 따라서 변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진리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승자의 주체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필연이다. 한 왕조가 멸망할 때 사직종묘(社稷宗廟)를 운운하는 것은 신흥 왕조가 모든 권력을 쟁취하면서 통치에서 불리한 내용은 삭제하고, 이반된 민심을 통합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책을 실현하는 것은 다반사이다.
○일본이 조선을 영구히 복속하여 식민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민족항거의식을 발본색원하여 민족정신이 함축한 상고사를 수거하여 분소하여 원천적으로 말살하고,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의 비문 가운데 일본에 불리한 자구(字句)는 정으로 삭마시켜서 본말을 전도시킨 것이다.
○일본이 거국적으로 한국의 역사를 말살한 목적은 고대로부터 조선인은 의타적인 식민지 종족으로 세뇌시키기 위하여 전국 팔도에 태양신인 천조대신을 숭모하는 신사를 세워서 참배를 강요한 것이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중국의 사이에 위치하여 역사적으로 잦은 침범과 약탈을 당하였으나 유구한 역사를 지탱할 수 있는 단초는 의사를 소통하는 말과 글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재건할 수 있었다.
○일본과 한국은 동양인으로 외형은 같으나 언어와 글이 다르고 정치체제와 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정복야욕은 잠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군비를 확장하는 것이다.
○일제가 조선총독부에서 식민통치하면서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하고 창씨를 개명한 것은 조선인의 민족성을 송두리째 내지의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계략은 영구 복속하여 조선팔도에는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日章旗)가 게양하려는 의도이다.
◆식민역사의 왜곡을 정설로 수용하는 반민족인 행위는 한국의 주권을 폐기하는 행위로 간주할 수밖에 없으며, 한반도에 일장기가 게양하는 것을 학수고대하는 매국적인 행위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조선총독부에서 주권을 빼앗아 내선일체로 민족정신을 말살하여 미개한 노예로 삼아 식민통치하면서 무소불위로 자원과 인력을 수탈하였다. 특히 남차랑(南次郞, みなみじろう, 1874~1955))은 “천황을 중심으로 국체의 본의 철저하도록 한다.”하여 황국신민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조선인을 민족정신을 말살하면서 고령에 임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910년 일한병합을 축하하는 기념엽서 중에서-】
※첫째, 신공황후의 정토(征討) ▬ 삼한정벌
※둘째, 풍신수길의 정벌(征伐) ▬ 임진왜란
※셋째, 서향융성의 정한론(征韓論) ▬ 조선정벌
▲ 등 2천 년 이래의 문제는 명치천황에 이르러 조선을 병합하면서 축하하는 핵심 내용으로 조선을 침략하는 정당성은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라는 허구적인 식민역사의 왜곡에서 단초가 된 것이다.
○오늘날 일본인이 거국적으로 임나일본부의 정당성을 교육하려는 것은 1910년부터 무소불위의 가혹한 식민통치에서 1945년 패전국가로 물러났으나 다시 군사강국으로 흥기하여 한국 침략의 강행을 내재한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독도의 역사침략에서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은 국가적으로 한국의 식민지배 역사를 왜곡하는데 편승하는 한국의 유수 학술기관이 임나일본부설을 수용하고 있어 임나일본부의 불식은 요원한 지경에 이르렀다. 즉, 한국의 국가에서 운영하는 역사 연구기관 중에서 일본인이 임의로 왜곡한 식민역사의 임나일본부를 수용하여 홍보하고 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 왜곡한 임나일본부설을 정설로 수용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 《일본육국사 일본서기(日本書紀)》7국(7國)과 4읍(4邑)
★[출처]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m)라는 사이트에 [新羅의 격파와 7國의 평정. 249년 3월(음)]의 제하에 주석이다. <이하 인용하면서 어미 글자는 삭제>
◎7국(7國)
○[比自㶱]은 경남 창령지방.
○[南加羅]는 곧 낙동강 河口인 金海에 있던 本加耶를 지칭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본가야는 532년에 신라에 정식으로 병합.
○[㖨國]은 大邱 부근의 慶山지방으로 추정해 왔으나, 최근 이를 경남의 靈山, 密陽 일대의 한 지역으로 보는 견해.
○[卓淳]은 대개 오늘날의 大邱 부근으로 보아 왔으나 이를 경남 창원지방에 있던 가야 소국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
○[古奚津] 古奚는 오늘날의 전남 康津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또는 狗奚國을 전남 海南으로 비정하는 견해.
○[忱彌多禮] 오늘날의 제주도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앞의 古奚津의 중심되는 부락으로서 康津 일대로 추정하는 견해.
◎4읍(4邑) 대개 이를 전라도 지방으로 비정.
○[布彌支와 辟中]은 각각 오늘날의 羅州와 寶城으로 비정.
○[意流村] 백제국의 聖地로서 王都 漢城을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견해.
○[辟支山] 백제의 옛 지명으로 오늘날의 전북 김제로 비정.
○[古沙山] 오늘날의 전북 古阜지방으로 비정.
【▲반론】이와 같은 임나일본부설을 수용한 결과 한강 이남에 충청도 일원과 전라도 강역 전체가 왜국의 식민지로 인준한 것이다. 그 발단은 비미호와 신공황후는 동일인으로 삼한정벌로 내세우고 있는데, 실제 중국의 객관적인 역사 기록에 의거한 활동 내용과 연대가 고증되면서 동일인은 허구성이다. 그 증거로 왜(倭)의 여왕(女王) 비미호(卑彌呼)와 신공황후는 활동한 연대에서 삼한정벌의 여걸로 등장시킨 것은 거짓으로 고증된다.
【▲자료】《해동역사 제5권 / 세기(世紀) 5 사군사실(四郡事實)》중에, ○위 명제(魏明帝) 청룡(靑龍) 2년(234) 6월에 왜(倭)의 여왕(女王) 비미호(卑彌呼)가 보낸 대부 난승미(難升米) 등이 대방군으로 와서 천자에게 나아가서 조알하고 공물을 바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수 유하(劉夏)가 관원을 보내어 그들을 경도(京都)로 호송하였다. 그해 12월에 조서를 내려서 여왕에게 말하기를, “친위왜왕(親魏倭王) 비미호에게 조서를 내린다. 대방 태수 유하가 사신을 보내어 그대가 보낸 대부 난승미와 차사(次使) 도시우리(都市牛利) 및 공물로 바치는 남자 4명과 여자 6명, 반포(班布) 2필 2장을 이곳에 도착시켰다. 그대가 있는 곳은 몹시 먼데 이렇게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니, 이는 그대의 충효(忠孝)에서 나온 것인바,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이에 그대를 친위왜왕으로 삼고 금인(金印)과 자수(紫綬)를 싸서 대방 태수에게 보내 그대에게 전해 주게 한다. 그대는 그대의 종족들을 잘 보살피면서 나에게 순종하기를 힘쓰라.” 하였다.
★[출처] 안정복 저, 정선용 역,《해동역사 제5권》, 한국고전번역원, 1996.
【▲반론】위에서 왜(倭)의 여왕(女王) 비미호(卑彌呼)는 234년에 친위왜왕(親魏倭王)의 작호를 받은 사실만 보더라도 임나일본부의 용언에서 일본은 개입할 수 없으며, 왜국에 여왕이 분명하며, 위(魏)나라의 속국을 자청한 이면에는 내란에 구원을 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반도에 삼한정벌을 성립할 수 없다. 특히, 234년은 120년으로 하대하여 354년은 인덕천황 42년(354)으로 신공황후와 관련이 없는 허구성으로 고증된다.
(2)《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음악[樂]》우륵이 지은 12곡
★[출처]{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에서 인용한『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하가라도(下加羅都) 금관국(金官國) 지금의 김해시(金海市).
○둘째, 상가라도(上加羅都) 대가야국(大加耶國) 지금의 고령(高靈) 비정.
○셋째, 보기(寶伎).
○넷째, 달이(達已) 지금의 전남(全南) 여수(麗水)와 돌산읍(突山邑) 일대로 비정.
○다섯째, 사물(思勿) 지금의 경남(慶南) 사천시(泗川市) 사천읍(泗川邑) 지역 비정.
○여섯째, 물혜(勿慧) 지금의 전남(全南) 광양시(光陽市) 광양읍(光陽邑) 지역 비정.
○일곱째, 하기물(下奇物) 지금의 전북(全北) 장수군(長水郡) 반암면(蟠巖面), 임실군(任實郡) 지역으로 비정.
○여덟째, 사자기(師子伎), 아홉째 거열(居烈) 지금의 경남(慶南) 거창군(居昌郡) 지역 비정.
○열째, 사팔혜(沙八兮) 지금의 경남(慶南) 합천군(陜川郡) 초계(草溪)지역 비정.
○열한째, 이사(爾赦) 지금의 경남(慶南) 의령군(宜寧郡) 부림(富林)지역 비정.
○열두째, 상기물(上奇物) 지금의 전북(全北) 남원(南原)지역으로 비정.
【▲반론】○이사(爾赦)는 《삼국사기》에 미상으로 분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남(慶南) 의령군(宜寧郡) 부림(富林)으로 비정한 목적은 이사(爾赦)=사이기국(斯二岐國)을 일본인 스에마쓰야스카즈(末松保和)와 다나카도시아키(田中俊明)가 날조하여 졸지어 우륵은 임나 사이기국인(斯二岐國人)으로 왜곡한 것을 수용한 것이다.
○사자기(師子伎)는 사자춤에도 불구하고 지명은 모순이다.
○사물(思勿)은 지금의 경남(慶南) 사천시(泗川市) 사천읍(泗川邑)으로 비정했으나《삼국사기 권제3 신라본기 제3》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25년(441) 봄 2월에, “사물현(史勿縣)에서 꼬리가 긴 흰 꿩을 바쳤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현(縣)의 관리에게 곡식을 내려 주었다.”하여 악성 우륵이 551년 신라 진흥왕 어전에서 탄금한 연대를 기준으로 110년 전에 사물현(史勿縣)은 신라에 복속한 사실에서 우륵이 태어나기 이전에 신라에 복속한 것이 명백하므로 우륵의 12곡을 임나에 이용한 것은 왜곡이다.
(3)《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성열성(省熱城).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제1 음악[樂]》성열현(省熱縣) 사람 악사 우륵.
★[출처]{정구복 외,《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에서 인용하여
○성열성(省熱城) : 의령군 부림면.
○성열현(省熱縣) : 지금의 경남(慶南) 의령군(宜寧郡) 부림면(富林面).
○악사 우륵(于勒) : 6세기 중엽 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의 한 소국인 사이기국(斯二岐國)의 사람으로 가야의 악사이며, 가야금의 대가.
【▲반론】《삼국사기》에 “성열현(省熱縣) 사람 악사 우륵”은 김유신 장군이 공취한 백제 성열성(省熱城)과 동일한 지역이다. 따라서 백제의 성열성(省熱城)이 가야국과 임나 사이기국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 수사관 스에마쓰야스카즈(末松保和)는 성열현(省熱縣)은 지금의 청풍을 서두에 인정하면서 낙동강 유역에 배치하여 임나일본부설을 토착한 것은 역사왜곡이 명백하다.
(4)《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欽明天皇 23년(562) 봄 정월 신라가 任那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任那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奚, 乞湌國, 稔禮國】
○古嵯國 지금의 경남 고성으로 비정.
○子他國 지금의 경남 晋州 혹은 거창으로 비정.
○乞湌國 지금의 창원시 혹은 산청군 단성면 등에 비정된다. 특히 경남 산청군 단성면과 신안면에는 5, 6세기 가야고분이 산재하므로 이 유적을 乞湌國과 연결시키는 견해.
【▲반론】《일본서기(日本書紀) 권5》에 숭신천황(崇神天皇) 65년(기원전 33) 가을 7월 “임나(任那)는 축자국(筑紫國)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있다.”라고 지금의 대마도를 가리키고 있다. 임나십국은 562년과 어떤 책에는 560년으로 연도가 불확실하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3》 서명천황(舒明天皇) 10년(638), “이 해 백제·신라·임나가 나란히 조공하였다.”하여 임나가 멸망한 이후에도 638년에 조공한 기사는 모순이 수반되므로 임나는 한반도에 존재할 수 없다.
(5)《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성열성(省熱城)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7960]
○성열성(省熱城). 오늘날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富林面)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32 악지(樂志)에 따르면, 가야금으로 유명한 우륵(于勒)이 성열현(省熱縣)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642년 백제가 대야성(大耶城)을 비롯한 신라 서부의 40여 성을 차지하자, 644년 신라는 반격에 나서 가혜성(加兮城: 고령)·성열성(省熱城: 의령)·동화성(同火城: 구미) 등 7성을 공격하였다.
【▲반론】의령은 경상남도 의령군은 역사의 연혁에서 백제의 강역이 실존한 바가 없기 때문에 백제의 성열성이 존재할 수 없다. 의령군에 소재한 미타산성은 조선시대 성곽에도 불구하고 청풍 성열현인 우륵을 임나에 악용한 결과 임나 사이기국인으로 변조하면서 성열성으로 날조한 것이다. 본디 미타산성은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지역으로 초팔국(草八國)의 강역이 명백하기 때문에 임나십국 중 사이기국(斯二岐國)이 존재할 수 없다. 낙동강 유역에 가혜성(加兮城)은 고령으로, 성열성(省熱城)은 의령으로, 동화성(同火城)은 구미로 날조 왜곡한 장본인은 조선총독부 수사관 스에마쓰야스카즈(末松保和)와 우륵의 12곡을 임나제국에 이용한 다나카도시아키(田中俊明)의 식민학설에 기저를 둔다. 실제 제천시 청풍면에 성열성이 소재하고 있다.
【해결방안】
○임나일본부설은 해방 후에 정치적인 사상범으로 척결하면서 임나의 용언은 금기어로 불식시켰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한반도에 임나일본부설이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설로 수용하여 상기와 같이 홍보하고 있어 일본인이 날조하여 왜곡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의 불식은 요원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역사 교과서로 교육하는 단계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통역사를 대변하는 학술기관에서 일언반구도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은 한국의 정통 학계에서 수용했으므로 한국의 상고사는 삼국초기에 원삼국시대로 연혁을 정립한 것은 바로 단군조선을 말살하는 결과를 자초한 셈이다. 그 다음에 임진왜란은 본디 삼한은 일본의 강역을 주장하는 동시에 한일합병의 식민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미래에 다시 한국 정벌에 명분을 부여한 것이다. 이로써 일본과 한국은 국가의 명운은 역사 왜곡에서 기인한 중대한 사안이다.
○임나일본부설은 단순히 가야권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일원과 충청도 일부 지역을 식민통치한 역사 왜곡은 반드시 불식하여 한국의 정체성을 수립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따라서 식민역사의 임나일본부설에 관하여 역사침략을 단호하게 대응하기 위한 국토수호의 결연한 의지의 일환으로 학문의 자유를 초월한 상위개념의 특별법을 제정하여 정치적인 사상범으로 척결할 수 있는 법률의 제정과 시행이 필요하다.
[첨부]《위키백과》<1937년 경성지도 부분> 해발 232.7m 남산[목멱산(木覓山)]에 왜성대공원을 조성하고 조선신궁과 남산신사를 구축하여 내선일체로 황국신민화로 민족성을 말살했다. 총독부관저에 대화정(大和町)과 남산에 욱정(旭町)을 명명한 의도는 바로 대화정권(大和政權)[야마토정권]에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을 강조한 것이며, 욱정(旭町)은 일본군이 승전하여 남대문으로 개선한 욱일기(旭日旗)를 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임진왜란의 장본인 풍신수길의 신사와 조선인의 귀무덤 주변에 도로명을 대화대로(大和大路)로 명명하고 있다.
한반도 남부를 왜가 200년간 지배했을까?
지난 3월 말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가 발표됐다. 검정에 통과한 교과서들은 전반적으로 역사 서술이 개악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그렇다면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서술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먼저 2009년 검정을 통과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후소샤’와 ‘지유샤’판 역사 교과서의 서술 내용 중 주요한 문제점들을 시기별로 하나씩 살펴보고, 한일 · 한중일 간의 연구자, 교사, 시민의 교류를 통해 발간된 공동역사교재에서는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7회에 걸쳐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후에는 올해 검정에 통과한 중학교 역사 · 공민교과서 서술 내용의 문제점을 시기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겠다. <필자>
후소샤와 지유샤 교과서는 어떻게 다를까?
후소샤와 지유샤 교과서 본문의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한 내용은 차이점이 거의 없다. 다만, 지유샤 교과서의 경우, 광개토왕비의 비문에 야마토 조정의 군대와 싸운 것에 대한 설명문을 추가하여 임나일본부설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내용이 개악됐다.
교과서 서술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후소샤 교과서는 물론 후소샤 교과서의 판박이인 지유샤 교과서에서는 이미 한일 역사학계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난 임나일본부설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가르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역사를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자국 중심주의적인 역사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임나일본부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 후소샤판 역사교과서.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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