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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1745, 영조21년~1806?) / 신윤복(1758, 영조34년~?)
조선시대의 풍속화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등장과 함께 18세기에 크게 발달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담은 풍속화가 등장한 데에는 영정조 시대의 정치적 안정, 실학사상의 대두, 상업으로 인한 서민경제의 발달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배경으로 김홍도와 신윤복은 자신이 그리고 싶은 주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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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와 신윤복의 공통점과 차이점 (비교와 대조) – 네이버 블로그
김홍도와 신윤복, 두 사람은 모두 조선 시대 후기에 활동하던 화가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그림인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6/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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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와 신윤복: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 Korea100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두 사람 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한 대표적 …
Source: dh.aks.ac.kr
Date Published: 1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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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 나무위키
김홍도는 왕을 상징하는 색인 빨간색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신윤복은 빨간색을 사용해 풍자했다. 기생들[3]과 양반들이 주요 모델이였기에 신윤복의 풍속화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5/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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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은 정말로 김홍도의 제자였을까? – 오마이뉴스 모바일
그렇다면 김용준이 혜원의 작품세계에 매료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필 한 편이 그 자체로 신윤복론, 김홍도론을 대신할 정도의 전문적 식견을 담고 …
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4/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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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 風俗畵 – 금성출판사 :: 티칭백과
김홍도는 주로 서민들의 활기찬 모습을 그렸고, 신윤복은 양반의 풍류와 부녀자의 생활을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풍속화는 왕실이나 조정의 각종 행사를 비롯하여 사농공상 …
Source: dic.kumsung.co.kr
Date Published: 1/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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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휩쓰는 신윤복 3대 미스터리 – 매일경제
왼쪽부터 신윤복의 작품 `미인도` `월하정인` `쌍검대무`의 일부분. 출생에서 사망까지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 김홍도 김득신과 …
Source: www.mk.co.kr
Date Published: 11/28/2022
View: 6952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는 어떻게 다른가? – K스피릿
그림 속 양반의 옷에 보이는 미세한 떨림은 훔쳐보기의 긴장감을 더한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그림, <빨래터>(사진 좌)의 모습이다. 신윤복( …
Source: www.ikoreanspirit.com
Date Published: 7/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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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중고거래 – 번개장터
신윤복 신윤복의 미인도 사각은화신윤복의 춘화를 접시에 담다(입넓이:69cm)보석십자수 … 신윤복 김홍도 한국미술5천년 특별 우표 시트 2종 1979년 상품 이미지.
Source: m.bunjang.co.kr
Date Published: 7/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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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김홍도 신윤복
- Author: KTV스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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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7. 6.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dtjIhxdCFqI
김홍도와 신윤복의 공통점과 차이점 (비교와 대조)
이렇게 둘 이상의 대상을 서로 견주어 명확히 설명
하고자 할 때 비교와 대조의 기법을 사용하면 좋습니다.
그렇지만 비교와 대조의 기법을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첫째, 두 가지 이상의 대상을 서로 비교·대조하려면
일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앞서 설명했던 김홍도와 신윤복 그림의 소재 또는 형태와 같은 기준 말이에요.
둘째, 두 대상이 비교·대조할만한
대상이어야 합니다.
사과와 개미를 비교·대조해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공통점도 차이점도 찾기가 쉽지 않겠죠?
예를 들어, 자전거와 오토바이처럼
바퀴가 두 개 달린 탈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자전거는 사람의 힘으로, 오토바이는 연료로 움직인다는 차이점도 있는 것 말이에요.
이렇게 비교와 대조의 기법을 사용하여 설명하기에
좋은 대상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지 한번 살펴볼까요?
김홍도와 신윤복: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Korea100
김홍도와 신윤복: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두 사람 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한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도화서는 왕실이나 양반들의 요청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국가가 만든 관청이다. 이곳에 소속된 화가를 화원이라고 했는데 도화서는 화원을 양성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김홍도
김홍도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의 제자였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물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고 칭찬했다. 김홍도는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정조가 임금이 된 후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데 몇 차례 참여하였다. 1781년에는 익선관본(翼善冠本)을, 1791년에는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렸다. 정조는 특히 김홍도를 총애하여 “그림 그리는 일과 관련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1788년에는 김홍도와 함께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응환(金應煥)과 더불어 금강산 등 영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임금에게 바쳤다. 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금강전도』에 쓰인 글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한국의 진경을 그리다
그의 화풍은 50세를 전후로 1기와 2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에는 주로 화첩을 보고 중국의 정형화된 산수를 많이 그렸다. 또 인물로는 신선도를 그렸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을 한 작품 「군선도병(群仙圖屛, 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를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는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탁월한 공간 구성, 능숙하고도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만년에는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씨름, 서당, 대장간, 벼 타작, 기와 잇기, 길쌈 등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모습, 풍속 등도 많이 그렸다.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이 되었다.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개인 소장)』,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 개인 소장)」, 『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화려한 색채로 그린 남녀 풍속화
신윤복은 서자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족보에도 올리지 않은 중인 신분이었는데 특히 종조부와 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이 많이 나왔다.신한평은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릴 정도로 인정 받는 화가였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도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의 영향으로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림에서 양반의 위선과 이중적인 태도를 풍자한 해학을 표현하기도 했다.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그린 작가로 특히 유명하다.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한 선과 화려한 채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배경이나 인물 등은 사실적으로 그려진 덕분에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살림살이, 복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혜원은 과부, 기녀, 비구니, 의녀와 같은 소외 계층 여인들을 주제로 삼은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갸름한 얼굴과 가는 눈썹, 요염하게 치켜 올라간 눈, 앵두 같은 입술, 희고 통통한 손과 피부 등을 가진, 아름답고 관능미 넘치는 여인들로 표현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신윤복의 경우 작품에 언제 그린 그림인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풍속화첩』이 있다. 『풍속화첩』에는 「단오풍정(端午風情)」, 「연당(蓮塘)의 여인」,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신윤복, 「거문고 줄고르는 여인」/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신윤복, 「대쾌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신윤복, 「전모를 쓴 여인」/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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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 • 오주석, 『단원 김홍도』, 솔, 2015.
『단원 김홍도 연구』는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화가 중의 한명인 단원 김홍도 (1745-1806)의 생애와 미술사상, 작품을 고찰한 연구서이다. 생애와 교유를 간략히 살피고 일반 산수화, 금강 산도와 진경산수화, 인물화, 영모화, 화조화, 기타 회화로 나누어 사진과 함께 작품세계를 설명했다.
『단원 김홍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옛 화가 김홍도의 삶과 예술을 소개하는 책이다. 1995년에 출간된 김홍도 탄신 250주년기념 특별전 논고집 『단원 김홍도』를 저본으로 삼은 책이다. 체제와 표현 방식 가운데 장점을 취하고, 판형을 키워 김홍도의 작품을 보다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책은 김홍도에 관한 모든 기록을 총망라하여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하고, 체계적인 구성 가운데 쉽게 서술함으로써 김홍도에 대한 정확하고 일관된 인상을 제시한다. 또한 관련 기록의 행간에 엿보이는 김홍도라는 인물의 됨됨이와 품격, 즉 예술적 성과를 넘어서는 풍부한 인간적인 매력을 함께 전해준다. 김홍도의 전모를 크게 서화가의 면모, 풍류인의 면모, 선인의 면모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신윤복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백금남, 『소설 신윤복』, 미래인, 2008. • 정유현, 『우리의 옛 그림: 신윤복 편』, 범우사, 2011.
『소설 신윤복』은 조선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은 신윤복이 김홍도의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는 설정 아래 시작된다. 유교적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에 인간의 본성과 예술의 본질을 솔직하게 표현했던 신윤복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또한 강세황, 김홍도, 최북, 김득신 등 조선 후기 대가들의 작품 세계를 함께 복원해냈다. 신윤복의 그림과 함께 수록된 그들의 대표작을 본문 곳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우리의 옛 그림: 신윤복 편』은 한 시대를 앞서 살았던 배포 큰 대장부, 신윤복의 작품과 함께 풍속화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옛 그림에 부연해설을 몇 마디씩 덧붙인 그림책 형식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 풍속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EBS 화인 제작팀, 『풍속화: 붓과 색으로 조선을 깨우다』, 지식채널, 2008. • 윤진영,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 다섯수레, 2015.
『풍속화: 붓과 색으로 조선을 깨우다』는 EBS에서 방송되었던 다큐멘터리를 글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방송에서 미처 다 말하지 못한 김홍도, 신윤복, 김준근 세 풍속화가의 독특한 이력과 그들만의 개성적인 미술 기법상의 비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세 명의 풍속화가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지, 그리고 그들이 조선 후기 근대라는 시대를 어떻게 뜨겁게 살면서 실천했는지, 교과서나 그림 분석에 머물렀던 여타 미술 교양서가 전혀 말해주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소개한다. 그들의 작품을 역추적해가면서, 조선 후기 세 풍속화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근대를 도입하여 근대를 살아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는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사회를 살아간 선조들의 다양한 삶을 만나게 된다. 풍속화를 저술한 윤진영 교수는 고전의 바다 장서각에서 역사연구와 미술사의 기초역량을 익힌 후 한국회화사로 미술사 석·박사 학위를 받아, 이제까지 접해 보기 쉽지 않았던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를 총망라한 다양한 그림을 진솔한 설명을 겻 들여 조선사회의 다양한 삶을 보여준다.
신윤복은 정말로 김홍도의 제자였을까?
조선의 유생들은 혜원의 그림을 통하여 그가 다만 화류항리(花柳巷裡)에 출입하는 일개 탕자로밖에 보지 않았을는지 모르나, 그렇게 속단하기에는 혜원의 작품의 예술적 향기가 지나치게 높은 것이다. 유탕(遊蕩)을 일삼는 배(輩)에게 예술이 창조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혜원의 예술의 심각한 묘사를 통하여 그를 범속한 탕자로 속단하는 오류를 넉넉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김용준, 수필 ‘조선시대의 인물화’ 중에서
큰사진보기 ▲ 신윤복 <미인도> ⓒ 간송미술관 관련사진보기
혜원은 풍속화 외에 산수에도 능한 듯하였으나 주로 풍속화에 전심하였고, 그 취재 내용은 극히 평민적이고 자유주의적이어서 시정항간(市井巷間)의 하층사회와 기방정취(妓房情趣)를 잘 묘사하였고, 그 필의(筆意)가 완미(婉媚)하여 다소 염정적(艶情的)인 일면과 해학조를 가미하면서 자유자재 당시의 사회상을 묘파하는 등 실로 조선 인물화계의 제일인자일 것이다. 혹 전문가의 간(間)에서는 혜원에게서 기운 높은 작품을 찾을 수 없다 하나, 과도히 엄격한 도학자적 견지에서 떠나 한층 더 낭만적인 예술적 견지에서 혜원을 볼 때, 당시와 같은 무서운 존유세력(尊儒勢力) 하에 있는 작가로서, 더구나 인물화라면 신선도란 방정식밖에 없고 모든 산수점경(山水點景)에까지 당의(唐衣)만을 입힐 줄 알던 당시의 작가로서, 단연 그들의 존유사상을 일축하고 현실에서 보는 의상과 현실에서 보는 풍속과 동작과 배경과 심지어는 일초일목(一草一木)에 이르기까지 조석(朝夕)으로 대하고 친(親)하는 눈앞의 현실을 그렸다는 것이 이 작가의 위대한 점이요, 가장 혁명적 정신이 풍부한 작가라 추대하지 않을 수 없다. – 김용준, 수필 ‘조선시대의 인물화’ 중에서
큰사진보기 ▲ 김홍도 <벼타작> ⓒ 국립중앙박물관 관련사진보기
혜원의 선(線)이 섬세하고 우미(優美)하고 유창하다면, 단원의 선은 간경(簡勁)하고 고졸하고 웅건한 맛이 있다. (….) 혜원이 시정과 촌락의 간아(간雅)한 장면을 묘사하는 동안에, 단원은 괭이를 든 농부와 밭 가는 소와 왁살스런 머슴들과 소를 타고 가는 농가 부녀와 경상도풍의 무지스런 농악의 장면과 씨름판, 엿장사, 대장간 등 자못 수선스런 장면을 사양함이 없이 닥치는 대로 묘파한다. – 김용준, 수필 ‘조선시대의 인물화’ 중에서
최근 문학, 영화, TV 드라마에서 동시에 뜨고 있는 주제(테마)가 혜원 신윤복이다. 이전에도 토정 이지함, 정약용, 황진이, 이순신, 정조 대왕 같은 역사속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재조명되는 현상이 유행처럼 반복되었기 때문에 혜원 신윤복의 느닷없는 등장이 그리 새삼스럽진 않다.다만, 기존의 패턴과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정치 쟁점이나 문화 담론으로까지 확대될 만한 요소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컨대 정약용, 이순신, 정조 대왕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 흐름과 맞물려 첨예한 정치 쟁점을 낳았지만 소위 ‘신윤복 코드’로 불리는 일련의 흐름 속엔 별다른 갈등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물론 최근 지만원씨가 좌파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70년대 반공 초등학생의 글을 보는 듯하다”는 진중권씨의 논평으로 충분해 보인다. 단지 영화, 드라마 주인공이 좌파라서 (실제로 좌파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지만) 신윤복 코드를 좌파 음모론으로 해석한다면 그 의식의 이면에 “좌파는 씨를 말려야 한다”는 극단적 배제론이 깔려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아무튼 최근 유행하는 신윤복 코드를 첨예한 정치 쟁점이나 거대 담론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신윤복에 대한 사료(史料)의 희소성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해 또 하나의 상업적 성공을 낳은 것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맞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배경을 좀더 뒤적이다 보면 “미스터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현실 사이의 함수관계” 같은 뻔한 도식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한국수필의 고전으로 불리는 김용준의 에도 신윤복과 김홍도에 관한 글이 나온다. 그 자신이 중학생 신분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을 만큼 재능 있는 화가이기 때문이었을까? 신윤복과 김홍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전문가다운 진지함과 예리함이 묻어난다.파격적인 화풍에다 사료(史料)에 남아 있는 기록이라곤 “선풍속화(善風俗畵)” 네 글자가 전부였던 신윤복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갔다. 김용준처럼 신윤복의 진가를 꿰뚫어보고 높이 평가한 이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화류항리에 출입하는 일개 탕자” 취급하는 이들도 있었다.그러나 김용준이 술회했듯이 화류항리에 출입하는 일개 탕자 취급하기엔 신윤복의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술적 향기가 지나치게 높다. 특히 이 대목은 김용준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그렇다면 김용준이 혜원의 작품세계에 매료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필 한 편이 그 자체로 신윤복론, 김홍도론을 대신할 정도의 전문적 식견을 담고 있어 일부만 발췌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아래 발췌한 내용만으로도 혜원의 진가를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무서운 존유세력”이 지배하던 18세기 조선 사회에서 하층민(서민, 기생 등)의 다양한 삶, 표정, 몸짓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심지어 춘화도까지). 사료 속에서 신윤복을 찾기가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이유를 대략 알 만하다.그런 의미에서 최근 부상하고 있는 신윤복의 정체를 둘러싼 가설들, 그중에서도 남장여자설은 존유세력에 의한 소외에 이은 또 하나의 수난사로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신윤복이 존유세력에 의해 철저히 소외되었다거나 그가 남장여자일 리 없다는 생각 역시 근거 없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아무튼 그에 대한 기록이 새롭게 발굴되지 않는 이상 이런 의문들이 쉽게 풀리진 않을 것 같다.이쯤에서 신윤복과 김홍도의 관계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 속 이들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극적 재미를 위한 설정에 불과하다. 물론 김홍도(1745~?)와 신윤복(1758~?)의 화풍과 서체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신윤복이 김홍도의 제자였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사료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와 (자의든 타의든)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던 신윤복은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데, 영화평론가 문학산씨는 조선 예술의 집대성이자 주류세력인 김홍도가 오른손잡이 화가를 대표한다면 주류에 편입되기보다 담 밖의 세계를 지향한 신윤복은 왼손잡이 화가를 대표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김용준도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공교롭게도 혜원이 섬세하고 우미하다면 단원은 고졸(古拙)하고 웅건한 맛이 있다는 대목은 드라마, 영화 속 인물 설정과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래서 더욱 남장여자설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들의 만남을 사료(史料) 속에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성이 뚜렷한 두 천재의 만남은 언제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고갱과 고흐, 괴테와 베토벤, 랭보와 베를렌느의 경우처럼.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이들 모두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만약 신윤복과 김홍도가 친분을 나누었다면 그들의 운명도 불행한 천재들의 전철을 따랐을까? 아니면 끝까지 우정을 지켜 행복한 전례를 남겼을까? 어쩌면 우리가 진짜 궁금히 여겨야 할 대목은 신윤복이 남자냐 여자냐 남장여자냐 같은 말초적인 문제가 아니라 김홍도와 신윤복의 만남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그렇다면 도대체 천재와 천재의 만남에 얽힌 비밀을 풀어줄 열쇠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래저래 수수께끼와도 같은 인물들이다.
금성출판사 :: 티칭백과
풍속화는 왕실이나 조정의 각종 행사를 비롯하여 사농공상 각 계층의 생활상과 습속·잡사(雜事) 등과 같은 모든 삶의 행위와 실태를 묘사한 것이다. 좁은 의미로는 궁궐이 아닌 민간의 생활상을 다룬 그림으로 한정하여 사인 풍속도(士人風俗圖)·서민 풍속도로 나눌 수 있다. 사인 풍속도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린 것으로 수렵도, 계회도, 시회도, 평생도 등의 주제가 유행하였다. 서민 풍속도는 일반 백성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다룬 것으로, 풍속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여인들의 생활이나 자태를 그린 미인도도 서민 풍속도에 속한다.
조선 시대에는 풍속화가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조선 초기와 중기를 통해 성장한 풍속화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가장 융성하게 발달하였다. 18세기 전반의 문인 화가들에 의해 독립적·본격적인 화목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풍속화는 18세기 후반에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과 같은 화원 화가들에 의해 절정기를 이루었다.
김홍도는 20대 초반부터 이미 당대 최고의 풍속화가로 손꼽히는 등 이 시기의 풍속화 전개에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당시 최고의 비평가였던 강세황은 김홍도의 풍속화에 대하여 “우리나라 400년 동안에 아무도 한 적이 없는 솜씨라 하여도 가할 것이다. 더욱 풍속을 그리는 데 능하여 인간의 일상생활과 길거리·나루터·점포·가게·과거장면·놀이마당 같은 것도 한 번 붓이 떨어지면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짖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김홍도는 각 계층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많이 그렸지만 그가 보다 즐겨 다루었던 것은 서당, 주막, 씨름, 빨래터, 우물가, 담배 썰기, 자리 짜기, 집짓기 등과 같은 일반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들이었다. 그의 풍속화는 대부분 주변의 배경적 설명을 생략하고 원형 구도나 X자형 구도 등을 이용한 인물 중심의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또한 둥글넓적한 얼굴에 동글동글한 눈매를 지닌 소탈한 모습의 조선 후기 서민상의 창출, 해학의 흥겨움이 물씬 밴 이들의 생활 감정 및 구수하고 정감이 넘치는 삶의 생생한 묘사, 투박하면서도 강하고 생명력 있는 필선의 구사 등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김홍도의 이러한 풍속화풍은 김득신과 신윤복을 비롯하여 김양기, 김후신, 권용정 등의 여러 화가들과 민화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득신의 풍속화는 인물들의 생김새나 표정, 해학적인 분위기와 정감어린 표현, 요점적인 묘사 등에서 김홍도의 영향을 짙게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김홍도의 영향을 토대로 파적도, 귀시도, 귀우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가늘고 예리한 필선의 사용을 비롯하여 섬세한 공간 구성,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 생활 감정의 진솔한 표현 등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이룩하였다.
김득신에 비해 신윤복은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소재의 선정이나 구성 방법, 인물들의 표현 방법, 먹으로 그린 후 채색이 들어가는 설채법 등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신윤복은 주로 한량과 기녀들의 로맨스와 같은 남녀 간의 애정 문제나 춘의(春意) 등을 소재로 삼았으며, 배경을 중시하고 가늘고 유연한 필선과 아름다운 색채의 효과를 최대한 살리려고 하였다.
따라서 신윤복의 풍속화는 감각적이고 선정적인 경향과 함께 세련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특색으로 하였다. 양반들의 풍류 생활이나 남녀 간의 애정을 감각적이고 흥미롭게 묘사함으로써 이 시기 풍속화의 다양하고 개성적인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단오풍정, 뱃놀이, 월하정인, 미인도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신윤복의 이러한 풍속화풍은 유숙, 유운홍, 등에게 영향을 미쳤고, 민화에까지 부분적으로 파급되었으나 그를 고비로 하여 전통적인 풍속화는 쇠퇴하게 되었다.
문화계 휩쓰는 신윤복 3대 미스터리
왼쪽부터 신윤복의 작품 `미인도` `월하정인` `쌍검대무`의 일부분.
출생에서 사망까지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인 신윤복을 소재로 한 전시, 드라마, 영화 등이 인기를 끌면서 그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하지만 2008년 문화계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는 그에 대한 정보는 ‘0’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풍속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 정도가 ‘설’로 남아 있을 뿐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에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신윤복은 도화서 화원이었나= 신윤복은 화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신일흥과 종증조부 신세담은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화원(畵員)으로 알려졌다. 부친 신한평은 영조 때 임금의 화상인 어진(御眞) 제작에 참여한 화원이었다. 하지만 신한평은 정조시절 낙마해 정조 12년(1788) 귀양을 간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신윤복이 부친이나 조부처럼 도화서에서 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이원복 국립전주박물관장은 “각종 의궤에서 신윤복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며 “그가 화원으로 활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어느 문헌을 찾아봐도 신윤복이 화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다”며 “또 조선시대에는 부자가 같은 곳에서 근무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신윤복을 소재로 한 소설 ‘색, 샤라쿠’의 저자 김재희 씨도 “아버지가 화원이었으니 신윤복도 시험 정도는 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있다”고 말했다. 화원이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해도 그는 수많은 풍속화를 그렸다. 국보 제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를 비롯해 ‘탄금(彈琴)’, ‘미인도(美人圖)’ 등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걸작을 많이 그렸다. 반면 신윤복이 화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조선시대 화원은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직업으로 신윤복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화원이었다”며 “또 오세창이 정리한 ‘근역서화징’에 신윤복이 화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김홍도와의 관계는= 김홍도와 신윤복은 조선후기 시대 동시대 인물이었지만 그 둘이 사제관계였다는 기록은 역사에 남아있지 않다. 화풍으로 봤을 때 신윤복이 김홍도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할 뿐이다. 조선시대 기록에 신윤복과 김홍도가 사제관계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 둘이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태호 교수는 “김홍도와 신윤복은 동시대 살았던 화가들”이라며 “둘의 화풍을 비교해봤을 때 신윤복은 김홍도의 화풍을 따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김재희 작가 역시 “두 사람의 작품을 비교해 볼 때 신윤복이 김홍도를 모사한 부분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며 “그림 원본을 접하기 어려웠던 당시를 돌이켜 보면 신윤복이 김홍도의 제자였거나 최소한 가까운 사이였을 가능성은 크다”고 밝혔다.◆ 신윤복은 플레이보이였나=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는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사이 정을 주로 그렸다. 그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여인들은 틀에 박힌 캐릭터가 아니라 자유 연애를 즐기는 관능적인 여성상으로 그려졌다. 이는 신윤복이 활약하던 사회 분위기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화법이었다.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에서 그가 플레이보이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미술작품은 대부분 본인의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이다.김재희 작가는 “금기시되던 기방에 대한 그림도 많고 작품의 필치를 볼 때 신윤복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자인가 여자인가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은 남장여자로 등장한다. 문근영이 연기하는 신윤복은 중성적인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TV에서는 신윤복이 여자로 설정돼 있지만 그는 남자다. 남존여비 사상이 심했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화가로 사회 일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김달진 미술연구소장은 “신윤복이 남자라는 사실은 모든 미술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라며 “당시 사회분위기상 여성이 풍속화가를 그리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밝혔다.[정승환 기자 / 손동우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는 어떻게 다른가?
국립중앙박물관, 토요일 오후 ‘인문학 정원’ 진행
▲ (좌)김홍도, <빨래터>, 『김홍도필풍속화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신윤복, <단오풍정>, 『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갓을 쓴 양반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빨래하는 여인들을 훔쳐본다. 그림 속 양반의 옷에 보이는 미세한 떨림은 훔쳐보기의 긴장감을 더한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그림, <빨래터>(사진 좌)의 모습이다.
신윤복(申潤福, 1858∼?)의 <단오풍정>(사진 우)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반라의 여인들은 목욕을 즐기고 있고 그 위로 어린 승려 둘이 훔쳐보고 있다.
소중화(小中華)를 꿈꾸던 성리학의 나라. 격조 높은 산수화나 인물화를 방(倣)하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던 조선. 그곳에서 서민과 여인들의 삶, 부도덕한 양반과 승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기 시작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신분제의 이완, 18세기 상업의 발달과 도시의 번영은 군자의 나라 조선에 변화를 가져온다.
국립중앙박물관은 5월 24일 수요일 박물관 대강당에서 펼쳐지는 이태호 교수(명지대)의 ‘토요일 오후, 인문학 정원’에서18∼19세기 조선의 풍속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김홍도와 신윤복을 만난다.
당시 조선에는 농업 생산량 증가와 상공업 발달로 사대부가 아니면서도 경제력과 지식을 갖추고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새로운 교양 계층이 등장한다. 실학의 태동, 우리 땅과 삶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의 유행,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판소리 등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풍속화 역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등장하며 문인화 위주였던 화단에 김홍도와 신윤복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걸어간 길은 서로 달랐다. 김홍도는 농촌을 중심으로 서민층의 일상을 잔잔하게 화폭에 담았고 지배층의 취향에 맞는 문인화에도 조예가 있었다. 반면, 신윤복은 19세기 변모하는 도시의 삶을 드러내는데 주력했고 서울의 향락 풍조를 꼬집은 그의 풍자는 폐쇄적인 사대부의 윤리관이나 체면치레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그는 화원출신이라는 봉건사회의 제약 속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고집한 작가의식의 싹을 보여주고 있다.
공개강좌로 진행되는 ‘토요일 오후, 인문학 정원’은 누구나 별도의 사전 신청 없이 참여할 수 있다. 2월부터 11월까지 매달 넷째 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진행되며 수강료는 무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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