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조각가 | 창원에 오면 거장들의 조각품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이유!..문화도시 창원조각가 편|창원, 세계 속 문화를 꿈꾸다| Mbc경남 0227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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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 창원조각가
현대 조각계의 거장 김종영, 문신 등 세계적인 조각가를 배출한 곳 창원!
창원은 우리나라 현대 조각계의 거장 김종영·문신 선생을 비롯해
박종배, 박석원, 김영원선생 등 세계적인 조각가를 배출한 예향의 도시입니다.
왜 현대 조각계의 거장 예술가들이 창원에서 활동했고
지금도 많은 청년들이 창원에서 조각 예술을 할 수 있었을까요?
또, 창원의 공원 등 곳곳에는 정말 가치 있고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많은거 알고 계셨나요?
조각 예술의 나아갈 방향까지 고찰해 볼 수 있는 다큐가 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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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金鍾瑛)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방 이후 「3, 1운동 기념상」, 「가족」, 「전설」 등의 작품을 낸 조각가. 영역닫기 영역열기 내용.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우성(又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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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5/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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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종영(金鍾瑛, 1915년 ~ 1982년)은 대한민국의 조각가이다. 생애 및 작품편집 · 경상남도 창원 소답 출신으로 1941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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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8/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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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어떻게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 한국 추상조각 ...

은사·아버지 무한신뢰로 조각가 길 걸어 중학교 2학년인 김종영이 서예로 동아일보 주최’전조선학생작품전시회’에서 일등을 하였으며, 워낙 그 실력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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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sa.co.kr

Date Published: 9/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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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김종영 조각가

  • Author: 엠키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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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3. 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Yj1ixT_iDK4

조각가 김종영, 울긋불긋 ‘꽃대궐’서 미나리 생선탕 즐겨

예술가의 한끼

창원은 큰 도시다. 경남도청의 소재지로 수많은 공단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개발 이전의 창원 읍내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은 창원 읍내 소답동에서 태어났다. 읍내의 북쪽에는 향교가, 서쪽에는 창원보통학교가, 남쪽에는 시장이 있었다. 김종영의 집은 읍내의 동쪽에 있었다. 창원 일대의 넓은 들판을 거느린 김해 김씨의 대궐 같은 집이었다. 향교와 김종영의 집 사이에는 큰 미나리꽝이 있었다. 창원 읍내 사람들은 이 미나리꽝에서 나오는 제철 미나리를 즐겨 먹었다. 생으로 먹거나 쪄서 무침을 만들었다. 생선탕 위에 미나리를 얹히면 비린내가 날아간다. 이 고장 사람들은 겨울이면 거제도를 건너온 커다란 대구를 사다가 빨랫줄에 널어서 꾸덕꾸덕하게 말려가며 양식으로 삼았다. 대구탕 위에 얹혀 슬쩍 데쳐진 미나리는 겨울 속에서 봄의 기운을 불러내었다.

읍내 사람들은 김종영이 살던 큰 집을 꽃집이라 불렀다. 이원수(1912~1981)는 1926년에 동시 ‘고향의 봄’을 쓰며 어릴 때 가보았던 이 꽃집을 떠올렸다. 몇 년 후 이 시에 곡이 붙여져 국민동요가 되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한 노랫말은 ‘울긋불긋 꽃대궐’로 이어지는데 꽃대궐은 김종영 일가가 살던 창원 소답동의 꽃집을 말함이었다.

소년의 선대가 가진 땅은 넓었다. 명서동에서 봉암까지 이어졌다. 읍내 미나리꽝의 맑은 물은 남천을 따라 십 리를 흘러 팔용산 기슭의 봉암에서 바다를 만난다. 어린 소년은 여기서 태평양으로 펼쳐지는 바다를 보았다. 봄이면 봉암에 꼬시락(망둥어)이 몰려든다. 미끼를 달지 않아도 물어댈 정도로 성미가 급한 놈들이다. 꼬시락 낚시는 어른들에게는 횟감의 확보였고 소년들에게는 즐거운 놀이였다.

휘문고보 졸업 뒤 동경예대 유학

창원보통학교를 졸업한 김종영은 1930년에 상경하여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휘문고보의 교장은 화가 장발(1901~2001)이었다. 김종영은 장발의 영향을 받아 1936년 동경예대로 진학했다. 휘문고보 출신으로 상지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박갑성과 함께 하숙했다. 인체의 사실적인 재현이 중심이던 동경예대의 분위기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서양 조각가들의 화집을 구해 따로 조각의 본질과 보편성에 대해 공부했다.

해방되자 장발의 주도로 출범한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학부에 휘문고보 출신인 조각가 윤승욱과 함께 김종영, 박갑성이 교수로 합류한다. 동양화의 장우성과 더불어 김종영, 박갑성은 이 셋은 함께 퇴근 후 명동을 들락거렸다. 호주가인 장발은 그의 단골인 종로 1가 신신백화점(현재의 제일은행 본점 자리) 뒤의 바에 이 셋을 가끔 초대했다. 김종영은 특별히 술에 탐닉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서울대 미대는 서울대 법대와 함께 있었다. 1962년 연건동에 있던 서울대 수의대가 농대와 통합하여 수원으로 옮기자 미대는 수의대 자리로 옮겨졌다. 넉넉한 공간이 생겼다. 땅바닥의 1층은 조각과의 실기실 및 교수들의 작업실이 되었다. 김종영은 처음으로 자신의 작업실을 가지게 되었다. 작업실이 생기자 작업에 탄력이 붙었다. 1963년 서울대 관사를 떠나 삼선교 언덕에 마당이 있는 집을 구해 나갔다. 마당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조각작업을 할 수가 있었다.

통영고를 졸업한 심문섭이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 건 1961년이다. 억센 통영 사투리가 소통을 막았다. 김종영은 그에게 표준어를 쓰라고 충고했다. 경상도 사람들은 서울말에 대한 저항은 있지만 표준어에는 저항이 없다. 소년 시절의 후반부와 청년 시절을 서울에서 보낸 김종영은 서울말이 아닌 표준어를 쓰고 있었다.

김종영의 조각은 ‘불각(不刻)의 미’로 요약된다. 불각은 파지 않는다는 뜻이다. 억지로 파 내려가지 않고 조각을 완성할 수만 있다면 이는 깊은 경지가 될 것이다. 김종영을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부른다. 필요한 상을 끄집어내는 추상(抽象)과 불필요한 상을 파서 버리는 사상(捨象)은 동일작용의 양면이다. 판다는 것은 구차한 현상을 사상하는 작업이자 본질을 퍼 올리는 추상의 작업이다. 그러니 불각은 아예 안 판다는 뜻이 아니라 나무든 돌이든 재료 속에 이미 담겨 있는 상의 본체를 통찰하여 단도직입으로 진실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 본질적인 추상을 퍼 올린다는 뜻이 된다.

생전의 김종영은 뭔가를 도모하는 데에 소극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1975년에 한국의 단색화를 출범시킨 적이 있는 일본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사장은 한국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예컨대 김종영의 동경예대 동기인 다테하타 가쿠조(建畠覚造 1919~2006, 다마대학 교수를 지냈음. 다마대학 학장을 지낸 그의 아들 다테하타 아키라는 미술평론가로 지금도 한국 현대 미술가들과 교류가 많음)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일본 조각가들보다는 김종영이 훨씬 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1980년쯤 서울을 방문한 야마모토는 김종영을 만나고 싶어했다. 조각은 운반이 힘들기 때문에 국제전의 실행이 번거롭다. 그만큼 야마모토는 김종영이 절실했다. 동경화랑 전시는 당시 한국 미술가들의 꿈이었다. 김종영은 만남을 거부했다. 일본 미술계의 흐름이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판단한 건지, 그의 평소의 태도대로 하는 것보다는 안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판단한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술가들은 대체로 행동과 자기표현이 넘친다. 이와는 반대로 김종영은 말과 행동을 아꼈다. 대신 안 보이는 데서 사람들을 배려했다. 그런 점이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서울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황창배는 결혼식 주례로 김종영을 모셨다. 서예가 철농의 딸인 신부 이재온이 왜 전공도 아닌 조소과 교수님을 모셨느냐고 물었다. 서울미대생들은 전공을 불문하고 다 김종영을 존경한다고 대답했다. 결혼식장의 신부는 떨고 서 있는데 주례는 더 떨고 서 있었다.

김종영은 남 앞에 나서는 걸 힘들어하는 내향적인 성격이었다. 학생들의 봄 MT에 가서도 노래를 잘하면 작품이 나빠진다는 구실을 대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경남의 바닷가 출신들이 대체로 행동이 적극적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화랑에다 작품을 내놓고 파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원화랑의 정기용과는 결이 잘 맞았다. 정기용은 화랑주인이 아니라 김종영을 존경하는 미술애호가로서 그의 작품을 사서 모았다. 봄이면 큰 민어를 구해다 민어탕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정기용이다. 최고의 와인 소믈리에인에다 미술계 최고의 미식가인 정기용은 김종영을 귀하게 모셨다.

정기용, 존경심에 민어탕·와인 대접

삼선교 집은 나중에 옆의 땅을 매입하여 제자인 조국정의 설계로 작업장을 지었다. 김종영의 조각작품은 크지가 않다. 조수의 도움 없이 오롯이 혼자서 할 수 있는 크기의 작품들이다. 자신의 손길이 온전하게 다다를 수 있는 크기이기에 조각가의 몸과 대상인 조각이 따로 놀지 않았다. 조각을 하다 지치면 의자에 쉬면서 작업하던 조각을 바라다보았다. 틈틈이 손으로 쓸고 만졌다. 그래서일까 김종영의 조각에서는 금방 손을 뗀 듯 작가의 체온이 느껴진다.

제자 심문섭이 차를 삼선교로 몰고 와서 그의 작업실이 있는 덕소로 모셨다. 한강을 바라다보는 걸 좋아했다. 미나리 대신 쑥갓을 넣은 쏘가리탕이 맛있다고 했다.

김종영은 부친의 호 성재(誠齋)를 따서 자신의 호를 우성(又誠)으로 했다. 어릴 때 시서화에 능한 부친으로부터 서예를 배워 예술의 바탕을 닦았다. 휘문고보 2학년생 때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3회 전조선학생작품전람회 서예 부문에서 중등부 장원을 할 정도였다. 김종영은 쉬지 않고 글씨를 쓰고 또 드로잉을 했다. 몇 년 전 학고재에서 추사 김정희와의 이인전이 열렸다. 글씨와 조각 모두 지극한 경지였다.

김종영의 종부성사는 서강대 교수였던 친구 김태관 신부가 맡았다. 의령 출신인 어머니 광주 이씨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삼선교 집을 지켰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우성(又誠). 경상남도 창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의 휘문중학교를 거쳐 동경미술학교에 유학, 조각을 전공하여 1941년에 졸업하고 이어서 연구과도 수료하였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에 미술학부가 창설될 때 조소과 교수가 되어 1980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근속하였다.

1949년에 정부 주관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시작되자 추천작가로 「여인좌상」을 출품한 이래, 초대작가·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주로 그 전람회를 통하여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의 작품들은 여인상·모자상 등을 소재삼은 구상(具象)이면서 표현적인 형상성에 치중된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추상적인 순수조형작업으로 기울다가 그 경향으로 완전히 전신하여, 나무·금속·대리석을 재료로 한 단순하고 명쾌한 형태의 작품조각으로 독자적 내면을 실현시켰다. 그 조형적 특질은 구성적이며 공간적이고, 혹은 유기적인 생명감을 가지는 다양성을 이루었다.

1953년「무명 정치수인을 위한 모뉴멘트」를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조각전에 출품하여 수상하였고, 상파울루비엔날레(1965) 등 다른 국제전에도 참가하였다. 1963년에는 「3·1운동 기념상」(서울 파고다공원)을 제작하였으며, 197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밖에 서울특별시문화위원(1955), 정부문화재보존위원(1959)과 한국미술협회 대표위원(1960), 한국디자인센터 이사장(1968) 등을 역임하였고, 서울시문화상(1960)·국민훈장동백장(1974)·예술원상(1978)을 수상하였다. 주요한 작품으로는 「가족」(1965)·「전설」(1958) 등이 있다.

사람이 삶이고 세상이다…不刻의 조각가 김종영 인체조각展

viewer 김종영의 ‘자각상B 작품71-5’

viewer 김종영의 ‘작품80-5’와 1974년에 먹으로 그린 ‘자화상’이 나란히 전시중이다.

viewer 김종영의 1950년대 ‘부인상’(왼쪽부터), 1964년작 ‘자각상’, 1974년작 ‘어머니상’

viewer 김종영의 여인입상 변천사를 보여주는 ‘작품53-1’(왼쪽사진)과 ‘작품74-1’.

viewer 김종영 ‘가족A 작품65-7A’

viewer 각진 기하학적 형상이 두상을 연상시키는 김종영의 1970년대 조각과 1976년작 ‘산동네 풍경’(오른쪽부터)과 ‘드로잉’

viewer 김종영의 ‘작품80-3’(왼쪽)과 드로잉.

viewer 김종영의 ‘인체조각’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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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옹이 두 개가 그대로 눈망울이 됐다. 생생한 나무 결은 시간이 쌓인 주름살로 자리 잡았다. 웃을 때 잡히는 눈가 주름은 정겹고, 한줄기 눈물 같은 흔적은 애잔하나 서럽지 않다. 툭툭 아무렇게나 쳐 낸 듯한 자리가 얼굴이 됐으니 자연과 사람의 혼연일치다. 인위적 가공을 배제한 자연스러운 미학을 추구한 불각(不刻)의 조각가 우성 김종영(1915~1982)의 1971년작 ‘자각상B 작품 71-5’이다.9년 뒤의 ‘작품 80-5’는 그의 또 다른 자각상이라 불린다. 마치 선승(禪僧)의 그림처럼 하나의 획으로 그린 1974년작 먹그림 ‘자화상’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나뭇잎처럼 길쭉하게 그린 얼굴에 일획의 코, 점으로 찍은 눈과 입이 단순하지만, 과묵하고 곧은 작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어려서부터 서예를 연마한 작가가 기교를 쏙 뺀 어린아이의 붓질 같은 대교약졸(大巧若拙·높은 기교는 서투른 것처럼 보인다)의 경지에 올랐다. 이 그림과 함께 ‘작품 80-5’를 보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운 얼굴에 코 하나 붙인 모습이 닮은 꼴이다. 코와 나무결은 수직인데 얼굴이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 비대칭의 극적인 미감을 풍긴다. 두상을 깎은 것인지 헌 한옥에서 발견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손 댄 흔적이 적은 작품이 사색하는 인간의 근본을 보여줘 절정에 오른 ‘불각의 미’로 꼽힌다.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이 기획전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의 인체조각’을 열고 있다. 그간 작가의 추상 조각이 부각된 까닭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인체 조각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추상조각으로 발전했는지 들여다 봤다. 명상적인 전시이자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에 몸의 의미와 가족의 가치를 되돌아 볼 기회다.기획 의도대로 전시를 보려면 입구 앞 오른쪽의 본관2전시실에서 시작하자. 도쿄미술학교로 유학 간 김종영이 1학년이던 1936년 여름 방학 때 제작한 ‘조모상’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근대 조각이자 유일한 1930년대 석고상이다. 한국 최초의 조각가 김복진을 비롯해 근대 조각가의 초기작은 거의 전하지 않고 1940년대 작품만 몇 점 남은 상황에서 이 작품은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다. 할머니의 자상한 품성이 얼굴에서 느껴질 정도로 김종영의 묘사력은 탁월했다. 작가가 특정인을 모델로 삼은 조각은 할머니·어머니·부인과 본인 뿐이었으며 가족 외에는 서울대 음대 입구의 현제명 흉상과 소녀상이 유일하다. 대리석을 깎은 부인상과 치옥석을 다듬은 어머니상 사이에 놓인 1964년작 ‘자각상A’는 덜 다듬어 울룩불룩한 칼질이 세파의 흔적처럼 선명하다. 매사 진지한 눈매와 말을 아끼려 꾹 다문 입이 작가의 평소 성정을 드러낸다.가족 등을 그린 드로잉은 작가의 인체에 대한 연구 과정이다. 머리에 손을 대고 서 있는 여성을 조각한 1953년작 ‘작품53-1’과 김종영의 마지막 여인입상인 1974년작 ‘작풉74-1’이 나란히 놓여 20여 년의 변천사를 보여준다.신관에서는 김종영만의 비대칭과 불각의 미가 펼쳐진다. 동시에 1950년대에 작성된 ‘추상예술(Abstract Art)’과 ‘수상(隨想)’이라는 작가의 예술노트가 처음 공개됐다. 추상조각의 거장 콘스탄틴 브랑쿠시(1876~1957)를 “추상 작가로서 투철한 지성이 부족한 것이 유감”이라 분석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김종영의 추상화한 인체는 세상으로 확장된다. 유기체 같은 곡선미는 풍만한 여체를 그리는가 하면, 부둥켜 안고 의지하는 ‘가족’이 되기도 한다. 1965년작 ‘가족A 작품65-7A’의 원작인 대리석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며, 전시에는 청동작품이 나왔다. 1970년대에는 사각형이 겹치고 덧붙은 듯한 기하학적 형태로 변화하는데 이것이 꼭 사람 얼굴처럼 보인다. 작가가 자신이 살던 성북동 삼선교 주변을 그린 ‘산동네 풍경’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직선들이 마을을 이뤘다. 추상의 형태가 사람이요, 집이자, 세상의 형상이 됐다.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김종영 조각의 모티브는 인체에서 출발해 식물,산과 같은 자연으로 확대됐는데 이는 선비의 자연관과 학문하는 태도와 직결돼 있다”면서 “20세기 한국미술의 과제이자 해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보편성에 기반한 특수성을 찾아내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6월7일까지./조상인기자 [email protected]

‘불각의 조각가’ 김종영의 동양적 뿌리 찾아서…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 작품 ‘새’(1953년).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머리(天)로 비스듬히 올려다보고 가슴 부분(人)과 다리(地)로 우뚝 서 있다. 만물을 구성하는 천지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작품 80-6’(1980년)은 자연 상태인 통나무(一)를 반으로 쪼개 포갠 것(二)으로 보아 생성의 원리를 시각화한 작품으로 해석된다. 그의 작품 중 구태여 깎지 말라는 ‘불각의 미’의 극치로 꼽힌다.

회화 ‘D-0108’(1961년)의 위아래에는 상형문자로 산과 물이 적혀 있다. 주역의 64괘가 상괘와 하괘의 조합으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과 비슷한 방식을 취했다. 김종영미술관 제공

깎지 않는 조각가. 수식어만으로도 우성 김종영(又誠 金鍾瑛·1915∼1982)은 유달랐다. 구태여 깎지 말라는 ‘불각(不刻)의 미’는 김종영이 한평생 읊었을 철학이다. 그의 고유함은 한동안 많은 평론가들의 이목을 끌어왔지만 한편으로는 그 뿌리가 무엇인지 쉽게 간파되지 않는다는 말이 따라다녔다.묵은 질문의 실마리가 될 전시가 찾아왔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김종영미술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아 7일부터 특별전 ‘김종영의 통찰과 초월, 그 여정’을 열고 그의 작품을 서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시선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김종영의 작품세계를 연구해온 원로 평론가 옥영식 선생과의 공동 연구 결과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김종영 선생은 동서양을 관통하는 추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 고유의 우주관을 표현해낼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 같다”며 “양과 음, 하늘과 땅과 사람 등 생성의 원리를 다룬 동양 사상이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김종영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 ‘새’에서부터 그의 고뇌는 드러난다. 이 작품은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작품으로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이다. 당시 김종영은 동양 철학자 우암 김경탁(1906∼1970)의 논고 ‘실생 철학의 구성’(1953년)을 읽고 평생 소장했는데, 그 내용은 음양조화론과 맞닿아 있었다. 음양조화론과 함께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가 통용됐다는 점을 접목해 보면 새의 머리 부분은 하늘, 수직으로 선 새의 가슴과 다리는 각각 사람과 땅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이는 기존의 시각과는 상이하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은 작품 제목이 비슷하다는 이유 등으로 서양 현대조각의 아버지인 브른쿠시의 ‘공간의 새’와 연관된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그가 활동하던 1950년대는 우리나라에 서구 미술이 유입됐고 김종영 또한 이를 능동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김종영 관련 논문 중 상당수가 그의 작품과 서구 작품 간의 형태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어떤 영향 관계가 있었는지 살피는 것에 집중돼 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우주관을 염두에 두면 날아가려는 순간의 모습을 포착한 브른쿠시의 새는 김종영의 새와는 전혀 달리 보인다.조각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그의 작품관을 엿볼 수 있다. 1961년에 그린 드로잉 작품은 화면을 위아래로 나눠 마주 본 채 누워 있는 여인을 담았다. 수많은 드로잉 작품 중 하나로 여겨졌던 이 그림에서 새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림 위와 아래에 모두 영문으로 이름을 쓰고 그 옆에는 각각 상형문자로 ‘山’과 ‘水’를 썼다는 사실이다. 바탕색은 각각 양과 음의 색인 갈색과 파란색이다. 미술관은 주역(周易)에서 아래가 물이고 위가 산인 산수몽괘(山水蒙卦)가 있는 점을 볼 때 이 작품 또한 동양 사상을 품고 있다고 분석한다.불각도인(不刻道人)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여러 실험의 결정체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에서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라고 방향성을 설명했다. 그의 절제적 표현은 작가의 이념 등을 표현하지 않고 재료 자체에 관심을 두는 서구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석할 수 있다.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어긋나게 포개 놓아 단순미의 극치라고 평가받는 ‘작품 80-6’도 노자 도덕경 등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분석된다.시선을 달리하면 해석이 달라진다. 이번 전시는 김종영의 작품을 김종영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작품을 새로 톺아볼 시발점이 될 것이다. 다음 달 27일까지. 무료.김태언 기자 [email protected]

조각가 김종영(金鍾瑛)

김종영(金鍾瑛.1915.6.26∼1982.12.15)

조각가. 경상남도 창원 출생.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우성(又誠). 경상남도 창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의 휘문중학교를 거쳐 동경미술학교에 유학, 조각을 전공하여 1941년에 졸업하고 이어서 연구과도 수료하였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에 미술학부가 창설될 때 조소과 교수가 되어 1980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근속하였다.

1949년에 정부 주관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시작되자 추천작가로 <여인좌상>을 출품한 이래, 초대작가·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주로 그 전람회를 통하여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의 작품들은 여인상ㆍ모자상 등을 소재삼은 구상(具象)이면서 표현적인 형상성에 치중된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추상적인 순수조형작업으로 기울다가 그 경향으로 완전히 전신하여, 나무ㆍ금속ㆍ대리석을 재료로 한 단순하고 명쾌한 형태의 작품조각으로 독자적 내면을 실현시켰다. 그 조형적 특질은 구성적이며 공간적이고, 혹은 유기적인 생명감을 가지는 다양성을 이루었다.

1953년 <무명 정치수를 위한 기념비>를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조각전에 출품하여 수상하였고, 상파울루비엔날레(1965) 등 다른 국제전에도 참가하였다. 1963년에는 <3ㆍ1운동 기념탑>(서울 파고다공원)을 제작하였으며, 197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밖에 서울특별시문화위원(1955), 정부문화재보존위원(1959)과 한국미술협회 대표위원(1960), 한국디자인센터 이사장(1968) 등을 역임하였고, 서울시문화상(1960)·국민훈장동백장(1974)·예술원상(1978)을 수상하였다.

【작품세계】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인 김종영은 초기에는 사실적인 인체와 인물상을 다루는 작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1953년 런던의 테이트갤러리가 공모한 국제조각전에서 <무명 정치수를 위한 모뉴먼트>가 입선한 이후 그의 작업도 추상조각으로 바뀌었다. 그의 조형적인 특성은 구성적이며 공간적이고, 유기적인 생명감을 가지는 다양성을 이루었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창조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한 순수조형의 본질을 실현하였다.

한국에 철 조각이 도입되는 시기부터 철을 이용한 추상조각을 실험하여 조각계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으나, 정작 그의 작품적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석조나 목조로서 재료 그 자체가 지닌 본질이 조형상의 절대적 요인이 되면서 자신의 추상적 표현욕구를 재료의 속성과 조화시켰다.

이는 김종영의 예술철학, 즉 자연 현상에서 구조의 원리와 공간의 변화를 경험하고 조형의 방법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필연적인 귀결이며 1960년대 이후 추상조각에서 나타난 생명주의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자연의 형상 속에서 양, 선, 면을 이끌어내 유기체적인 곡선으로 연결하였고, 정교하고 복잡한 기교를 멀리하여 단순한 기법으로 표현을 응축시켜 마치 하나의 생명이 있는 대상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한 것은 예술가와 농부의 미덕이다.”(김종영)

김종영(金鐘瑛)의 작가적 편력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심플한 편이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생애는 지나치리만큼 평탄한 면을 드러내 놓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김종영의 개인적인 체질과 무관하지 않을 듯한데, 그가 살았던 시대적 굴곡에서 볼 때 확실히 이 점은 예외적인 사항으로 돋보인다.

그의 예술을 독특한 위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요인도 여기서 먼저 찾아져야 할 것이다. 김종영의 조각가로서의 위치는, 우리나라 최고의 근대조각가인 김복진(金復鎭)에 이은, 선구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먼저 파악되어질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근대조각은 1919년 김복진이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함으로써 출발된다고 할 수 있는데 , 김종영은 바로 그 후속부대로서 1936년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서 근대조각을 수학하였다.

그와 비슷한 연배로서 알려져 있는 조각가로선 윤승욱(尹承旭), 김경승(金景承), 윤효중(尹孝重) 등이 있다. 김종영은 이들에 비한다면 훨씬 뒤늦게야 알려진 편이다. 이유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개인적인 체질에서 먼저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그의 동료들이 당시 관전이었던 문전(文展)이나 선전(鮮展) 등을 통해 명성을 얻어가고 있을 때에도 그는 홀로 작품제작에만 골몰하였고 자기세계에 자적하기를 즐겼다.

이 같은, 자신에 성실한 과묵한 성향은 해방이후 작가적 편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종전이 가까워올 무렵인 1943년에 향리로 돌아온 그는 1948년 서울대 미대 교수로 나아가기까지의 한동안을 시골에 파묻혀 그야말로 주경야독을 실천하고 살았다. 옛 선비들의 소박한 삶을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난세를 맞은 고격한 선비가 취했던 태도를 엿보여주기 때문이다.

김종영의 작품은 먼저 환원적인 특성으로 인해 심플한 인상을 드러내고 있다. 환원적 특성은 구조적인 단순화의 지향에서 연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체질론에서 본 그의 생애의 평탄함과도 결코 무관치 않을 듯하다. 환원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항상 본질론적인 것에의 접근을 환기시키며, 모든 외화적인 것을 배제한 에센스를 향한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환원적이라고 했을 때 거기서 오는 단순함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언제나 전체로서 볼 때는 동양인의 관조적 사유에도 크게 기인함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는 가장 근대적 형식의 예술을 추구했지만 그의 사유세계는 전통적인 인생관, 전통적인 우주관에서 결코 벗어나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수학한 것은 다름아닌 로댕 이후의 근대조각의 방법이었으며 그것을 계승한 브랑쿠시, 아르프의 문맥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동양인의 사유체계였으며, 그러한 사유체계로써 근대조각을 접근했으며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의 작품이 때때로 브랑쿠시나 아르프를 연상시킨다고 하는 지적은 단순한 외형적 인상에 불과할 뿐이다. 어떤 면으로 본다면, 전체로서 보려는 단순화의 방법론에서 기인하는 의식의 교차현상이 그러한 인상을 빚어내고 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만나는 재질에 대한 높은 인식에서 거듭 확인되어진다. 그가 다루었던 소재는 돌, 브론즈, 나무, 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이다.

이런 다양함 속에서도 주로 많이 취급했던 것은 돌과 나무라고 할 수 있다. 돌과 나무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은 우선 방법적으로 조각, 즉 밖에서 쪼아내는 방법에 지지되어 있음을 반영해주고 있다. 1950년대 한동안 다루었던 용접에 의한 철조 역시 떠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가해지는 수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가 소조의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지 않은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이미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놓고 떠낸다는 방법에 대한 기피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밖에서 각을 한다는 것은 애초에 어떤 완벽한 형태를 상정한 것이기보다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놓여 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언제나 자연스러움 속에 놓여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란 말이 거듭되지만, 이 경우에서의 자연이란 본래적인 질서의 회복 또는 전체적인 질서 속에 무리 없이 편입될 수 있는 회귀의 논리에서의 자연스러움이다. 돌이면 돌, 나무면 나무가 지니는 질료적 속성을 최대로 드러내 놓는 방법, 그것이야말로 자연스러움으로 대변되는 것이다. 다음의 언급은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 바로미터가 되기에 충분하다.

【공적】

김종영은 경남 창원 출생으로 17세 때인 1932년 《동아일보》주최 전국서예실기대회에서 1등으로 입선하였고, 1936년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였다. 1941년 같은 학교 연구과정을 거치면서 세계적 거장들의 조형법을 습득하는데 몰두하였다. 1943년 귀국하여 은둔생활을 하다가, 1948년 서울대학에 미술대학이 창설되자 1980년까지 교수로 재직하면서 초창기 한국미술의 건설과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1953년 런던의 데이트갤러리가 공모한 국제조각전에서 입선한 <무명 정치수를 위한 모뉴먼트>를 계기로 구상조각에서 벗어나 추상조각으로 전화하였다. 1953~1980년 대한민국 전람회의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을 지냈다.

그는 1930년대 김경승, 윤승욱, 윤호중 등과 더불어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근대조각을 공부하였으나 동료 작가들과는 달리 조선미술전람회나 일본 문무성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고 홀로 작품 제작에만 몰두하였다.

해방 후 그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현실에 동요치 않는 선비적 체취와 과묵하고 성실한 예술가적 기질로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작가의 개성이나 기교에 치우치지 않고 동양의 관조적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자연이나 사물의 질서에 대한 관찰과 이해를 토대로 하여 생명의 내재율을 단순하게 형상화하였다.

김종영은 추상조각을 한국에 소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적 작가이자 교육자로서, 그 조형적인 특성은 구성적이며 공간적이고, 유기적인 생명감을 가지는 다양성을 이루었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창조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한 순수조형의 본질을 실현하였다. (예술원 홈)

【김종영미술관】

김종영미술관은 한국 현대조각의 개척자 우성 김종영의 예술혼을 기리고, 조각에 전념하는 젊은 작가들을 후원하기 위해 2002년에 설립되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북한산 자락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김종영미술관은 김종영의 예술세계를 알리기 위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며 오늘의 작가 및 신진작가전 등을 통하여 조각 예술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창조라는 낱말은 나에게는 없다. 자연의 물체가 자연스럽게 있듯이 나의 조형세계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김종영갤러리 한쪽 벽에 고이 적힌 김종영 선생의 말이다. 그 아래 의자에 선생의 예술혼이 쉬었다 가는 듯하다. 평창동 산기슭에 위치한 김종영갤러리는 이처럼 조각 작품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갤러리다. 지난 2002년 현대 조각의 개척자 김종영 타계 20주년을 기념해 설립했는데, 살아생전 그의 흔적이 조각에 전념하는 후배 작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김종영은 200여 점의 조각 작품과 3000여 점의 드로잉 등을 유품으로 남겼다. 김종영갤러리는 그 가운데 170여 점을 소유, 이를 상설 전시하고 있다. 신진 작가들의 기획 전시도 김종영갤러리의 주요 역할이다. 지난 1990년부터 격년으로 김종영조각상을 정해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고 있다. 아울러 정기 및 비정기 학술 세미나와 심포지엄, 그리고 문화 특강을 통해 조각 예술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 고양하고 있다.

류재은이 설계한 김종영갤러리는 2003년 서울시건축상과 아천건축상을 동시에 수상했을 정도로 건축미가 뛰어나다. 1320제곱미터의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지형과 주변 건물에 조화롭게 자리해 평창동 갤러리 가운데 마니아층이 많은 편이다. 사진애호가들이 출사지로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화강암을 붙인 낮은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정문이다. 돌과 소나무, 물과 화강암이 이루는 조화가 마당을 중심으로 전시 공간, 사무실, 로비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마치 계곡을 따라 물이 흐르듯 이어지는 동선이다. 관람로는 위에서 아래로 아득해 보이는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가 중간의 카페를 찍고 다시 산 정상 입구로 올라온다.

2층 제1전시실에서는 아틀리에를 재현한 김종영의 조각 작품과 일대기를 보여준다. 또한 각종 사료들과 생전에 사용했던 작품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빛에 따라 새로워 보이는 조각 작품의 특징을 살려내기 위해 유리와 자연광을 적절히 활용했다. 넉넉한 공간과 높은 천장 역시 조각 작품을 위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1층으로 내려가면 제2~4전시실과 강연이나 세미나를 할 수 있는 자료실을 만난다. 복도를 따라서는 조각정원과 카페로 갈 수도 있다. 오밀조밀 잘 꾸민 아담한 조각정원은 초록의 북악산 아래 맑은 공기가 가득하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미술관이 아닌 어느 산속에 들어앉은 듯한 느낌도 준다. 갤러리 또한 한편의 조각처럼 자리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김종영갤러리가 간직한 아주 특별한 매력이다.

【창원 소답동 김종영 생가(昌原 召畓洞 金鍾瑛 生家)】

등록문화재 제200호. 소재지 경남 창원시 의창구 의안로 44번길 33(소답동). 이 가옥은 우리나라 현대 조각의 개척자이자 미술교육의 선구자인 우성 김종영의 생가로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납공간과 높은 다락, 미서기 유리문과 출입구 상부의 채광을 겸한 환기창 등이 특징이다. 가곡 ‘고향의 봄’에서 ‘울긋불긋 꽃 대궐’이라는 노랫말은 바로 이 집을 묘사한 것이다.

【학력】

1936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1941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졸업

【경력】

1948 서울대학교 미대 조교수·부교수(~1962)

1949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1977)

1953 국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1955 서울시 문화위원

1959 문화재보존위원

1960 미술협회 대표위원

1961 한국미술협회 이사

1962 서울대학교 미대 조소과 교수

1966 서울대학교 대학원 위원

1968 한국포장센터 이사장

1968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

1976 예술원 회원

1981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2002 김종영 미술관 개관

【상훈】

1932 전국학생서예 실기대회 1등상

1953 영국 국제조각전 입상 (무명 정치수를 위한 모뉴먼트)

1960 서울시 문화상

1960 녹주소성훈장

1963 국민재건운동본부 공로상

1972 서울대학교 공적기념상

1974 국민훈장 동백장

1978 대한민국예술원상

【예술활동】

1945 해방기념전 (덕수궁미술관)

1949 제1회 국전 <여인좌상> 출품 (~17회)

1953 무명정치수를 위한 모뉴망 (런던 테이트 갤러리)

1956 한국미협전 <추억> 출품

1957 벨기에 만국박람 전시회 <동정녀> 출품

1959 월전 장우성과 2인전 (중앙공보관)

1963 3ㆍ1운동기념탑 제작(서울 파고다공원)

1965 상파울로 비엔날레, 마닐라 동남아국제전

1968 유네스코 초청으로 파리ㆍ로마의 미술 시찰, 연구

1972 한국근대미술 60년展 (국립현대미술관)

1974 한국현대조각대展 (국립현대미술관)

1975 김종영 작품 招待展 (신세계미술관)

1980 우성 김종영 작품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4 한국인체조각展 (호암미술관)

1989 강남 그로리치 화랑 개관 기념展 [작고작가 4인전]-김종영, 김환기, 박생광, 송영수 (그로리치 화랑)

1989 김종영 展 (호암갤러리)

1989 우성 김종영조각상(金鍾瑛彫刻賞) 제정

1992 우선 김종영 10週期(주기) 추모展 (예술의전당 미술관)

1993 드로잉展-김종영, 송영주, 최종태, 최의순, 최만린, 심문섭 (갤러리 나인)

1993 현대미술 100년의 열정 출판기념展 (갤러리 현대)

1994 김종영전 <긴봄날> (원화랑)

1995 창원미술제-김종영선생님 기념비 제막식 특별전, 한국, 100개의 자화상 자료집(국립청주박물관)

1996 한국 모더니즘의 전개 1970~90년대의 초극(超克)-2부[모더니즘ㆍ대중ㆍ표현](금호갤러리)

1997 교과서 미술전 (예술의전당)

1997 김종영 조각展 (부산공간화랑)

1998 김종영 16주기 기념전 – 그림과 조각展 (가나아트센터)

1999 새천년 특별기획 –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호암미술관)

1999 한국근대미술 : 조소 – 근대를 보는 눈 展 (덕수궁미술관)

1999 한국조각 50년展 : 1950-1999 (갤러리 현대)

2000 한국 현대미술 미와 질서 展 (노화랑)

2000 한국 현대미술의 시원 展 (국립현대미술관)

2001 김복진 탄신 100주년 기념展-한국현대 미술의 전개:1970-90(갤러리 현대)

2002 격조와 해학 : 근대의 한국미술展 (호암갤러리)

2002 김종영미술관 개관

【작품】<풍경>(1935) <여인좌상>(1949) <무명 정치수를 위한 모뉴먼트>(1953) <나무>(1955) <윌리엄텔>(1956) <전몰학생위령탑>(포항.1958) (1958) <전설>(1958) <모자(母子)>(1958) <북한산>(1960) <3ㆍ1운동 기념탑>(서울 파고다공원.1963) <난초>(1964) (1965) <가족>(1965) <작품 66-1>(1966) <어머니>(1967) (1968) <삼선동 풍경>(1970년대) <산동네 풍경>(1970) <나무가 있는 풍경>(1971) (1972) (1973) <세한도(歲寒圖)>(1973) <자화상>(1976) (1976) (1976) <나무>(1978) <돌>(1978) <작품 78-20>(1978) (1979) <작품 81-1>(1981) (1981)

【평론】<현대의 조각>(미사일 14.1962) <조각예술 본질에의 자각: 한국현대미술의 당면과제, 조각>(서울대 미대학보 1.1966.5) <추상조각 제작연구>(조형 1.1976.12)

【저서】<중학미술(1)>(공저.영지문화사.1967) <중학미술(2)>(영지문화사.1967) <중학미술(3)>(공저.영지문화사.1967) <인문계 미술>(공저.영지문화사.1979)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열화당.1983)

(조각가 김종영)

(창원 생가)

(평창동 김종영미술관)

(평창동 김종영미술관 내부)

<모자(母子)>(1958)

<전설>(1958)

<작품 66-1>(1966)

(1968)

<나무가 있는 풍경>(1971)

<돌>(1978)

(1979)

<작품 81-1>(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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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金鍾瑛, 1915년 ~ 1982년)은 대한민국의 조각가이다.

생애 및 작품 [ 편집 ]

경상남도 창원 소답 출신으로 1941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하였다. 1953년의 제2회 국전에서 시작하여 오랫동안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1949년 이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재직하여 동 교수와 학장을 역임했다. 1956년에 발족된 한국미술협회의 창립회원이며 서울시 문화위원이기도 하다. 1953년 영국에서 열린 국제조각대회에서 입상한 것을 필두로 1954년 가톨릭성미전(聖美展), 같은 해에 벨기에 만국박람회에 출품, 1959년 조각개인전 및 3·1독립선언기념상을 제작하는 등 오랜 작품생활을 하였다.[1]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 등록문화재 제200호)과 그 일대의 고가 지역은 그의 증조부인 김영규(1857-1931, 구한말 사헌부 감찰, 함안군수, 진남군수 종이품, 참판 장례원 전사 역임)가 세운 것으로 동요 고향의 봄의 무대로 알려져있다. 작품으로 〈여인좌상〉, 〈새〉, 〈이브〉, 〈황혼〉, 〈소립상(小立像)〉, 〈앉아 있는 여인〉 등이 있다.[1]

각주 [ 편집 ]

가 나 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현대미술/현대의 미술가/김종영, 《글로벌 세계 대백과》

참고 자료 [ 편집 ]

김종영, 어떻게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김종영, 어떻게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은사·아버지 무한신뢰로 조각가 길 걸어

중학교 2학년인 김종영이 서예로 동아일보 주최‘전조선학생작품전시회’에서 일등을 하였으며, 워낙 그 실력이 출중하여 심사위원들이 믿기지 않아 결과발표 후 그를 불러 그들 앞에서 다시 써보게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서예를 통해 예술 세계에 입문하게 된 그가 어떻게 서양미술 중에서도 특히 조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 조모상, 20x22x42㎝, 석고에 채색, 1936. 유족들은 그가 어려서부터 미술에 대한 남다른 흥미와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뒷산에서 진흙을 뭉쳐 무엇인가를 만드는 데에 열중했다고 한다. 휘문고보 입학 후에는 방학에 고향집에 내려오면 늘 뒷산에 올라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휘문고보 동기동창이며 일본유학 생활도 같이 하였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같이 근무했으며, 김종영 사후 우성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했던 미학자(美學者) 고 박갑성의 회고에 의하면 김종영이 조각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직접적 이유는 당시 휘문고보의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우석(雨石) 장발(1901-2001)의 권유에 의한 것이다.

장발은 4·19혁명 후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의 동생으로, 1919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던 중 1922년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대학에서 미술실기와 이론을 공부하고, 1926년 귀국하여 오랜 시간 모교인 휘문고보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는 해방 후 서울시 학무국장을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설립을 주도하였고, 초대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1961년까지 재직하였으니 그가 해방 후 한국미술교육의 커다란 초석을 세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휘문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장발은 장래 한국미술을 이끌어 갈 인재를 발굴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김종영은 당시 이쾌대, 윤승욱 등과 더불어 그의 지도를 받으며 미술가로서의 역량을 갖춰 나갔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 중 장차 한국미술의 조각 분야를 담당할 인재를 찾고 있었으며, 자신의 제자 중에서 우수한 학생을 선택하였는데 바로 김종영과 윤승욱이었다. 이런 연유로 장발은 김종영에게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로 진학할 것을 권유하여 그는 조각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 동소문고개, 64×49㎝, 유화, 1933. 장발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으로 재직하던 때인 1948년에 김종영을 부름으로써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가 되었다.

그러므로 김종영이 휘문고보로 진학하여 은사 장발을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인연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김종영이 조각을 하게 되는데 은사 장발과 더불어 그의 아버지 성재 김기호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영남의 전통 사대부집안인 김해 김씨 23대 장손인 김종영이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조각을 전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종영의 아버지는 당시 아들이 조각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관리, 법관들은 다들 죄를 짓는데 내 자식은 짐승으로 치면 제비인지라 남의 곡식 축내지 않고 깨끗이 살 것이다.”식민지 상황에서 아들이 선택한 길에 대해 아버지의 무한한 신뢰를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김종영이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된 데는 훌륭한 은사를 만난 것과 더불어 아들을 무한히 신뢰해 준 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우성(又誠). 경상남도 창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의 휘문중학교를 거쳐 동경미술학교에 유학, 조각을 전공하여 1941년에 졸업하고 이어서 연구과도 수료하였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에 미술학부가 창설될 때 조소과 교수가 되어 1980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근속하였다.

1949년에 정부 주관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시작되자 추천작가로 「여인좌상」을 출품한 이래, 초대작가·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주로 그 전람회를 통하여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의 작품들은 여인상·모자상 등을 소재삼은 구상(具象)이면서 표현적인 형상성에 치중된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추상적인 순수조형작업으로 기울다가 그 경향으로 완전히 전신하여, 나무·금속·대리석을 재료로 한 단순하고 명쾌한 형태의 작품조각으로 독자적 내면을 실현시켰다. 그 조형적 특질은 구성적이며 공간적이고, 혹은 유기적인 생명감을 가지는 다양성을 이루었다.

1953년「무명 정치수인을 위한 모뉴멘트」를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조각전에 출품하여 수상하였고, 상파울루비엔날레(1965) 등 다른 국제전에도 참가하였다. 1963년에는 「3·1운동 기념상」(서울 파고다공원)을 제작하였으며, 197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밖에 서울특별시문화위원(1955), 정부문화재보존위원(1959)과 한국미술협회 대표위원(1960), 한국디자인센터 이사장(1968) 등을 역임하였고, 서울시문화상(1960)·국민훈장동백장(1974)·예술원상(1978)을 수상하였다. 주요한 작품으로는 「가족」(1965)·「전설」(195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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