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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고린도후서 5장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 …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
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5/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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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이 되는 길.. (고린도후서 5장 17절 ~ 21절) > 은혜로운 말씀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지나갔기 때문에 새 것이 될 …
Source: fgyega.com
Date Published: 9/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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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17,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소고
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구원받은 존재,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었습니다.
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12/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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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고린도후서 5:17) – 전주대신문
새로움(고린도후서 5:17). [883호 13면, 발행일 : 2018년 10월 17일(수)] 이 곳에 오면서 형형색색 단풍이 물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색은 더욱…
Source: news.jj.ac.kr
Date Published: 3/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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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 묵상 [김연희 목사] – 복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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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2/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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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고후5:17)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ion)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
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7/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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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 (고후 5:17) – 기멀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4/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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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고후 5 17
- Author: 말씀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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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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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이 되는 길.. (고린도후서 5장 17절 ~ 21절) > 은혜로운 말씀
서 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짐승들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서 유일하게 변하는 피조물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 론
1.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변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바깥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3절은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변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구원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된 새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 밖에 살게 된다면 변함이 없는 짐승들과 같습니다. 쾌락과 정욕을 쫓아 살게 되며 죄를 짓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빛 되신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나를 새롭게 비치게 되고 새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삶 보다 더 빛이 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과거의 삶을 정리해야 새 사람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지나갔기 때문에 새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전 것을 지나지 못한다면, 새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정리해야 할 부분과 변화 되어야 할 부분이 정리 되지 않는다면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과감하게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나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함을 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화목하며 살아야 새 사람이 됩니다.
미련한 사람의 대표적인 현상은 싸움입니다.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잠언 18장 6절은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싸움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화목을 이루셨듯이,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일은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화목을 이루는 길은 십자가 희생과 같은 희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고후 5:19).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고후 5:20).
결 론
새 사람이 되는 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 사람이 됩니다. 둘째, 과거의 삶을 정리해야 새 사람이 됩니다. 셋째, 화목하며 살아야 새 사람이 됩니다. 이 세 가지를 기억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새 사람이 되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17,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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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죄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는 영원한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구원받은 존재,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멸망의 모습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하였다고 바울은 말하지만, 그 뜻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이 듭니다. 과연 바울이 고린도후서 5:17의 ‘새로운 피조물’을 언급한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자연도 신비하지만 새로운 피조물의 신비함에 비할 수는 없다
목차
1. ‘새로운 피조물’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피조물’이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인간을 나타내는 좁은 의미의 피조물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닐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동물들을 보살폈던 피조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으며 부끄러움과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땅의 모든 것을 돌보는 특별한 피조물로서 인간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 고후 5:17의 앞뒤 문맥
고린도후서 5장의 1절부터 10절까지에서 바울은 ‘이 땅에 있는 장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간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좁혀졌음을 설명합니다.
죄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살아가던 과거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다시 한 번 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절부터 21절까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되셨고, 새로운 피조물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거주할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까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2)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과거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새롭다는 말 자체가 이전의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형상(쩰렘, צלם)으로 혹은 그림자로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인간이었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전히 다른 존재(아나카이노시스, ἀνακαίνωσις)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곳에 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가까워진 천국(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거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피조물이 구원 받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2. 새로운 피조물과 예수 그리스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첫 번째 아담을 창조하셨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적인 것이 아닌 ‘성령’과 ‘능력’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엔 크리스토, ἐν Χριστῷ)에 있을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녹아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강물이 바닷물로 흘러 들어가면, 바닷물의 속성인 짠맛을 가지게 되고 강물의 모습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예수 안에 있을 때, 더 이상 인간의 속성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녹아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변화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2) 또한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안으로 녹아 들어갔기에,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은 단순히 육체 속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은, 죄나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놓임을 받아 성령 하나님께 사로잡힌 생명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곧 ‘성령 안’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로마서 9:1-2, 개역개정 성경)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 εν χριστω ) 참말을 하며, ‘성령 안’에서 양심이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은 곧 ‘성령 안'(엔 프뉴마티, εν πνευματι )이며,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곧 성령과의 연합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은 곧 성령께서 증인이 되시는 사역임을 바울은 위의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이끄시는 복된 삶, 새로운 피조물의 삶
3. 새로운 피조물의 삶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는 곧 성령과의 연합의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녹아 들어가서 성령과 연합하게 된 성도의 삶은 어떤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1) 날마다 죽는 삶
사도 바울은 고전 15:3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개역개정 성경)
‘날마다 죽는다’는 그의 말은 세상과 자기 자랑에서 날마다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나의 모습은 모두 배설물처럼 여기고 죽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2) 영성의 삶
날마다 죽음으로서 얻는 결과가 무엇일까요? 나의 과거 모습들이 죽음으로써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녹아 들어가게 되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더 이상 나의 욕심이나 교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전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영성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입니다.
4. 나가면서
사도 바울은, 고후 5:17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과거의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하늘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영원한 하늘의 집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 화해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는 과거의 욕망과 죄의 본성에서 날마다 죽으며 매일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성령 안에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성화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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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고린도후서 5:17)
[883호 13면, 발행일 : 2018년 10월 17일(수)]이 곳에 오면서 형형색색 단풍이 물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색은 더욱 진해지겠지요. 정말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바라보니 항상 새롭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단풍 뿐 만이 아니고 말입니다. 하루를 산다는 것은, 새로움을 향한 몸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말씀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말하는데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 시인하면 새로운 피조물 즉,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믿어 확신하십니까? 우리는 주님안에 거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롭다는 것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전의 됨됨이, 예전이 인품들 말입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오늘과 다른 내일을 보여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지 않겠냐는 우리 개인을 향한,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향한, 그리고 우리 전주대학교를 향한 부르심이 바로 오늘 말씀에서 주어진 메시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산지를 내게 달라 부르짖었던 갈렙의 간구와 같이, 이에 도전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이 전에 좋았으니 이전 것을 지켜 동일하게 나아갑시다’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자체를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세 가지 도구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의 성품입니다. 자꾸만 옛날의 것들을 주장하고 지지 않으려 하는 그런 모습들, 인품들, 성품들, 고집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품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바로 창의성, 도전, 윤리적 삶의 내용들, 용서하는 것, 사랑하는 것. 그리고 성실함. 이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녀야 할 성실함으로 이전에 우리가 품어왔던 모든 생각들, 인품들의 빈 자리를 채워 나가기 원합니다. 특히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모습으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우리 전주대학교가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은 모습을 갖추기 위하여 학생의 본분으로서 공부에 열중하고, 교직원의 본분으로서 하나님의 학교를 이루어가기 위해 업무에, 강의에 더욱 충실하며 나아가시기를 원합니다.
도전하고, 변화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의 도구는 재능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택하여 쓰시는데, 그 사람들을 쓰시도록 각 분야에 맞는 재능을 주신 것 같습니다. 이 재능이라는 것은 어떠한 분야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에 진정한 재미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아름다운 세상을 꿈 꾸었고, 어린 마음에 나 자신이 좋아하는 이런저런 일을 가지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자리에 서게 된 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제가 자각하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목회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세상을 계속 꿈꾸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세상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관심있는 것으로 이루는, 즉 내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고 주님이 이루신 아름다운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 그것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고, 저는 그에 재미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 또한 주님 안에서 각자의 재능을 마음껏 표현하며, 그를 통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며 나아가시기 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렇습니다. 바로 행동하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에 따라 운명론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아가는 목적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로써 그에 갇히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목적이 있고, 목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행동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에서 말하듯이 말이죠. 새로운 피조물은 사색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언어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사색과 언어를 행동으로 표현하여, 거기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이미 새롭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써 성실한 성품을 품고,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재능을 붙잡고 행동함으로써 나아가는 교직원분들, 학생들, 모든 전주대학교 구성원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인용가능 (단, 인용시 출처 표기 바람) *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 묵상 [김연희 목사]
새로운 한 해를 기대합니까?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에오’입니다. 이 말은 “나중에”를 의미하는 ‘메타’와 “지각하다, 분별하다, 혹은 의식하다”를 의미하는 ‘노에오’로 구성된 말입니다. 따라서 ‘메타노에오’는 나중에 잘못을 알아 고치는 행동 양식 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이미 깊이 깨달아 알아버린 마음의 상태에 기인하는 것에 따른 생각이나 태도 혹은 방향, 목적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새해가 되며는 예전 보다는 더 나은 삶과 미래의 희망을 위하여 새롭게 하고자 하는 많은 계획들과 구상들을 세웁니다. 주변 분위기를 바꾸어 보는 것도, 의상을 바꾸는 것도, 이사를 하는 것도, 계획을 새롭게 세우는 것도….. 특히 올해는 이 땅 모든 사람들이 함께 꾸는 소원이 있습니다. 온 세상을 떨게하는 코로나가 종식되고 평범한 일상을 찾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원합니다.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 안정과 평안을 바라는 새로운 미래를 기대해 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고…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회개하라~”고…그래야 만이 하늘로 부터 내리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덧입어 이 땅의 공포와 걱정과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고, 환난 많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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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은 내 자신의 주변 환경이나 이웃이 아닙니다. 내 생각, 내 태도, 내 삶의 목적이 바꾸어져야 합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생각과 태도와 삶의 가치관과 목적이 바뀌어지길 원합니다. 힘으로 능으로 안되기에 겸손히 주께 나아와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구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시며,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것을 채우실 것을 믿음으로 소망하며, 우리 모두가 은혜의 주님을 경험하는 올 한 해가 되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 (고후 5:17)
설교제목 :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
성경말씀 : 고후 5:17
우리는 한 평생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딴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은 정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그 안에서 필수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할 뿐 아니라, 사회를 이루어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교회 역시 일반사회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동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려면 좋은 인간관계가 필수적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다윗은 요나단을 친구로 만났기에 사울 왕의 손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된 데는 신실한 친구 빌립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로 유명한 관중과 포숙의 우정에 관해서 아실 것입니다. 관중은 포숙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기도 하고 나중에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서 큰 업적을 세웠습니다. 관중은 말하기를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한 평생 갈릴리 어부로 살다가 갔을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동족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세리 노릇을 하면서 살다가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자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4절에 보면, 새 예루살렘에 관해서 말씀하기를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고 하셨습니다. 주의 제자들의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결과가 이와 같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보세요. 그는 일곱 귀신 들려서 인격이 파탄 나고 가족과 이웃에게 버림 받은 비참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로잡은 일곱 귀신을 쫓아내시자 그는 생명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여성은 드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거룩할 성(聖) 자를 붙여서 성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말씀해 드림으로 피차에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로, 죄인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죄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범죄로 인해 아담 속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었으므로 그의 자손은 누구나 타락한 본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사람은 환경이 나빠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이는 환경의 영향을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 사회의 불합리한 환경 역시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죄가 가져다 준 불행은 한둘이 아니지만 핵심적인 것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로,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이는 죄의 본질을 이해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을 말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고 하셨지만, 간교한 뱀이 다가와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고 하였을 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또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헛된 욕망을 품었습니다.
지음 받은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생각은 이만 저만한 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귀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너희도 신이 될 수 있다”는 헛된 꿈을 넣어주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고, 평생 이마에 땀을 흘려 수고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고 수고하고 자식을 낳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미움과 반목과 살인과 전쟁으로 얼룩진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장 18절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57장 21절에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불화하여 그 진노 아래 있는 인간들의 마음에 평안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둘째로, 죄로 인해 인간은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대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인간뿐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도 죽음의 세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22절에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전국에 산재해 있는 묘지의 수는 약 2천만 기가 되며 이는 전국토의 약 1%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는 서울과 인천을 합친 면적과 같고, 또 매년 20만기씩 새로운 무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이 같은 현실은 사망의 세력이 그만큼 막강함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람치고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인다는 말은 가장 무서운 위협입니다.
성경은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들을 일컬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히 2:15)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비참한 것은 육신의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악인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죄로 인해 인간은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꾀어 범죄케 한 뱀은 곧 마귀를 상징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0장 1절로 2절에 보면 “1)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마귀의 말을 들은 것은 곧 마귀의 지배 아래 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일컬어 “이 세상 임금”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2:31).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 되어 타락한 인생들을 종으로 부립니다. 마귀에게는 자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귀는 인간들의 생명을 노략질하고 파멸시키기 위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역사합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 믿기를 거부할까요?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전력을 다해서 행하는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영과 육을 끝까지 파멸시키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죄의 결과는 이처럼 끔찍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해결하려면 먼저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타락한 인간이 무슨 수로 자기의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마귀의 종된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얻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가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통해서 또는 수양을 통해서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보혈로써 우리를 위한 속죄를 완성하셨기에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하신 로마서 8장 1절로 2절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답게 언제나 승리를 구가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일어난
두 번째 변화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의 영적 실상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1절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 이는 죄인은 영적으로 볼 때 죽은 상태에 처해 있다는 뜻입니다. 육신은 살아서 활동하고 있지만, 영은 죽은 상태입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의 역할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교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두뇌가 명석해서 석박사가 된 사람이라도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의 관심은 단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이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남은 곧 영적 신생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는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고, 요한일서 5장 1절에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출생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는지 무슨 느낌을 통해서 알 수는 없습니다. 신생아가 태어나는 것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고 오직 부모의 뜻에 의한 것이듯이, 영적 출생인 거듭남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치상으로는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먼저이고 믿는 것이 그 다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 것이 먼저냐,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먼저냐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믿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고,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차이점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데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어느 편이 옳은지를 놓고 지나치게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바로는 성경 말씀과 같이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믿는 것이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명목상으로만 법적으로만 자기의 자녀로 삼으신 것이 아니고 실제로 자기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4절로 16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종의 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무서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바’란 말은 우리말의 ‘아빠’라는 호칭과 같은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증거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께서 성도들의 심령에 와 계신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자녀들만이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니 하나님의 후사라고 했습니다. 후사란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동생들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이 보다 더 확실하게 표현할 수는 달리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천사들보다 더 고귀한 신분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6장 3절에는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땅에 천년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 때 성도들은 주님과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계시록 22장 5절에 보니 “…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은 말할 수 없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 시련을 당하고 핍박을 받더라도 낙심하거나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부심이 있고 믿는 배경이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시험이 다가올지라도 담대히 외칠 수 있습니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말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위대한 특권이 있는데 그것은 언제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란 곧 성전의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단 한 차례 그릇에 제물의 피를 담아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지성소는 엄위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언제라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늘 자각해서 언제 어디서나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일어난
세 번째 변화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믿기 전과는 귀하게 여기는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도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팔일만에 할례 받은 것을 내세웠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내세웠습니다. 이만한 조건이면 유대 사회 어딜 가더라도 대접 받고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가치관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자랑하던 것들이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니까 과거의 것들은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 즐거움을 위해서 살았으나 이제는 예수 믿는 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어서 세상 즐거움은 싱거워서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자족하면서 삽니다. 이전에는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는데 이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이전에는 세상일에 바빴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데 열심 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에 대하여 성경적인 기준을 갖고 삽니다.
그 다음, 사생관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목숨에 연연해서 몸을 아끼고 불의와 타협하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이와 같은 사생관을 갖고 삽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영생과 부활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위해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데 힘씁니다. 그것은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이해타산에 의해서 행동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에 마음 쓸 것 없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성도들은 천국의 시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신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일꾼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추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주님 앞에 설 때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써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땅바닥에서 하늘까지 상승했습니다. 비천한 땅에서 육의 것을 바라고 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늘의 신령한 것을 누리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인이 의인 되었고, 마귀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육신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님 각자에게 주어진 영적인 변화와 새로운 신분을 늘 자각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옛 방식은 과감히 버리고, 내가 인생에 행하는 모든 일을 네가 포용하기를, 그리고 오직 내 안에서만 안전함으르 누리기를 원한다.
삶 주변에 경계를 쳐두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찾으면서 일상을 우상으로 만들기는 쉽단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매일매일의 24시간은 일련의 독특한 환경으로 이루어지지. 어제의 틀에 오늘을 끼워 맞추려고 애쓰지 마라. 대신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함으로 귀한 하루인 오늘,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모든 일들을 발견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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