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좌병사 이각 | 북한영화 임진왜란 부산 동래성전투 장면 3000 Vs 30000 최근 답변 15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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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동래성전투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 3000 vs 30000

동래성 전투(東萊城戰鬪)는 1592년 5월 25일(음력 4월 15일)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일본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동래성 전투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끈 왜군이 1592년(선조 25년) 4월 15일 동래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1760년 재야의 화가 변박(卞璞)이 그린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보물 392호)’에는 동래성을 겹겹이 에워싼 왜군들의 모습과 의연하게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는 송상현(宋象賢·1551∼1592) 부사, 그리고 성 밖으로 말을 타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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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조선) – 나무위키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함평(咸平)[1], 자는 숙헌(叔獻).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약칭은 경상좌병사)로 울산 병영에서 부대를 이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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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5/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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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 (조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각 李珏. 생몰, 생년 미상 ~ 1592년 음력 5월 14일. 사망지, 조선 임진강. 본관, 함평 이씨. 복무, 조선 육군. 근무, 경상좌도병영성. 최종계급, 경상좌도 병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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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0/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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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병사 이각, 요즘 지휘관들에게서 그를 본다 – 오마이뉴스

그는 경상좌병사 이각(李珏 ? ~ 1592)이었다. 명색이 도원수였지만 김명원은 병서를 많이 읽었다 뿐이지 실제 전투에는 문외한에 가까운 문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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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4/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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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동래성 버린 이각 순절도에 나올 줄 몰랐겠죠 | 중앙일보

그림 위쪽 좌측에 성 밖으로 말을 타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진 부산박물관]. 1592년 임진왜란 때 부산진을 함락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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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7/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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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임진왜란을 징비한다<3> – 천지일보

그런데 좌병영에서 달려온 경상좌병사 이각은 부산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랐다. 그는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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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cj.com

Date Published: 10/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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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에 들어왔다가 나간 이각의 행동에 대하여 간단한 소고

대표적으로 욕을 먹는 사람들 세사람을 꼽자면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경상좌병사 이각 입니다(경상우병사 조대곤도 있기는 한데 저 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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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2/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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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장(朴毅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해 7월에 이각이 처형되고 박진(朴晉)이 병마절도사로 파견되자, … 1599년 성주목사 겸 방어사, 1600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601년 인동부사(仁同府使)를 두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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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1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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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영화 임진왜란 부산 동래성전투 장면  3000 vs 30000
북한영화 임진왜란 부산 동래성전투 장면 3000 vs 30000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경상좌병사 이각

  • Author: 방콕 추억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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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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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병사 이각, 요즘 지휘관들에게서 그를 본다

“어찌하여 경상좌병사가 임지를 버리고 이곳에 와 있는가!”

“왜적이 강대하여 병사들은 흩어지고 이렇게 홀로 남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병사를 다시 모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고심 끝에 어가를 호위하기 위해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푸하하! 어가를 호위한다? 지켜야 할 곳조차 버리고 온 자네가 어가를 호위하러 여기까지 왔다? 하하하!”

“네가 도망함으로 인해 경상도가 순식간에 함몰되었는데 어찌 할 것이냐? 당장 죽어 마땅한 자로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대감의 종이라도 되겠소이다.”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는 말은 못할지언정 구차히 목숨을 바라는 것이냐! 여봐라! 이자의 목을 당장 베어라!”

“공이 먼저 병사들을 끌고 성 밖으로 나가 복병(伏兵)으로 적의 예기(銳氣 : 날카로운 기운)를 꺾는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오.”

“왜군의 병력이 엄청나게 많아 맞아 싸울 수가 없었소이다. 성을 지키면서 어서 한양으로 이 소식을 전해야 하오.”

“고립된 성 안에서 이렇게 있다간 반드시 패할 것이오. 난 휘하 병력을 이끌고 성 밖에서 응원하겠소. 부사께서는 성을 지키시오. 그렇게 안과 밖에서 왜군을 치면 승세를 잡을 수 있을 것이오.”

“병력이 부족하오. 성 안에서 같이 지켜야 하오.”

“그렇다면 내 휘하 병사들을 좀 남겨 두겠소.”

“너는 지금부터 쉬지 말고 말을 달려 병영으로 돌아가 내 첩과 면포 천 필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아라.”

“그렇게 하면 지금 병영에 집결해 있을 병사들이 크게 동요할 것입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명을 들을 것이냐 단칼에 죽을 것이냐!”

“명을 거두어 주소서!”

“성을 버리고 진을 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게다가 병사를 나누자는 건 무슨 말입니까? 본래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은 어디 있습니까?”

“내가 거느린 정병들은 성 밖에서 응원할 요령으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소. 그러니 그대가 거느린 석전군(石戰軍 : 투석전을 전문으로 하는 병사들)을 떼어 주시오. 그대는 다른 판관, 현령들과 성을 굳게 지키면 될 일이오.”

“너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느냐?”

“면포를 옮겨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왜 그러시오?”

“면포는 왜 옮기시는 게요?”

“너희들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저곳에 꽉 차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네 이놈! 네 놈의 목을 베어 군문에 걸 것이니라!”

우리는 가끔 만약을 생각해 본다.세월호 참사 때 만약 선장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가습기 살균제 사건 때 만약 제조사들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각종 사고 때마다 언급되는 무책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때로는 개인에게, 때로는 집단에게 겨누어진다.무책임이 문제시 되는 일은 어떤 위치에 있는 자가 책임을 졌다면 최소한 피해를 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돌발적인 사고 뿐만 아니라 예견된 상황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초기 대응미숙에 대해 역사 속 여러 사람의 이름을 소환하며 갑론을박을 펼치곤 한다.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전쟁에 속하며 수많은 판단착오와 대응미숙이 나오는 게 바로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 기록을 본 사람들은 ‘만약 초기에 어느 정도 막았다면……’이란 가정을 해보았을 것이다.역사 속으로 들어가 조선시대, 7년 동안 전쟁을 겪었던 임진왜란을 살펴보면 그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은 무책임하게 상황을 방관하거나 회피했고 어떤 이는 책임을 넘어서 사명감을 가지고 상황을 대했음을 알 수 있다.수많은 이들 가운데 지금 거론할 인물은 경상좌병사였던 이각이다. 그는 임진왜란 초기 가장 큰 무책임함을 보이고도 의외로 그다지 이름이 자주 거론되지 않는 이다.병사들을 이끌고 임진강에서 진을 치고 있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1534~1602)은 자신 앞으로 기어 오다시피 한 자를 보고서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커다란 체격과 거친 수염은 자못 무인의 풍모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렇게나 걸친 옷가지에 상투는 죄다 흐트러져 있으며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경상좌병사 이각(李珏 ? ~ 1592)이었다.명색이 도원수였지만 김명원은 병서를 많이 읽었다 뿐이지 실제 전투에는 문외한에 가까운 문관이었다. 게다가 한강전투에서 자신의 실책을 숨기기 위해 왜군을 물리친 부원수 신각(申恪 ? ~ 1592)을 모함해 죽게 만든 용렬한 자이기도 했다.(단, 김명원은 도원수 자리에서 내려온 뒤에는 전시행정관으로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조정의 잘못된 인사가 가져온 피해자일지도 모른다.)한강 사수전에서 패한 김명원은 신각이 전선을 멋대로 이탈해 패했다고 조정에 보고했으나 그 시각 신각은 해유령에서 왜군 70명을 섬멸하는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김명원의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승전한 신각을 처형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벌인다.이러한 일로 조정의 신임을 잃은 김명원은 임진강 전선에서는 명목상 도원수였을 뿐 그 지휘를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임금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나가는 재상에게 부여된 정2품 임시 벼슬) 한응인(1554 ~ 1614, 한응인은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막 귀국한 중이었다)에게 거의 맡기다시피 하고 있었다.그런 김명원이었지만 이각이 눈앞에 나타난 그 순간, 김명원은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임진강은 경상좌병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이각은 김명원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한 채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답했다.김명원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이각은 식은 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김명원은 손가락으로 이각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이각은 무릎을 꿇더니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애원했다.김명원은 혀를 차며 이각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외쳤다.아무리 군권의 최고 책임자인 도원수라 할지라도 하급 관리도 아닌 무관직 최고 품계인 종2품 병마절도사를 그 자리에서 참수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보통은 조정으로 압송 후 처형하거나 보고를 받은 왕이 무직승지인 선전관을 보내어 처형하는 것이 상례였다.그러나 후에 아무도 도원수 김명원이 이각을 참수한 것을 탓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 방어체계가 급히 붕괴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각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이각이 맡은 직책인 경상좌병사는 경상좌수사와 더불어 왜군이 쳐들어올 경우 최전선이었다. 나름대로 전쟁징후를 감지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한 조선 조정이었지만 예상 외로 엄청난 병력이 몰려오자 일선에 있는 모든 지휘관들과 지방관들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큰 전쟁이 난다고 해도 수천 명 병력이 해안가 정도를 건드릴 것이라 예상했지 한 번에 만 명 이상 대부대가 상륙해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도 모자라 이러한 대부대가 연이어 밀어닥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몰려온 왜군의 수많은 배를 처음 접한 경상좌수사 박홍(1534~1593)은 배를 모아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박홍이 선택한 방식은 바다에서 싸우는 걸 포기한 채 동래성을 방비하는 것이었다.이후 박홍은 수군을 이끌고 동래성 가까이 왔다가 전투가 불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보고 후퇴하고 만다. 병력수의 차이로 유리할 것이 없는 전투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성을 증축했고 해자도 갖춘 동래성이 불과 하루 만에 무너진 것은 이각의 행보 때문이었다.당시 상황을 보면 왜군의 침입을 받을시 왜군과 접전하는 곳은 그 자리를 사수하고(부산진과 다대포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경상좌도의 병력은 동래로 집결하는 체제가 갖춰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렇기에 부산진이 함락되는 동안 울산 병영에 주둔한 경상좌병사 이각이 이끄는 병력이 동래성으로 진군했다. 경상좌수사가 동래근처 해안가로 이동했으며 양산군수 조영규(?∼1592)와 울산 군수 이언성(?~?) 또한 동래성으로 합류한다.편제상 경상좌병사가 울산 병영에서 직접 지휘하는 병력은 2천이 조금 되지 않았다. 부산진의 경우 경상좌수사가 지휘하나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600명 남짓한 병력을 첨사가 지휘하고 있었다.하지만 이 병력은 왜군과 최초로 맞닥트렸기에 합류할 수 없었다. 이는 다대포 첨사의 병력 800명도 마찬가지였다. 그 밖에 동래, 울산, 양산의 병력은 각각 천여 명 남짓이었다.그러므로 당시 대응체계상 동래성에 들어서야 할 병력은 총 5천 남짓이었다. 그리고 이 병력을 지휘할 사람은 바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인 이각이었다.울산 군수 이언함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동래성에 들어선 이각은 그 동안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동래성이 방비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이각은 양산군수 조영규를 불렀다.조영규는 휘하 병력 수백을 이끌고 동래성 밖 4km까지 진군한 후 매복을 실시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일본제 1군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카의 병력과 뒤이어 상륙한 3만 대군이었다. 조영규가 거느린 병력으로 성밖에서 대군을 맞아 싸우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영규는 퇴각하여 좌병사 이각과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보고했다.동래부사 송상현은 성을 지킬 의지를 굳게 다졌지만 막상 병력을 총지휘해야 할 이각은 발뺌을 하기 시작했다.병력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송상현은 이각의 말이 어불성설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당장 있는 병력으로도 넓은 동래성을 지키기 어려운데 이를 반으로 나누면 더욱 지키기 어려운 건 자명한 일이었다.송상현의 만류에도 이각은 군사 20명만 남기고 부하들을 이끌고서는 동래성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이각은 왜군의 모습조차 보지 않은 채 그렇게 빠져나갔고 동래성은 왜군과의 접전 끝에 방어가 허술했던 동쪽 성벽부터 무너져 하루 만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동래부사 송상현, 양산군수 조영규, 조방장 홍윤관이 전사하고 울산군수 이언함은 포로로 잡혔다. 성안에 있었던 동래성 주민들은 왜군들에게 모조리 학살당했다.동래성이 함락됐지만 제승방략(制勝方略)에 따른 조선의 방어체제는 변함없이 가동되고 있었다. 후세 많은 비판을 받은 방어제제지만 적어도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는 문제없이 그 체제가 돌아가고 있었다.이각이 동래성 구원을 위해 병력을 이끌고 간 사이, 경상좌병영 소속 13개 읍군병력 수천 명은 울산 병영으로 집결한 후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즈음 동래 부근 소산(오늘날 부산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마을)까지 퇴각해 온 이각은 휘하 최고 군관에게 명령을 내린다.군관은 정색을 하며 거부했다.이각은 크게 화를 내며 칼을 빼어 들었다.군관은 성 밖으로 나가 왜군과 싸우겠다는 이각의 말이 완전 거짓임을 깨닫고는 마주 언성을 높였다.이각의 칼이 허공을 그리자 군관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다른 병졸과 군관들이 그런 이각을 멍하니 보자 이각은 서둘러 말을 달려 홀로 병영으로 향했다. 이각이 이끌던 군사들은 그 길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빨리 도주할 생각만 하며 병영으로 돌아온 이각은 병력이 집결해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이각은 사람을 시켜 첩에게 먼저 달아나라고 일러둔 뒤 안동판관 윤안성(1542~1615)의 영접을 받으며 그에게 병사를 나눌 것을 제의했다. 윤안성은 의아해 했다.이각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재빨리 말했다.이각이 구체적으로 나눌 병종까지 말하자 윤안성은 의심을 버리고 석전군을 떼어 주었다. 이각은 병사들에게 면포를 성 밖으로 날아 실어두라고 시켰다. 이각의 병사들이 물건을 나르느라 분주한 것을 본 윤안성은 의아해 하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병사들 중 하나가 외쳤다.깜작 놀란 윤안성은 이각을 찾았다. 이각은 속으로 당황했지만 미리 생각해 놓은 꾀가 있어 겉으로는 태연히 윤안성의 부름에 답했다.윤안성이 크게 상기된 표정으로 성 위에서 소리쳤다.이각은 태화강을 가리키며 윤안성을 위시한 성 위 병사들에게 소리쳤다.그 말에 병사들이 크게 동요하며 어수선해졌고 이각은 말에 오르더니 서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제야 이각이 애초부터 달아날 생각만 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윤안성은 크게 노해 칼을 빼어들고 달아나는 이각의 뒤통수를 보고 소리쳤다.윤안성은 당장 이각을 추격해 목을 베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마저 성을 나가 버리면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병사들의 분위기가 더욱 안 좋아질까 염려되었고 주장을 보필하는 장수인 아장(亞將) 원응두의 경우에는 겁을 먹고 달아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안성은 한숨을 쉬며 달아나는 이각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결국 다음날 경상좌병영은 제대로 응전도 하지 못한 채 왜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연이은 이각의 도주는 왜군의 기세를 올려 주었고 결국 초기 조선군의 방어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진 주요 이유였다.당시 경상좌수사 박홍도 왜군의 기세에 눌려 수군을 거느리고 싸워볼 엄두를 내지 않았고 연이어 왜군을 피해 다닌 바가 있었다. 하지만 박홍은 파발을 보내 처음으로 한양에 왜군의 침입을 알린 바가 있었다. 즉, 최소한 해야 할 일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니었던 것이다.박홍은 임지를 버리고 평양까지 도망 왔으나 공으로서 죄를 씻으라는 명을 받고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운다. 그럼에도 몇몇 신하들은 박홍의 죄를 소급하여 엄벌에 처하라고 탄핵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박홍의 죄는 컸지만 평양까지 어가를 따라온 것으로 보아 자신의 뒤를 봐줄 사람을 찾아 목숨을 구하지 않았나 싶은 추측도 할 수 있다.그럼 역시 도주만을 일삼은 이각은 어땠을까. 난중잡록에는 이각이 비겁한 자였지만 일단 힘과 무예가 뛰어나 경상좌병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사실 이각과 박홍 외에도 임진왜란 초기에는 예상을 뛰어 넘는 왜군의 숫자에 제대로 대응도 해보지 못하고 숨거나 도주한 장수와 관리들이 많았다. 그러나 초기에 왜군과 맞닥트린 관리 중 군사부문에서 최고 책임자였던 이각과 박홍이 그보다 낮은 직급이었던 정발이나 송상현처럼 목숨을 던져 적을 막아내려 했다면 왜군이 그렇게 쉽게 한양까지 북상할 수 있었을까?어쨌건 몇몇 지방 관리들과 경상도를 지나 빠져나온 이각은 한강 방어선을 지키지 않고 후퇴하는 도원수 김명원 부대로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임진강으로 향하는 길목인 혜음령에서 역시 임지를 벗어난 경상좌방어사 성응길과 함께 한양을 점령한 뒤 계속 북상하는 왜군을 저지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각은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고 곧장 퇴각하여 임진강을 건너가 버린다.결국 이각은 도원수 김명원에 의해 처형당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왜 김명원은 이각을 즉시 처형하기로 마음먹었을까?임진왜란 초기, 당시 조선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 대규모 왜군의 공격으로 인해 도주하거나 대응을 하지 못한 경상도 쪽 관리들에 대해 조선조정은 대부분 관대한 처벌을 내리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도 이는 부원수 신각의 일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진다.당시 신각은 왜군과의 접전 후 그 진격을 막고 적을 참살한 첫 승리라는 공을 세웠음에도 도원수 김명원의 보고만으로 처형을 당한 바였다. 반면 김명원은 그로 인해 조정의 신망을 잃고 임진강 방어전에서는 명목상으로 도원수 직책만 지닌 채 실권을 잃고 있었다.이런 김명원이었기에 너무나도 전투를 기피하는 게 자명한 이각을 직접 처형하지 않으면 도원수로서 군율이 서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각의 일을 조정에 보고해 처형하게 한다면 앞서 신각의 일로 인해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김명원은 조선군의 사기와 실추당한 자신의 통솔력을 위해서 도주를 일삼고 비열한 행동까지 한 이각을 당장 처형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만약 이각이 동래성에서 송상현과 함께 전투를 벌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후속 군대가 속속 당도한 왜군을 막아내긴 어려웠을 테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제승방략에 따라 모인 조선군이 제때 한양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이일 등의 지휘하에 어느 정도 버텼을 가능성이 있었다.남해를 지나 서해로 올라가려는 왜군은 당시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강적 이순신을 만나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일 뿐이다. 하지만 당시 초기대응에서 이각의 책임이 막중했으며 그의 도주가 조선군을 패닉에 몰아넣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그로 인해 결국 이각은 동래성순절도를 통해 그 추한 모습이 후대까지 영원히 남는 희대의 졸장으로 각인되고 만다.

임란 때 동래성 버린 이각 순절도에 나올 줄 몰랐겠죠

육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동래부 순절도. 숙종 35년(1709)에 그린 그림이 훼손돼, 영조 36년(1760) 동래부의 화원이었던 변박이 먹과 채색으로 다시 그렸다. 성문 앞쪽 패목 2개에는 일본군의 ‘길을 비켜달라’는 내용과 조선군의 ‘죽더라도 길을 비켜줄 수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림 위쪽 좌측에 성 밖으로 말을 타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진 부산박물관]

1592년 임진왜란 때 부산진을 함락한 왜군이 밀려와 동래성을 둘러싼 채 “싸울테면 싸우고 아니면 길을 비켜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은 패목(牌木, 팻말) 하나를 성 밖으로 던졌다. 거기에는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죽기는 쉬우나 길 비켜주기는 어렵다)이라고 적혀 있었다. 같은 시각 경상좌병사 이각은 말을 타고 성을 빠져나갔다. 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쳤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서 벌어진 전투 모습을 담은 ‘동래부 순절도’에는 이 같은 내용이 그림으로 잘 묘사돼 있다.

부산 박물관은 5일부터 다음달 29일까지 2012년 특별 기획전 ‘임진왜란’에서 순절도 5점을 전시한다. 개막식이 있는 4일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5일의 4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순절도가 한자리에 전시되기는 처음이다. 특히 일본 와카야마현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동래부 전투도’가 그려진 도록도 전시돼 국내 순절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이 밖에 임진왜란 관련 국보와 보물, 각종 문화재 등 200여 점도 전시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주로 사용한 3m 길이의 장창과 일종의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 등 무기류와 전사자들의 인골도 볼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유물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의 부록격인 국보 제76호 ‘임진장초(壬辰狀草)’다. 이 충무공이 임진왜란 주요 전투의 경과, 왜군 상황, 등을 조정에 올릴 장계(狀啓)의 초본이다. 함께 전시된 ‘선무공신교서’는 1604년 임금이 이순신을 선무 1등 공신 덕풍부원군에 봉하면서 내린 교서다. 현충사에 소장된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대여된 적이 없던 귀한 유물이다. 부산박물관 전시 후 보존처리를 위해 현충사에서도 장기간 전시를 하지 않을 예정이다.

개막식날 오후 3시부터 박물관 대강당에서는 ‘임진왜란 전후 부산지역의 사회변화’를 주제로 김강식 동서대학교 교수의 강연이 진행된다. 식후에는 연희단 거리패와 뮤지컬 ‘이순신’(연출 이윤택)이 공연된다.

양맹준 부산박물관 관장은 “동래성에서 옥쇄한 송상현 부사와 민·군은 오늘날까지 충절의 표상으로 되살아났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홀로 도망친 이각은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면서 “이번 전시는 임진왜란이 주는 교훈을 되새겨볼 수 있는 자리다”고 말했다.

위성욱 기자

◆순절도(殉節圖)=전쟁의 뼈아픈 기억과 교훈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관 소속 화원(畵員)들이 전쟁이 끝난 뒤 그렸다. 국내에 전하는 순절도는 변박(卞璞)과 변곤(卞崑)이 그린 것과 송상현 종가에서 소장한 ‘동래부 순절도’(392호 등) 3점이 대표적이다. 현재 육군박물관과 송상현 종가, 울산박물관 등 3곳에 1점씩 보관돼 있다. 부산진 순절도(보물 391호)와 이시눌이 그린 임진전란도를 포함하면 모두 5점이 전해진다. 동래부사를 지낸 홍명한은 “깊은 참호와 높은 성벽, 날카로운 병기보다 더 낫다”라고 순절도를 평가했다.

[역사이야기] 임진왜란을 징비한다<3>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경상 좌병사는 도망치고

왜군이 부산에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은 지역의 군민(軍民)과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아 성을 지켰다. 양산군수 조영규(전남 장성군 출신)도 5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그런데 좌병영에서 달려온 경상좌병사 이각은 부산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랐다. 그는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시 나가서 동래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치겠다”고 핑계대고 조방장과 함께 달아나 버렸다. 송상현이 동래성을 같이 지키자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줄행랑쳤다. 정말 비겁하다.

# 일본인도 존경한 충신 송상현

4월 14일에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기세를 몰아 곧바로 동래성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목판(木板) 하나를 성 밖에 세웠다.

“싸우려면 싸우고 戰則戰,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 不戰則假道.”

그러자 남문루에서 송상현도 목판을 왜적에게 던졌다.

“싸워 죽기는 쉬어도 戰死易,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假道難.”

이러자 왜군은 날이 저물기도 전에 동래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15일 새벽에 왜적이 진격해 오니 성안 사람들은 놀라고 울부짖었다. 송상현은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일(半日)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왜군은 양산군수 조영규, 별장 홍윤관 등 모든 군민을 죽였다.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대마도 왜인 평성관(平成寬)은 일찍이 동래에 왕래하면서 송상현에게 대접을 후하게 받았다. 그는 송상현의 옷을 끌며 숨으라고 하였으나 송상현은 따르지 아니하였다. 왜적들이 송상현을 생포하려고 하자, 그는 항거하다가 죽었다.

송상현은 죽기 전에 손수 부채에다 ‘포위당한 외로운 성, 달은 희미한데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가노(家奴)에게 주면서 그의 부친 송복흥에게 주라고 하였다.

한편 송상현이 죽자 1591년 1월에 조선통신사 황윤길 등과 함께 부산에 도착했던 왜의 사신 평조신(平調信)이 탄식하며 그의 시체를 관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을 세워주었다.

송상현의 함흥기생 출신 첩은 왜군이 더럽히려 하자 자결하였다. 왜군은 그녀를 송상현과 함께 묻었다.

또 양인(良人) 출신 첩 이씨도 잡혔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자 왜인들이 별실에 가두었다. 나중에 그녀는 일본에 끌려가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1605년에 사명대사가 데리고 온 포로 3천명과 함께 조선에 돌아왔다(1607년 조선통신사 경섬의『해사록』).

송상현은 문과에 급제하여 1590년에 간관(諫官)이 되고, 1591년 4월에 파직된 고경명(나중에 전라도 의병장) 후임으로 동래부사로 왔다. 1594년에 병사 김응서가 울산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만났을 때 가토는 송상현의 시체를 거두어 고향인 정읍으로 옮겨 장사(葬事)지내도록 허락하고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부산시 송상현 광장과 전북 정읍시 정충사는 송상현 유적지이다. 또한 부산 충렬사엔 송상현과 조영규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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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에 들어왔다가 나간 이각의 행동에 대하여 간단한 소고

임진왜란 개전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보였던 조선장수들의 추태에 대하여 많이 욕들을 하지요.

대표적으로 욕을 먹는 사람들 세사람을 꼽자면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경상좌병사 이각 입니다(경상우병사 조대곤도 있기는 한데 저 세사람에 비하면 선녀…..).

그 중에서 이각 같은 경우 송상현이 죽음으로 동래성을 지켰던 것에 반하여 동래성에 들어왔다가 일본군이 도달하기 전에 송상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갔던 일로도 욕을 먹지요.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동래부 순절도(1760년, 1834년 작 모두)에 까지 자세히 묘사가 되어있고, 이후 학자들의 문집등에서도 동래성에 들어왔다가 나간 이각의 행동에 대하여 비겁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나중에 동래부사로 임관되어 간 민정중이 그림을 그릴때 이각의 형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권징의 뜻을 나타낼 정도

숭정 무술년(1658, 효종9)에 민후 정중(閔侯鼎重)이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어 그 당시의 사실을 찾아 물어보았는데, 그때의 노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 이가 있어 눈물을 흘리면서 그때의 사실을 이와 같이 말하였으므로, 마침내 돌을 다듬어 그 사실을 기록하고, 또 집을 짓고 그림을 그려서 이각(李珏)이 도망치던 형상을 아울러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권징(勸懲)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였다……

송자대전 제171권 / 비(碑) 동래성(東萊城)의 남문비(南門碑)

나중에는 근왕하겠다는 명분으로 경상도 전역을 버리고 임진강까지 갔다가 잡혀 참수되는 블랙 코미디를 연출하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이각이 동래성에서 나간 것 자체가 과연 욕을 먹을 행동이었을까요?

이각의 지위는 경상좌병사이고 그의 임무는 한 지역의 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경상좌도의 전체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여 침략군을 막아내는 것 이었습니다. 반대로 동래성에서 있다가 전사하였다 하더라도 을묘왜변 초기에 달량성으로 들어가 왜군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어 전사했던 전라병사 원적처럼 대대로 무능한 장수라고 욕먹었을 가능성이 더 컸습니다. 을묘왜변 당시 조선조정은 원적이 달량성에서 전사하자 전라도 육군의 지휘체계가 붕괴되었고 이 때문에 을묘왜변의 초동대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오죽하면 나중에 방어사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던 양사준이 자신의 가사문학인 남정가에 “혜욤 업 뎌 兵使야 네 딘을 어 두고 達島로 드러간다(생각없는 저 병사 놈이 지 진을 어디다 놔두고 달량성으로 들어가고 있냐)” 라고 써놓을 정도.

이각이 동래성에서 나간 명분이었던 ‘소산역에 주둔하며 후방에서 공격하겠다’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삼국지에서도 하비성전투 당시 진궁이 여포에게 병력의 일부를 빼내어 조조군의 후방을 치라고 간언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 성을 나가 동래성 근처 소산역에 주둔하고 있던 밀양부사 박진과 합류하고, 일본군의 후방에 주둔한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 ‘주둔’ 만 한 것이 문제였죠 이각이 성을 나온 명분은 어디까지나 핑계였을 따름이지 그것이 전략적 판단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게 문제였던 것이죠;; 소산역에 있다가도 동래성을 지원하려는 박진을 방해하기만 하다가 경상좌병영으로 도망치고 맙니다. 밀양부사 박진도 소산역에 있다가 중과부적이라 판단하여 밀양방면으로 후퇴하고요.

우리가 흔히 변명으로 치부하고 마는 ‘작전상 후퇴’ 라는 말은 사실 매우 중요한 전술 행위중의 하나입니다. 전력을 보존하고자하는 목적의 후퇴라던가 적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을 위한 후퇴 등등 후퇴 또한 상황에 따라 엄연히 취해야할 것이죠.

중요한 건 이각의 저런 후퇴들은 작전상의 혹은 전략적 목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도망’에 다름아니었습니다.

이각이 혹여 동래성을 후방에서 지원하지 않았더라도 그 목적이 동래성을 희생시키면서 시간을 벌고 자신의 권한으로 후방의 병력을 동원하고서(ex 공간을 버리고 시간을 취한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그렇게 동원된 병력을 재배치하고 반격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더라면 비정하다고 욕은 먹었을 지언정 이런식으로 무능하다고 대대로 까이지는 않았겠죠.

실제로 이각이 도망쳐서 도착한 경상좌병영에는 제승방략에따라 모인 ’13개 읍의 군사들’이 있었음에도 또 기각지세로 적을 후방에서 공격하겠다는 명분으로 나가서 도망치고 좌병영은 함락되고 동래성의 희생으로 번 시간동안 병영에 모인 병사들은 부질없이 희생되고 맙니다;;

상대가 안되어서 맞붙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동원된 병력이라도 제대로 끌고 다니며 온전하게 유지시키고 있다가 나중에 오게 되는 이일, 신립등과 합류하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의미없는 가정도 해봅니다만….. 왜냐하면 조선조정은 장수의 ‘후퇴’와 ‘도망’을 철저히 구분하였기때문이죠. 그 대표적 사례중의 하나가 송상현처럼 ‘부사’였던 밀양부사 박진의 경우죠.

소산역에 있다가 밀양방면으로 후퇴한 박진은 양산과 밀양 사이에 있는 황산의 좁은 길목에서 북상하는 왜적을 맞아 싸워서 잠시 시간을 지연시키지만(작원전투) 패색이 짙어지자 밀양으로 후퇴, 동래에서 순절한 송상현과는 달리 밀양의 창고를 불태우고 군사를 몰아 퇴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조선조정도 사정을 잘 몰라서 박진도 이각처럼 그냥 도망치기만 하는 장수로 판단하였다가, 박진이 계속해서 싸움을 하며 전략적 판단하에 후퇴를 한 것임을 알게되고, 박진을 경상좌병사로 임명하였고 훗날 박진은 박의장과 함께 비격진천뢰로 경주성을 탈환하는 전공까지 세우게 되지요.

참고로 동래부 순절도이야기가 나왔는데, 일본 와카야마현 현립박물관에 소장중인 임진왜란 병풍도에는 조선의 성을 공격하고 있는 일본군과 성에서 싸우는 조선군, 그리고 그 일본군을 뒤에서 ‘협공’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 모습이 일본에서는 의병들의 후방공격으로 성을 지킨 1차 진주성전투를 묘사한 그림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비쳤지만, 노영구 교수님은 그림에서 묘사한 성의 모습과, 후방을 습격하고 있는 조선군의 모습들이 관군의 모습이었던 점 등을 보고 동래성 전투를 묘사한 것이라 주장하시기도 하셨습니다.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해 주부(主簿)가 되고, 1588년 진해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판관이 되었다. 이 때 소속군사를 이끌고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함께 동래성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각이 퇴각하자 비겁함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같은 해 7월에 이각이 처형되고 박진(朴晉)이 병마절도사로 파견되자, 장기군수 이수일(李守一)과 함께 박진을 도와 적에게 빼앗긴 경주성의 탈환 작전에서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93년 4월에는 군사 300여 명을 거느리고 대구 파잠(巴岑)에서 왜적 2,000여 명과 맞서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수백 필의 말을 빼앗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5월에도 울산군수 김태허(金太虛)와 함께 울산의 적을 쳐서 50여 명을 베는 등 크게 이겼다. 그러한 공으로 당상관으로 특진되면서 경주부윤이 되었다.

7월에는 초산군(剿山郡)의 적을 쳐서 남문에서 전멸시켰다. 8월에는 왜병이 안강(安康)에 주둔한 명나라의 군사를 급습해 200명을 죽이자 병사 고언백(高彦伯)과 함께 적을 추격해 무찔렀다.

1594년 2월 양산의 적을 무찔렀고, 3월에는 임랑포(林浪浦)의 적이 언양현에 진입해 노략질하자 이를 급습해 무찔렀다. 이 때 적에게 잡혀 있던 백성 370명을 구해냈으며 우마 32필도 노획하였다. 5월에는 기장(機張)에서, 7월에는 경주에서 많은 왜병을 베었다.

1595년에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1597년 영천과 안강의 적을 무찔렀다. 이 때 1,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명군 5만 명의 뒷바라지를 했으며, 적군이 성을 비우고 밤에 도망치자 창고에 있던 곡식 400여 석을 거두었다.

1598년 박도산(薄島山)의 적을 쳐서 전승을 올려,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말이 하사되었다. 1599년 성주목사 겸 방어사, 1600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601년 인동부사(仁同府使)를 두루 지내다가, 1602년 다시 경상좌병사 및 공홍도수사(公洪道水使)를 거쳐 경상수사가 되었다.

다섯 차례의 병사를 지내는 동안 한결같이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영해의 정충사(貞忠祠)와 구봉정사(九峯精舍)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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