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 묘 | 조선 역사의 안식처, 왕릉을 만나다! _ 비운에 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회묘 – 태믹스의 역사지식문화 콘텐츠 4892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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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일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능입니다. 성종의 비이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입니다. 성종의 비이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의 묘입니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산 5번지 경희의료원 자리에 위치했으나, 1969년 10월 25일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의 서삼릉(西三陵) 경내로 이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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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이야기 – 조선왕릉 – 문화재청

회묘는 조선 9대 성종의 폐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사친인 폐비 윤씨의 묘이다. 회묘는 연산군 즉위 후 1504년(연산 10)에 회릉(懷陵)으로 추존되면서 왕릉의 형식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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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oyaltombs.cha.go.kr

Date Published: 12/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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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폐비 윤씨 회묘(懷墓) – 문화유산여행 – 이야기

회묘(懷墓)는 연산군의 친모이자 조선왕조 제9대 성종임금의 왕비(1445~1482)였던 윤씨의 묘인데, 일반인이 관람 할 수 없는 서삼릉 태실 옆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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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heritage.tv

Date Published: 1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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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묘 – 오마이뉴스 모바일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 숨어 있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1445-1482)의 회묘를 볼 때마다 김영임이 부르는 ‘회심곡’의 구슬픈 가락이 묘 주변에서 들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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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4/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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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릉(懷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종의 비이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의 묘이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산 5번지 경희의료원 자리에 위치했으나, 1969년 10월 25일 경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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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1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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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회묘(懷墓)는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계비 폐비 윤씨의 무덤이다. 한때 폐비 윤씨가 제헌왕후로 복위되면서 무덤의 이름도 회릉(懷陵)으로 바뀌었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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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8/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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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서울 연산군묘 (서울 燕山君墓) | 국가문화유산포탈 | 문화재 …

조선 10대 연산군(재위 1494∼1506)과 거창군부인 신씨(1476~1537)의 묘이다.연산군은 9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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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eritage.go.kr

Date Published: 8/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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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이조여인」연산군 생모 4백74년만에 천장 | 중앙일보

이조5백년동안 가장 불운했고 끝내 사사됐던 폐비 윤씨의 회묘(서울동대문구회기동·경희대구내)가 25일상오10시 고양군원당면원당리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전주이씨 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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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10/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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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태믹스 스튜디오[역사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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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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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이야기

제10대 연산군 사친 폐비 윤씨 회묘(懷墓)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묘의 형식 : 단분 묘의 조성 : 1482년(성종 13), 1497년(연산 3), 1504년(연산 10), 1969년

묘의 구성

회묘는 조선 9대 성종의 폐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사친인 폐비 윤씨의 묘이다. 회묘는 연산군 즉위 후 1504년(연산 10)에 회릉(懷陵)으로 추존되면서 왕릉의 형식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조선 전기의 왕릉 양식에 맞게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묘의 역사

1482년(성종 13)에 폐비 윤씨가 사사되자 처음에는 일반묘로 조성하고, 1489년(성종 20)에 성종은 특별히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생모의 존재를 알게 된 연산군은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1497년(연산 3)에 경기도 장단(長湍)에 있던 묘소를 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이장하고 묘호를 회묘(懷墓)라 하였다. 이후 1504년(연산 10)에 갑자사화가 발생하면서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존하여 시호를 제헌왕후(齊獻王后), 능호를 회릉(懷陵)이라 하고 상설을 왕릉의 제도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그러나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을 다시 회묘로 격하하였으며, 1969년에 묘소를 서삼릉 경내로 이장하였다.

폐비 윤씨(廢妃 尹氏) 이야기

폐비 윤씨(재세 : 1455년 음력 윤6월 1일 ~ 1482년 음력 8월 16일)는 본관이 함안인 함안부원군 윤기견과 장흥부부인 신씨의 딸로 1455년(단종 3)에 태어났다. 1473년(성종 4)에 성종의 후궁 숙의(淑儀)로 간택되었다가, 이듬해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476년(성종 7)에 성종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 다른 후궁들을 투기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1477년(성종 8)에는 중궁전에 비상(砒霜)과 주술서책이 발견되어 원자(연산군)와 성종에게 해가 끼칠 위험성이 있다 하여 폐위 될 뻔 하였으나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이후 1479년(성종 10)에 투기의 죄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성종과 인수대비의 분노를 사 폐위되었다. 여기에 성종의 두 후궁 엄씨와 정씨의 모함이 더해져 1482년(성종 13)에 사사되었다. 성종은 연산군을 생각하여 1489년(성종 20)에 ‘윤씨지묘’라는 묘비와 2명의 묘지기를 두게 하였다. 그 후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지문(誌文)을 읽으면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고, 윤씨를 위하여 제사를 허락하였으며, 1504년(연산 10)에 갑자사화가 발생되면서 왕후로 추존되어 시호를 제헌왕후(齊獻王后)라 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모든 칭호가 삭탈되었다.

서삼릉 폐비 윤씨 회묘(懷墓)

회묘(懷墓)는 연산군의 친모이자 조선왕조 제9대 성종임금의 왕비(1445~1482)였던 윤씨의 묘인데, 일반인이 관람 할 수 없는 서삼릉 태실 옆에 자리하고 있다. 이 묘는 사약을 받고 죽은지라 묘비 조차 없던 것을 성종이 후일 <윤씨지묘>라는 묘비는 세우게 허락하여 달랑 묘비 하나 세웠다가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능호를 <돌아올 회, 품를 회(懷)>자를 써서 회릉(懷陵)으로 하고 왕릉 규모로 조성했다. 연산군이 권좌에서 내려오자 회릉은 회묘로 다시 격하되는 수모를 겪으면서 현재의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던 것을 1969년 10월 25일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한다. 근대에 와서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폐비 윤씨와 연산군 모자의 한이 묘역의 석물에서 엿볼 수 있다. 우선 문인석은 체구가 크고 화려한 옷자락이 표현되어 있고, 무인석 또한 거대한 체구에 투구와 갑옷이 화려하고 큰 칼집을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이 여느 릉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아마도 죽어서도 어머니를 굳건히 지켜 주기를 바라는 연산군의 효심이 깃들어 있는 듯 하다. 굳이 눈여겨 보자면 오른쪽 무인석은 오른손 잡이 왼쪽 무인석은 왼손잡이로 표현된 것은 왜일까?

폐비 윤씨는 지금도 숨 죽이고 서삼릉 한 켠에 누워있다. 윤씨의 묘를 취재 차 찾았을 때도 보슬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지금은 둘째주 토요일과 마지막주 토요일에 관람 신청을 받아 일정 인원만 관람이 가능하다.

한정구/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묘

▲ 왕릉 못지 않은 폐비 윤씨 회묘. ⓒ 한성희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 숨어 있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1445-1482)의 회묘를 볼 때마다 김영임이 부르는 ‘회심곡’의 구슬픈 가락이 묘 주변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폐비 윤씨 회묘의 겉모습은 왕릉과 다름없다. 오히려 웬만한 왕릉보다 외관상으로는 훨씬 훌륭하다.

▲ 회묘의 문인석과 무인석. ⓒ 한성희 분명히 묘인데 어째서 능의 형식을 갖춘 것일까. 묘에서 능으로, 능에서 다시 묘로 격하된 폐비 윤씨의 슬픈 운명이 죽어서도 서삼릉 비공개 지역 끝자락에 숨어서 이렇게 눈물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 공릉 문화유산해설사 권효숙씨가 올려다 보는 문인석의 높이가 약 3.4m 정도돼 보인다. ⓒ 한성희 연산군의 정성 때문인지 조선전기 양식을 따르고 있는 회묘의 석물은 웅장한 무인석과 문인석, 석호와 석양도 뛰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두 문인석의 얼굴은 한결같이 어둡고 슬픈 표정이다. 마치 폐비 윤씨의 한맺힌 한삼 자락의 슬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회묘는 원래 동대문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 10월 25일 경희대학교 학교 공사 때 이곳으로 천묘했다. 회묘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희대학교 경희의료원이 들어 서 있다.

죽어서도 파란만장했던 폐비 윤씨의 묘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일제가 조선왕실의 태실과 왕자 공주묘를 집장하고 후궁들의 묘까지 여기로 옮긴 영향이 미친 게 아닐까 한다.

▲ 슬픔에 찬 문인석의 얼굴에서 비장함 마저 흐른다. ⓒ 한성희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능을 ‘품을 회(懷)’, ‘돌이킬 회(懷)’를 써서 회릉(懷陵)이라 한 것은 그리운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다시 안기고 싶었던 사모곡이었을까? 새삼 연산군이 폭군 이전에 시인이었다는 기억을 회릉에서 곰곰 생각해본다.

다른 어느 능의 능호보다 우울한 회릉이라는 능호를 되짚어보고, 회심곡을 폐비 윤씨의 무덤 앞에서 들려줬으면 하는 것은 그들 모자의 비극 때문인지, 아님 회심곡이라도 묘 앞에서 한바탕 속 시원히 불러줘야 폐비의 500년 서린 한이 풀어질 거라는 한낱 내 감상때문인지….

1482년 성종(1457-1494)에게 사약을 받고 한삼에 피를 쏟고 죽은 뒤 묘비조차 없던 윤씨에게 연산군이 즉위 후를 생각한 성종이 1489년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겨우 허락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고부간 갈등 희생자가 폐비 윤씨이고 이 역시 권력에 희생된 여인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의 딸인 윤씨는 아버지 윤기견가 죽자 집안이 궁핍해 어머니에 의해 궁에 들어온다.

폐비 윤씨가 성종보다 12살이나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진 바가 없다. 빼어난 미모로 성종4년(1473) 숙의에 봉해졌던 윤씨는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자리에 오른다. 성종이 13세 소년왕으로 왕위에 올라 7년간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던 시절이 끝나고 친정으로 들어선 성종7년(1476)년의 일이다.

성종은 어머니 인수대비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상의 여인이자 집안이 별 볼일 없는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고 그해 연산군이 탄생한다. 정희대비, 인수대비, 안순대비의 세 과부 대비들의 비호 아래 성종의 여성 섭렵은 조선조 제왕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화려했다. 힘이 되어줄 마땅한 배경이 없는 윤씨는 명문가를 등에 업은 여성들과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었다….

다 알고 있는 얘기다. 성종이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으나 지아비에 의해 죽음을 당한 윤씨는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불행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성종이 소년 시절 12살이나 연상이었던 윤씨를 왕비로 책봉할 만큼 사랑한 것은 무엇일까? 소년 시절에 빠졌던 미모였을까? 아니면 절대권력을 가진 제왕이라 그런 나이 차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일까.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불과 8살의 차이에 시샘 당한 여자들의 다툼이었을까.

숙의에서 단숨에 왕비로 오를 정도로 왕의 사랑을 입었지만, 훈구세력의 막강한 명문집안이었던 시어머니 인수대비(1437-1504)와 명문출신이었던 후궁들이 손잡은 세력다툼에 밀려나고 만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사림과 훈구의 대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왕실을 둘러싼 대신들의 정권 알력 속에 희생된 여인들이 한둘이던가.

▲ 난간석과 석물이 조선초기 양식이다. ⓒ 한성희 폐비 윤씨의 회묘가 왕릉의 겉모습 갖게 된 이유가 단순히 연산군의 어머니 추숭 때문만은 아니다.

성종이 1494년 12월24일 창덕궁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29일 연산군이 20세의 젊은 왕으로 즉위한다. 국장기간이던 1495년 3월16일 성종의 능에 묻을 지석(誌石)의 초안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은 비로소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된다.

지석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도, 행적을 숨김없이 적어 상석과 능상 사이에 묻는다. 지석의 초안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의 이름이 드러나면서, 연산군은 생모로 알았던 윤호의 딸 정현왕후의 아들이 아니고 윤기견의 딸 폐비 윤씨의 아들이 자신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폐비 윤씨가 아들 연산군에 의해 회릉(懷陵)으로 복원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연산군 10년(1504)이다.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윤씨의 폐출을 빌미 삼아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을 동시에 제거하려고 벌인 피바람이다.

성종이 사후 1백년간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한 유명을 깨고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유래 없는 사화가 벌어졌다.

연산군의 향락으로 국고가 비게 되자 공신들에게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해 보충하려 한다. 그때까지 폭정을 묵인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던 권신들은 태도가 돌변한다. 자신들의 경제기반을 빼앗길 수 없던 권신들은 비로소 왕의 향락을 자제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겉으로 갑자사화는 폐비 윤씨 사건 때문이나, 연산군과 대신들의 대립을 이용해 사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으려는 임사홍의 속셈과 사림을 싫어했던 연산군의 내심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피비린내 나는 갑자사화에서 권신과 사림, 훈구의 거의 모든 세력들이 화를 당했고 중종반종이 일어난 계기가 됐다.

▲ 회묘를 수호하는 석호의 꼬리가 압권이지만 쓸쓸함이 느껴진다. ⓒ 한성희 이 과정에서 인수대비는 손자에게 머리를 받혀 죽고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죽음을 당한 폐비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존되고 회릉으로 격상하게 된다. 이 덕분에 폐비 윤씨는 어느 왕릉 못지 않은 능상과 석물로 단장했으나, 고작 2년 후에 중종반정으로 아들이 쫓겨나고 비참하게 죽게되니 과연 한삼의 피에 서린 원한이 풀렸을지는 의문이다.

1506년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됐지만 ‘무덤을 건드리면 동티난다’는 설을 우리 조상들이 굳게 믿고 있는 덕분에 겉모습은 연산군이 조성한 회릉의 모습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 폐비 윤씨 회묘에서 내려다 본 후궁들의 공동묘지. ⓒ 한성희 폐비 윤씨의 묘에서 나무들 사이로 후궁들의 묘가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일제가 모아들인 후궁묘와 해방 이후 묘의 주변개발 때문에 옮겨온 명종 후궁 경빈 이씨 묘 외 6기를 천묘해 모두 16기의 후궁묘가 있다. 광복 후에 천묘한 묘들도 왜 일제가 만든 묘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는지 알 수 없다.

▲ 조선 왕들의 후궁묘. ⓒ 한성희 폐비 윤씨의 묘에서 내려와 후궁들 묘의 담장을 끼고 돌면 대문이 나온다. 이 후궁들의 묘는 싸구려 공동묘지 같은 왕자와 공주들의 묘보다 봉분도 훨씬 크고 담장을 둘러 그런 대로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일제가 무슨 속셈으로 왕자와 공주 묘보다 후궁들의 묘를 이렇게 크게 만들고 담장까지 둘렀는지 잠시 생각해본다.

▲ 겨울 석양의 그림자가 길게 깔린 대문 틈새로 보이는 후궁묘. ⓒ 한성희 왕실에 들어와 각자의 사연을 지니고 영욕의 세월을 보냈던 여인들이 잠든 묘들을 보자니 겨울 석양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스산하기만 했다.

성종의 비이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의 묘이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산 5번지 경희의료원 자리에 위치했으나, 1969년 10월 25일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의 서삼릉(西三陵) 경내로 이장되었다.

윤씨는 1479년 폐출당했으며, 1482년(성종 13) 8월에 사약을 받았다. 이 때 성종은 예조에 교지를 내려 폐비 윤씨의 묘소를 ‘윤씨지묘(尹氏之墓)’라 표시하고, 묘지기 2인을 배치, 소재지 관원에게 민속적인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며 영구히 고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1494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1496년 효사묘(孝思廟)라는 사묘(私廟)를 짓고, 윤씨의 묘를 수봉해 회묘(懷墓)라 하였다.

그 뒤 1504년 갑자사화를 겪고 난 뒤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고 회묘를 회릉으로, 효사묘를 혜안전(惠安殿)으로 승격시켰으며, 모든 석물(石物)을 왕릉의 형식과 같이 하는 한편 제향 절차도 종묘 의식과 같게 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자 회릉은 회묘로 강봉되고, 혜안전도 철폐되어 윤씨의 신주(神主)는 묘 곁에 묻혔다. 석물은 봉분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다가 서삼릉 내 귀인(貴人)·숙의 묘역 바로 뒤로 이장되었다.

이장된 회묘는 곡장이 불타 기단부만 남았다. 봉분을 두른 난간석도 일부 무너졌으나, 문인석·무인석 등 다른 석물과 함께 조선 초기 왕릉의 석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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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묘(懷墓) 대한민국의 사적 지정번호 사적 제200호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좌표 제작시기 조선

회묘(懷墓)는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계비 폐비 윤씨의 무덤이다. 한때 폐비 윤씨가 제헌왕후로 복위되면서 무덤의 이름도 회릉(懷陵)으로 바뀌었던 적이 있다.

개요 [ 편집 ]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생모로, 1482년(성종 13년) 음력 8월 16일 사사된 폐비 윤씨의 무덤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다. 원래는 경기도 장단군에 묻힌 것을 연산군이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천장하였으며, 이후 1969년 10월 25일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1].

대체적으로 조선 전기의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물들은 여타 왕릉처럼 문인석, 무인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2].

조선 성종 재위 당시 중전이었던 윤씨가 폐서인이 되면서 묘호도 회묘로 지어졌으나 세자였던 조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憲王后)로 시호를 하사하면서 이 당시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조선 중종이 즉위하면서 폐주인 연산군이 시행했던 행적들을 청산하는 일원으로 제헌왕후 시호가 삭탈되고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역사 [ 편집 ]

1482년(성종 13년) 음력 8월 16일 : 폐비 윤씨 사사 [3] , 경기도 장단군에 매장 [4]

, 경기도 장단군에 매장 1489년(성종 20년) 음력 5월 20일 : 폐비 윤씨의 무덤에 ‘윤씨지묘(尹氏之墓)’의 이름을 내리고, 묘지기 2명을 두어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함 [5]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윤3월 13일 : 연산군, 폐비의 묘를 천장하도록 명령 [6]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3월 24일 : 폐비 윤씨가 제헌왕후로 복위되고, 묘의 이름을 회릉 으로 개칭 [7]

으로 개칭 1506년(중종 1년) 음력 9월 3일 : 회릉을 회묘 로 강봉, 제헌왕후의 시호 삭탈 [8]

로 강봉, 제헌왕후의 시호 삭탈 1969년 10월 25일 : 회묘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의 서삼릉 경내로 이장

기타 [ 편집 ]

회릉이라는 이름은 조선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가 선왕이자 부왕(父王)이었던 조선 성종에 의해서 폐비지묘(廢妃之墓)로 안장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며 왕의 생모이자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그리움을 뜻하여서 한자인 회(懷, 그리울 회 또는 품을 회)를 본따서 폐비윤씨지묘를 회릉으로 고쳐서 격상시켰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연산군이 폐위가 되어서 교동도로 귀양을 가게됨에 따라 중종 당시 폐주인 연산군의 행적을 지우거나 고치기 위한 일원으로 회릉을 묘(墓)로 격하하여 회묘로 고치게 되었다.

“회기동”이라는 동명은 회묘에서 유래한 것이다. 윤씨의 묘가 회릉으로 이름이 바뀌자 이 지역의 이름은 회릉동(懷陵洞)이었으며, 이후 회묘로 격하되면서 회묘동(懷墓洞)으로 바뀌었다. 훗날 회(懷)라는 글자가 어렵다 하여 회(回)로 바꾸고, 묘(墓)라는 글자가 좋지 않은 글자라 하여 기(基)자로 바꾸어 오늘날의 회기(回基)라는 이름이 되었다[9].

같이 보기 [ 편집 ]

출처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사적 서울 연산군묘 (서울 燕山君墓)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조선 10대 연산군(재위 1494∼1506)과 거창군부인 신씨(1476~1537)의 묘이다.

연산군은 9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성종 대의 평화로움이 그대로 이어졌다. 사치풍조를 잠재우기 위해 구체적인 금지 조항을 만들어 단속하였고,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비융사를 설치하여 철갑옷과 무기를 만들어 생산하는 등 국방정책에도 힘을 썼다.

그러나 무오사화(戊午士禍, 성종실록 편찬 중 김일손 등 사림이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어 사림이 피해를 본 사건)와 갑자사화(甲子士禍, 생모 폐비윤씨의 사사사건을 이용하여 훈구 및 사림파들이 척신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화 이후 국정에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하여 사치와 향락으로 조정이 어지러워졌다.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거창군부인 신씨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비에서 폐위되었다.

묘는 쌍분의 형태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연산군, 오른쪽이 거창군부인의 묘이다. 처음 연산군묘는 유배지에 조성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묘의 상설은 왕자묘제의 형태로 문석인, 장명등, 망주석, 묘표석 등을 배치하였다.

그 밖에 연산군묘 앞에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와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구문경)의 묘가 있다.

King Yeonsangun and his queen, Geochang Sin, were buried in the tomb. As the 10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reigning between 1494 and 1506, he was the eldest son of King Seongjong. Born in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gjong (1476), he ascended the throne in 1494. Two cruel massacres of scholars took place during his reign, showing how violent he was. Thus, scholars staged a revolt and installed Prince Jinseong, another son of King Seongjong, as new king named Jungjongbanjeong. King Yeonsangun was expelled in 1506 and was downgraded as King Yeonsangun (the title of “Gun” is a term indicating less respect in naming rulers in Korean history.) He died in 1506 while living in exile in Gyodong, Ganghwado Island. His wife begged the government to move his tomb from Ganghwado Island to this present site. Near his tomb are some tombs of his daughters and sons-in-law. Around his tomb are stone constructions such as honyuseok (rectangular stone table), stone lantern that guards the tomb, hyangnoseok (stone incense table), etc. The front side of his gravestone is inscribed with Chinese characters showing that it is his tomb; the back states that his funeral was held “for 20 days in February of the 8th year of Jeongdeok.

是朝鲜第10代燕山君(在位1494∼1506)与夫人居昌慎氏之墓。墓周围有燕山君之女与女婿的坟墓,还有魂游石·长明灯·香炉石等石物。墓石碑正面刻有“燕山君之墓”字样,后面则刻有“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

燕山君墓は朝鮮時代第10代燕山君(在位1494~1506)と妃居昌愼氏の墓である。墓の周辺には燕山君の娘と壻の墓もあり、魂遊石・長明灯・香炉石などの石造物が立っている。墓碑石の前面には「燕山君之墓」と刻まれ、裏面には「正徳八年二月二十日葬」と刻まれている。

「비운의 이조여인」연산군 생모 4백74년만에 천장

○…이조제9대왕 성종의 비였고 연산군의 친모였던「비운의 이조여인」폐비 윤씨가 4백74년만에 다시 고양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이조5백년동안 가장 불운했고 끝내 사사됐던 폐비 윤씨의 회묘(서울동대문구회기동·경희대구내)가 25일상오10시 고양군원당면원당리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원묘천장위원회(위원장이세정)에 의해 지난16일부터 파헤쳐지기 시작, 24일자정에 발굴이끝나 묘를 옮기게된 것이다.

폐비 윤씨의 묘가 이장되는 것은 관리가 번잡하고 소란스러워 유택으로는 적합치 못하다는 뜻으로 종친들에의해 옮겨진다지만, 다시 쫓겨나듯이 이장되는 것은 비참하고 억울했던 한 왕비의 한많은 일생을 되새기게 했다.

이조개국 1백5년되던 해 만든 이묘는 연산군이 복수를 겁냈음인지 다른 능과 달리 백회로「콘크리트」되고 석곽대신이중 목곽으로된 것이특징.

3m두께의 봉토와 다시 3m두께의 백회벽속에 안치됐던 관속에는 부장품이 한점도 없었고, 관위에 덮은 썩은 만장과 관밑에 괸 물, 그리고 물괸 함(길이14㎝, 폭 9㎝, 높이 9㎝)하나뿐이었다.

윤비의 묘는 처음 1495년 연산군이 즉위하자 곧 장단에서 13년만에 지금의 자리(당시양주중염지원)로 옮겨져 겨우 능으로 격이 높아졌으나 연산군이 폭정으로 폐위되자 다시 폐릉되었었다.

함안 윤씨인 비는 20세때(1476년)성종의 비로 책봉되었다가 그해 늦가을에 연산을 낳았으나 시어머니 조대비와 후궁들의 계략으로 폐비, 26세의 젊은나이로 사약을 받고 한많은 최후를 마쳤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폐비 윤씨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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