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조선시대 여종 – [夜史야사TV] 동물보다 못한 노비의 삶? 노비에게 몹쓸 짓을 하는 주인😨 | 천일야사“?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ppa.pilgrimjournalist.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ppa.pilgrimjournalist.com/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채널A 캔버스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622,493회 및 좋아요 3,166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Table of Contents
조선시대 여종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夜史야사TV] 동물보다 못한 노비의 삶? 노비에게 몹쓸 짓을 하는 주인😨 | 천일야사 – 조선시대 여종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동물보다 못한 노비의 삶
노비에게 몹쓸 짓을 하는 주인?
천일야사 174회
조선시대 여종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1. 주인의 성적 침탈 – 우리역사넷
특히, 조선시대에 양반 남성들은 보다 쉽게 성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 대상은 … 이 때 향복은 나이 어린 여종으로 상당(上堂)에서 이문건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3/23/2022
View: 2457
여종날 – 표제어 – 한국세시풍속사전
음력 이월 초하루를 달리 부르는 말. 여종이란 조선시대 천민 계급이었던 여자 노비를 일컫는 말로, 남자 노비들의 명절인 노비일에 대비하여 여종날이란 말이 파생 …
Source: folkency.nfm.go.kr
Date Published: 5/12/2022
View: 915
조선시대 여종의 슬픈 이야기 < 윤일광의 원고지세상 ... - 거제신문
조선 성종 때 신자치(愼自治)의 여종 겁탈사건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 참봉 신자치의 집에 외모가 뛰어난 도리(道里)라는 계집종이 있었다. 어느 날 참봉 …
Source: www.geojenews.co.kr
Date Published: 1/2/2022
View: 4029
[갓 쓴 양반들의 性 담론 ④] 불륜 | 중앙일보
조선시대 양반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 조선시대 양반들의 부적절한 성관계는 일차적으로 자기 집안의 여종들을 대상으로 했다.
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10/6/2021
View: 2300
송여종(宋汝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대: 조선; 성격: 무신; 성별: 남. 출생일: 1553년(명종 8); 사망일: 1609년(광해군 1); 본관: 여산(礪山: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경력: 녹도만호, 단성현감, …
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2/29/2021
View: 6967
노비 – 나무위키
이렇듯 이후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수가 없게 되는 … 라는 사상이 사회 전반에 펴져서, 사대부나 기타 양인이 여종을 건드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1/2022
View: 6899
칼럼-조선 여인 잔혹사(Ⅰ) – 경남도민신문
조선시대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을 살았던 여자들은 종이다. 여종들은 관노(官奴)와 사노(私奴)로 구별되는데, 관노든 사노든 15∼16세가 되면 탐욕 …
Source: www.gndomin.com
Date Published: 7/9/2021
View: 1606
조선 민중들은 지배층의 파렴치한 일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들은 신분의 굴레와 지배층들에 의한 시련을 어떻게 이겨내며 살았을까? 조선 시대 천민으로 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더더욱 여종으로 산다는 …
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2/2/2021
View: 6881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조선시대 여종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夜史야사TV] 동물보다 못한 노비의 삶? 노비에게 몹쓸 짓을 하는 주인😨 | 천일야사.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조선시대 여종
- Author: 채널A 캔버스
- Views: 조회수 622,493회
- Likes: 좋아요 3,166개
- Date Published: 2021. 1. 1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_HpExoj3uU
우리역사넷
성욕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지닌 본성 중의 하나여서 이에 대한 정서는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에 양반 남성들은 보다 쉽게 성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 대상은 여비와 기녀였다.
여비는 자색은 기녀만 못할 지라도 쉽게 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따라서 양반 주인의 입장에서 비의 성을 꺼릴 것 없이 농락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갓김치종’이라 부르기도 하고, “종년 간통은 누운 소타기보다 쉽다.”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비도 일시적으로 성적인 대상이 되기도 하고, 장기적으로는 첩이 되어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일시적으로 농락을 당하는 경우는 이문건 가의 비 향복(香福, 香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문건의 유배 생활은 그리 외롭지 않았다. 부인과 아들·며느리가 내려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을사사화에 화를 입어 경흥에 유배된 조카 염(爓)의 아들 천택(天澤)도 함께 내려와 수학하고 있었다. 이 때 향복은 나이 어린 여종으로 상당(上堂)에서 이문건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문건은 향복이 강간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에 이문건은 향복의 어미인 삼월(三月)을 불러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향복은 자신을 범한 자가 누구인지를 발설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이문건은 향복이 강간을 당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하가로 쫓아 버렸다. 강간을 당하면서 소리쳐 거절하지도 않고 누가 그러하였는지를 밝히지 않아 동정의 여지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내심으로는 강간을 당한 여종이 자신의 시중을 드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여 일 후 향복을 범한 상대가 도령이었으며, 도령이 세 차례에 걸쳐 범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처음에는 아들 온(熅)에게 혐의를 두었으나 온은 몸이 아파 누워있는 상태였으므로 결국 염의 아들 천택으로 범위가 좁혀졌다. 그러나 이문건은 천택이 향복을 강간한 사실을 알고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다만, 며칠 후에 공부를 끝내고 나서 색을 경계하라는 뜻을 전할 뿐이었다. 이후에도 향복은 차비 온석(穩石)과 통간하게 된다. 주목되는 사실은 통간한 인물보다 강간을 당한 여종에 대한 처벌이 더 가혹하다는 사실이다. 향복이 천택에게 강간을 당할 때 소리쳐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가로 내려가도록 하는가 하면, 온석과 통간하였을 때는 오히려 강간을 당한 향복을 구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에 향복은 딸을 출산하는데 그 아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이문건도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향복의 딸을 자신의 아이라고 인지(認知)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린 딸도 향복의 신분을 따라 이문건 가의 비로 사환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미 삼월(三月)—향복(香福)—딸 3대가 이문건 가의 비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필자] 이성임
내용
음력 이월 초하루를 노비일이라고 하여 노비들이 한 해 동안 열심히 수고해주기를 바라며, 음식을 대접하면서 하루를 쉬게 하였다. 그런데 남자 노비들이 주로 농사나 바깥 살림에 힘썼다면, 여자 노비들은 밭일과 집안일에 힘썼다. 따라서 여자 노비들에게도 이날 송편을 빚어 나누어주고 하루를 쉬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세시풍요(歲時風謠)』는 “풍년을 비는 초하루 봄볕이 따뜻하니, 볏가릿대 끝에 매단 주머니 풀어 내리네. 늙은 여종 부지런히 물 뿌리고 청소하니, 떡을 가장 많이 주어 배불리 먹게 하네(禳田吉日暖初陽 解下竿頭白粲囊 老婢莫辭勤灑掃 㝡多分餠飽飢腸).”라고 하였다.
또한 이날 남자 노비들에게 볏가릿대를 내려서 만든 떡을 나이 수만큼 먹게 했듯이 여자 노비에게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노비일이나 머슴날의 다른 이름인 여종날은 극히 드물게 쓰여 왔다.
조선시대 여종의 슬픈 이야기
지금 우리 사회는 ‘나도 고발한다’는 미투(Me Too)운동이 각계각층으로 불꽃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업무·고용 등으로 인해 우월한 지위에 있는 남성이 위계와 위력을 사용해서 여성을 성추행이나 성폭행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자는 게 근본 의미다. 그러나 신분관계가 철저했던 조선시대에는 상전이 자기 집 여종을 범하는 일이 흔했지만 고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세종실록’에 형조가 올린 상소에 ‘노비가 주인을 고발할 경우, 그 고발을 받지 말고 곤장 100대를 쳐서 3000리 밖으로 유배를 보내자’고 건의한다. ‘경국대전’의 ‘형전’에도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면 교수형에 처한다고 했다. 단 주인이 반역이나 역모를 꾀한 경우만큼은 예외였다. 노비의 상전은 노비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죽지 않을 만큼 때려도 처벌 받지 않았다. 그러니 주인에게 강간을 당했다 해도 엄감생심 관가에 고발할 수 없었다.
조선 성종 때 신자치(愼自治)의 여종 겁탈사건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 참봉 신자치의 집에 외모가 뛰어난 도리(道里)라는 계집종이 있었다. 어느 날 참봉은 부인 몰래 도리를 겁탈을 하게 된다. 요즘 같으면 전형적인 ‘미투’ 감이다. 그러나 종의 몸으로 상전의 노리개가 됐다고 해서 당시로서는 문제가 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신자치의 아내가 알게됐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신자치의 아내는 도리를 모든 종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발가벗겨 묶어 놓고 때리며 치욕을 줬다가, 숯불에 쇠꼬챙이를 달궈 젖가슴과 음문을 지지기 시작했다. 도리는 단지 노비였다는 이유로 신자치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의 아내에게 부끄러운 죽임을 당한 사례다.
신자치 아내는 도리의 시체를 흥인문 밖 산골짜기에 버렸다가 주민들의 신고로 알려져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게 되지만, 사람을 죽여놓고도 ‘장(杖) 100대’에 처하는 대신 경상도 땅에 부처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됐고, 신자치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조선시대 여종들의 슬픈 이야기가 미투운동을 보면서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갓 쓴 양반들의 性 담론 ④] 불륜
어떤 학자는 인간사회의 병리를 따져본 결과 ‘부적절한 관계’ 증후군으로 귀결된다고 했다.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는 일 때문에 세상이 망가진다는 주장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우선 양반들이 부적절한 성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평가했는지부터 알아보자.
미국의 전직 대통령 클린턴은 다방면에서 재주가 탁월해 언제 어디를 가나 재미있는 화제를 많이 만들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인턴으로 들어온 모니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그때는 하마터면 대통령 자리까지 날아갈 뻔했다.
역사상 수많은 명사가 이른바 부적절한 관계로 곤욕을 치렀다. 1차대전 때 독일의 여자 스파이 마타하리는 국가 기밀을 빼내려고 각국의 고위층 인사들과 연달아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어 국제적 물의를 일으켰다.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면 좀더 기막힌 일도 있다. 서양 중세의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는 조카딸을 첩으로 삼았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매독에 걸려 코가 떨어져 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듯 숱한 명사가 ‘부적절한 관계’로 침몰했다.
어느 초여름날이었다. 선비가 모처럼 말을 타고 나들이를 나갔다 큰 개울 앞에 도착했다. 개울을 건너려고 빙 둘러보니 마침 건너편에서는 아낙네들이 쪼그리고 앉아 부지런히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들 가랑이를 벌리고 있었다. 선비는 벌어진 여인들의 허벅지가 눈에 들어오자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는 상상의 불길이 타올라 오도 가도 못한 채 마상에서 군침만 흘렸다때 늙은 스님 하나가 멀리서 지팡이를 짚고 터벅터벅 걸어와 역시 개울물을 건너려고 짚신을 벗어들었다. 그때야 정신을 차린 선비가 계면쩍은 듯 말을 꺼냈다.
“초면에 실례합니다만, 노장 스님도 시를 지을 줄 아시겠지요? 제가 우선 시 한 구절을 읊어 보렵니다. 스님은 대구(對句)를 지어 보시죠?”
그 말에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변홍합개(溪邊紅蛤開, 개울가에 홍합들이 벌어져 있네).”
스님이 답했다.“속세에 사는 분이라 홍합이라는 고기(肉)를 빌려 시구를 지으셨군요. 소승은 깊은 산에 묻혀 사는 중이어서 고기는 못 먹으므로 분수에 맞게 채소로 시구를 삼겠습니다. 들어보시죠. 마상송이동(馬上松?動, 말 위에 송이버섯이 꿈틀거리고 있네).”
부적절한 관계를 꿈꾸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부적절한 성관계라고 일컬을 만할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선비의 흉중에는 이미 그런 사건이 준비되어 있었다. 선비는 말 위에 걸터앉은 채 낯선 여성들의 허벅지 사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지 않은가? 관음증 또는 성적 망상의 경미한 증거가 된다.
선비는 여성들의 두 다리에 감춰진 부분을 조개라고 불렀다. 색깔도 선정적인 붉은 조개라고 말이다. 마침 여성들은 빨래를 하느라 쪼그려 앉을 수밖에 없어 가랑이를 벌린 채였고, 속내의가 부실했던 그 옛날이라 보여서는 안 될 부분이 보일락말락했다. 선비는 그 광경에 취해 “홍합들이 벌어져 있다”며 입맛을 다셨다.
선비의 시선에는 두 가지 문제가 깔려 있다. 하나는 선비가 성적 대상으로 상정한 여성들이 익명의 낯선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선비는 성관계에 앞서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조개 타령을 읊던 선비로서는 상대 여성의 이름이 무엇이든, 나이와 출신과 성격이 어떠하든 아랑곳할 일이 아니었다. 일단 아름다운 조개라면 그의 남성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에게는 사랑보다 강렬한 성적 자극과 충동이 훨씬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또 한 가지. ‘홍합들’로 지칭된 여성들은 손빨래라는 힘든 노동에 묶여 있었다. 여성들이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의 질곡에 얽매여 있던 순간, 선비는 향락을 꿈꾸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은 노동에 사로잡혀 있으나 부와 권력의 소유자인 선비, 즉 남성은 쾌락을 추구하기에 바빴다. 성희롱과 성적 탐욕은 강자의 몫이었다.
굳이 여성주의라는 프리즘을 빌리지 않더라도, 말 탄 선비의 음침한 시선에서 성적 일탈 또는 부적절한 관계를 향한 열망을 읽어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사랑방에 앉아 이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갓 쓴 양반들도 대개는 선비의 심정을 공유했을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양반들은 총체적 의미에서 부적절한 관계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 가운데 선비의 상대역으로 등장한 노장 스님의 태도에서도 남성적 욕망이 확인된다. 스님은 “말 위에서 송이버섯이 꿈틀거리고 있네”라고 대꾸했다. 그는 선비가 성적 충동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이것은 선비의 조개타령에 대한 간접적 질책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에 앞서 스님도 벌어진 조개들을 바라보며 군침을 흘렸다는 은밀한 고백이기도 하다. 만일 스님이 선비의 심리상태에 무관심 또는 무지했더라면 결코 이런 답변을 즉석에서 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다. 좀더 과장해 말하면 스님이 말한 송이버섯은 결국 스님 자신의 흥분한 버섯이라고 단정해도 별 무리가 없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 이야기의 속뜻은 선비의 무분별함을 탓하는 데 있는 것 같으면서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텍스트는 선비든 스님이든 남성이라면 누구나 부적절한 성관계로 돌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자기고백과 자기비판을 동시에 담고 있다. 필자의 짐작대로라면 양반들은 부적절한 성관계를 무조건 비판만 하지는 않았을 법도 하다. 양반들의 생각이 어땠는지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며 좀더 생각해 보자.
“왜 이리 사슴뿔마저 불뚝 섰소”
어느 마을에 머리가 약간 부족한 농부가 살았는데, 운은 좋았던지 아내가 천하절색이었다. 하루는 먼 곳에 급한 볼일이 생겨 부득불 집을 비우게 됐다. 농부는 자기가 집에 없는 사이 혹시 누군가 예쁜 아내와 잠이라도 잘까봐 몹시 걱정이었다. 걱정 끝에 아내의 그것에 누워 있는 사슴을 붓으로 그려놓고 길을 재촉했다. 틈을 엿보던 이웃집 총각이 농부의 아내를 찾아와 간곡히 사정했다. 제발 한 번만 좀 하자고 했지만 농부의 아내는 한사코 거절했다. 총각은 까닭이나 좀 알자고 애원했다.
“바깥양반이 내 거시기에 사슴을 그려 놓고 길을 떠났으니 난들 무슨 방법이 있겠소?”
그 말을 듣고 총각은 기뻐하며 껄껄 웃었다.
“일을 마친 뒤 다시 그려 줄 테니 아무 염려 말아요.”
총각의 우뚝 솟은 콧날을 바라보자 농부의 아내는 점점 몸이 더워졌다. 두 사람은 즉시 벌거숭이가 돼 한참을 이리저리 뒹굴었다. 일을 다 마친 다음 총각이 농부 아내의 거기를 살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농부가 그려둔 사슴 그림이 많이 뭉개져 있었다.
총각은 기억을 더듬어 그림을 다시 그렸다. 그런데 기억이 분명하지 못해 누운 사슴을 그리는 대신 멀쩡하게 서 있는 사슴을 그려 놓았다. 그러고는 만족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행여 아내에게 무슨 불상사라도 일어날까 싶어 먼 길을 한 달음에 다녀온 농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내의 은밀한 부위를 자세히 살폈다. 당연히 누워 있어야 할 사슴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농부는 마구 화를 냈고, 아내는 일이 틀어진 것을 직감했다. 그럼에도 아내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꾸며댔다.
“당신은 사물의 이치를 아직 잘 모르시는군요? 사람도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데, 사슴이라고 늘 누워만 있으라는 법이 있나요?”
“그건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린 사슴은 뿔도 좀 비스듬히 자빠져 있었는데, 이 그림에는 왜 이리 뿔마저 불뚝 서 있는지 모르겠소.”한풀 기가 꺾인 농부는 푸념하듯 말했다.“사슴이 누우면 뿔도 누울 것이고, 사슴이 일어서면 뿔도 서는 것은 당연하지요. 이런 것이 세상의 이치랍니다.” 아내는 더욱 기세등등했다. 농부는 감탄을 연발하며 아내의 등을 토닥거렸다.
“맞아, 당신은 정말 모르는 것이 없어. 나는 왜 이런 것도 모르지?”
농부는 그 뒤로 아내를 더욱 사랑했다고 한다.이야기 속의 농부는 지능이 낮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자기가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어떤 남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증거를 정확히 포착했다. 그렇지만 결국 아내의 궤변에 속고 만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농부는 아내를 더욱 끔찍이 아꼈다고 했다. 영락없는 바보 이야기인 셈이다.
어찌 보면 정작 바보는 농부가 아니었다. 그는 아내의 성기에 그림을 그려 일종의 정조대를 채울 정도로 세심했다. 뿐만 아니라 농부는 자기가 그린 그림의 특성을 빠짐없이 기억했다. 부적절한 관계 뒤에 새로 그린 타인의 그림이 자기의 그림과 어떻게 다른지도 정확히 인식했다.
이처럼 철저한 농부가 아내의 거짓말 몇 마디에 꼼짝없이 속아 넘어갈 수 있겠는가? 농부는 아내의 부정을 확신했다고 본다. 하지만 그냥 덮어두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천하절색인 아내를 잃게 된다면 자신의 손해도 만만치 않으리라는 계산을 그도 할 줄 알았다.
어진 이를 만드는 스님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부적절한 관계의 당사자인 농부의 아내와 총각에 대해 양반들은 전혀 비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총각은 갓 쓴 양반들의 표상으로 읽힐 만하다. 양반들은 총각에게 면책특권을 줌으로써 자기들 스스로의 일탈 욕구를 긍정적으로 수용한 셈이다.
농부의 아내에게도 면책을 허용했다는 점이 내 관심을 끈다. 이 부분은 우리가 막연히 짐작하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억압된 성 의식과 다르다. 양반들은 여성의 성적 욕망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한마디로 잘라 대답하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양반들의 성 담론에서 확인된 한 가지 사실은 양반들이 부적절한 성관계에 빠질 위험이 전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다. 양반들의 이런 확신은 독신생활을 하며 수도에 전념하는 스님들에게도 적용됐다.
이름난 스님이 한 분이 있었는데 글쓰기에 탁월했다. 골계(滑稽)에도 뛰어나 인기를 끌었다. 그런 스님이었건만 바람기만은 좀체 극복하지 못했다. 그 시절 관서지방에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미모가 수려했을 뿐만 아니라 시문(詩文)도 잘 지어 명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스님은 벼르던 끝에 그 기생을 찾아갔다. 둘 다 시를 잘 쓰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실력을 겨루기로 했다. 먼저 기생이 운(韻)을 정하고 스님은 그에 맞춰 시를 읊조렸다.
“그대의 아름다움 정말 고와라.정이 깃든 그대 교태 내 마음 사로잡네.어둠 속에서 그대를 만난다면 내 간장 무쇠라 한들 어찌 녹아나지 않을쏘냐.”기생은 스님이 자기에게 마음을 두고 있음을 눈치채고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스님이 어찌 여인을 거느릴 수 있습니까” 하며 아양을 떨었다. 스님이 답했다.“거느리지 않지만 거느릴 수는 있지. 옛날 아란존자는 석가여래의 큰 제자였는데, 마등가라는 여인과 서로 통했느니라. 그렇다고 해서 아란은 중이 아니요, 마등가는 여자가 아니었다는 말이냐?”
기생이 되물었다. “스님께서도 그 재미를 아시나요?”“그대는 내 인생의 진미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구나. 불교에는 극락세계가 있느니라. 내가 그대의 옷을 벗겨 엉덩이를 살살 간질이고 나서 그대 그곳을 깊숙이 꿰뚫으면 바로 거기 극락의 재미가 있느니라. 그것이 다름 아닌 극락세계로다! 그 순간에 이르러 그대는 나의 참됨을 알게 되리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기생은 입 안의 침이 말라왔다. 침을 삼키며 가까스로 하는 말이 “요놈의 얄미운 대머리여! 알았다니깐요”였다. 다시 스님이 대답했다. “그대는 내 윗대머리만 알았지 아래 있는 대머리는 아직 구경도 못했느니라. 당장이라도 그대에게 아랫대머리 맛을 보여주고 싶다. 나무관세음보살!”스님은 기생을 끌어안고 조용하나 힘차게 그 일을 시작했다. 기생은 너무 황홀해 숨이 넘어갈 듯했다. 기생은 속삭이듯 말했다. “스님은 정녕 나를 속이셨소. 스님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본업인데 어찌 나만은 이렇듯 죽이시나요?”
“자고로 불법이 신통해 사람이 사물을 죽게 만들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느니라.”마침 그 순간 어떤 사람이 방 안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 엿보다 놀라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니, 스님! 지금 무슨 짓을 하십니까?” 스님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나라를 위해 어질고 훌륭한 아이를 만드는 중이다”하며 마지막 기운을 쏟아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너나없이 다들 웃었다.
이 이야기에는 길게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핵심은 부처님의 법과 계율을 따라 수행에 정진하는 고승이나 성현(聖賢) 말씀대로 수신제가(修身齊家)에 힘쓰는 고사라도 성적 충동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는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을 살펴보아도 선비들의 부적절한 성관계가 자주 발견된다.
세종 때 부사정(副司正) 벼슬에 있던 김방은 안숭직이라는 선비의 기생첩 금련과 몰래 간통했다. 선비 노회신 역시 금련과 간통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김방은 화가 치밀어 자기 집 종들을 거느리고 노회신을 찾아가 마구 구타했고 말안장과 산호 갓끈 등 기물을 몽땅 때려부쉈다. 형조로부터 이 사건을 보고받은 세종은 김방에게 무거운 벌금형을 내렸다.(세종 14년 3월23일)
젊은 양반의 산나물 타령
따지고 보면 김방이나 노회신은 선비의 체면을 돌보지 않고 남의 첩을 건드렸다. 상대 여성이 기생 출신이어서 나름대로 합리화할 소지는 있었다. 어쨌든 김방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연적인 노회신에게 앙갚음을 했다 도리어 처벌받았다는 이야기다.
연적과의 경쟁을 불필요하게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경제적 타산 때문이었을까? 금련 같은 기생에게는 아무래도 대가성 선물을 제공해야 성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시·공간적으로 편리해서였을까?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조선시대 양반들의 부적절한 성관계는 일차적으로 자기 집안의 여종들을 대상으로 했다. 갓 쓴 양반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아래 이야기를 한번 읽어 보자.
어느 젊은 양반이 여종을 몹시 탐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아내가 잠들면 몰래 여종의 처소로 나가고는 했다. 그런 일이 워낙 자주 있다 보니 아내도 눈치를 챘다. 아내는 잠든 척하며 바깥양반의 꼬리를 밟기로 작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내는 살금살금 양반의 뒤를 밟았다. 행랑채 문틈으로 마침 단잠을 깬 여종이 양반의 요구를 거절하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리는 왜 하필 흰떡 같은 부인을 버려두고 못나고 하찮은 저한테 오셔서 자꾸 못살게 구십니까?”“부인이 흰떡이라면 너는 산나물이다. 음식을 먹을 때도 그렇지 않으냐? 먼저 떡을 맛있게 먹고 그 다음에 나물을 먹지 않는다면 소화가 안 되느니라.”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양반은 여종과 입을 맞추며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었다. 아내는 잠자리로 되돌아갈밖에 달리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이튿날 젊은 양반 내외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안방에서 무슨 일인가를 상의하게 됐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잔 젊은 양반은 자꾸 하품을 했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다 겸연쩍었던지 혼잣말을 했다.
박저생, 아내를 쇠꼬챙이로 때려
“요즘 이런 병이 생겼으니 참으로 괴이하다. 괴이해!”젊은 양반의 아내가 그 말을 받았다. “그야 물론 다른 까닭이 있을 턱이 없지요. 날마다 그리도 많은 산나물을 잡수신 까닭이지요.”시아버지는 마침 나물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어디서 산나물이 나서 나도 안 주고 너만 혼자 그렇게 많이 먹었느냐”며 진지하게 캐물었다. 얼굴이 붉어진 젊은 양반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 버렸다.
딱히 아내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도 젊은 양반은 집 안에서 딴 짓을 했다. 실은 늙은 양반들도 많이들 그랬다고 한다. ‘부부간에는 손님처럼 대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을 지키느라 아내들에게 내밀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해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육체노동에서 해방된 선비들이어서 정력이 남아돌아 그랬을까? 또는 그저 단순히 정력을 과시하는 것이 사회적 습관이라서 그랬는가? 지금 제기된 가능성은 일단 개연성이 있어 뵈는데 실상은 좀 더 다차원적이고 다중적이었을 수 있다.
위에서 읽은 예화를 음미해 보면 아내가 남편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간접적이고 소극적인 질책만 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문제의 장본인인 젊은 양반도 자신의 바람기를 적극 변호하지 않는다. 그들 부부는 서로 적절히 타협했다. 아내는 눈치껏 알아서 견제했고, 남편은 요령껏 아내의 눈을 속였다. 여종도 어느 정도는 그 관계를 즐기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그러나 이런 평화 공존은 한낱 갓 쓴 양반들의 희망에 불과했을 수 있다. 역사적 실상은 좀 더 직접적인 투쟁 또는 거칠고 복잡한 대립관계가 일반적이었다. 일례로 세종 때 고관을 지낸 이맹균이라는 양반 집안 이야기를 잠깐 해 보자. 이맹균의 부인 이씨(李氏)는 남편이 여종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나자 질투심이 발동해 여종을 때려 죽였다. 이 일이 문제가 돼 세종은 이맹균을 관직에서 파면했고, 이씨 부인에게 수여했던 작첩(爵牒)도 박탈했다.
사건 당시 이씨 부인의 나이는 70세에 가까웠는데, 슬하에 자식이 전혀 없었다. 당시 양반들은 이 일을 두고 이맹균을 탓하기보다 그의 부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실록의 편찬자들도 노파의 “질투가 지나쳐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세종 22년 6월17일)
사회 일각에서는 남편의 부적절한 관계를 둘러싸고 부부싸움이 극단으로 치닫기도 했다. 태종 때 박저생이라는 고관이 있었는데, 그 집안이 정말 그랬다. 박저생은 본래 색을 밝히는 편이었는지 한번은 지방관으로 나갔다 기생놀음에 빠져 파면되었다. 서울 본가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집안의 여종들을 늘 가까이했다. 질투를 느낀 아내가 반대하고 나서자 박저생은 조리 도구인 쇠꼬챙이로 아내를 마구 때렸다. 마침 장인이 조정 대신이어서 박저생을 사헌부에 고발했다. 결국 그들 부부는 조정의 명령으로 이혼했다. 그리고 박저생은 경상도 사천으로, 그 아내 이씨는 전라도 김제로 귀양 갔다.(태종 2년 6월11일)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설도 있지만 워낙 심하다 보니 국가가 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이쯤 되면 완전히 패가망신한 꼴이다. 바로 이런 극단적 예에 비추어 갓 쓴 양반들은 부부간에 그저 알아서 눈치껏 적당히 통제하고 눈감아주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의견이 제출된 것 같다.
마님의 찢어진 아랫배를 꿰매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예에서는 부적절한 관계를 주도한 쪽이 한결같이 남성들이었다. 농부의 아내와 총각의 경우는 모호한 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경우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성관계를 맺자고 먼저 애걸한 쪽은 남성이었다. 그렇다면 양반들의 담론에서 여성이 부적절한 관계를 주도한 예는 영영 찾아볼 수 없을까?
어느 양반의 부인이 친정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주인 양반은 부득불 종놈을 하나 따라가게 했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염려돼 바보 종놈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평소 가장 바보스러워 뵈던 노총각 종 막돌을 떠보았다. “막돌아! 너 옥문을 아느냐?”
막돌은 모른다고 대답했고, 양반은 다소 안심이 됐다. 그때가 마침 여름이어서 모기 한 마리가 달려들자 막돌은 되물었다. “나리, 저게 금방 말씀하신 옥문 아닌가요?” 양반은 마음이 놓여 안심하고 부인 행차에 막돌을 붙여 보냈다. 막돌은 마님을 모시고 길을 떠나 한참을 가다 함께 개울을 건너게 됐다. 물이 너무 깊어 막돌은 마님을 업어 건네지 못했다. 그들은 갈아입을 옷이 없어 속옷까지 다 벗고 건너게 되었다. 마님이 보았더니 막돌의 물건이 큼직한 것이 아주 좋아 보였다. 마님이 막돌을 희롱했다.
“네 다리 사이에 고기 막대기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이냐?”
“예, 본래 어렸을 적부터 자그만 혹이 하나 있었습죠. 나이를 먹으면서 이게 자꾸 커져 이만해졌습니다.”
그러자 마님이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나도 본래 두 다리 사이에 움푹 팬 데가 있었는데 점점 커져 이제는 깊은 구멍이 되고 말았구나. 네 고기 방망이로 깊이나 한번 재 보았으면 좋으련만!”
이 말을 들은 막돌은 몸뚱이에 불이 타올라 견딜 수 없었다. 마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개울을 건너자마자 누가 보거나 말거나 정신없이 그 일을 했다. 양반은 마누라를 떠나보내 놓고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동네 산꼭대기에 올라가 살피고 있었는데 믿었던 바보 종 막돌과 마누라가 한창 그 짓을 하고 있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양반은 소리 소리치며 쫓아갔다. 막돌은 태연한 표정으로 송곳과 노끈을 꺼내 무엇을 고치는 시늉을 했다.
“마님이 말에서 떨어지셨는데 온몸을 살펴보니 배꼽 아래 한 치 정도 째진 데가 있어 그냥 놔두면 풍독(風毒)이 생길 것 같았습죠. 그래서 지금 구멍을 꿰매려는 중이옵니다.”양반은 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서라. 그 구멍은 날 때부터 있는 것이니 그냥 놔둬도 일없다!”
양반이 아내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제 아무리 노력해도 그 한계는 명확하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마님은 사내종 막돌의 씩씩한 물건이 탐났고, 막돌도 마님의 곱고 부드러운 속살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들은 대문을 벗어나기 무섭게 상대방의 몸을 희롱했다. 결국 바보가 되고 만 사람은 두 사람을 굳게 믿었던 주인 양반뿐이다.
마님과 사내종의 부적절한 관계는 발각되었다. 그때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마님은 기절한 것으로 가장해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도 모르는 체했다. 꾀 많은 ‘바보 종’ 막돌은 다시 바보 노릇을 연출해 위기를 무난히 넘겼다.
그러나 이야기에서처럼 사내종과 안방마님의 부적절한 성관계는 극히 드물었다. 여종과 주인 양반의 관계가 매우 흔했던 것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일탈의 관계를 주도할 마님의 권력이 주인 양반에 비해 워낙 열세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으로 마님의 탈선은 주인의 장기 부재 또는 죽음을 기화로 삼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성의 부적절한 관계는 용서하지 않았다
이쯤에서 다시 구체적 예를 살펴보자. 성종 때 사내종 막산이 자기의 옛 마님과 동거하다 발각됐다. 본래 주인 양반 강순은 역모 사건에 관련돼 사형을 당했다. 강순이 죽은 지 한 해도 안 돼서 마님은 막산과 정을 통해 아이를 낳았다. 마님은 강순이 역적으로 처벌되는 바람에 남의 집안 여종으로 신분이 강등됐다.
종이 되고 만 그녀는 막산의 아내가 되기를 갈망했다.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그녀는 막산의 본처를 매로 때려 쫓아내고 자기가 그 집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양반 노릇을 못할 바에야 사랑하는 막산과 함께 가난하지만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양반들은 타락한 여성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사헌부 관리들은 이 사건을 국왕에게 보고하면서 요점을 이렇게 간추렸다. “그 여인은 음탕하고 더럽기 짝이 없습니다. 윤리를 땅에 떨어뜨렸으므로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형법에 따라 그 여인과 막산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풍속을 바로잡으소서.”
본래 양반의 아내였던 한 여성이 집에서 부리던 사내종의 아내로 변신해 종의 자녀를 낳아 기르며 산다는 사실을 양반들은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고 못박았다. 마침 그 무렵에는 사면령이 선포돼 있어서 웬만한 죄는 모두 용서받았다.
그럼에도 양반들은 여주인과 사내종의 부적절한 관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임금도 양반들의 의견을 따랐다.(성종 2년 3월17일) 국왕과 양반들은 마님 출신 여성의 부적절한 관계를 조선사회의 기본질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내가 하면 연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것이다.
무예를 익히고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여러 차례 실패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안군수(樂安郡守) 신호(申浩)의 막료로서 종군하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한산도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다. 또 왕에게 올리는 이순신의 보고문을 가지고 밤새 적진 사이를 돌파하여 행재소(行在所)에 이른 공으로 술잔을 하사받고 녹도만호(鹿島萬戶)에 임명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7년 원균(元均)의 휘하에 있다가 한산도에서 패전하였지만,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기용되자 그의 휘하에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녹도만호로서 조·명연합군과 함께 나아가 적선 6척과 적군 70명을 포획하였다.
1599년 단성현감, 1600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이어 사복시정·임류진첨사(臨溜鎭僉使)·흥양현감 등을 거쳤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고, 이 해 곤양군수(昆陽郡守)를 거쳐 1607년 경상좌도우수군우후(慶尙左道右水軍虞候)에 이르렀다.
칼럼-조선 여인 잔혹사(Ⅰ)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조선 여인 잔혹사(Ⅰ)
저작권자 © 경남도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날만 새면 성희롱이니 성폭행이니 성에 관한 사건이 하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니 ‘조선시대 여인의 잔혹사’를 2회에 걸쳐 되돌아보고자 한다. 창세기에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한 배필로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딱하여, 전적으로 남자를 돕는 배필의 역할을 받은 것이 여자라는 존재다. 그러나 남자들이 자신의 영원한 동반자로 지어진 여자를 학대하면서 창조 질서에 혼란을 빚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조선시대를 살았던 여자 중에,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을 남긴 여성들의 이야기는 되짚어보기도 끔찍할 정도다. 음란하다는 이유 한 가지로 참혹하게 살해되고, 첫사랑을 잊지 못한 죄로 참수형을 당한 여인, 그리고 전처의 자식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박살(撲殺)을 당한 여인들의 사연 앞에서 이 시대의 우리는 모두가 옷깃을 여며야만 할 것 같다. 당시의 사회제도와 남성들은 어떻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었던가? 우리는 요즘 무심하게 ‘박살을 낸다’는 말을 자주 쓴다. 그러나 ‘박살’이야말로 형벌 중에 가장 끔찍한 형벌이었다. 죽을 때까지 매를 때려서 죽이는 형벌이었다. 간음을 하면 남자들은 벼슬에서 파직되거나 귀양 가는 것에 그치지만, 여자들은 최고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태종 때 14세의 소년을 사랑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늙은 관찰사에게 시집가야만 했던 유씨가 옛 사랑을 잊지 못해 다시 그를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발각되자 남자는 귀양을 가고 여자는 참수되었다.조선시대는 여자들에게 절개를 강요했다. 절개는 개가(改嫁)하는 것을 억제했고 남편을 따라 죽어야 열부(烈婦)나 절부(節婦)가 되어 훌륭한 여인으로 칭송 받고, 개가를 하면 실절(失節)했다고 하여 가문(家門)의 수치가 되고 직계 가족들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했다. 단순하게 음란하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이유만으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살해하거나 오라버니가 여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전쟁이 일어나면 여자들이 더욱 불행해진다. 적국의 병사들에게 유린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당한 여자들은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쫓겨나기도 했다. 갈 곳이 없는 여자들은 자살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수많은 양반가의 여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강화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기록에만 60명이 훨씬 넘는다. 강화도 방어의 책임을 맡았던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부인들이 대책을 묻자 빨리 자결하라고 부인과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를 다그치기까지 했다. 결국 김경징의 아내 박씨, 김진표의 아내 정씨는 자살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강화도 방어의 책임을 맡은 김경징과 아들 김진표는 비열하게 달아나서 두고두고 양식 있는 사대부들의 비난을 받았다. 여자들의 가장 큰 고통은 사랑이다. 남자는 1처 2첩, 3첩을 거느리며 여종들을 비첩으로 삼는 일도 있으나, 여자들은 결코 두 남자를 거느릴 수 없었다.태종 때 박저생의 여종 파독(波獨)은 여종으로서 주인의 첩이 된 여자였는데 아들의 첩을 아비가 취하고 아비가 죽자 아들이 다시 첩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을 살았던 여자들은 종이다. 여종들은 관노(官奴)와 사노(私奴)로 구별되는데, 관노든 사노든 15∼16세가 되면 탐욕스러운 주인의 성적인 노리개가 되었다. 주인을 거절하면 매를 맞다가 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주인이 종을 학대하거나 살해해도 관청에 고발할 수가 없었다. 종의 신분은 세습이 되었다. 특히 종모법이라고 하여 종의 자식은 어미가 소속되어 있는 주인에게 세습되었다. 종이 되는 것은 나라에 죄를 지은 경우 그 가족들을 관비로 보내거나 공신들에게 노비로 하사한 경우가 많았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한명회 등과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그 가족들을 공신들에게 노비로 하사했다. 사육신이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다가 실패했을 때도 그들의 가족들 수백 명이 모두 노비로 전락했다. 또한 조선시대에 신분적으로 고난을 받은 여자들은 기생들이다. 특히 관기의 경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관리들의 수청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하여 자식을 낳아도 남자는 양육에 대해서 의무도 없고 책임도지지 않았다. 아들을 낳으면 관노나 천민이 되고 딸을 낳으면 기생이 되어 어머니의 업을 이어받았다.
조선 민중들은 지배층의 파렴치한 일을 어떻게 견뎠을까
조선 시대 천민으로 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더더욱 여종으로 산다는 것은 짐승으로 살아가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종들은 주인의 소유물이라서 매매를 하거나 사사로이 벌을 내리기도 했다. 그래서 종은 주인이 이유 없이 형벌을 내리거나 팔아도 항변할 수 없었다. 심지어 종은 주인을 고발할 수도 없었다. 여종은 주인에게 겁탈을 당하기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종모법에 따라 아이도 종이 되었다. 다른 집 사내종과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아도 역시 어미인 여자 종을 따라 종이 되었다.남편이 있는 여자 종이어도 주인은 함부로 겁탈하고 사통했다. 사통을 거절하다가 매를 맞아 죽는 일도 허다하게 벌어졌다. 여종이 종살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치면 추쇄꾼에게 잡혀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매를 맞고 얼굴에 노(奴)라고 자자(얼굴이나 팔에 죄명을 문신하는)를 당하기도 했다. 세종 때 문장가로 유명한 권채도 자신의 여종에게 가혹한 짓을 하여 ‘문장은 아름다우나 사람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 <조선시대 민중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16~217쪽 큰사진보기 ▲ 책표지. ⓒ 북오션 관련사진보기 얼마 전 종영한 한 사극에서 사람들을 우리에 진열해놓듯 가둬두고 매매를 기다리는 노비시장 모습이 나와 당혹스러웠다. 조선시대, 노비는 맘대로 파고 살 수 있는 물건과 같은 존재였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필요에 따라 아는 사람끼리 거래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처럼 시장을 형성했을 거란 상상조차 못했다.드라마에서는 전주관찰사가 일반 백성들을 잡아 가뒀다가 노비시장으로 공수해주는 장면도 나왔다. 지배층의 악행으로 노비만이 아닌 사람들의 삶까지 통째로 흔들린 것이다. 드라마라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에 바탕을 뒀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 복잡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다.사실상 일부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위해 만든 신분제도에 불과한데도 그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대를 물려 핍박받으며 살아야만 했던, 그것으로도 모자라 지배층들에 의해 삶이 통째로 흔들리기도 했던 조선의 민중들. 그들은 신분의 굴레와 지배층들에 의한 시련을 어떻게 이겨내며 살았을까?성종 때였다. 유효손이라는 자가 자신의 여종 효양에 대해 저지른 짓은 참혹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유하는 수양대군이 권력을 쥐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당시 내금위로 수양대군 편에 서서 큰 공을 세워 정난공신이 되었다. 이후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가 왕권을 잡는데도 큰 공을 세워 문산군에 봉해지는 한편 많은 재물과 노비(종)와 첩을 소유하게 되었다.유효손은 첩이 낳은 자식이었다. 게다가 중인 출신의 첩이 낳은 서자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천민 출신의 첩이 낳은 얼자였다. 하지만 여러 명의 노비를 거느리는 등 어지간한 양반보다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았다. 정난공신들이 여전히 활개 치는 그런 세상이었기 때문이다.어느 날 우연히 효양을 보게 된 유효손은 기회다 싶으면 덮치는 등 호시탐탐 효양을 노렸다. 열아홉 살이지만 이미 혼인까지 한 효양이었다. 그러나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겁탈하는 주인들이 많은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유효손은 그럴 때마다 "주인 말을 듣지 않았다"거나, "도망치려고 했다"는 거짓 이유로 심한 매질을 한 후 굶어 죽기 직전에 이를 때까지 며칠씩 광에 가두곤 했다. 또한 걸핏하면 민감한 부분들만을 골라 희롱하듯 매질하거나, 피투성이가 되도록 몽둥이를 휘둘러 효양은 멀쩡할 날이 없었다. 고통을 못 이겨 체념하고 받아줄 것이란 계산에서였다.효양에 대한 탐욕과 학대는 계절이 몇 차례 바뀔 정도로 오래 지속되었는데, 그런데도 굴복하지 않자 벌겋게 달군 인두로 몸을 지진다. 그런 후 발목을 뚫어 삼줄로 꿰어 묶어 두거나 개처럼 기어 다니며 살게 한다. 그런데 그로 그치지 않고 걸핏하면 효양에게 침을 뱉어 모욕하는가 하면 걷어차곤 했다고 한다. 동물에게도 해서는 안 될 짓을 당연한 듯 저지른 것이다.유효손의 포악은 성종의 귀에도 들어간다.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혼인한 여종마저 맘대로 겁탈하는 파렴치한이 지배층들의 상식이긴 했지만, 유효손처럼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목을 뚫어 묶어놓고 개처럼 살게 하는 것은 해도 너무한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사건 당시 효양의 어머니를 비롯한 효양의 남편 등 일가족이 유효손의 노비로 살고 있었다. 성종은 효양과 그 가족들의 속공(사노에서 관노로 만듦)을 제안한다. 효양처럼 사사로운 탐욕에 희생될 확률이 낮은 관노가 사노보다 대체적으로 덜 힘들었기 때문이다.성종의 제안은 노비에서 아예 벗어나게 하자가 아니다. 조금 나은 조건의 노비로 살게 해주자였다. 그런데도 대신들의 벌떼처럼 일어나는 반대에 부딪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반대 이유는 "노비를 엄하게 다루지 않으면 사나운 노비들이 주인에게 반발한다"와 같은 논리였다. 그런데 대신들만이 아닌 여러 부서의 관리들까지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에게 영향이 미칠지도 모른다는 계산에서였다.성종이 뜻을 굽히지 않고 여러 차례 진노하며 강제한 덕분에 효양과 일가족은 속공된다. 이런 유효손 사건은 조선 시대 노비들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말해주는 동시에 당시의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신분 유지와 사사로운 욕망을 위해 얼마나 파렴치했으며 졸렬했는지를 잘 말해준다.유효손이 효양에게 저지른 포락지형은 중국 상나라의 폭군 주왕이 했던 것인데,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로 악명 높았다. 그래서 당시 국가에서도 시행하지 않던 금지된 형벌이었다. 말하자면 국법까지 어긴 것이다. 그럼에도 유효손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풀려났다고 한다.유효손의 학대로 효양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졌다. 그럼에도 노비에서 벗어나기는커녕 그나마 좀 낫다는 관노로 바뀌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노비를 비록 하찮은 신분이지만 그래도 생명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처사가 과연 마땅했을까?(북오션 펴냄)는 효양처럼 조선의 지배층들에게 짓밟히며 살았던 민중들의 고달프고 애잔한 이야기다.조선 시대 지배층은 왕족과 양반이었지만 사실상 조선을 이끈 것은 대다수 민중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생활상 혹은 삶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배층 위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옛사람들의 이야기들도 지배층 위주다. 민중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기 위한 부속물 중 일부로 비춰지곤 한다. 혹은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조선 민중들의 여러 유형의 삶을 한권에 담았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의미 남다르게 와 닿는다.책은 세금을 내지 못해 집을 빼앗기고 떠돌며 아이들과도 생이별해야만 하는 농사꾼의 아내 이야기를 시작으로 종(노비), 여자 백정, 평민 여성, 기생, 악공, 떠돌이 장사꾼, 역관, 의원, 과부 등, 두루뭉술하게 혹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민중들의 삶을 들려준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조선시대 여종
다음은 Bing에서 조선시대 여종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夜史야사TV] 동물보다 못한 노비의 삶? 노비에게 몹쓸 짓을 하는 주인😨 | 천일야사
- 천일야사
- 역사
- 야사
- 정사
- 곱덕
- 마의
- 마방
- 노비
- 추노
- 오응규
- 최곳대
- 문안비
YouTube에서 조선시대 여종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夜史야사TV] 동물보다 못한 노비의 삶? 노비에게 몹쓸 짓을 하는 주인😨 | 천일야사 | 조선시대 여종,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