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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YTN 탐사보고서 ‘기록’은 80년대 5공화국이 만든 대규모 민간인 수용 시설 문제를 집중 보도하고 있습니다.오늘은 부산 형제복지원의 형제라고 할 수 있는 대전 천성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족벌경영과 세습 문제, 그리고 대규모 수용시설의 구조적 문제를 고발합니다.
한동오 기자입니다.
[기자]형제복지원과 같은 문제가 불거졌던 대전 성지원과 세종 양지마을.
20여 년이 지난 지금 시설의 덩치는 더 커졌습니다.
[원용철 / 목사 (대전 노숙인 쉼터 ‘벧엘의 집’ 운영) : 대재벌이라고 보통 표현을 합니다. 복지재벌.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요.]두 시설 운영자였던 노재중 씨도 여전히 건재합니다.
사회복지법인 천성원이라는 이름 아래 대전에선 노 씨의 첫째 부인과 세 아들이 12개 시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천성원 관계자 : (아드님이신 것 같은데 시설장이세요?) 네. 평강의 집 원장님이 노OO 원장님. (노OO 선생님은?) (법인) 학교에 계시고…. 노OO 씨는 (법인) 병원에서….]세종에 있는 4개 시설은 법인 분리를 거쳐 둘째 부인과 두 딸에게 물려줬습니다.
[前 충남 연기군 공무원 (80년대 부랑인 수용 업무) : (천성원) 이사회에서 분리해 주면 돼요. (엄밀히 말하면 천성원이 손해 보는 거잖아요.) 그 이사들이 다 그 사람의 사람이야. (노재중 씨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사람이니까 말이 안 되는 거예요.]천성원 법인은 수익사업에서 적자가 나는데도, 백억 가까운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해왔습니다.
과거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이 법인 수익사업을 하며 돈을 차입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당시 박 원장은 이 과정에서 돈을 빼돌려 시설과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줬습니다.
[이성재 / 변호사 (98년 양지마을 ‘햇볕 작전’ 참여) : 아버지가 잘못했으니 자식도 잘못했어, 그렇게 하면 정말 안 돼요. 저도 그건 반대하는데, 그렇게 접근하기보다, 투명하면 누가 해도 괜찮습니다.]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존재하는 사회복지법인의 세습.
거대한 복지 공룡으로 성장한 형제복지원의 형제들.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우리는 왜 이들을 계속 주목해야 하는지,
오늘 저녁, YTN 탐사보고서 ‘기록’ 5공화국의 강제수용소 3부작 3번째 편에서 방송됩니다.
YTN 한동오입니다.
▶ 기사 원문 : https://www.ytn.co.kr/_ln/0103_202009270214154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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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가족의 충격적인 근황(+아들) – 살구뉴스
이러한 사건의 주범인 원장 박인근은 대한민국의 사회사업가이자 폭력, 강간, 살인범으로 형제복지원을 설립한 인물입니다. 1930년생 경남 울산에서 …
Source: www.salgoonews.com
Date Published: 2/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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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근 – 나무위키:대문
형제복지원 원장 … 그 부녀는 아직까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피해자의 아들은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가족을 힘들게 부양하고 있다.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17/2021
View: 1479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충격적인 실체..박인근 원장 아들 근황(+ …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당시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부랑아 퇴치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과 1984년 각각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
Source: m.post.naver.com
Date Published: 3/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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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형제들] 12번째 증언 `호적 등본 떼보니, 아버지가 …
아버지 이름 칸에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 이름 석 자가, 자신은 그의 아들로 등록돼 있었다. 강 씨의 친부, 어머니가 재혼한 새 아버지, …
Source: www.busan.com
Date Published: 5/13/2021
View: 7003
박인근 아들!! 재산 1000억원 환수 못하는 이유는?
이번 주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에서는 형제지옥원에 대해 파헤쳐 봅니다. 바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입니다. … 형제복지원원장 박인권.
Source: hsj8404.tistory.com
Date Published: 6/28/2022
View: 6902
형제복지원 원장 아들 “우리 아버지도 인권 있다” 발언 재조명 …
7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형제복지원’에 대해 다룬 가운데 원장의 아들이 “우리 아버지도 인권이 있다”는 태도를 보인 모습이 재조명 …
Source: www.joongboo.com
Date Published: 3/19/2021
View: 5568
박인근 일가 ‘복지 재벌’로 떵떵거리고 산다 – 시사저널
박 원장의 자녀는 3남4녀로 파악됐다. 형제복지원의 후신인 사회복지법인 ‘느헤미야'(재단)는 셋째 아들인 박천광씨가 물려받았다. 박씨는 2011년 1월 …
Source: www.sisajournal.com
Date Published: 2/11/2022
View: 8608
형제복지원 박인근, ‘악행의 말로’를 추적하다 – 한겨레
형제복지원 3부는 원장 박인근의 60살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 박인근과 아들이 검찰 수사를 받던 지난 1월27일, 이 학교 법인의 대표 …
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7/26/2022
View: 3359
형제복지원 박인근 아들 사건 형제복지원 박희태 수사외압 – 중계
1987년 3월22일 직원들의 구타로인해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집단탈출하면서 형제복지원 실체가 드러난것입니다.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 형제복지원은 수천명에 …
Source: coconism.tistory.com
Date Published: 12/29/2022
View: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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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형제복지원 원장 아들
- Author: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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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9. 2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FUdPFkI9t8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가족의 충격적인 근황(+아들)
‘꼬꼬무 시즌3’ 에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루며 형제복지원을 운영했던 박인근 원장과 박씨일가에 대해서 재조명이 되며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부산의 위치한 형제복지원에서 1975∼1987년까지 일어난 인권 유린사건으로, 일반인들을 납치하였고, 불법감금은 물론 강제노역, 구타, 성폭행, 살인, 암매장, 시신판매 등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긴 인권 유린 사건입니다.
형제복지원 측은 이들을 불법감금한 뒤 강제노역은 물론 구타·성폭행 등 끔찍한 학대를 가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에 대해 암매장을 자행하면서 그들의 만행을 철저히 은폐했습니다.
실제로 형제복지원이 운영된 12년의 기간 동안 확인된 사망자는 5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중에 70%가 노숙자가 아닌 가족과, 멀쩡한 직장이 있는 일반인들이였습니다.
소름돋는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
이러한 사건의 주범인 원장 박인근은 대한민국의 사회사업가이자 폭력, 강간, 살인범으로 형제복지원을 설립한 인물입니다. 1930년생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직업군인출신으로 근무하다 장인이 운영하는 부산 형제육아원에 드나들며 사회복지사업에 발을 들였습니다.
당시 박인근 원장은 “장애인은 나를 먹여살리는 상품”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1980년대 초까지 고아, 장애인을 돕는 복지사업은 헌신적인 봉사정신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사재를 털어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박 원장은 ‘복지사업으로 돈을 버는’ 방식을 국내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만들어냈고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이를 가로채는 수법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언론을 통해 사건이 드러나기 전에 박원장이 운영하던 ‘형제재단’은 생계급여, 교육급여, 운영비, 인건비 등을 부산시로부터 보조받았습니다. 받은금액만 2007년 9억원, 2008년 9억7000만원, 2009년 9억4000만원, 2010년 10억1000만원, 2011년 11억원 등이었습니다.
이후 세상에 알려지게 되며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법원에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던 박인근은 출소한 이후 법인 이름을 재육원, 욥의마을, 형제재단 등으로 수차례 바꾸면서 복지사업과 수익사업을 병행했습니다.
박 원장의 최측근에 따르면, 생전에 그는 “축적한 재산을 가족들한테 한 개씩을 다 물려줬다”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재산은 목욕탕 사업을 하는 데 쓰이거나 호주 골프장을 구입하거나 이런 비용으로 지출이 됐습니다. 박인근의 재산을 은닉하고 재산을 불리는 데 쓰였던 부분입니다.
형제복지원 건물은 이 사건 이후 대부분 폐쇄되고 일부만 다른곳으로 활용 되다가 2001년 건설사에 팔아 200억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남겼습니다.
부지가 매각된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는데,공사중 약 40~50여구 유골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찾을 생각도 안하고 죄다 무연고 처리후 납골시설들에 안치시키고 말았습니다.
해당사건이 언론 시사프로그램들을 통해 재조명이 되자 2014년 뒤늦게서야 부산시에서 형제복지원 법인(느헤미야)를 청산에 착수했으나 1000억원대로 알려진 박인근원장의 재산은 빼돌릴때로 빼돌려서 빈껍데기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참고로 박인근은 2011년 4월7일까지 형제재단에서 이사로 활동하면서 사우나, 해수온천, 스포츠센터 등을 운영했습니다.
이후 형제재단은 박인근의 셋째아들은인 박천광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며 형제복지원의 후신인 사회복지법인 ‘느헤미야’(재단)을 물려받았습니다.참고로 박천광은 형제복지원을 운영하다 구속되어 3년의 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박천광은 느헤미야 재단 자금을 빼돌린 혐의(횡령)로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 받았지만 재산은 제대로 회수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셀프청산이라 불리우는 적자청산 때문이었습니다.
느헤미야 법인 재산이었던 9개 부동산이 감정가 292억보다 낮은 231억에 처분, 당시 법인부채가 272억으로 43억 원가량의 부채를 남긴 채 적자 처분됨에 따라 국고환수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한 관계자는 박천광이 형제재단을 물려받은 이유에 대해 “장남과 차남은 전처의 자식이라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박인근 일가와 자녀들의 재산, 근황은?
현재 박인근의 가족들은 온천, 헬스장, 부동산임대사업과 야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 호주에 골프장이 포함된 대형 스포츠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에도 호주 골프장을 소유하는 등 상당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박인근의 재산에는 호주 시드니에 골프장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 박인근은 이 해외 부동산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차명으로 송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해당 골프연습장은 박인근의 셋째 딸과 사위에게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박인근의 자녀와 사위들은 노인요양원·정신과병원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박 원장의 첫째 딸은 사회복지법인 신양원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86년 8월 설립된 신양원은 2008년 8월부터 박인근 원장이 직접 대표이사를 맡다가 2010년 12월부터 2012년 8월, 2013년 5월부터 2014년 1월까지 박 원장의 큰딸이 대표이사를 맡았습니다.
신양원은 경남 김해시 생림면에 위치한 대안 위탁 교육기관인 신영중·고등학교와 샘터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목사인 남편 김 아무개씨도 학교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둘째 딸의 경우 의사인 남편 김씨가 울산에서 정신과병원을 운영 중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병원은 13층 규모의 빌딩에 들어서 있는데 이 빌딩의 소유주가 김씨였습니다.
해당 건물의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김씨가 이 빌딩을 매입한 것은 2006년 5월이었는데, 복잡하게 얽혀 있던 채권 관계가 정리돼 소유권 이전이 완료된 것은 2009년 7월 말이었습니다. 형제재단의 대저동 토지 대금 중 일부가 이 빌딩의 상환금으로 쓰였다는 부산시의 특별점검 결과와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집니다.
셋째 딸 부부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호주 시드니에 위치한 한 레포츠센터를 운영하는 등 해외 부동산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넷째 딸은 한동안 실로암의 집에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시사저널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기장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실로암의 집 점검 결과’ 문서를 보면 2012년 9월에 실시한 점검에서 ‘법인 대표이사와 특수관계에 있는 자를 운영위원회 등을 통한 공개 채용 절차 없이 채용한 점이 부적정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와 관련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넷째 딸이 사회복지 관련 전문 지식이나 자격이 없는데 특채로 고용했다가 기장군청의 점검 때 걸렸다”고 밝혔습니다. 이 인사는 “실로암의 집이 이전하게 되면 넷째 딸이 맡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넷째 딸의 남편은 부산에서 한 사회복지법인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이 씨로 알려졌습니다. 이 재단은 정신요양원·노인요양원·건강센터·노숙인쉼터 등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씨의 경우 이 재단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부 사업의 경우 장인인 박 원장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현재 박인근 일가의 재산들은 상당한 수준이며 그 재산은 고스란히 유지되며 부가 대물림 되고 있습니다.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이 다시 재조명을 받는 요즘이지만, 정당히 죗값을 한참 더 치러야 마땅할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은 지난 2016년 6월 86세의 나이로 이미 사망했습니다.
그의 가족과 자녀들은 자산들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복지사업, 등을 이어오며 상당한 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도 인권을 잃어버린 수많은 피해자들은 진상규명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형제들] 12번째 증언 ‘호적 등본 떼보니, 아버지가 ‘박인근’으로…’
부모 있는 아이들도 마구잡이 끌려와
박인근 원장 아들로 호적 올리기도
1987년 이슈화, ‘박종철 사건’에 묻혀
보급 안 돼 7년 전 ‘아동 옷’ 입고 퇴소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최근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잊고 싶은 이름, 원수보다 더한 존재가 ‘아버지’라니…
형제복지원에서 벗어난 지 10년. 자동차를 사기 위해 호적 등본을 뗀 강철민(51·가명) 씨는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 이름 칸에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 이름 석 자가, 자신은 그의 아들로 등록돼 있었다.
강 씨의 친부, 어머니가 재혼한 새 아버지, 그리고 서류상 아버지인 박인근 원장까지. 강 씨에겐 아버지가 3명인 셈이다.
어린 시절, 뿌리에 대한 혼란은 강 씨를 밖으로 돌게 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고향을 떠나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 소년의집에서 생활하다 2년 뒤 부산 형제복지원으로 이첩됐다.
강 씨는 싸움을 잘한다는 이유로 곧바로 ‘아동소대’ 조장을 맡았다. 이후 7년 내내 아동소대에서 조장으로 생활했다. 아동소대를 거쳐간 원생들 중 ‘하마(물을 많이 먹어서 붙은 별명)’ 조장을 모르는 이는 없다.
소대원 관리를 위해 조장들은 몽둥이를 들었다. 때리지 않으면 조장들이 ‘총반장’에게 맞았다. 일반 소대원들에겐 ‘중대장’, 간부들은 ‘총반장’이라 불렀다.
강 씨는 자신이 살기 위해 아이들을 때렸지만 뒤에서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밖에서 만났다면 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이었다.
1987년 형제복지원 참상이 담장 밖으로 알려지면서 다같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깥 세상의 부정적인 시선 탓에 ‘형제복지원’이 적힌 옷을 그대로 입을 순 없었다. 사복은 지급되지 않았다. 7년 전 입소 당시 입었던 옷을 찢어서 걸쳤다.
강 씨가 유일하게 내세울 건 ‘주먹’이었다. 체육관에 들어가 복싱을 시작했고, 서울 올림픽을 목표로 삼았다.
국가대표 선발 최종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시합 전날 술을 많이 마셨고, 결국 링에 오르지 못했다. 꿈은 사라졌다.
이후 어둠의 세계로 빠졌다. 업소를 돌며 삥을 뜯어 생활했다. 교도소도 들락날락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마지막 출소를 했다. 서울에서 경호원 생활을 하다 지금은 사촌형이 운영하는 건설사에서 일하고 있다.
1990년대 사촌형으로부터 연락이 온 적이 있다. 아파트 건설 공사를 맡아달라는 제안. 주례동 산 18번지. 형제복지원이 있던 자리였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땅을 파면 무엇이 나올지 알고 있었다. 강 씨는 사촌형을 설득했고, 따낸 입찰권을 포기했다.
한종선, 최승우, 김대우…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정부 진상조사까지 이끌어낸 동생들이다.
강 씨는 그저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앞장서서 그 일을 해주고 있는 동생들이 고맙다.
그는 피해자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이 이뤄져야 하지만 본인은 괜찮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3명인 채로 살아야 했던 시절. 돈으로 보상받을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야기>
■ 졸지에 3명이 된 아버지
내가 등본 뗄 일 있어가지고. 차 사려고요. 1997년인가. 이때 등본을 떼보니까…
주소는 ‘부산시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형제복지원 주소)로 돼 있고… ‘부(父). 박인근'(형제복지원 원장).
형제복지원에 있던 부모 애들 보면 대충 다 그랬어요. 아버지가 ‘박’. 박인근…
공무원들은 후처와 결혼해 살아도 호적을 못 올렸다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호적이 없이 살았거든요. 계속. 그때 제가 이름도 몰랐었고요.
엄마가 재혼을 했어요. 그 아버지 성함이 ‘박’ 씨였거든요. 제 원 호적은 ‘강’ 씨인데.
이리로 가면 치이고… 집에 있으면 강 씨 아버지 오면 열받고요. 이리로 오면 이번엔 박 씨 아닙니까. 그러니깐 나는 어차피 이 세상에 나올 사람도 아닌데… 라고 생각했죠.
제가 아버지를 96년도에 찾았거든요? 강 씨 아버지를요.
(2004년에) 돈 1000만 원을 주고 그 당시 호적을 다 바꿨는데. 바꿀 때 참 허무하더라고요. 내가 원 이름 놔두고 아무도 모르게 살다가…
기분이 안 좋지요. 왜냐면, 나도 내 부모가 있는데 왜 이 사람(박인근)이 내 아버지가 돼야 되는지.
(형제복지원에서) 보낸 세월도 서글프지만. 잊고 싶은데 자꾸 나온다 아닙니까… 박인근… 박인근… 이름 석 자가… 이 갈리지요.
만약에 내 입장 같았으면 어떡하겠습니까. 부모는 한 명입니다. 그런데 ‘부’가 세 명이에요.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세월… 그거 어떻게 할 건데요. 이거는 보상문제가 아니거든요.
그 어린 나이에 엄마하고 부모하고 손 잡고 학교도 가고 싶은데. 가지도 못하고… 갇혀가지고 있고… 그 세월 다… 누가 보상해줄 건데요.
■ 맞는데 이유는 없어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무작정 서울로 간 거예요. (서울)소년의집에서 부산 형제복지원으로 넘어왔거든요. 나이가 차다 보니까 이첩된 거죠.
제가 싸움을 잘해서 처음부터 조장이었거든요. 조장 같으면… 상당한 파워예요.
나머지 아이들은 좀 비참했다고 봐야죠. 저 같은 사람(간부)은 상관 없는데 일반 애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거 못하고 부모 손도 못 잡고. 그런 애들 많다 아닙니까.
아무 이유 없이 온 애들이 많아요… 이유 없이… 가다가 학교 가다가 잡혀온 애들도 많고.
밑에 애들은 힘이 없으니까. 만약 소대장이 때리라고 하면 때릴 수밖에 없었거든요. 우리가 안 맞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패도… 참 돌아서서 많이 울어요 나도. 왜냐면 나도 저만한 애들… 동생도 있을 거고…
관리 치고는 너무 빡세게 했죠.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되니까. 마음이 안 편하지요. 티이틀만 그거(조장)인데 마음은 안 그렇지요.
7년을 (조장) 했습니다. 제가 마지막 형제복지원 폐쇄될 때까지 있었거든요.
(최)승우나 (한)종선이 같은 경우는 다 내 밑에 있었거든요. (김)대우(*’살아남은 형제들’ 02번째 증언자)도 있었어요.
저도 많이 맞았죠.(간부들 중에서도) 총반장이 있거든요.
(간부들은 중대장을 ‘총반장’이라고 부르는 건가요?)
네. 기합 받다가 맞아가지고 여기 찢어졌거든요 여기.
(총반장한테 맞아서?)
예. 맞아도 피나도… 내가 살려고 하면 애들한테 가서 혼내고.
애들은 맞으면 ‘왜 맞지?’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게 이유 없이 맞는 거예요. 누구 한 사람이 잘못하면 한 사람 때문에 애들 다 맞는 거예요.
진짜 오갈 데 없는 애들이 왔으면 이해를 해요. 다 부모 있는 애들인데. 하루 아침에 애가 없어지면 부모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도 애 있으면 똑같은 심정일 거고. 만약 그 사람들의 자식이 (거기) 있다고 하면 아마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빽 없고 아무 것도 없다 보니까 그냥 무조건 끌려가야 되고… 맞아야 되고…
■ 맞아서 실려나간 뒤 사라진 아이들
(형제복지원 안에서 뭐라고 불리셨어요?)
‘하마’라고 불렸죠. 하마라고 했어요. 물을 많이 먹어가지고.
저기 ‘까마귀'(김대우) 있잖아요. 승우 재우… 재우는 죽었지요. 최승우(*’살아남은 형제들’ 03번째 증언자) 동생(재우)이 죽었거든요.
저 아이(김대우) 형이 김경우(*’살아남은 형제들’ 07번째 증언자)예요. 형제간도 많이 있었어요. 그때 거기.
‘사건’은 좀 많지요. 사람이 맞아서 정신이 혼미… 혼수상태가 온다 아닙니까. 우리는 어디 갔는지 몰라요.
일단 의무실에 가긴 가는데. 근데 얘가 가면 안 돌아와요. 과연 그 애가 어디 갔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 경우가) 많지요. 상당히. 수십 건 수백 건 되겠죠. 아마도요.
조장들은 서로 열람할 수 있거든요. 물어볼 수도 있고. “오늘은 무슨 일 없었냐” 그렇게 물어보면 “우리 소대에서 누가 오늘 나갔는데 애가 안 돌아오더라”.
그러면 집에 갔는가? 이상하거든요?
(박인근 원장을) 내가 한 여섯 번 봤을 거예요. 교회에 있을 때부터 시작해가지고. 우리가 다 짓고 난 다음에 이용복 가수가 와가지고. 혹시 아실 겁니다. 장애인 가수 있잖아요.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 외부인한테 알리는 거지요. 사실은 그게 아닌데. 일단 보여주기 식이죠.
(박인근 원장은) 혼자 오는 게 아니고 경호처럼 여러 명이 주변에 딱 붙습니다. 혹시 해코지할까 봐.
애들은 이제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앙심’밖에 없거든요. ‘내가 점마(박인근) 때문에 왜 여기 왔지?’. ‘내 부모가 있고 다 있는데’.
■ 사라진 올림픽 출전 꿈
식사는 영 안 좋다고 봐야죠. 밖에서 따지면 ‘최하’ 있잖아요. ‘최하’보다 더 심한 거예요. 사람이 먹을 것이 아니지요.
일종의 뭐 ‘짬밥’이라 보면 되지요. ‘짬밥’. 그거 버리긴 아깝고. 안 먹으면 애들 배고프다 아닙니까. 그럼 먹어야 돼요. 그걸 먹어야 살지요.
(형제복지원 안에 학교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예. ‘개금분교’가 있었어요. 모든 게 통제되니까 내가 가서 배운들 뭐 하겠습니까. 인생 포기한 상태지요.
그해에 아마 ‘박종철’ 사건 났을 거예요. 그때 다 묻혔거든요. 이 형제복지원(사건)이 싹 다 묻힌 거예요. 그때 언론에서 막 왔다가 그냥 다 올라가 버렸어요. 전부 다.
원생들 전부 퇴소 조치가 내려지면서 며칠 걸려서 나왔지요… 하루 만에 다 나온 게 아니고요
내가 들어갔을 때 그 옷이 있을 거 아닙니까. 7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니 옷이 작아요. 그걸 그대로 입고 나오는 거예요.
안에서 입던 추리닝은 뒤에 ‘형제복지원’ 글자가 적혀 있어서. 사람들 시선이 안 좋기 때문에…
(입소 당시 옷이) 작으면 옆에 째거든요. 째서 이렇게 좀 벌려요. 옷을 갖다가.
형제복지원 나오고 철길 건너면 외부로 나가거든요. 가게나 슈퍼 가서… 남는 옷 달라 해가지고. 그건 일종의 ‘구걸’이지요
혹시 오광수 씨 알지요? 복싱 선수. 그 사람하고 내가 88년 서울 올림픽 나가려고. 복싱 선수 하다가 내가 최종전에서 떨어졌거든요.
(최종전 경기) 전날 선배랑 술 먹고. 그래서 경기를 못 나갔지요. 배운 거라곤 뭐 싸움박질밖에 없으니까. 운동을 해서 올림픽 나가려고 했다가 못 나갔고요.
그러니까 뭐 있습니까. 밖에 나가서 이제… ‘어둠의 세계’에서 굴렀지요.
깡패 생활도 하고. 배운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 ‘주례동 산 18번지’ 그곳엔…
생활은 어차피 가게 가서 좀 뺏들고. 업소 가서 유흥업소 가서 좀 뺏들고.
노태우가 ‘범죄와의 전쟁’ 선포했다 아닙니까. 선포한 그해에 제가 (교도소) 들어가서 7년 살고요. 30대 40대 이때는 그런 생활을 많이 했지요.
마지막에 나온 게 2002년 그때 월드컵 보고 나왔거든요. (교도소) 안에서. 나와서 이제 경호팀에 좀 있다가. 경호원 생활 좀 하고요.
부산 온 지는… 2011년도에 왔으니까요. 11년도에 이 업을 시작했거든요. 건설쪽…
‘주례동 산 18번지’ 여기를 저희가 공사를 하려다가… 입찰했다가 제가 하지 말라고 했어요. (사촌) 형이 대표이사를 보니까…
“이거는 포기를 하자” “내가 집 못 짓는다”
(아파트 짓는 거 말씀이시죠?)
예. 그걸 제가 알기 때문에… 파면 뭐가 나온다는 걸 알 거 아닙니까. 거기에 내가 솔직히 있었고. 그렇게 고생 다 했는데… 거기 누가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 짓죠.
나는 경호원 할 때도 국회의원 경호해주라 하면 절대 안 하거든요. 가서 맞든가 말든가. 우리는 이만큼 고생해가지고 컸는데. 지는 앉아서 가만 있잖아요 월급만 받고.
제가 김형오 씨하고는 한 4년인가 같이 근무했거든요. 국회의장요. 하다 보니 이제 열이 살살 받더라고요. ‘내가 뭐 때문에 해줘야 되지?’
내가 승우하고 종선이 보고 이랬습니다. “나는 돈 다 싫고… 너희가 한 건 잘했다” “잘했고 이걸 알린 거에 대해선 고맙다”.
내가 만약에 형제원 안 가고 밖에 있었으면 아마 더 잘됐을지 모르죠.
지금은 좀 마음 편한 게. 어차피 드러난 거… 그것만 해도 만족하죠.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email protected]
박인근 아들!! 재산 1000억원 환수 못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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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에서는 형제지옥원에 대해 파헤쳐 봅니다.
바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입니다.
1975~1987년까지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 고아 등을 부산의 형제복지원에 불법감금하고 강제노역시킨 대표적인 인권 유린사건으로 영화 ‘도가니’의 실존이야기 이자 한국판 아우슈비츠 사건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부산 형제복지원은 4,300여 명의 일반인을 납치하여 감금한 후 상해치사와 고문과 폭행이라는 범죄를 저질렀으며,
납치된 여성의 경우에는 미성년자 소녀까지 성폭행과 성고문을 통해 노예로 만들어서 강제노동에 투입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6년간 51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형제복지원원장 박인권
형제복지원을 지배하던 독재자 박인권은 직업군인 출신으로 고아장사를 통해 수 많은 재산을 축적했으며 그의 재산은 대략 1000억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심지어 513명 살해가 발각된 이후에도 형제복지원은 재육원, 욥의마을, 형제복지지원재단에 이어 2013년 2월에 “느헤미야” 로 법인명을 변경하며 법의 제한사항 없이 박인근과 그의 가족들에 의해 멀쩡히 경영해 왔습니다.
온천, 헬스장, 부동산임대사업과 야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 호주에 골프장이 포함된 대형 스포츠센터 등 그 재산은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1987년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이 형제복지원과 관련에 수사에 착수했으며 징역 15년에 벌금 6억 8천 1백 78만원을 구형했으나 계속되는 재판에서 징역 4년, 징역3년 그리고 1989년 특수감금을 무죄로 판단 최종 벌금없이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박인근의 사회사업가로서의 공과에 대한 평가 등 정상을 참작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박인근은 2016년 6월 27일 사망하였고 이미 공소시효도 지나서 어떠한 처벌도 불가능해졌습니다.
최근 수많은 시사고발프로에서 형제복지원사건을 재조명하는 이유는 바로 박인근의 숨겨진 재산환수 때문 입니다.
2014년 뒤늦게서야 부산시에서 형제복지원 법인(느헤미야)를 청산에 착수했으나 1000억원대로 알려진 박인근원장의 재산은 빼돌릴때로 빼돌려서 빈껍데기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박인근의 아들은 재단 자금을 빼돌린 혐의(횡령)로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 받았지만 재산은 제대로 회수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셀프청산이라 불리우는 적자청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이 법인 청산과정에서 감정가보다 터무니없이 낮은 액수로 적자 매각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었습니다.
느헤미야 법인 재산이었던 9개 부동산이 감정가 292억보다 낮은 231억에 처분, 당시 법인부채가 272억으로 43억 원가량의 부채를 남긴 채 적자 처분됨에 따라 국고환수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 잔여재산 환수를 위한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과 함께 박인근 원장 일가의 호주 골프장, 일부 은닉 재산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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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원장 아들 “우리 아버지도 인권 있다” 발언 재조명
사진=뉴스타파M 캡처
7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형제복지원’에 대해 다룬 가운데 원장의 아들이 “우리 아버지도 인권이 있다”는 태도를 보인 모습이 재조명되고 있다.
과거 2014년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27년 전 끝내 밝혀지지 않고 묻혀버린 부산 형제복지원의 진실을 파헤쳤다. 형제복지원은 지난 1975년 부산시와 부랑인일시보호사업 위탁계약을 맺고 국가보조금을 지원받으며 3천여 명의 부랑인을 수용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은 무연고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을 납치해 감금, 폭행 및 구타와 강제 노역을 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형제복지원 박 원장은 7번의 재판 끝에 업무상 횡령, 초지법 위반, 외환관리법 위반만 인정돼 징역 2년6개월 만에 출소했고, 새로운 법인을 설립해 현재는 ‘복지재벌’로 살고 있어 시청자들의 공분을 샀다.
게다가 해당 방송에서 형제복지원을 운영해 온 박모 원장의 아들은 인터뷰를 시도하는 ‘뉴스타파’ 취재진에게 “야, 우리 아버지는 인권 없나? 어? 우리 아버지는 인권 없나?”라고 말하며 멱살을 잡는 등 난폭한 행동을 보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한편 7일 방송된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는 ‘형제복지원’ 관리자들의 최초증언을 따라 ‘아동소대’에서 벌어진 해외 입양과 암매장, 시체소각 의혹을 추적했다.
정영식 기자
박인근 일가 ‘복지 재벌’로 떵떵거리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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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처분한 돈 자녀들 유입…첫째·넷째 딸 부부 사회복지 사업, 둘째 사위 정신과병원 운영
최악의 인권 탄압을 저지른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가족은 지금도 부산·경남 지역에서 ‘복지 재벌’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시사저널이 박 원장 일가의 재산을 추적한 결과 가족 대부분이 사회복지 관련 재단이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둘째 딸의 남편이 울산에서 빌딩을 소유한 채 정신과병원을 운영 중인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또 넷째 딸의 남편이 사회복지법인 대표이사를 맡아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박 원장의 자녀는 3남4녀로 파악됐다. 형제복지원의 후신인 사회복지법인 ‘느헤미야’(재단)는 셋째 아들인 박천광씨가 물려받았다. 박씨는 2011년 1월 사임한 아버지 대신 재단 대표를 맡았다. 해당 법인의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올해 2월 대표직에서 물러났지만 재단 운영의 실질적인 권한은 여전히 박씨가 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 내부 사정에 밝은 복수의 인사들에 따르면 첫째와 둘째 아들의 경우 상속 경쟁에서 동생인 셋째 아들에게 밀려 재단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박인근 원장의 첫째 딸이 대표를 맡았던 사회복지법인 신양원에서 운영 중인 김해시 소재의 대안학교. ⓒ 시사저널 박은숙
느헤미야 재단은 부산을 비롯한 영남 일대에 상당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대출금을 갚지 못해 대부분 가압류된 상태인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시 사상구 괘법동에 위치한 사상해수온천은 재단의 대표적인 수익 사업이었다. 대지 2필지 4006㎡에 5층 건물로 이뤄져 있는데 재단은 이 온천의 리모델링을 명분으로 2005~2009년까지 부산 저축은행으로부터 118억원을 대출받았다. 현재 142억2000만원의 근저당이 설정돼 있으며, 부산지방법원이 지난해 10월 임의경매 개시를 결정했다.
재단이 운영 중인 ‘실로암의 집’을 이전하겠다고 밝힌 부산시 북구 덕천동 임야 2만6087㎡와 인근 대지 1252㎡도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과 울산지방법원으로부터 가압류된 상태다. 울산시와 경주시에 위치한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울산시 북구 정자동 일대 4필지 6289㎡와 산하동 일대 2필지 4178㎡, 구유동 3003㎡도 울산지방법원에 가압류돼 있다. 경주 양남면 상라리 일대 2필지 8만7339㎡는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과 울산지방법원 두 곳에서 가압류 결정을 내린 상태다.
박인근 원장의 넷째 사위가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진 노인요양원. ⓒ 시사저널 박은숙 2000년대 들어 부동산 대규모 매각
시사저널이 부산시로부터 확보한 재단의 부동산 목록 가운데 실로암의 집만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다. 개인에게 3000만~1억2000만원, 한국전력공사와 부산도시가스에 5000여 만원씩의 채무가 있어 가압류돼 있지만 해당 부동산 가격이 72억원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그리 큰 금액은 아니다. 2011년 11월 한국감정원은 이들 부동산의 총 가치가 221억2000여 만원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앞서 재단은 2000년대 들어 상당량의 부동산을 팔아치웠다. 2001년 7월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일대 10필지 1만329㎡ 대지를 울산시 강남교육청에 3억9000여 만원의 보상금을 받고 매각했다. 2001년 12월에는 당시 실로암의 집이 있던 부산시 사상구 주례동 대지 2만9012㎡와 건물을 한 지역 건설사에 223억8000여 만원을 받고 팔았다. 이어 2009년 6월에서 9월까지 부산시 강서구 대저1동 일대 8필지를 21억5000여 만원에 매각하고, 2011년 12월에는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에 위치한 5층짜리 레포츠센터를 한 인테리어 업체에 48억2000여 만원을 받고 팔았다.
그런데 재단이 이런 식으로 부동산을 매각한 돈이 박 원장의 자녀들에게 흘러들어갔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부산시가 2012년 8월에 실시한 특별점검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일부 드러났다. 대저동 토지와 레포츠센터 매각 대금 48억2000여 만원 가운데 박 원장 개인 용도로 3억7000만원이 빠져나갔고, 둘째 사위인 김 아무개씨 소유 빌딩의 상환금을 지원하는 데 10억8000여 만원이 사용됐다는 것이다.
박인근 사위들, 노인요양원·정신과병원 운영
박 원장의 첫째 딸은 사회복지법인 신양원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6년 8월 설립된 신양원은 2008년 8월부터 박인근 원장이 직접 대표이사를 맡다가 2010년 12월부터 2012년 8월, 2013년 5월부터 올해 1월까지 박 원장의 큰딸이 대표이사를 맡았다. 신양원은 경남 김해시 생림면에 위치한 대안 위탁 교육기관인 신영중·고등학교와 샘터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목사인 남편 김 아무개씨도 학교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 딸의 경우 의사인 남편 김 아무개씨가 울산에서 정신과병원을 운영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병원은 13층 규모의 빌딩에 들어서 있는데 이 빌딩의 소유주가 김씨였다. 해당 건물의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김씨가 이 빌딩을 매입한 것은 2006년 5월이었는데, 복잡하게 얽혀 있던 채권 관계가 정리돼 소유권 이전이 완료된 것은 2009년 7월 말이었다. 재단의 대저동 토지 대금 중 일부가 이 빌딩의 상환금으로 쓰였다는 부산시의 특별점검 결과와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다. 셋째 딸 부부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호주 시드니에 위치한 한 레포츠센터를 운영하는 등 해외 부동산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넷째 딸은 한동안 실로암의 집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시사저널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기장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실로암의 집 점검 결과’ 문서를 보면 2012년 9월에 실시한 점검에서 ‘법인 대표이사와 특수관계에 있는 자를 운영위원회 등을 통한 공개 채용 절차 없이 채용한 점이 부적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넷째 딸이 사회복지 관련 전문 지식이나 자격이 없는데 특채로 고용했다가 기장군청의 점검 때 걸렸다”고 밝혔다. 이 인사는 “실로암의 집이 이전하게 되면 넷째 딸이 맡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넷째 딸의 남편은 부산에서 한 사회복지법인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이 아무개씨로 알려졌다. 이 재단은 정신요양원·노인요양원·건강센터·노숙인쉼터 등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 재단의 지난해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시설 4곳의 정부 보조금이 34억3000여 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씨의 경우 이 재단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사업의 경우 장인인 박 원장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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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박인근, ‘악행의 말로’를 추적하다
[토요판] 커버스토리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제3회 ① 악행의 말로
형제복지원 대하3부작 제3회-박인근 출소, 그 뒤
▶ 형제복지원 3부는 원장 박인근의 60살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1987년부터 국가기록원, 부산시, 기장군청에 남겨진 법인 관련 자료, 박인근의 재산을 추적하기 위한 오스트레일리아와 국내 등기부등본, 시민단체 부산사회복지연대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자료,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신문기사를 바탕으로 인간 박인근의 말로를 입체화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회입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 참회하고 국가가 지나간 과오를 사과하는 날을 기대합니다.
인간의 말로에는 생의 지나간 시간들이 퇴적돼 있다. 1980년대 대통령 표창을 받고 전국 최대의 부랑아 시설을 이끌며 복지계 영웅으로 전성기를 보낸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1987년 추락한다. 특수감금 혐의 등으로 구속돼 2년6개월을 보낸 박인근은 1989년 7월 교도소를 나와 달라진 세상을 목격한다. 올림픽을 앞두고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며 경제가 호황에 접어들었고 1990년대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기 시작했다. 산업의 축은 경공업을 지나 중공업, 전자, 서비스 산업으로 선진화되고 있었다. 감금된 원생의 노동력을 착취해 봉제공장 등을 가동하던 박인근은 바뀐 세상에서 새로운 복지왕국을 꿈꾼다. 복지시설을 줄여 수익사업을 다각화하고 원장에서 사업가로 변신한다. 한 차례 추락했을 뿐, 형제복지원 대표이사로 쉽게 재기한 박인근은 자신의 성공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친구가 부회장으로 있는 부산상호저축은행의 화수분 같은 대출 창고는 쉽게 돈을 내주었다. 돈과 인맥, 거짓말과 술수로 사람을 움직이니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박인근은 머리 위로 폭우를 머금은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돌아오지 못할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email protected] 화려한 부활, 브레이크 없는 질주의 끝
출소 이후 박인근의 행적을 추적하다 등장인물 원생 감금·착취 대신 새로운 술수로 사람들을 죽이다 민가를 벗어나 좁은 길을 따라 산턱으로 2㎞쯤 걸어 갔을까. 단감 밭과 야산이 둘러싼 어둠 속 폐교는 철조문으로 막혀 있었다. 철조문 너머 1642평 대지에 들어선 학교의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운동장을 중심으로 교실과 기숙사, 식당으로 쓰이던 5층짜리 건물 세 동에 학생들이 오지 않은 지 오래다. 언제 닦았을지 모를 교실의 창문들마다 불은 꺼져 있었다. 운동장 왼쪽에 자리한 건물의 창문 한곳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학교 정문을 두드렸지만 소리가 운동장을 넘어 빛이 새나오는 건물까지 전달될 리 없었다. 2014년 9월25일, 시계는 오후 7시10분을 가리켰다. 사회복지법인 느헤미야(옛 형제복지원)의 수익사업인 부산시 사상구 괘법동 사상해수온천. 5층짜리 건물과 붙어 있는 교회도 재단 소유다. 이 교회 목사는 지난 2~5월 느헤미야 대표이사를 맡았다. 박유리 기자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빛은 사고 당시 이 학교를 소유한 복지법인 신양원의 대표이사 박아무개(49), 학교장이자 박씨의 남편인 김아무개(54)의 거처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이들은 폐교에 살고 있다.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2008년 8월29일부터 신양원의 대표이사를 지냈고 2010년 12월14일 첫째딸인 박씨에게 넘겨주었다. 박인근은 배아무개씨로부터 이 법인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인근과 아들이 검찰 수사를 받던 지난 1월27일, 이 학교 법인의 대표이사는 허아무개(54)씨로 바뀌었다. 박인근의 지인인 허씨는 두 차례 김해시장에 출마했다 낙마한 인물로 형제복지원(형제복지원은 이미지 세탁을 위해 재육원, 욥의 마을, 형제복지지원재단, 느헤미야로 줄곧 법인명을 바꾼다)의 각종 행사에 참석해왔다. 김해시 생림면 신영중고교
학생 2명이 물에 빠져 죽은
비극적 사건 뒤부터 폐교가 된
이곳서 산다는 박인근 딸 부부
“박인근도 부근서 요양” 소문 군수와 주민 반대 뚫고 추진한
중증장애인 시설 ‘실로암의 집’ 공사
산허리 깎아 만들어 경사 40도
2002년 폭우 4명 파묻혀 죽자
박인근 “내가 죽였냐?” 악을 써 “저 불빛 보이지? 교장 부부만 사는데, 저래 보여도 한때는 건물 세 동 있는 멀쩡한 학교였어. 내가 학교 경비를 했는데 참, 경비가 쉬워 보이지? 아냐. 아이들이 도망갈까봐 밤마다 문이란 문, 틈이란 틈은 다 확인해. 아이들은 늘 도망칠 궁리를 했거든. 학교는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으려 했어. 애들이 나가면 정부 보조금이 줄잖아. 박인근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삼사일에 한번은 이 학교에 왔어. 와서는 직원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면서 1987년 구속이 됐지만 자기가 힘이 세서, 무죄여서 감옥에서 나왔다고 했어. 박인근 아들은 비엠더블유인가, 벤츠인가 외제차 타고 다녔고. 몇 년 전이었던가, 김해의 공무원이 감사를 나왔지. 그 여자 공무원이 1987년 사건을 입에 올리자 박인근, 딸, 사위 셋이서 난리, 난리를 쳤어. ‘당장 사과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 쉽게 말해서 좀 별난 가족이었어. 요즘 박인근은 보지 못했고, 딸 부부는 시커멓게 선팅이 된 봉고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데 동네에 걸어다니는 걸 본 적은 없어. 그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과 교류도 안 하고, 차로 왔다 갔다만 해. 왜 그런지 알아?” 집 앞 흰 가로등 아래 선 노인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옅게 웃었다.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크고 비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리니까. 뒤가 막, 구리니까.” 형제복지지원재단이 소유한 수익사업 가운데 하나인 부산 사상구 괘법동 사상해수온천과 맞붙은 건물 5층에 살았던 박인근은 최근 경남 김해시 생림면에서 요양 중이라고 그의 측근이 말했다. 건강이 악화돼 딸의 집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박인근 일가는 그러나 폐교 밖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박인근과 아들은 법인 자산을 횡령한 혐의로 지난 3월 재판에 넘겨졌다. 아들 박천광(38)만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검찰을 통해 뇌경색 진단서 등 의료 기록을 재판부에 제출한 여든다섯살의 박인근은 법정에 한 차례도 출석하지 않았다. 박인근은 아들과 사건이 분리됐고 재판이 중지돼 있다. 1975~1986년 원생 513명 숨진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영원히 심판받지 않을 자로 삶의 끝을 맺을지 모른다. ② 투기적 인간, 박인근
③ 그해 여름의 폭우
④ 욕망의 끝
⑤ 심판과 구원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전편 다시보기]
글 박유리 기자 [email protected]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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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사건은 1975년~1987년까지 당시 전국 최대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이었던 부산형제복지원에서 12년간 일어났던 인권 유린 사건입니다. 1987년 3월22일 직원들의 구타로인해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집단탈출하면서 형제복지원 실체가 드러난것입니다.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
형제복지원은 수천명에 달하는 무연고 장애인과 고아, 노숙인등을 강제로 격리 수용하고 노역 폭행하였습니다. 특히나 형제복지원이 운영되었던 시기는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 이유로 전국 부랑자 단속이 가장 심했던 시기였습니다. 때문에 사건에 연루된 혐의자들이 공권력을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월 27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피해자들을 만나 사과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늘 이 자리만으로는 부족하지만 형제복지원 피해자분들의 아픔이 회복되길 바라며 피해자와 피해자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인권유린 사태가 다신 발생치 않도록 검찰 본연의 역할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은 당시 왕처럼 군림하였으며 충성만하면 여자 원생들을 강간, 성희롱, 성폭행을 해도 아무도 터치하지 못했습니다.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1989년 9월14일에 2년 6개월형을 받았으나 이미지 세탁후 개신교 집사가 됩니다. 또한 형제복지원을 이름을 바꿔 운영하게 되는데 2014년 느헤미야라는 이름으로 형제복지원 박인근 아들이 운영, 셋째아들은 실로암의집을 만들어서 운영했습니다.
또한 지난 4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수사 외압의혹으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을 조사했었습니다. 당시 부산지검장이었던 박희태 형제복지원 수사외압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형제복지원 박희태 전 의장은 기억못한다고 잡아뗐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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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족벌경영·세습…형제복지원은 지금도 살아있다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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