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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소개 : [홍교수의 성서특강 : 칭의의 본질]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r
∎강사소개 : 홍순원 교수(협성대학교 교수 /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 국제 학제간 연구소 연구위원)\r
∎강의내용\r
∎본 강의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홍순원 인문학연구소’ 블로그를 통해 제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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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주는 교훈 < 신학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품꾼은 천국 일꾼을 의미합니다. 포도원에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았던 것처럼 하나님나라에서 할 일이 …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5/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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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와 구원의 이해
주를 좇는 자의 보상을 설명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마태는, 그것과 관련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Source: www.bonhd.net
Date Published: 1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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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 : 포도원 품꾼 이야기>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는 밀과 함께 1세기 유대인 청중에게는 가장 친숙한 포도가 등장한다. 아울러 포도원을 배경으로 그 포도원의 주인, 비유를 듣는 청중의 상당수도 …
Source: www.aladin.co.kr
Date Published: 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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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3- 포도원 품꾼 이야기 – 두란노서원
22살때부터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나는 성경을 읽으며 마태복음의 포도원 품꾼 비유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12시간을 꼬박 일한 일꾼과 1시간 일한 일꾼에게 …
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3/29/2021
View: 9051
[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포도원의 주인과 품꾼 비유(1)
그 후 예수님은 이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는지 부연 설명을 하신 게 오늘의 비유이다. 이 비유의 대략은 이렇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
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1/2/2022
View: 4005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 20:1-16) – 네이버 블로그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고 말합니다. 또한 주인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옳지 못하느냐”라고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16/2022
View: 1575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 20:1-16) – 기멀전
1)품꾼은 자신의 주인만 섬깁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품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4/8/2021
View: 9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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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
- Author: 메타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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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12.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rDQahaqlQFU
뉴스앤조이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품꾼은 천국 일꾼을 의미합니다. 포도원에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았던 것처럼 하나님나라에서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아침 일찍부터 일꾼을 부르듯이 하나님께서도 천국 확장을 위해 일꾼을 부르십니다. 이 비유에서 아침 일찍부터 나와 일한 일꾼들은 일찍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릴 때 부름 받아 세상의 때에 물들지 않고 일평생 주님을 섬긴 사람들은 참으로 신실한 일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강조하는 것은 비록 늦게 부름을 받아 헌신한 일꾼들도 하나님은 귀히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보면 아침 6시부터 나와 일한 일꾼, 9시, 12시, 3시에 나와 일한 일꾼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이 거의 끝날 즈음에 와서 일한 일꾼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똑 같이 임금을 주었습니다. 주인은 왜 임금을 똑 같이 주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찍 부름 받은 사람이나 늦게 부름 받은 사람이나 동일하게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일평생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한 일꾼들이나, 늦게 부름 받은 일꾼일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봉사와 헌신 역시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로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보다 나중에 시작한 한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는 하나님나라에서 비록 작은 역할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적에 귀하게 이바지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찍 부름을 받았든 늦게 부름을 받았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서 내가 차지하는 역할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일꾼은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꾼은 단 한 시간만 일했습니다. 그럼에도 주인이 똑 같은 품삯을 나눠 주었습니다. 이런 집 주인의 행위는 우리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의 질과 양을 통해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일에 근거해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비록 나의 가진 재능이 부족할지라도, 나의 힘이 부족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바칠 때 하나님은 이를 귀하게 보십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뒤늦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부름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늦게 부름을 받았을지라도 주님께 헌신할 때 하나님의 나의 헌신을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일찍 부름을 받았느냐, 일찍 부름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 부름 받은 사람이나 늦게 부름 받은 사람이나 모두 귀하게 보십니다. 문제는 부름 받은 후 지금 주님께 충성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주는 또 한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에게도 관대하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먼저 고용된 일꾼들이 불평을 했을 때 주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했습니다. 사실 집 주인은 일찍 온 일꾼들에게 처음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기 때문에 불공평하게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들의 불평에도 그들을 친구로 부르며 관대하게 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베드로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행위에 근거해 주님께 공평한 처분을 요구하지만, 우리 역시 곧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이렇게 넘어졌을 때도 우리에게 관대하십니다. “친구여, 너는 내가 나중 온 사람들에게 관대했다고 불평했지? 하지만 너도 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임을 잊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에 시달리며,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이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은 나를 행위로 대하시지 않고 자비로 대하십니다. 그 자비의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회개의 마음을 가지게 되고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주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의 소원을 갖게 됩니다. 주님은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나를 향하여 “친구여” 라고 부르십니다. 그 자비의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희망을 갖게 되고,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됩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와 구원의 이해
최세창 목사 / 1977년 감리교목사안수, 한국성서신학교 출강, 인천여신 출강, 협성대 출강, 훼이스신학대학원객원교수, *28년간의 1250여 주석대조연구로 신약 전권인 『최세창의 신약주석 시리즈』출판 *논문* “바울의 인간이해” “야고보서의 저자에 관한연구”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문제” “고용주와 고용인의 도리” “부부간의 도리” “부자간의 도리” “기도에 관한 성서적 개요” “서원기도에 관한 연구” “칭의에 관한 연구” “바울의 성 이해” “주석과 설교에 관한 소고” “히브리서의 저자 연구” 외 교계 잡지 연재 및 세미나 인도 다수
주를 좇는 자의 보상을 설명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마태는, 그것과 관련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마태의 독특한 기사로 19:30의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다.
이 기사는 【1】“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로 시작된다. 원문의 첫 부분에는 가르(γάρ)가 있어서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천국”은 3:2의 주석을 보라.
“포도원”①과 관련해서 반즈(A. Barnes)는 “유대의 상당 부분이 포도의 문화에 젖어 있었다. 그러므로 기름지고 잘 경작된 장소를 가리키는 데 종종 포도원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가꾸시는 포도원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른 아침에”는 해뜨는 시간을 의미한다.“작업 시간은 태양이 비칠 때부터 별이 뜰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랍비 문헌들에서 읽을 수 있으며, 시편 104:22, 23에서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E. Schweizer).
“집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집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간 이유는 “큰 도시에는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오전 6시경에 모이곤 하기 때문이었다”(Eric F. Bishop).②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이 품꾼들을 만나서 한 약속에 대해, 예수님은 【2】“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라고 하셨다.
“한 데나리온”(δηναρίου)은 로마의 은화인데 품꾼의 하루 품삯, 또는 군인의 하루 급료에 해당되었다(10:29의 주석과 18:28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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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을 밝혔음.
1) 포도원(사 5:1, 3, 4, 5, 7, 27:2, 렘 12:10-)과 포도나무(시 80:8-19, 사 5:2, 6, 렘 2:21, 19:10, 겔 15:2-, 17:6-, 19:10-, 호 10:1)는 이스라엘로 비유되었다. 이러한 구절들은 이스라엘은 순수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민족이라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하여 멸망의 위기를 초래한 민족이라는 점을 서술하고 있다.
2) Eric F. Bishop, Jesus of Palestine(London: Lutter worth, 1955), 203, in R. Earle, 마태복음(비콘 성경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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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쳐(E. Schweizer)는 “정식 절차가 분명히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정확하게 행해졌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의 집주인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3】“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라고 하셨다.
“유대의 날은 해가 뜨는 오전 6시부터 시작됐고, 그 시간들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계산되었는데, 오후 6시는 공식적으로 다음 날이 시작된 시간이었다”(W. Barclay). 그러므로 “제 삼 시”는 오전 9시경에 해당되는 것이다.
“장터”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여러 가지 상품을 팔고 사는 장소이다. 얼레(R. Earle)는 “장터(agora)는 중앙의 집회소인데 각 도시에 있었으며, 그 곳에서 어린아이들이 놀기도 하고(11:16), 사람들이 물건을 사기도 하며(agorazo는 사다), 법관들이 재판하기도 하고(행 16:19), 철학가들은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행 17:17).”③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일자리를 구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는 일하기 싫어서 놀고 섰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감을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은 【4】“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로 뒷받침된다.
그 집주인은 그들에게 특정한 품삯을 약속하는 대신에 “상당하게 주리라”, 즉 일한 만큼 보수를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약속을 들은 그들은 그 포도원으로 갔다.
그 후의 집주인의 같은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5】“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라고 하셨다.
“제 육 시”는 정오쯤을 가리키고, “제 구 시”는 오후 3시경을 가리킨다.
집주인은 더 이상 같은 행동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때에도 같은 행동을 하였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6】“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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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R. Earle, 마태복음(비콘 성경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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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십일 시”는 오후 5시경을 가리킨다. 이 시간에 고용되면,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품꾼들이 그 날은 공치는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집주인은 그런 그들에게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라고 물었고, 그들은 “품꾼으로 써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품삯을 정하지 않은 채, “포도원에 들어가라”라고 하였다. 이 품꾼들은 먼저 고용된 품꾼들보다 더 기뻐하고 감사했을 것이다.
일하는 시간이 끝나고 품삯을 지불할 때가 되었을 때에 집주인이 한 일에 대해, 예수님은 【8】“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라고 하셨다.
“저물매”는 오후 6시경을 가리킨다.
‘Red Vineyards at Arles’ (1888) by Vincent Van Gogh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의 “청지기”는 에피트로포(ἐπιτρόπῳ)이며 ‘관리인’, ‘청지기’(마 20:8), ‘장관’, ‘집사’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집주인이자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모든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라고 하였다. 집주인의 지시는 품삯을 당일에 지불하라고 하는 신명기 24:15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때는 최후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J. A. Bengel).
그런데 맨 나중에 온 품꾼들에게 지불된 품삯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9】“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이라고 하셨다.
“제 십일 시” 곧 오후 5시경에 와서 한 시간 정도만 일한 품꾼들이 와서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의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했을 것이다. 집주인은 한 시간 정도만 일한 품꾼들에게 일한 분량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에 사랑을 베풀어 준 것이다. 이 처사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는 것을 본, 먼저 온 품꾼들의 반응에 대해, 예수님은 【10】“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라고 하셨다.
제 삼 시(오전 9시경)에 온 품꾼들과 제 육 시(12시경)에 온 품꾼들과 제 구 시(오후 3시경)에 온 품꾼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먼저 온 자들, 즉 이른 아침(오전 6시경)에 온 자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한 약속을 알고 있었지만, 훨씬 적게 일한 품꾼들이 한 데나리온 받는 것을 보고는 그들보다 “더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한 데나리온씩 받은, 먼저 온 자들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11】“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하셨다.
“원망하여”는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인 에공귀존(ἐγόγγυζον)이며 ‘원망하다’, ‘불평하다’, ‘투덜대다’ 등을 의미한다.
포도원에 먼저 와서 약 열두 시간 동안 힘들게 일하면서 더위를 견딘 품꾼들이 원망한 이유는,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 정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먼저 온 품꾼들의 시기와 불평 또는 원망이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약속된 한 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처럼 가난한 품꾼들이 일이 없어 괴로운 마음으로 놀고 있을 때, 그것도 공치는 날로 여길 수밖에 없는 십일 시경(오후 5시경)에 그 품꾼들을 고용해 주고, 게다가 1 시간 정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하루 품삯인 한 데니리온을 준 집주인에 대해 감사한 마음과 존경심을 가졌어야 했다. 실상, 집주인의 처사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의로웠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었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13】“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셨다.
집주인은 부당하게 투덜대며 원망하는 그 품꾼들 중의 한 사람을 “친구”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은 계약한 대로 이행했기 때문에 그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하나님께서는 약속 이행은 물론, 사랑으로 역사하신다. 그러한 “하나님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더욱 나쁜 것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부당한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J. A. Bengel). 실상, 더 많은 시간을 일한 것이 더 많은 대우를 받을 필연적 조건은 아니다.
계속된 집주인의 말에 대해, 예수님은 【14】“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라고 하셨다.
집주인은 그 품꾼에게 정당한 그의 몫인 약속된 품삯이나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나중에 온 품꾼들에게 그와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자신의 뜻이라고 하였다.
집주인은 더욱 강조하여 【15】“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하였다.
주인이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할 권한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가난한 품꾼들을 사랑한 선한 주인을 악하게 보느냐는 것이다.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정당한 주장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인간과 만물의 창조주인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로 자신의 뜻대로 하시는 일에 대해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구원과 믿는 사람들의 보상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의 결론적 말씀에 대해, 마태는 【16】“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19:30의 주석을 보라.
※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524-529.
[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포도원의 주인과 품꾼 비유(1)
이 비유는 앞 장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앞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마 19:30)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후 예수님은 이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는지 부연 설명을 하신 게 오늘의 비유이다.이 비유의 대략은 이렇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구하러 아침 9시, 낮 2시, 낮 3시, 낮 5시에 나가서 일꾼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자 많이 일한 사람이 원망하는 일이 발생했다.이에 주인이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본래 처음에 약속한 것을 준 것이라며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베드로에게 한 말과 똑같은 얘기로 끝이 난다. 이때 예수님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그 대답이 조금 특이하다. 일반적으로는 천국의 비유를 ‘지역’으로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물(포도원 주인)’로 표현했다.(1절)그렇다면 그 주인의 마음, 주인의 의도를 이해하면 보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은혜’이다. 왜 은혜인가. 1절을 보면 주인이 일꾼을 찾고 또 찾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포도원의 일이 급해서도 아니고, 사람이 없어서 할 일을 못 해서도 아니다.주인이 일꾼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포도원을 가꾸기 위함도,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주인은 지금 집 나간 자녀를 찾듯이 일꾼을 찾아다니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 일을 주기 위해서이다.이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면 그가 왜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성인의 하루 품삯이다. 그 돈이 있어야 가족이 하루를 버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의 관심은 일꾼이 포도원에서 일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 일꾼이 자신에게 부양된 가족을 돌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그것은 일을 마친 후 주인이 돈을 줄 때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주인은 처음 온 자부터 주지 않았다. 나중 온 사람들부터 주었다. 왜 그랬을까. 주인의 배려이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심란했을 것이다. 이 저녁에 어디를 가서 나머지 돈을 채워야 하나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그것을 주인은 너무나 잘 알았다. 더군다나 처음에 온 사람은 가격을 얘기했는데 나중에 온 사람은 얼마를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로 인해 몹시 불안하고 초조해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들에게 안심하라는 차원에서 먼저 불러서 넉넉한 일당을 지급했다.반면 일찍 와서 내가 주인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다고 생각하는 일꾼은 감사가 없다. 약속한 대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작다고 느꼈다. 주인이 하루를 살게 해주었다는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주인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했다.지금 베드로는 정확히 이 먼저 온 일꾼 같다. 예수님이 처음 베드로를 불렀을 때는 주 앞에 엎드려 죄인이라고 고백했던 그가, 3년이 지난 지금은 예수님에게 보상을 요구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비유가 바로 이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로 인해 스스로 대견스러운가. 이때 이 말씀을 기억하자. 하나님이 내가 쓸 만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음을…. 그것을 기억할 때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로 내 삶이 채워지게 될 것이다.이수용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목사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 20:1-16)
예수의 비유를 통해본 하나님 나라의 정치경제
주후 1세기 지중해 세계의 긴장(tensions)과 모순(ambivalnce)을 창조한 누가의 경제(economy)를 재구성함에 있다. 특별히 눅 15장의 “잃어버린 아들(Lost Son)”의 비유는 당시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아버지(paterfamilias)의 공간이동 및 경계횡단을 그리고 있는데, 그의 끊임없는 넘나들기는 외부와 내부, 방탕한 자녀와 의로운 자녀, 빈자와 부자의 구별을 드러내며, 동시에 그 같은 구별을 모호하게 한다. 그 결과, 전에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던 이들이 찾아지고, 예외 없이 환영받으며, 살림(οἶκος)의 합당한 참여자로 부상한다. 이렇게 유도된 살림의 방식(οἰκονομία)은 당시 로마의 통치 아래 놓여 있는 백성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한 모델이 되어, 억압과 착취의 세계(οἰκουμένη) 속에서도 자유(liberation)와 변화(transformation)에의 꿈을 실현케 한다. 요컨대, 아버지의 내부와 외부를 넘나들며 맺는 아들들과의 상호 작용은 살림의 경계선을 허물며 당대 지중해 세계에 깊이 드리워 있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강제로부터 놓임을 약속하는 것이다. 예수의 경제는 경제행위의 숙련(discipline)이나 그로 인한 소득(earnings)이 아닌 “모든 산”과 “모든계곡 의 경계를 평탄케 ”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속에 놓인 실제의 필요들과 실제의 공동체로부터 출범하고 있다. 지중해 세계의 경제(oikonomia)는 세계(oikoumene) 내에 존재하는 살림(oikos)의 형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신약성서는 살림(oikos)이 그 자체로 상속된 것이든, 혹은 그렇지 않든, 정식화된 규범(“this is the way things are or should be”)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본 논문은 특별히 누가의 오이코스 담화(oikos discourse)가 주후 1세기 지중해 세계를 향해 내어놓은 경제(oikonomia)의 도전을 고찰하고, 그 같은 도전이 당시 세계 속 호혜(reciprocity)의 망(network)에서 “타인(the other)”으로 배제되어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the People of God)에게 주었던 의미와 의의를 분석함에 목적을 둔다. 이 같은 목적은 당시 사회와 문화, 정치, 경제의 형성과 실제의 바탕 위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본문과의 끊임없는 깊은 대화의 장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9장 마지막 부분에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20장 초반에 “마치 천국은 이와 같다”라고 하시면서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성경말씀의 비유 가운데 많은 부분이 천국에 관한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의 배경을 보면 19장 16절 이하의 말씀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부자였고, 젊은이였으며, 다른 성경말씀에는 관원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에 있는 여러가지 계명들을 이야기해줍니다. 아마 십계명을 중심으로 말씀을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이 사람이 “내가 어려서부터 이것을 다 지켜서 행했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유대 사람들의 관례에 의하면 6살이 되면 교회당에 보내서 그 때부터 율법공부를 시작하게 합니다. 어릴 때부터 율법공부를 시작하고 지켰으니 이 사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서 나를 쫓으라.”는 말씀을 하시자 부자 청년은 돈이 많은고로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이 돌아간 다음에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그리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제자들 가운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논란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우리의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즉 무엇을 얻으리이까” 물었습니다. 재물을 많이 얻을 사람도 구원을 못 얻는다면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고 봅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만 재물에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먼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영토를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린 것에 대해 어떤 도움을 받고 싶어할 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20장에 있는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 데 유의할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귀절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른 아침에 온 사람과 마감하기 한 시간 전에 온 사람이 같은 품삯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불합리한 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경제원칙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비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성경말씀을 합리적으로 해석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세속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사고를 합리적으로 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서는 합리적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토툴리안이라는 학자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합리적인 것 같으면 믿음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불합리한 비유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18,19세기에 합리주의 운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심지어는 성경말씀의 해석까지도 합리적으로 해야한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오히려 잘못 해석한 예들이 빈번하게 있었습니다. 합리적인 해석의 하나는 “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에게 한 달란트 더 주려고 했었는데 일은 하지 않고 꾀만 부려서 한 달란트만 주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는데 일찍 온 사람들은 금으로 만든 것을 주었고, 늦게 온 사람은 동으로 만든 것을 주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해석 방법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했다면 불평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만족하지 않고 불평했다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을 볼 때에 본문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벗어나서 지나치게 합리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오히려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경제 상황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절박한 상태였습니다. 장터에는 아침부터 품팔기 위해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먹고 살 만큼을 벌면 만족하는 경제적인 형편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품삯을 벌지 못하면 굶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공정한 임금을 측정하는 경제학적인 원칙문제가 아니라 고용주이신 하나님의 절대 선과 은혜를 뜻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풍경을 보는 것 같은 비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번째, 예수님의 마음은 일찍 온 자나 늦게 온 자나 동일한 일할 권리와 대가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지방은 포도를 따는 계절이 우리 나라와 비슷해서 9월 중순 전에 포도를 모두 딴다고 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가 낮이며 이 시간에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3시(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6시(정오)에, 9시(오후3시)에, 11시(오후5시)에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의 노동시간은 일반적으로 10시간이라고 하는데 11시게 온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등있게 포도원에 들어왔지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3절에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말라.”고 하신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주인이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또한 보충 설명하는 말씀으로 신명기 24장 15절에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두렵건데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약적인 말씀을 통해서 그 당시에는 해가 지기 전에 품삯을 지불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품삯을 받고나서 먼저 온 자들이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 내가 너와의 약속을 지켰다.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고 말합니다. 또한 주인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옳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일찍 온 자나 늦게 온 자나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이 아닌 질을 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많이 일했다고 해서 항상 하나님께서 옳게 보시는 것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이 한 자나 적게 한 자나 일한 댓가는 마찬가지로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른 아침에 온 사람만이 불평을 합니다.
랍비의 비유에 보면 늦게 온 자는 일찍 온 자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기 때문에 똑같은 댓가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자 문제가 아니라 포도원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랍비의 비유와 예수님 비유의 차이점이라고 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는 시간이 빠르고 늦음이 없기 때문에 동일한 권리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믿었는냐는 것보다 얼마나 열심히 믿었느냐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계시록 21장 말씀에는 거룩한 성 사면에 각각 세 문이 있다고 말합니다. 윌리암 버클레이라는 학자는 “동편문은 아침 일찍 하나님과 교제하러 온 사람들이고 서쪽문은 황혼 시기에 들어와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다”고 말했습니다. 초대 교부들 가운데 시간을 억지로 해석하려는 분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유래니우스라는 분이 말하기를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은 노아 이전의 사람들이었고, 9시에서 12시 사이에 온 사람들은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에 왔던 사람들이었으며, 정오에서 오후 3시 사이에 온 사람들은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의 사람들이었고, 3시에서 5시사이에 온 사람들은 모세에서 그리스도까지의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오후 5시 이후에 온 사람들은 승천과 재림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된 사람들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른 사람과 늦은 황혼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시기적으로 구분하여 해석하는 것도 잘못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동일한 권리를 주신 것은 모두에게 일할 권리가 있다고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것은 좋은 특권입니다. 11시에 만난 품꾼들은 주인에게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라.”라고 말하면서 종일 서 있었습니다. 한 시간밖에 일할 수 없는 이 사람들에게 주인은 한 시간 일할 권리를 부여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린 사람은 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하는 것과 잠자고 쉬는 것의 균형이 맞도록 해주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말씀에 한편 손마른 사람의 치유에 관해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석수였는데 오른손이 마비되어 일을 하지 못하고 가정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낫고나서 얼마나 기쁜지 일하는 즐거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초점은 먼저 온 자들의 즐거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초점은 먼저 온 자들의 잘못된 동기를 나무라고 많이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며 바라고 따르는 자세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기의 잘못된 기도를 회개하는 기도문이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25년동안 교회에서 일했고 봉사했습니다. 집사로서 장로로서 봉사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수를 열심히 믿었습니다. 모태때부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금까지 예수 믿은 것으로 보아서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금까지 예수 믿은 것으로 보아서 이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고, 율법주의적인 생각이며, 공로주의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기 바란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유대 사람 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타이르고 계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두번째, 일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온 자들과 마지막 11시에 온 자들 사이의 비교로 먼저 온자들이 불평을 합니다. 중간에 온 자들은 불평이 없었습니다. 항상 먼저 일하고 믿은 자들이 불평이 많습니다. 그것은 일하는 것을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감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할 수 있도록 건강과 여건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 봉사할 때 우월감은 방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얼린을 제작한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음악가에게 음악적인 재질을 주셨는데 내가 그들에게 악기를 줄수 있다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봉사정신이며 이러한 장인정신이 있을 때 명기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것을 주셨다면 우월감보다 감사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흥정하는 의식보다 감사하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온 자들은 주인과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흥정한 후 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도록 선택되었다는 감사의식보다 흥정의식이 먼저 있을 때 항상 불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고 선택된 것에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적절하게 보상을 주신다고 봅니다. 우리의 땀의 댓가를 주님께서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어도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고 다 기억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갈 어떠한 댓가를 바라고 흥정을 하는 것은 참된 봉사정신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노사문제도 일어난다고 봅니다. 뒤에 온 사람은 조건조차 제시하지 않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심정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된 동기는 그런 마음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다 버리고 먼저 따랐으니 다른 사람보다는 더 보상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비교의식보다는 공동체의식으로 일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볼 때 상대적으로 먼저 온 사람의 댓가가 적기 때문에 비교해서 볼 때 상대적으로 먼저 온 사람의 댓가가 적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의 거의 정해진 하루 품삯입니다. 따라서 10시간 일한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면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시간만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으니까 상대적으로 내 것이 적어보여서 불평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의 정당한 댓가를 받았으면 되었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열등하게 생각하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다한 욕심은 결국 어리석은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빈부 차이가 격심해지는 이유는 공동체의식보다는 비교의식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장 말씀에 탕자와 탕자의 형이 나옵니다. 형은 아버지께, 나는 아버지와 함께 일했고 일도 많이 했는데 나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아우에게만 주느냐고 불평합니다. 자기의 몫을 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우와 비교해서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교의식 속에서 불평이 나오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사이에도, 한 민족 사이에서도 많은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죤 번연은 “이상하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 할 성도가 자기들끼리 싸우다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들끼리 싸운다는 것은 힘의 손실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보다는 내 일의 정당한 댓가를 받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채권의식보다는 채무의식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습니다. 10절 말씀에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줄 알았더니”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더 생각했습니다. 이 공로의식이 곧 채권의식 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 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채무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 우리 사회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공로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율법적인 행위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먼저 온 품꾼들도 공로적인 생각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준 것을 기억하지 않는 자와 받은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억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권리를 주장하고 불평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인의 무조적인 선함에 대해서 자신들의 조건적인 이기심으로 대항하는 일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벵겔이라는 학자가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은 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잘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악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분이므로 결단코 우리들에게 잘못하시지 않습니다.
세번째,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의 은혜입니다.
주인은 언제나 공평한 정의와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했습니다. 당시에 익숙한 공로교리에 대해서 주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공급을 말합니다. 주인의 행위를 보면 자기 하인들을 시켜서 품꾼을 데리고 올 수도 있지만 친히 나가서 품꾼들을 모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능동적인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전에 온 품꾼들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은혜받을 가치도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약에 의하지 아니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선에 기인하는 것이고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인의 포도원에 부름받은 품꾼들입니다. 역사적인 긴 시간으로 볼 때 우리들은 11시에 부름받은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시간에서 볼 때 이른 아침에 온 사람도 있고 저녁 늦은 시간에 온 사람도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품꾼된 다세는 일에 충실하고 주인에게 전적으로 분배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시는 것은 주인의 뜻이고 은혜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품삯에서부터 사명으로 돌리고, 근면하게 봉사하고 받은 것에 만족하는 품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평하심을 생각하고 마지막 시간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기쁨과 여건을 허락하시는 사회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될 줄로 압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 20:1-16)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 20:1-16)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금년 8월 우리나라의 전체 실업률은 3.7%이고, 청년 실업률은 7.3%인데, 체감 실업률은 둘 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실업문제는 언제나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으며, 직장을 구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다음은 아버지의 정년퇴직을 지켜본 어떤 아들의 글입니다. <쓸쓸한 추억 하나, 그 아버진, 열두 살과 열 살 난 남매를 꼭 끌어안으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빤, 추워서 오늘 못 나가겠다. 너희들이 대신 나가서 근무 좀 서고 와라.” 아빠의 얼굴에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지만, 남매는 정말 아빠가 추워서 일하러 나가기 싫어하는 줄로 알고, 남매는 아빠가 일을 그만두신 날엔 정말 행복해 하실지 모른다고 철없이 믿었다. 그런데 막상 정년퇴직을 하신 아버지가 될 것 같지도 않은 일들을 자꾸 벌이자, 따지듯 물었다. “왜 자꾸 일을 벌이세요?” “매일 나가다 안 나가니까 못 살겠다. 돈은 안 벌어도 매일 어디 나갈 곳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그 아버진 30년 내내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퇴직 후 한 달도 안 돼 터득하신 것이었다.>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는 일터가 없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는 한 주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마 19장 마지막절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말씀을 설명해 주는 연속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맥을 반영하여 Living Bible은 본문을 “여기에 또 다른 천국의 예증이 있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비유를 근거로 하여 천국의 상급에는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도원의 품꾼’ 비유는 천국의 상급에 관한 교훈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구원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에게 교훈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1절에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간 주인은 품꾼들에게 하루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제 삼시 곧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나가보았더니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상당하게 주리라.”고 약속하고 들여보냈습니다. 집주인은 12시와 오후 3시에도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오후 5시에 장터에 나갔더니 그 때까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측은하게 생각한 주인은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고서 그들을 들여보냈습니다.
이윽고 날이 저물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후 5시에 온 자들부터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 까지 모두 한 데나리온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이 집주인을 원망하며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고 하면서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다.
주인은 원망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선민 공동체인 교회를 뜻하며, 그리고 품꾼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성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품꾼을 부르는 집주인은 택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 구원관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이 갈파한 로마서 주제 곧 구원은 ‘인생의 노력의 대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임을 역설한 것이, 이 비유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 비유를 좀 더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포도원 주인
1)부지런한 주인입니다.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으로 비유된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집주인은 날이 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품꾼을 모으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이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애쓰는 하나님의 열심을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직후부터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려고 열심을 다 하셨습니다. 렘 25:4에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시다가, 마침내는 독생자까지 보내주신 하나님의 열심에 우리는 다만 놀라고 감격할 뿐입니다.
2)긍휼이 많은 주인입니다.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주인의 행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섭리의 목적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지만, 그 안에는 창조하신 인류의 행복도 포함됩니다. 비록 인류가 하나님을 등졌다고 해도 그 목적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 있었던 유대 나라는 경제가 몹시 피폐하여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실업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도 분주하다고 불평을 합니다만, 그러나 분주한 괴로움은 실직의 고통에 비하면 비할 수 없는 기쁨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죄인 중에서 부르시되, 그들에게 꼭 어떤 의무를 맡기려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뿐만 아니라 3시에도, 제 6시에도, 제 9시에도, 그리고 저녁 무렵인 11시에도 품꾼들을 자신의 농장으로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일을 시키기보다는 그들에게 품삯을 주려는 의도가 더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3)천국은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포도원 주인의 초청에 응하는 일꾼들을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맨 처음에 부름 받았던 일꾼들과 같이 확실하고도 명백한 주인의 약속이 없었지만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히 주리라,”는 말만 듣고 포도원에 들어가 일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신실함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초면의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셨을 때, 예수님의 전인격을 믿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림으로써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구원하심과 축복하심에 동참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모두 품꾼입니다.
1)품꾼은 자신의 주인만 섬깁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품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결코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로지 우리를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 한 분뿐이며, 따라서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2)품꾼에게는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품꾼은 주인의 명령에 왜? 라는 이유를 달지 않습니다. 백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처럼,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이해하지 못할 명령에 무조건 순종한 하인들처럼, 품꾼인 우리에게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전적인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3. 성도의 일터는 교회입니다.
집 주인이 품꾼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들여보내십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교회 안에서 내게 맡겨진 직분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천국 백성의 일터인 교회에서, 맡은 직무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나태함이나 게으름은 결코 천국 일꾼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천국 일꾼의 참된 자세는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주어진 일을 성실히 행하는 것이며,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분깃을 땅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오자 그대로 꺼내 온 게으른 종에게는 주인의 책망과 추방밖에 없었으나, 자신이 받은 분깃으로 열심히 일한 종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상급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성실과 인내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4. 품꾼들의 불평
긍휼이 많은 주인과 품꾼들 사이에 이견이 생겼습니다. 문제는 먼저 온 품꾼들에게 늦게 온 품꾼들과 똑같은 품삯을 준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먼저 온 자신들이 품삯을 더 받든지, 아니면 늦게 온 사람들이 덜 받든지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틴의 한낮 더위는 매우 심합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들은 자신들이 바로 이러한 더위를 견디며 수고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을 늦게 들어온 자들과 똑같이 취급한 주인을 원망하였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주인의 행동은 형평에 맞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처음에 약속한 대로 품삯을 지불하였다는 점에서 잘못이 없습니다. 그들은 집주인이 불러 주지 않았으면 일할 기회조차 없었으며, 더군다나 처음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으므로, 원망하고 불평할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이른 아침에 포도원으로 부름 받은 일꾼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나중에 부름 받은 일꾼들은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먼저 온 일꾼들이 포도원 주인에게 항의하는 모습은 곧 유대인들이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며,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고집하는 완악한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먼저 온 일꾼들의 항의를 일축해 버리고, 나중 온 일꾼들에게도 동일한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비록 유대인들보다 늦게 부름을 받았지만, 그들도 분명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예정하신 택한 자들이며, 유대인들과 차별 없이 구원을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임을 잘 보여 줍니다.
5. 포도원 품꾼 비유의 교훈
1)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청지기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집주인이 청지기를 통하여 품삯을 지불하듯,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단 4:35에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고, 사 14:24-27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은 반드시 이루리라…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지만, 주인은 자기 생각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돈을 쓰는 것도, 물건을 사는 것도, 일꾼들을 채용하는 것도, 주인의 마음입니다. 종과 주인의 차이점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세계에 대하여 이와 같으십니다. 그 분은 무엇이든지 임의로 하실 수 있습니다.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이 세계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들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지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인 것입니다. 이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살고 또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할지라도 인생을 실패하게 되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계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어야 할 점은 품삯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포도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된 동기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원한다고 임으로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할 수는 없었습니다. 설령 그들이 남보다 능력이 있고 또 부지런할지라도,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의지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도가 되고 또 일군이 된 것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학교나 직장 등은 요구하는 자격만 갖추면 얼마든지 갈 수가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는 것입니다.
3)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에서 일한 모든 품꾼들이 받은 한 데나리온 곧 품삯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꾼들에게 품삯이 동일하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성도에게는 부름의 시기에 관계없이 구원이 동일하게 주어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축복에는, 그 어떤 시대적 차별도 민족적 차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먼저 믿은 자나 나중에 믿은 자나, 구원을 얻는 데에는 전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실업자나 실직자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직장이 있는 분들은, 자신에게 일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많든 적든 매달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에 대해, 그 월급에서 뚝 떼어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신에게 확실한 일자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늘 바쁘다는 핑계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 비하여, 자신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인가를 알아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일자리가 없어서 오후 5 시가 되도록 장터에서 놀고 있던 일꾼들에게, 일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이었습니까? 더구나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아가는 날품팔이 일꾼들에게 있어서, 만일 주인의 자비로운 은총이 없었던들, 그와 그의 처자식들은 그날 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과 똑같은 품삯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품꾼들의 마음은 얼마나 고마운 마음으로 가득 찼겠습니까?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며, 품꾼은 교회의 구성원을 이루는 성도를 의미하고, 집주인은 성도를 부르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 분문 말씀은 구원의 진리를 모르고 허송세월하고 있는 죄인들을 교회로 불러, 구원의 대열에 동참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보여 주시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가진 것이 많거나 혹은 남보다 의로워서 구원을 받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증거 하듯이 우리는 자랑하거나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오직 무조건 선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주인의 자비와 선한 뜻이 없었더라면, 품꾼들은 그저 장터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정녕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여전히 죄와 사망의 그늘 아래 머물다가 결국은 영원히 파멸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같은 이방인을 불러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포도원인 교회 일꾼으로 일하도록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마치 오후 5시에 부름 받은 품꾼처럼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도록 충성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자비로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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