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회군 안했다면 | 위화도 회군이 없었다면 만주벌판 누구꺼??[개념있는 사람들을위한 진짜 상식!! If 21화]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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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있는 사람들을 위한 진짜 상식!!
개.진.상 if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위화도의 존재를 몰랐을수도 있다고??

영상을 시청하시고 여려분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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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 #영웅 #전쟁 #한국사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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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 문화유산칼럼 – 이야기

이로써 이성계는 역사의 승자가 되고 최영은 역사의 패자가 됐다. 만약 이성계가 군대를 돌리지 않고 압록강을 넘어 요동정벌을 단행했다면, 최영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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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heritage.tv

Date Published: 6/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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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 오마이스타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고 그대로 철령 이북 땅을 공격했다면 고려는 … 그렇기 때문에 위화도회군을 안했다면 역사가 일부 달라졌을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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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tar.ohmynews.com

Date Published: 12/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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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안했다면?? – 클리앙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안했다면?? 41 · 1. 요동정벌에 실패후 국가 전체가 흔들려 존폐위기(명, 왜나라등의 공격, 내부혼란 반란등등) & 요동을 정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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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lien.net

Date Published: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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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 나무위키:대문

이것이 바로 한국사에서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이다. “지금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안 될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역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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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8/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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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고 요동정벌을 감행했다면 역사는 …

이성계는 그 유명한 사불가론을 말합니다. ​. “지금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안 될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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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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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안했다면 – 미스터리/공포 – 에펨코리아

패전 책임을 물어서 정치적으로 숙청 되었을까요?당시 명나라가 요동쪽에 배치한 장수들이나 병력 생각하면 이기는건 절대 불가능하다 보고(그냥 찍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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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fmkorea.com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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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위화도 회군만 안했다면 – 군사 마이너 갤러리

[일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만 안했다면. ㅇㅇ(218.238); 2021.09.30 19:04. 조회수 360; 추천 1; 댓글 10. 요동은 고려땅인데 그럴수밖에 없는게 아직 몽골 중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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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dcinside.com

Date Published: 3/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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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영토 회복의 기회를 잃다 | 리더십 | DBR

Article at a Glance14세기 원명 교체기에 벌어진 위화도회군은 고구려 영토 회복의 … 의 역사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비슷한 과오가 반복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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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br.donga.com

Date Published: 3/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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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이 없었다면 만주벌판 누구꺼??[개념있는 사람들을위한 진짜 상식!! IF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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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위화도회군 안했다면

  • Author: 허준허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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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 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6qTSVR5MEe8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 이성계는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려 고려 조정을 장악했다. 뒤이어 이성계는 우왕을 몰아내고 최영을 제거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이로써 이성계는 역사의 승자가 되고 최영은 역사의 패자가 됐다.

만약 이성계가 군대를 돌리지 않고 압록강을 넘어 요동정벌을 단행했다면, 최영과 이성계 중에서 누가 승리했을까?

역사에서 가정(if)은 무의미하다지만, 가정을 하지 않으면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 그때 이랬다면, 그때 이러지 않았다면 하고 가정해봐야만, 역사에 대한 지식도 깊어지고 향후의 유사한 상황에도 잘 대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가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이성계가 요동에서 명나라 군대에 패하고 돌아왔다면, 이성계의 위상은 당연히 추락했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개경에 남아 권력을 공고히 한 최영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요동정벌을 추진한 최영의 위상도 깎였겠지만, 최영은 어린 우왕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이성계보다 훨씬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최영이 이성계보다 유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됐다면, 이성계의 조선 건국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성계가 명나라를 꺾고 귀국한 뒤 최영과 대결했다면, 어느 쪽의 승산이 더 높았을까? 이 경우는 앞의 것보다 상황이 좀 복잡하다.

최영과 이성계 어느 쪽도 고려 군사력의 ‘과반수’를 장악하지 못했다. 최영 군단의 주력은 주상 경호부대였고, 이성계 군단의 주력은 동북면 여진족 출신들이었다. 양쪽 다 백전백승의 전적을 과시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우수했을지 측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정치투쟁의 결과가 반드시 군사력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여론을 형성하는 지배층의 동향도 승부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이 경우, 불리한 쪽은 최영이었다. 공민왕 시대에 지배층의 자리에 오른 신진사대부들(개혁 성향 선비그룹)이 최영에게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영은 요동정벌 추진 직전에 이인임 정권을 붕괴시키고 최영-이성계 공동정권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신진사대부들에게 타격을 입힌 바 있었다.

고대 중국의 전략서인 황석공의 <삼략>에서는 “장수는 마치 물을 갈구하듯이 학자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학자들의) 책략이 모여든다”고 했지만, 최영은 체질적으로 학자나 선비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신진사대부들이 모이기 힘들었다.

반면에, 이성계는 신진사대부들을 열렬히 포용했다. 신진사대부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색과 수제자인 정몽주가 위화도 회군 이후 한동안 이성계를 도운 사실이나, 신진사대부의 핵심 중 하나인 정도전이 끝까지 그를 도운 사실이 이 점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요동정벌이 승리한 상태에서 최영과 이성계가 맞붙었다면,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얻는 이성계가 훨씬 더 유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리하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요동정벌에 나선 뒤에 패배하고 돌아왔다면 최영의 승리 가능성이 높았고, 반대의 경우에는 이성계의 승리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결론은 최영과 요동정벌이 상호 모순관계였음을 의미한다. 요동정벌을 추진한 최영의 입장에서는 정벌이 실패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유리했던 것이다.

최영은 위대하고 청렴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처한 모순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이것이 그의 실패를 초래한 핵심 요인이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큰사진보기 ▲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눈앞에 둔 드라마 ⓒ KBS

지난 25일 방송된 KBS 1TV 대하드라마 (연출 강병택·이재훈, 극본 정현민)에서 끝내 고려 왕조가 무너졌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폐위되면서 500년 역사를 가진 고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고려의 멸망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결정적이었다. 그럼 거꾸로 이성계가 만약 위화도회군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고려가 어떻게 되었을지 가정해볼 수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고 그대로 철령 이북 땅을 공격했다면 고려는 전시 상태로 돌입했을 것인데, 전쟁의 결과에 따라 고려의 운명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고려의 상대가 당시 최강국이었던 명나라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북위와의 전쟁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고 주변 이민족들이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에 철령 이북 땅에서 벌어질 전쟁에 ‘올인’할 상황은 되지 못하였다.당시 북벌을 주도했던 최영은 이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최영의 의도에 따라 이 점을 노렸다면 전쟁은 예상보다 빨리 끝낼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투보다는 외교를 통한 해결점을 찾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았던 당시 정국이었다.결국 고려로서는 작은 희생만 치르고 철령 이북 수복이라는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고려는 영토와 인구, 자원 등을 얻어 국력에 한층 보탬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500년 이상 존속되며 주변 나라의 정세에 따라 더 큰 나라로 성장해 동북아시아의 리더가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를 통해 북벌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다.문제는 고려 말기의 국력이었다. 드라마 을 보면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백성들을 먹을 것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고려가 정말 그 정도의 상황이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도 그는 일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공민왕 때처럼 영토를 수복했다가 도로 내주는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외적의 침입과 내란 등으로 나라가 패망의 위기에 놓였을 수도 있다.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고 진격을 했다가 명나라에 패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자칫하면 고려는 어렵게 준비한 군대가 몰살됨은 물론 이성계, 조민수 등의 맹장도 모조리 잃었을 수도 있다.설사 주요 장수들이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패전의 책임이 씌워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려에는 늙은 최영만이 남게 된다. 주변 나라들이 역습으로 쳐들어왔을 때 과연 막아낼 수 있었을 지가 의문시된다. 어렵게 외적의 침입을 막아냈다고 할지라도 고려는 본의 아니게 황제국에서 제후국으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을 것이다.여기서 아쉬움이 남은 것은 고려의 국력 수준이다. 에서 고려가 북벌에 동원한 병력은 5만 정도였다. 그 수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고려보다 수백 년 먼저 존속했던 고구려의 경우 외세와 싸울 때 보통 10만 이상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그런 점에서 중세 국가인 고려가 고대 국가인 고구려보다도 병력이 적었다는 것은 국력 수준이 한참 떨어졌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이성계의 입장에서 보면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전쟁터에서 죽거나 돌아와서도 패전의 멍에를 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계에게 위화도회군은 불가피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다만 이성계가 두 차례나 회군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가 정말로 역심을 품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혁명을 위한 절차였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고려 말기의 경제 수준과 백성들의 민심이 정말 어느 정도였느냐가 역사를 가정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그러나 분명한 건 이성계는 위화도회군과 상관없이 반 독립적인 상태로 상당수 영토와 사병을 데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실상 고려 동북면의 독립 군벌이었고, 사병집단 가별초는 사실상 그의 백성이었다. 이성계가 왕이 될 준비를 자발적으로 했는지, 아니면 드라마에서처럼 등 떠밀려했는지를 떠나서라도 그에게는 역성혁명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려는 한 나라로서 그런 이성계를 완벽히 통제하지 못했다. 이인임이 유일하게 이성계를 우려했을 뿐 다른 이들도 그런 이성계를 경계하기는커녕 오히려 협력하였다. 우리가 고려의 충신이라고 아는 정몽주도 위화도회군에 찬동하였고,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우왕과 창왕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그렇기 때문에 위화도회군을 안했다면 역사가 일부 달라졌을지는 모르나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성계가 고려를 장악하는 것을 온전히 막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고려에는 이성계에 대항할만한 힘을 지닌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 왕실은 물론이고 그에게 힘겹게나마 대항했던 이들도 모두 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는 어쩌면 이성계가 오랜 시간동안 대권을 잡기 위해 정도전 등을 영입하여 준비한 태스크포스 팀의 계획이 치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오히려 위화도회군은 그런 계획에 날개를 달아준 고려의 자충수였을지도 모른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안했다면?? : 클리앙

간단하게 생각해서 역사와 다르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안하고 요동정벌을 했다면 어찌 됐을까요?

1. 요동정벌에 실패후 국가 전체가 흔들려 존폐위기(명, 왜나라등의 공격, 내부혼란 반란등등) & 요동을 정벌했어도 당시 고려 꼬라지론 동일한 결과 였을것임. 최악의 경우 우리는 지금 중국인이 됐을지도 모름.

2. 요동정벌 성공후 국력상승 & 고구려보다 더 큰 제국이 건설되어 지금의 대한민국의 지도 자체가 달라졌을거임.

3. 아더임.

제 생각엔 당시 고려말 상황이면 요동정벌을 했어도 전처럼 관리안돼 나락으로 떨어졌을거 같긴한데 어떤분은 그때 했어야 했다는 분도 계시더라구요. 만약 요동정벌을 했다면(실패든 성공이든) 어찌됐을까요?

이성계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고 요동정벌을 감행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계획된 위화도 회군이었나?

안녕하세요. 을지문덕입니다.^^

우선 이번 글에서 지명 표기에 관해 말씀드립니다.

요동성이 당시 요양성으로 불렸고, 평양은 서경으로 불렸으나,

이 글을 읽으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양. 요동성으로 알고 계시는 분도 많으시고, 복잡하실까 봐

요동성. 평양성으로 표기하겠습니다. 단 글의 흐름상 역사적 기록을 남길 사서의 기록엔 정식 표기 또는 병기 표기

합니다.

당시 원. 명. 고려의 상황입니다.

1368년

주원장 원의 수도 북경을 함락.

1371년 2월 28일

주원장이 요동으로 20만 대군을 정벌군을 보내자, 요동성의 성주인 유익.명나라에 항복하다.

1372년 1월

서달의 15만 대군. 북원에게 대패. 11월 요동 북쪽의 북원의 나하추에게 가정 습격당함.

1374년 11월

북원의 나하추 요동(요양) 성을 공격했으나 성과 없이 물러남.

1375년 12월

북원의 나하추 대규모 침공했으나 명나라가 격퇴시킴.

1382년

원나라의 세력인 윈난의 난을 평정.(사실상 중국 내 원나라 세력 완전 추출)

1383년

정도전. 이성계를 만나다.

1387년

요동 북쪽의 나하추가 명나라의 명장 남옥에게 항복함,

1387년 12월

철령위 이북의 땅을 명에 반환을 요구함. 고려 사신의 명나라 입지도 금지시킴.

(23년 전부터 고려의 영토가 되었고, 명 건국 2년 전이기도 한 땅이 쌍성총관부와 철령위입니다.)

1388년 3월

남옥은 15만 군사로 북원을 공격. 말을 먹일 마초가 부족하여 설마 북원의 수도까지 진격을

예상 못 했던 북원은 수도가 공격당해서 북원의 칸인 또 구스 테무르와 태자 등 수십 명만 도망가고,

둘째 아들이 생포되고 공주와 비등 수백명과 오왕 타야지. 대왕 달리마가 생포됨.

포로만 7만 명에 달하였고, 원나라 옥쇄마저 빼앗는 대승을 거둡니다.

1388년 4월 01일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놓고 요동정벌을 의논. 이성계 4불 가론 표출.

4월 03일 우왕은 평양으로 돌아와 압록강에 부교를 놓게 하고 지휘관을 임명.

1388년 4월 18일(양력 5월 22일)

고려는 전국에서 좌.우군 3만 8,830명, 수송대 1만 1,634명,

말 2만 1,682필을 동원해 요동 정벌에 나섰고, 우왕이 직접 평양까지 나가 격려하였습니다.

5월 07일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도착. 11일 1차 도하 시도. 13일 철군할 것을 우왕에게 서신함.

5월 22일(양력 6월 26일) 위화도회군.

6월 03일 우왕과 최영. 이성계에게 제압 당함.

위화도회군 날짜를 양력으로 표기한 건, 장마철이라던데 5월이네? 이렇게 생각하실까 봐 양력 일을 표기했습니다.

원은 북경이 함락당하고 몽골의 초원지대로 수도를 옮김과 동시에 “북원”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제 원은 지구의 절반을 차지했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몽골 초원과 요동만 남았습니다.

(*몽골이 맞는 말이며, 몽고는 중국계 한족이나 고려. 조선 등에서 몽골을 비하할 때 몽고라고 표현합니다.. 저도 가끔 몽고라고 습관처럼 발음이 쉬워서 쓸 때도 있지만요*)

.

주원장의 명은 몽골에게 망한 송나라 때의 영토는 이제 사실상 회복을 했는데, 이제 주원장입장에서 동북쪽

요동을 어찌 생각할까요?

송 이전에 요동 전체가 통일이된 한족 국가에 포함되었던 시기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발해가 건국하기

전인 30년간이 사실상 유일한 지배시기 입니다. 이때도 지배력이 매우 미흡했죠.

수. 당의 염원인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때 신라 무열왕이 요동 공격까지 시도하였고, 서쪽에 토번에 토번 역사상 최강의 명장 “가르친링”이 나타나서 당군이 수차례 괴멸당하고 당의 설인귀 포함 명장이 모조리 생포당하면서 요서에선 거란의 이진충이 궐기하면서 요동과의 교통마저 끊겼고 바로 발해가 부흥해버리죠.

그 이전엔, 통일왕조인 진나라 시절 요동지역 일부가 진나라 영토였으나 그것도 수십년에 불과했죠.

즉 주원장에게 요동 자체가 요동은 한족 통일왕조의 땅!! 이라고 생각할수는 없었을 겁니다. 말갈과 고구려 계통이 사는 땅이라는 생각이 더 컸을겁니다.

그러나 주원장은 재빠르게 요동을 공격합니다.

이유는 원제국이 북원으로 몰락했다고 하지만, 아직 그 세력이 강했으며 아직도 중원 곳곳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북원의 몽골 초원은 인구가 적어서 200만 명이 겨우 사는 땅이었지만, (지금 현대의 몽골의 인구도 316만 명) 만주는 달랐죠.

요동은 몽고 전체 영토의 70%크기이며, 인구는 300만 명 수준이었고 만주 평야의 넒은 평야지대와, 기병을 중심으로한 군부대가 양성되어 있었으며, 요동의 산성들은 험준하기로 유명했죠. 요동300만.몽골200만 정도였죠.

요동의 이민족이 얼마나 강한 민족인지 주원장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금나라가 모두 요동을 중심으로 했으며, 고구려는 수. 당을 몇 차례나 박살을 냈고,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아예 중국 화북 전체를 점령해버립니다.

훗날 또 만주족(여진족이 이름만 바꿈)이 새운 청나라도 요동지역의 민족이니

요동계통 사람들이 강하긴 강한 민족인듯합니다.

무엇보다, 요동이 북원 세력하에 있으면, 고려와 동맹을 맺고 중원을 노릴 여지가 있기 때문에

주원장은 요동을 점령하려고 바로 공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전쟁의 무대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요동의 상황입니다.

몽골의 원나라 시절 요동을 실지배 하고 있던 사람은 심양왕입니다. 임명된 심양왕들은 요양성(요동성)에서

요동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고려인입니다.

즉, 몽골은 고려의 국왕은 당연히 고려인으로, 또한 요동성의 지배도 고려인에게 맡깁니다.

이유는 고려 충선왕이 원 무종의 즉위를 도와준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요동과 고려과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고 라이벌 구도였습니다.

아시겠지만, 원나라 말기 고려의 입김은 고려 출신 황후 기황후부터 시작해서 요동성의 심양왕. 그리고 기황후의 본토인 고려인들의 입김이 강했죠.

즉, 요동 일대에는 고려인들이 대거 살고 있었고, 고려의 요동정벌도 이를 구실점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1차 요동정벌 때에도 오녀(우라) 산성과 요동성을 함락시킬 때 격문을 돌려 “옛 고려의 땅을 찾았으니 고려인들은 기뻐하라”란 식의 격문을 요동지역에 돌립니다.

*참고로 고구려 장수왕 즉위이후 국호는 고려로 바꿨었습니다. 그래서 고려라는 국호가 고구려=고려라고 하는 겁니다. 무려 장수왕 시절 이후 고구려 멸망 시기까지 고려라고 불렸으며 그 기록은 무수히 많습니다, 아마도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부터 고려로 불린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최소한 고구려와 고려가 병기 사용되었을 겁니다.*

사실 이미 1387년 무렵부터 고려의 지도층은 명나라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요동에서 어떤 사람이 고려로 도망쳐 와, 명나라의 황제가 장차 처녀와 환관 각 1천 명과 소와 말 각 1천 마리를 요구할 것이라고 도당에 제보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도당에서 우려하자, 최영은 “정 이런 식으로 한다면 군사를 일으켜서 명나라를 쳐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즉 2차 요동정벌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었던 철령위 요구가 일어나기 전에도, 최영 등은 명나라를 칠 수도 있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피력하며 극도의 반명 기조를 보였습니다.

“고려에서 짐의 지시를 따르겠노라고 스스로 원하기에 짐은 해마다 말을 바치라고 지시했으나 바친 말들은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공납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기에 내가 바치지 말게 하고 다만 3년에 종마 50 필 만을 바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또한 쓰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뒤에 사서 바친 5천 필도 모두 작고 약해져서 우리 말 한 필의 값으로 그런 말 두세 필을 넉넉히 살 만한 정도였다.

지금 또 복색을 개정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면서 바친 것도 발굽이 제멋대로 생긴 데다 다리에 종기까지 났으니 기왕 바칠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따위를 바쳤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필시 사신이 오는 길에 서경에서 원래 말을 팔아버리고 나쁜 말로 바꾸어 온 것이 틀림없기에 장차 온을 금의위에 여러 해 동안 수감하는 벌을 내린 것이다. 그대가 귀국하거든 이 사실을 정무를 맡고 있는 대신에게 알리도록 하라. 짐이 이미 통상을 허락했는데도 고려에서는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내 무역을 하려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보내 우리의 군사 태세와 전함 건조 여부를 정탐하게 했으며 또 우리 명나라 사람으로 그곳에 가서 정보를 누설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길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짓거리니 지금부터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지며 또한 사신도 보내지 말라. 철령 이북 지역은 애당초 원나라에 속했으니 함께 요동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

기타 개원로· 심양·신주 등지의 군민은 다시 생업에 종사할 것을 허락한다. 1368년”

명나라는 끊임없이 고려에게 태클을 가합니다.

말이 형편없다는 증명할수 없는 딴지를 걸면서 고려의 사신을 억류하고, 그러면서, 철령 이북의 땅을 달라고 하면서, 항변할 사신도 막아버린 겁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사신을 그래도 파견하여, 항변하려고 하였으나 요동에서 쫓겨납니다.

다시 조정회를 하는데, 조정 신하들 또한 철령 이북의 땅을 명에 바치는 것은 대부분 반대하였고

극도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최영은 요동정벌을 주장하고 우왕이 받아들이면서

대대적인 징집령이 내려집니다.

공산 부원군 이자송이 반대하자 최영은 매질하여 유배 보낸 후 사사시켰으며,

때마침 서북면 도안 무사 최원제가 “명나라가 병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와서 철령위를 세우려고 한다.”라는 보고를 올렸고, 동강에서 돌아오고 있던 우왕은 이 소식을 듣고 울면서 통탄했다.

이후로 우왕은 명백하게 명나라를 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는 마침 명나라도 요동백호 왕득명을 파견하여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하였으나, 이미 명나라를 적으로 여기던 우왕은 병을 핑계로 아예 왕득명을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우왕 대신 판삼사사였던 이색이 왕득명을 만나 잘 달래었으나, 왕득명은 “철령위 요구는 황제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심지어 최영은 여기서 한술 더 떠, 왕득명의 일로 고려에 왔던 명나라의 요동 병사 21명을 살해하고, 다섯 사람만 남겨 구금함으로써 명나라에 대한 적대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전쟁 반대론자들에게 돌이킬 수 없게 행동을 함) 고려 8도에서는 요동 정벌에 필요한 병사들이 징집되었고, 우왕은 황해도 부근으로 이동하며 사냥을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병력의 징발과 요동 공격에 대한 준비에 착수하고 있었습니다.

4월 1일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우왕과 최영은 또 다른 지휘관인 이성계에게 요동정벌 계획을 설명하지만,

이성계는 그 유명한 사불가론을 말합니다.

“지금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안 될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역격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입니다.

넷째,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 ”

-고려사 우왕 14년 4월 1일-

이 4불 가론을 먼저 분석해 보겠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역격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가장 욕을 먹는 부분입니다. 즉 뼈속까지 사대주의가 가득하다는 겁니다.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기회주의자로 원나라와 여진 고려 등에 줄타기하면서 강한 곳에 붙었던 집안사까지 나옵니다.

더군다나, 강감찬.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김경손 등 뛰어난 무장들은 자신보다 수배에서 10배 이상 강한 적들도 막아냈는데, 왜 명장 이성계는 큰 나라를 공격이란 단어도 아니고 역으로 공격(역격)이란 단어를 쓰면서 반대했는가 입니다. 물론 앞서 말한 고구려. 고려의 용장들의 공통점은 쳐들어온 대군을 물리친 명장이라는 겁니다. 소규모로 수배~10배의 적을 물리친 공격의 명장이 아니라는 관점도 있습니다.

즉, 큰 나라와의 전쟁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지. 고려 나라를 통째로 이판사판 공격의 도박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더 강해 보입니다. 그것도 10배가 넘는 강국에게는 더욱 그렇다.라는 뜻이겠죠.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여름철에 군사가 동원되면 가을 안에 돌아올 수 없고, 농사를 지을 백성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봅니다.

동원된 원정군의 규모는 50.464명입니다. 물론 고려 전 지역에 군대가 텅텅 빈 상태는 아닙니다.

개경 수비군도 수천 명이고 전국엔 징집을 하여, 최소한의 수비군과 왜구를 위한 방어군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5~10만 명이 추가로 징집 및 노역에 동원된다 해도,

고려 전영토의 농사를 아예 못할 수준의 인원은 절대 아닙니다.

이미 고려 말의 인구는 550만 명이었습니다. 인구의 최소 100분의 1~50분의 1의 노동력 감소입니다.

셋째,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입니다.

왜구의 방어는 1376년 최영이 충청도 홍산에서 괴멸시키고, 1380년 군산/서천의 금강에서 최무선이 왜선 500척을 최초의 고려 화포로 배를 모두 불태우고 잔당 370명은 이미 상륙한 일본군과 합류하여 고려 남부를 휩쓸다가 황산에서 이성계에게 궤멸되고 70명만 지리산으로 도주합니다.

그리고 1383년 한번 더 왜구를 격멸함으로써, 왜구는 잠잠해집니다. 물론 그 후로도 조선 초까지 간간이 괴롭히나 고려 말처럼 왜구가 극심하지 않았고 세도 약해서 조선을 위협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즉 1388년은 왜구가 이미 고려군에게 박살 OF 박살이 났던 시기고 각 해안가에 화포로 무장한 함선들이 있는 고려였기에 이성계의 우려는 결과론적으로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넷째,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 ”

고구려. 고려. 조선은 중국 등 여러 사서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듯이 활의 강국입니다. 조선시대 편전(애깃살)은 국가 기밀 수준의 보안까지 유지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아교가 장마철에 녹는가? 습한 계절에 녹는게 맞습니다. 그래서 최영은 아교의 원료인 물새 뿔을 대량으로 밀반입까지 하면서 준비했었습니다.

즉 고려 말 가장 중요한 아교가 녹으면 고려군의 전력은 너무 크게 저하가 될 것이며.

어느 전쟁사에도 여름철에 전쟁을 했다가 전염병이 터져서 군이 괘멸당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기에

장마철은 절대 피해야 한다.를 주장한 겁니다.

최영이 어느정도 아교를 준비했냐는 기록이 없어서 페스하고, 전염병 문제는 수비보단 공격자가 험난한 이동 중 발생할 확률이 높으니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말입니다.

최영은 4가능론을 제시합니다.(3가능론이란 설도 있지만, 4 불가론의 반박이니 4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1. 명나라가 대국이긴 하지만 북원과의 전쟁으로 요동 방비는 허술하다.

분석: 요동성의 방비가 허술한 것은 어느 정돈 사실이나, 요동지역에 약 6만의 군대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2. 요동을 공격하면 가을에도 경작이 가능하기에 군량 확보가 가능하다.

분석: 요동을 신속히 점령 후 요동지역의 만주 평야의 쌀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입니다.

단, 명의 대군이 가을전에 맞대응한다면, 수적 우위인 적이 밖에서 오히려 경작해서 식량을 확보하기에

청야를 펼쳐야 했을 겁니다. 즉 가을 이전에 명군이 대응하지 못할 경우에만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3. 장마철이라는 조건은 명나라도 같으며, 명나라 군사들이 장마철에 싸우는 걸 더 싫어한다.

분석: 장마철이란 조건은 명나라도 같은 건 사실입니다. 명이 장마철을 더 싫어한다는 건 증빙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단,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당시 장마가 시작되었고, 통상 2주간의 장마이기에 요동은 장마철에 점령하려 하지 않았다면, 장마철은 이동을. 장마철 끝나면 바로 요동을 공격했을 겁니다.

이성계가 위화도까지 20일간 거북이 행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하단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4.(예상) 왜구는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분석: 이 시기상 어느 정도 맞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가로 설명하자면,

1350년부터 고려 왕조가 역사상에서 사라진 1392년까지, 장장 40여 년 동안 총 394건이나 되는 왜구의 침공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353년, 1356년, 1368년, 1386년의 단 4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발생하였습니다. 고려 관리들은 녹봉이 9개월간 밀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만, 단 고려 관리들의 녹봉은 6개월에 1번지 급 되므로 실제론 3개월 정도 말린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고려 말 국가 재정이 왜구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위화도 회군 당시의 재정이 급료가 밀리던 시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1380년 1383년 왜구는 화포로 괴멸시켜서 이제 고려 국가를 전복시킬 상대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우왕과 최영이 뜻을 꺾지 않자 다음날 이성계는 전략상 조언을 합니다.

“전하께서 꼭 이 계책을 성취하려고 하신다면, 일단 서경에 머물러 계시다가 가을철에 군사 행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때는 대군이 먹을 군량이 풍족할 것이니 사기가 높은 가운데 행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군사 행동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 오니 비록 요동의 성 하나를 함락시키더라도 쏟아지는 비 때문에 군대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면 군사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져 참화를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최영은 전쟁을 반대했다가 죽은 이자송을 비유하면서 꾸짖습니다.

고구려 영토 회복의 기회를 잃다

Article at a Glance

편집자주

본 연재의 콘텐츠는 필자의 저서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2021)』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

2. 농번기에 거병하는 것은 백성에게 불편하다.

3. 요동 정벌 기간 중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어렵다.

4. 장마가 와서 활의 아교가 풀어져 활을 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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