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장 주석 | 요한계시록강해 | 요한계시록 1:1-20 | 주여, 말씀하여 주옵소서! | 유기성 목사 227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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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제1장 주석(요약자; 예수사랑) – 네이버 블로그

요한계시록 제 1장 주석(요약자; 예수사랑). ​.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 ‘계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시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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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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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요한계시록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아포칼륖시스 예수 크리스투 헨 에도켄 아우토 호 데오스 데잌사이 토이스 둘로이스 아우투 하 데이 게네스다이 엔 타케이 카이 에세마넨 아포스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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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5/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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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 옛신앙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요한계시록 서론 · 1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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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5/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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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요한계시록 1장 – 밧모 섬에서 생긴 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들을 이 죄악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계 1:5)하셨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예수그리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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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agospel.com

Date Published: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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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1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 ‘계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시스'(* )는 ‘본래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말로 성경에서는 ‘진리에 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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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3/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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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요한계시록 01장 – HANGL CFC

1:1 중요 내용과 계시의 순서 (요한 계시록 1:1,2) Ⅰ. 이 책의 유래를 말해 주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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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fc.kr

Date Published: 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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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1~7 – 요한계시록 서론

저도 요한계시록에 관심을 갖고 주석을 많이 읽어보았으나, … <1장>의 내용에는 사도 요한이 현재 본 것, 보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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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ovatochurch.com

Date Published: 10/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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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9장 (주석집) – 두란노몰

요한계시록 1-9장 (주석집). 김추성 지음; 킹덤북스|; 2018-04-07. 정가 판매가 적립금. 33,000원 29,700원 (10% 할인) P 1,650원 (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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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ll.duranno.com

Date Published: 4/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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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설교말씀] “촛대 사이의 인자”(계1:9-20) – 기혼샘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1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촛대 사이의 인자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촛대 사이의 인자”(계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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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ihonsam153.tistory.com

Date Published: 4/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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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설교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1:1-8)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1장 설교말씀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 1:1-8) ♧명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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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dk153.tistory.com

Date Published: 3/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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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계시록 1장 주석

  • Author: 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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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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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제1장 주석(요약자; 예수사랑)

​ 요한계시록 제 1장 주석(요약자; 예수사랑) ​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 ‘계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시스'(* )는 ‘본래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말로 성경에서는 ‘진리에 대 한 통찰력'(엡1:17)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나타냄'(살후 1:7; 벧전1:7)을 의미한다(Johnson, Lohmeyer). 본문에서 ‘아포칼류시스’가 복수가 아 닌 단수로 언급된 것은 본서가 여러 개의 예언과 환상으로 말하고 있으나 ‘말씀’이라 는 하나의 일치점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 예수 그리스투)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라고 주장한다(Hughes). (2)혹자는 주 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계시라고 주장한다(Kraft, Charles, Ladd).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Tenney, Morris). 그 계시 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요한에게 주어진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 ‘그에게’는 앞서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를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계시의 근원 임을 시사한다(Mounce, Morris, Lenski, Johnson). 즉 성부 하나님은 모든 섭리의 계 획자이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의 성취자이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이 성 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속설(從屬說)을 뜻하지 않는다(요3:34,35; 5:20-24; 7:16; 8:28,29; 12:49; 14:10,24; 16:15; 17:8, Alford, Morris). 반드시 속히 될 일을. – ‘반드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 )는 예언적 필연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나타낸다(Loh- meyer). 한편 ‘속히 될 일’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될 사건임을 암시한다(4:1; 22:6; 단2:28,29,45, Johnson). 여기서 ‘속히'(* ,엔 타케이)는 본서에 7회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으며(2:16; 3:11; 11:14; 22:7,12,20)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시간적 성취의 관점으로 해석한다(Vincent, Hengstenbe- rg). (2)혹자는 종말론적 임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계시의 성취의 진행과 확실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Alford, Johnson, Morris, Mounce). ‘엔 타케이’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자기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다. 즉 ‘엔 타케이’는 인간의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측면에서의 시간적 개념으로(벧후3:8) 하나님의 갑작스런 개입을 통해서 이루 어지는 계시의 성취와 그 확실성을 나타낸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 본 문은 계시의 전달 경로를 나타낸다. (1)하나님. (2)예수 그리스도. (3)근원이신 하나 님께서 계시의 전달자이며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를 통해 자신의 종인 요한에게 전하셨으며, 그 종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받 은 계시를 전하였다. 여기서 세 번이나 언급되는 ‘그'(* ,아우투)는 ‘그리스 도’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본문의 주 동사인 ‘에세마넨'(* , ‘지시하신 것이라’)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모든 계시의 근원이 하나님 이시지만 하나님께 계시를 전달받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종들, 천사, 그리고 종 요한 에게 전달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한편, ‘그 천사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 앙겔 루 아우투'(* )는 ‘그 천사를 통해’라는 의미로 천사의 매개적 역할을 나타내며(22:6,16), ‘그 종 요한에게’의 헬라어 ‘토 둘로 아우 투 요안네'(* )는 수단이나 기구를 나타내는 여 격이 사용되어 요한이 계시 전달의 인간적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나타낸다. 결국 본 서의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기원하여 참됨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천사와 인 간적 도구로 말미암아 수신자들에게 전달된다(Sweet, Moffatt, Ironside). ​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 라.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동일한 내용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증거되어 나타났음을 나타낸다. 즉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증거이 며,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낸다. 또한 본문에서 요한 자신이 본 환상과 예수 그리스 도의 증거가 동일시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약 시대 사도들과의 연속성을 엿볼 수 있다(Johnson, Plummer). ​ =====1:3 본서에는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진술이 나타난다. (1)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 (2)주 안에서 죽는 자(14:13). (3)깨어 옷을 지키는 자(16:15 ). (4)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된 자(19:9). (5)첫 부활에 참여한 자(20:6). (6)하 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22:7). (7)두루마리를 빠는 자(22:14). 본절에 나타난 사람 은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중 첫번째에 해당된다. 이 예언의 말씀을…복이 있나니. – ‘이 예언의 말씀’은 본서가 예언서임을 나타내 는 것으로(10:11; 22:6,7,10,18,19) 본서의 말씀이 예언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영 적, 윤리적 권면과 권고를 포함한 현재적 경고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Johnson).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과 관련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기 술한다. 읽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호 아나기노스콘'(* )은 관사 있는 단수 분사로 초대교회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성경을 읽던 자를 나타낸다. 듣는 자들(* , 호이아쿠온테스)과 지키는 자들(* , 테룬테스). 이 두 부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모두 복수로 예언의 말씀 을 듣고 지키며 행하는 회중들을 나타낸다(눅4:16; 행13:15,21; 골4:16, Johnson, Zahn, Robertson). 요한은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통해서 는(느8:2,3; 눅4:16; 행13:15; 살전5:27)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 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때가 가까움이라. – 본문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 이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 )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 는 ‘크로노스'(* )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마24:3-51; 요21:22, Jo- hnson, Mounce). ​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 본문에서 아무런 수식어 없이 ‘요한’이라고 언급한 것은 서신을 받는 일곱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서로의 사정 을 잘 알고 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요한이 아시아 교회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Mounce). 한편 ‘아시아에’는 본래 로마의 영토를 지칭하는 것으로 아타톨리아 고원에 이르는 소아시아의 서편 지역을 가리킨다(Morris, Kiddle). 당시 아시아 주에는 ‘드로아'(행20:5), ‘골로새'(골1:2), ‘히에라볼리'(골4:13) 등 많은 교 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일곱 교회에만 편지하고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일곱 교회가 역사상의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Seiss, Kuyper). (2)혹자는 ‘일곱’이란 숫자가 완전 수이므로 계시록에 언급되는 다른 일곱이 라는 문학적 양식을 따른 것이라 주장한다(Morris, Johnson, Moffatt, Greijdanus). (3)혹자는 일곱 교회가 처한 황제 숭배화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Mounce)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 견해는 타당하다(레4:6,17; 8:11,33; 민19:12; 롬12:6-8; 약3:17, Ford, Vincent, Canon).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 아포 호 온 카이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 ‘말미암아’의 뜻을 가진 전치사 ‘아포’ (* )는 보통 소유격 명사와 함께 쓰임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성품 을 나타내는 주격 명사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런한 표현 방법은 본서에서 자주 나타나 는 것으로(8절; 4:8; 11:17; 16:5) 요한이 헬라어 문법상 어긋나는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영원불변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신적 성품을 손상시키지 않고 경외하려는 동시에 서 비롯되었다. 즉 이러한 표현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잘 묘사하려는 요 한의 의도를 암시한다(Greijdanus, Morris, Johnson, Ladd).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전 능하신 분이다(8절; 4:8).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 ‘일곱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일곱 천사라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Mounce). (2)혹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Ladd, Johnson, Morris).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전자의 경우 본절과 다음절에 나타나는 삼위일체론적 인사말에 어긋나며 본서에 나타나는 ‘영’은 천사가 아니라 하 나님의 영이나 마귀의 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을 ‘일곱 영’으로 표현한 것은 성령의 속성과 권능이 완전(完全)하고 성결함을 시사한다(3:1; 4:5,6; 5:5; 슥 3:9, Johnson, Morris, Robertson, Barclay, Lenski, Ladd). ​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 본문은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첫번째 수식구로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충성된 증인으로(시89:37; 사55:4) 새 언약을 성취시킨 것이었 음을 나타낸다(Morris, Johnson).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까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시킨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이었다(Ladd). 이러한 사실은 당시 박해와 고난에 처해 있던 일곱 교회의 수신자들에게 위로와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이유가 되 었다(2:13; 11:3; 17:6, Mounce, Johnson).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 ‘먼저 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프로토토 코스'(* )는 바울의 경우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나 통치자의 의미로 사용한 반면(골1:15),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죽은 자들에 대하여 주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 하고 있다(시89:27, Ladd, Mounce, Johnson).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땅의 임금들의 머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르콘 톤 바실레온 테스 게스'(* ) 는 문자적으로 ‘땅의 왕들의 통치자’를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왕적 직분을 표현 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뛰어나시며 모든 권세자들을 지배하시는 주권적 통 치자이심을 시사한다(6:15; 17:14; 19:16; 시89:27; 빌2:9,10, Johnson, Mounce, mor- ris, Ironside).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선물 을 의미하며(롬1:7; 고전1:3), ‘평강’의 헬라어 ‘에이레네'(* )는 히브리인 들의 인사말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풍요로운 영적 상태와 화목을 가리킨다. 이 인사는 평범한 인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이 종적, 횡적으로 임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롬1:7; 고전1:3; 엡1:2; 벧후1:2, mounce, Craft, Martin, and Kiddle).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사랑하사’의 헬라 어 ‘아가폰티'(* )는 현재 분사로 계속되는 사랑을 나타낸다. 이 ‘사 랑’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Mounce). 한편 ‘해 방하시고’에 해당되는 헬라어 ‘뤼산티'(* )는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죄에서 해방하신 공효(功 效)를 시사한다(5:9; 마20:28; 요8:34-36; 갈3:13; 딤전2:6; 히9:12; 벧전1:18,19, Moffatt, Mounce, Lenski). 이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바와 같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 참하게 된다(12:11). ​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 ‘그 아버 지 하나님을 위하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나 타내며(22:3; 엡1:6) 구원 사역이 삼위 하나님의 협동적 사역으로 수행되나 근원적으 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요6장). 한편 ‘나라와 제사장’에 해당 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안, 히에레이스'(* , )는 문자적으로 ‘나라, 곧 제사장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제사장들 의 집합체를 가리킨다. 이는 출19:6과, 벧전2:9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 의 왕됨과 제사장됨을 시사한다(Beckwith, Morris, Lenski).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영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돝사'(* )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으로(출33:9; 겔 1:28)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삼위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본문의 경 우에는 관사와 함께 사용되어 하나님의 신적 속성에 관한 찬양과 공경의 의미를 함축 하고 있다(Mounce). 그리고 ‘능력’의 헬라어 ‘토 크라토스'(* )는 인간이 갖는 권리나 내적 능력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능력을 나타낸다(벧전 4:11). 한편 ‘세세토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 )은 문자적으로 ‘세대들의 세대들에’라는 의미로 ‘영원성’을 나타낸다(18절; 4:9,10; 5:13; 7:12; 10:6; 11:15; 15:7; 19:3; 20:10; 22:5, Lenski).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수신자들에게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기 원하고 있다. ​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 본문은 단7:13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 림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확증하신 바며(마24:30; 26:64) 사도 바울에 의 해 입증된 재림의 모습이다(살전4:17). 여기서 재림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구름은 그리 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위엄을 나타내는 초자연적 현상인 듯하다(Morris, Lenski, Johnson).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 본문은 슥12:10의 예언을 반영한 것이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공개성을 나타낸다. 현재는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실로 인식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는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눈으로 확연히 보게 될 것이다(Ladd). 한편 ‘그를 찌른 자들’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Moffatt, Plummer, Johnson, Ladd). 그리스도는 이런한 자들에게도 자신의 재림을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박해자를 비 롯한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재림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주적 주권을 소유한 분으로서 온 세상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심판주이심을 시사한다(Mounce, Lenski).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 본문은 심판의 보편성을 나타낸 다.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회개치 못한 다들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낸다. 본문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회개치 않은 불신자들이 당할 두 려움을 극명하게 시사한다(Morris, Mounce, Ironside). 그러하리라 아멘. – ‘그러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이'(* )는 동의를 나 타내는 표현으로 히브리어 ‘아멘'(* )과 같다. 요한은 동의어인 ‘그러하리라’와 ‘아멘’을 이중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종말적인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한다 (Greijdanus, Morris, Mounce). ​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 ‘알파’는 헬라어 문자의 첫 글자 며,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이 되셔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시대와 세대의 주가 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창조 주와 심판주로서 모든 주권을 소유하고 계신다(21:6; 22:13, Beasley-Murray,Charles, Robertson). 이런한 하나님이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은 확실한 것이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 본문은 4절의 반복으로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 즉 ‘영원히 자존’하신 하나님의 성품을(출3:14) 묘사한다. 이는 구체적 으로 하나님께서 자체 안에 존재의 기반을 가지고 계셔서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 하시며 영원 불변하신 심판자이심을 나타낸다(Johnson). 그 하나님은 장차 오셔서 자 신이 섭리하신 심판을 이루실 것이다(Ladd).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전능한 자’의 헬라어 ‘판토크라토르'(* ) 는 본서에 9회나 언급되는 중심 단어로 문자적으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나타낸다. 이것은 곧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자가 분명히 가져야 될 속성이다(Johnson). ​ =====1:9 나 요한은. – 요한은 다시금 자신을 밝혀 하나님과 자신과 수신자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요한이 자신을 ‘사도 요한’이라 밝히지 않는 것은 아시 아의 그리스도인들과 친분이 있음을 암시한다(22:8, Johnson).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 요한은 본문에서 자신 과 수신자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너희 형제요…동참하는 자라’에 해당하는 헬라 어는 ‘호 아델포스 휘몬카이 슁코이노노스'(* )로 하나의 관사 ‘호’에 의해 두 가지 칭호 즉 ‘형제’와 ‘동참하는 자’가 연결되어 있다. 이는 ‘형제’인 까닭에 ‘동참하게 된다’는 인과 관계를 드러낸다. 한편 ‘예수의’에 해 당하는 헬라어 ‘엔 예수'(* )는 문자적으로 ‘예수 안에서’란 의미 로 ‘주 안에서’란 바울의 사상과 상통하며, 문법적으로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의 세 말에 공통적으로 연결되어 ‘환난’과 ‘나라’ 그리고 ‘참음’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 음을 시사한다(Moffatt, Mounce). 여기서 ‘환난’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해 온전히 충 성할 때 나타나는 고난을 가리키며(요16:33; 행14:22; 딤후3:12) ‘나라’는 메시야적 통치의 축복을 말하며, ‘참음’의 헬라어 ‘휘포모네'(* )는 ‘휘포'(* , ‘아래에’)와 ‘메노'(* ,’머물다’)의 합성어로 충성된 자들에게 요구되 는 적극적인 인내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축복을 기다 리는 가운데 환난 속에서 인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Johnson, Ironside).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 ‘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와 관련되어 요한의 밧모섬 행(行)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갔다고 주장한다 (Spitta). (2)혹자는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를 받기 위해 갔다고 주장한다(Weiss, Bleek, Lucke). (3)혹자는 복음 전파에 대한 박해로 말미암아 유배되었다고 주장한다 (Moffatt, Charles, Vincent, Plummer, Johnson). 세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 때 에베소 지방에서 전도하던 중 밧모 섬에 귀양갔다가 후에 귀환(歸還)하였다고 역사가와 교부들이 전하기 때문이다 (Irenaeus, Clement, Eusebius). ​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 ‘주의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퀴리아케 헤메라'(* )는 문자적으로 주께 속한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안식후 첫날'(막 16:2; 눅24:1; 요20:19; 행20:7) 혹은 ‘매주일 첫날'(고전 16:2)과 같은 뜻이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유대교의 안식일이었던 토 요일이 사도 시대부터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로 대치된 것을 가리킨다(요20:19; 행 20:7; 고전16:2, Morris, Lenski, Ladd). 한편 ‘성령에 감동하여’의 헬라어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 )는 문자적으로 ‘내가 성령 안에 있었다’는 뜻으로 이는 단순히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황 홀한 상태에 있게 되었음을 암시한다(4:2; 17:3; 21:10; 행10:10; 11:5, Lohmeyer, Ladd, Johnson,Mounce).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 ‘나팔소리’는 구약 시대에 백 성을 불러 소집하거나 군사적으로 경고할 때(겔33:6), 전쟁 때(겔7:14), 그리고 특별 한 의미로 절기 때(레23:24)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한 징표로 나타난다(마24:31; 살전4:16). 본서에서 70회나 사용되며 종말론적인 특성 을 나타내는 본문의 ‘나팔소리’는 심령들을 일깨우는 천사의 음성으로 이해된다 (Morris, Mounce, Ladd). ​ =====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 ‘써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랖손'(* )은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표현이다. 이는 특별히 히브 리 예언 방식으로, 본서에서 12회나 반복되어 사용됨으로 본서의 기록이 하나님의 권 위로 되었음을 시사한다(Morris, Robertson).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 내라 하시기로. – 본문에 제시된 교회의 명칭은 1:4에서 언급된 ‘일곱 교회’를 가리키 는 것으로 각각의 교회에 보내진 특별한 메시지는 2,3장에서 동일한 순서로 나타난다 (‘일곱 교회’에 대해서는 2,3장의 주석 참조). 특별히 기록된 말씀을 일곱 교회에만 보내라고 한 것은 그 도시들이 소아시아 중서부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며(Zean) 동시에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가 보편적으로 모든 교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Mounce, Lenski). ​ =====1:12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 요한이 처음으로 본 것은 슥4:2의 환상과 비슷한 일곱 금 촛대로 여기서 ‘촛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크니아스'(* )는 세워놓 거나 달아메는 ‘등잔불’을 가리킨다(출 25:31; 왕상7:49; 슥4:2). ‘일곱 금 촛대’는 스가랴서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반면에(슥4:2) 본문에서는 수신자들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나아가 전세계의 보편적인 모든 교회들을 나타낸다(20절, Mounce, Johnson, Kiddle). ​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 ‘인자 같은 이’란 단7:13,14을 반영한 것으로 계시 자이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고양시켜 표현한 것이다(행7:56). 요한은 이 표현을 사용 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은 물론 영광으로 고양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Beas ley-Murray). 그리스도가 성전의 촛대 사이로 움직이시는 것은 그의 대제사장적 임재 와 교회의 머리되심을 시사한다(Moffatt, Mounce).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 ‘발에 끌리는 옷’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착용한 예 복으로(출28:4; 레16:4; 사6:1)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그의 권위와 위엄을 시사한 다(Johnson, Mounce). 가슴에 금띠를 띠고. – 이 또한 대제사장 혹은 왕의 예복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출28:8; 29:5) 권세를 가지신 메시야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렇듯 요한은 구약성경에 묘사된 대제사장과 왕의 모습을 빌어 그리스도의 위엄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Bruce, Johnson, Mounce, Morris, Ironside). ​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 본문은 단7:9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성경에서 흰 색깔은 항상 ‘권위’와 ‘영광’과 ‘순결’을 상징하기에 본문은 그 리스도의 성결과 영원성 혹은 그의 영원한 신성을 상징한다(사1:18, Mounce, Kiddle). 그의 눈은 불꽃 같고. – 이는 단10:6을 반영한 것으로 그분의 전지성으로 모든 악 을 꿰뚫어 아시는 날카로운 공의의 눈을 상징하며(Vincent) 아울러 승리로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심판을 시사한다. ​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 ‘빛난 주석’의 헬라어 ‘칼콜리바노'(* )의 어원(語源)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금 같은 청동’ 혹은 ‘양질의 합금이나 놋쇠’로 이해된다(계2:18). 그리스도께서 빛난 주석의 발을 가지셨다는 사실은 초림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힌 발’과는 달리 재림 때에는 영광 과 권능으로 오셔서 모든 더러운 무리들과 반대자들을 밟아 심판할 것을 상징한다(단 10:6, Lenski, Mounce).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 본문은 10절의 ‘나팔소리 같은’에 뒤이어 나 타나는 음성에 대한 묘사로 겔43:2에 똑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는 불가항력적인 권위 와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이 모든 죄인들에게 두려움을 줄 무서운 음성임을 시사한다(시29:3,4). ​ =====1:16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 ‘오른 손’은 권세있는 능력 혹은 보호와 안전을 상징한다(출15:6; 사41:10; 행2:33). 그리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를 뜻하 며(20절) 더 나아가 전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의 사자들을 상징한다. 따라서 본문은 일곱 교회 즉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과 보호하심 가운데 있음을 시사한다 (Lenski, Johnson, Mounce).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 이는 신,구약 성경에서 흔히 사용된 비유이 다(사11:4; 49:2; 눅2:35; 엡6:17; 히4:12). 혹자는 ‘날선 검’을 ‘율법과 복음’의 양 면으로 해석하기도 하나(Tertullian, Victor) 본문은 단순히 날선 검의 심판적 기능을 묘사한 것으로 만국을 심판하시는 메시야의 심판권을 시사한다(19:15; 살후1:8, Charles, Mounce, Walvoord).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 ‘얼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프시스’ (* )는 ‘외관’으로 이해되므로(Lenski, Mounce) 본문은 환상 전체에 대한 결 론적 묘사로 보인다. 이것은 마치 과거에 변화산에서 순간적으로 체험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과 유사한 것으로(마17:2; 막9:3, Plummer)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과 우 월함을 시사한다(Johnson). ​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 본문은 인간이 사도 요한 이 그리스도에 대한 초자연적인 환상을 보고 두려움과 떨림에 압도되었음을 시사해준 다. 이는 계시를 받을 때 흔히 일어나는 모습으로(수5:14; 겔1:28; 단8:17; 10:15; 마 176; 행26:14) 인간의 연약성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두려운을 시사하며 일반적 인 공포와 전율의 감정과는 다른 것이다(Greijdanus, Lenski, Moffatt).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흔히 제자들을 안심시킨 것과 같이(마14:27; 17:7; 막 6:50) 인자한 모습과 음성으로 요한을 위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나는 처음이요 나 중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 호 프로토스 카이 호 에스카토스'(* )는 구문상 강조 용법으로 ‘처음과 나중인 바로 나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8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나타난 ‘알파와 오메가’와 동일한 것으로 8절에서는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칭호로 나타낸 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자신의 칭호를 통해 위로하심으로 요한에게 절대적인 확신을 주고 있다(Mounce, Zahn, Ironside). ​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 ‘곧 산 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호 존'(* )은 앞절의 ‘처음과 나중’이라는 칭호를 보충하는 언급으로 늘 살아있는 ‘영원성’을 나타낸다(출3:14; 시42:2). 한편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는 십자 가에서 죽으신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명을 제 한시킨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수여할 수 있는 구속사적 순종의 사건이다(요 5:26, Lohmeyer).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음부’에 해 당하는 헬라어 ‘하두'(* )는 히브리어 ‘스올'(* )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육신의 죽음 상태와 무덤 혹은 죽은 영혼들이 가는 곳을 가리켰 으며(왕상2:2,9; 욥3:13; 30:23; 시89:48; 사14:9; 겔32:28, Johnson, Greijdanus) 신 약성경에서는 죽은자들이 있는 곳(행2:27,31), 혹은 죽어서 악인들이 거하는 곳을 의 미하였다(20:13,14; 눅16:23).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부활을 통해 사망의 영 역을 정복하시고(고전15:54,55, Vincent) 영원히 살아계셔서 죽음의 영역을 주관하는 열쇠 곧 권능과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 본문은 ‘네 본 것’ 과 ‘이제 있는 일’ 그리고 ‘장차 될 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서 의 내용을 3구분하여 ‘네 본 것’은 1장의 ‘인자에 대한 환상’을, ‘이제 있는 일’은 2,3장에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현재 상태를, ‘장차 될 일’은 4-22장까지의 내용 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Charles, Sweete, Lenski). (2)혹자는 본절의 주동사가 ‘기록 하라’임에 주목하여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현재와 미래에 될 일’로 구분하여 해석한다(Mounce, Moffatt, Johnso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요한이 보고 기록해야 하는 것은 본서의 전체이다. ​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 ‘비밀’에 해당하는 ‘뮈스테리온'(* )은 원래 ‘가둔다’ 혹은 ‘닫는다’는 의미의 ‘뮈 오'(* )에서 파생된 말로(10:7; 17:5,7) 단순히 ‘신비롭다’는 개념이 아니라 ‘상징적인 환상에 대한 내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셔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을 가리킨다(단2:7; 골1:26; 살후2:7, Charles, Robertson).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이'(* )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교회 에서 가장 우세하고 지배적인 정신(the prevailing spirit of the church)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unce). (2)혹자는 ‘교회 자체’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Bleek, Sweete). (3)혹자는 일곱 교회의 감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Zahn, Weiss) (4)혹자는 이 사자가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점을 들어 교회에서 책임을 맡은 천사들이 라 주장한다(Johnson, Moffatt, Charles, Rist).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견해가 타 당하다(단10:13,20.21). 한편 촛대로 상징된 일곱 교회는 일차적으로 소아시아의 선택 된 교회를 말하나 본질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세계의 모든 교 회를 가리킨다(엡3:10).

헬라어 요한계시록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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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륖시스 예수 크리스투 헨 에도켄 아우토 호 데오스 데잌사이 토이스 둘로이스 아우투 하 데이 게네스다이 엔 타케이 카이 에세마넨 아포스테일라스 디아 투 앙겔루 아우투 토 둘로 아우투 요안네

개역개정,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새번역,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의 기록입니다’

우리말성경,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곧 일어날 일들을 자기의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천사를 통해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영어NIV,1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영어NASB,1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to His bond-servants, the things which must soon take place; and He sent and communicated it by His angel to His bond-servant John,

영어MSG,1 A revealing of Jesus, the Messiah. God gave it to make plain to his servants what is about to happen. He published and delivered it by Angel to his servant John.

영어NRSV,1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헬라어신약Stephanos,1 αποκαλυψις ιησου χριστου ην εδωκεν αυτω ο θεος δειξαι τοις δουλοις αυτου α δει γενεσθαι εν ταχει και εσημανεν αποστειλας δια του αγγελου αυτου τω δουλω αυτου ιωαννη

라틴어Vulgate,1 apocalypsis Iesu Christi quam dedit illi Deus palam facere servis suis quae oportet fieri cito et significavit mittens per angelum suum servo suo Iohanni

히브리어Modern,1 חזון ישוע המשיח אשר נתן לו האלהים להראות את עבדיו את אשר היה יהיה במהרה והוא הודיע בשלחו ביד מלאכו לעבדו יוחנן׃

성 경: [계1:1]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머리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 ‘계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시스'(*)는 ‘본래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말로 성경에서는 ‘진리에 대한 통찰력'(엡1:17)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나타냄'(살후1:7; 벧전1:7)을 의미한다(Johnson, Lohmeyer). 본문에서 ‘아포칼류시스’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언급된 것은 본서가 여러 개의 예언과 환상으로 말하고 있으나 ‘말씀’이라는 하나의 일치점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투)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라고 주장한다(Hughes). (2)혹자는 주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계시라고 주장한다(Kraft, Charles, Ladd).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Tenney, Morris).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요한에게 주어진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 ‘그에게’는 앞서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를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계시의 근원임을 시사한다(Mounce, Morris, Lenski, Johnson). 즉 성부 하나님은 모든 섭리의 계획자이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의 성취자이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속설(從屬說)을 뜻하지 않는다(요3:34,35; 5:20-24; 7:16; 8:28,29; 12:49; 14:10,24; 16:15; 17:8, Alford, Morris).

반드시 속히 될 일을. – ‘반드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는 예언적 필연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나타낸다(Loh-meyer). 한편 ‘속히 될 일’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될 사건임을 암시한다(4:1; 22:6; 단2:28,29,45, Johnson). 여기서 ‘속히'(*,엔 타케이)는 본서에 7회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으며(2:16; 3:11; 11:14; 22:7,12,20)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시간적 성취의 관점으로 해석한다(Vincent, Hengstenbe-rg). (2)혹자는 종말론적 임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계시의 성취의 진행과 확실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Alford, Johnson, Morris, Mounce). ‘엔 타케이’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자기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다. 즉 ‘엔 타케이’는 인간의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측면에서의 시간적 개념으로(벧후3:8) 하나님의 갑작스런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계시의 성취와 그 확실성을 나타낸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 본문은 계시의 전달 경로를 나타낸다. (1)하나님. (2)예수 그리스도. (3)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의 전달자이며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를 통해 자신의 종인 요한에게 전하셨으며, 그 종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전하였다. 여기서 세 번이나 언급되는 ‘그'(*, 아우투)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본문의 주 동사인 ‘에세마넨'(*, ‘지시하신 것이라’)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모든 계시의 근원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 계시를 전달받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종들, 천사, 그리고 종 요한에게 전달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한편, ‘그 천사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 앙겔루 아우투'(*)는 ‘그 천사를 통해’라는 의미로 천사의 매개적 역할을 나타내며(22:6,16), ‘그 종 요한에게’의 헬라어 ‘토 둘로 아우투 요안네'(*)는 수단이나 기구를 나타내는 여격이 사용되어 요한이 계시 전달의 인간적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나타낸다. 결국 본서의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기원하여 참됨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천사와 인간적 도구로 말미암아 수신자들에게 전달된다(Sweet, Moffatt, Ironside).

호스 에마르튀레센 톤 로곤 투 데우 카이 텐 마르튀리안 예수 크리스투 호사 에이덴

개역개정,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새번역,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2 요한은 그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입니다.

가톨릭성경,2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영어NIV,2 who testifies to everything he saw–that is,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영어NASB,2 who testified to the word of God and to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even to all that he saw.

영어MSG,2 And John told everything he saw: God’s Word–the witness of Jesus Christ!

영어NRSV,2 who testified to the word of God and to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even to all that he saw.

헬라어신약Stephanos,2 ος εμαρτυρησεν τον λογον του θεου και την μαρτυριαν ιησου χριστου οσα τε ειδεν

라틴어Vulgate,2 qui testimonium perhibuit verbo Dei et testimonium Iesu Christi quaecumque vidit

히브리어Modern,2 אשר העיד דבר האלהים ועדות ישוע המשיח ואת כל אשר ראה׃

성 경: [계1:2]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머리말]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동일한 내용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증거되어 나타났음을 나타낸다. 즉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증거이며,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낸다. 또한 본문에서 요한 자신이 본 환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동일시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약 시대 사도들과의 연속성을 엿볼 수 있다(Johnson, Plummer).

마카리오스 호 아나기노스콘 카이 호이 아쿠온테스 투스 로구스 테스 프로페테이아스 카이 테룬테스 타 엔 아우테 게그람메나 호 가르 카이로스 엥귀스

개역개정,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새번역,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성경,3 이 예언의 말씀들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이는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영어NIV,3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

영어NASB,3 Blessed is he who reads and those who hear the words of the prophecy, and heed the things which are written in it; for the time is near.

영어MSG,3 How blessed the reader! How blessed the hearers and keepers of these oracle words, all the words written in this book! Time is just about up.

영어NRSV,3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aloud the words of the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and who keep what is written in it; for the time is near.

헬라어신약Stephanos,3 μακαριος ο αναγινωσκων και οι ακουοντες τους λογους της προφητειας και τηρουντες τα εν αυτη γεγραμμενα ο γαρ καιρος εγγυς

라틴어Vulgate,3 beatus qui legit et qui audiunt verba prophetiae et servant ea quae in ea scripta sunt tempus enim prope est

히브리어Modern,3 אשרי הקורא ואשרי השמעים את דברי הנבואה ושמרים את אשר כתוב בה כי קרובה העת׃

성 경: [계1:3]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머리말]

본서에는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진술이 나타난다. (1)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 (2)주 안에서 죽는 자(14:13). (3)깨어 옷을 지키는 자(16:15 ). (4)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된 자(19:9). (5)첫 부활에 참여한 자(20:6). (6)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22:7). (7)두루마리를 빠는 자(22:14). 본절에 나타난 사람은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중 첫번째에 해당된다.

이 예언의 말씀을…복이 있나니. – ‘이 예언의 말씀’은 본서가 예언서임을 나타내는 것으로(10:11; 22:6,7,10,18,19) 본서의 말씀이 예언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영적, 윤리적 권면과 권고를 포함한 현재적 경고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Johnson).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과 관련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기술한다.

읽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호 아나기노스콘'(*)은 관사 있는 단수 분사로 초대교회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성경을 읽던 자를 나타낸다.

듣는 자들(*, 호이아쿠온테스)과 지키는 자들(*, 테룬테스). 이 두 부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모두 복수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행하는 회중들을 나타낸다(눅4:16; 행13:15,21; 골4:16, Johnson, Zahn, Robertson). 요한은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통해서는(느8:2,3; 눅4:16; 행13:15; 살전5:27)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때가 가까움이라. – 본문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이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마24:3-51; 요21:22, Jo- hnson, Mounce).

요안네스 타이스 헾타 엨클레시아이스 타이스 엔 테 아시아 카리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 아포 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 카이 아포 톤 헾타 프뉴마톤 하 에노피온 투 드로누 아우투

개역개정,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새번역,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우리말성경,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가톨릭성경,4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영어NIV,4 John, To the seven churches in the province of Asia: Grace and peace to you from him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and from the seven spirits before his throne,

영어NASB,4 John to the seven churches that are in Asia: Grace to you and peace, from Him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and from the seven Spirits who are before His throne,

영어MSG,4 I, John, am writing this to the seven churches in Asia province: All the best to you from THE GOD WHO IS, THE GOD WHO WAS, AND THE GOD ABOUT TO ARRIVE, and from the Seven Spirits assembled before his throne,

영어NRSV,4 John to the seven churches that are in Asia: Grace to you and peace from him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and from the seven spirits who are before his throne,

헬라어신약Stephanos,4 ιωαννης ταις επτα εκκλησιαις ταις εν τη ασια χαρις υμιν και ειρηνη απο του ο ων και ο ην και ο ερχομενος και απο των επτα πνευματων α εστιν ενωπιον του θρονου αυτου

라틴어Vulgate,4 Iohannes septem ecclesiis quae sunt in Asia gratia vobis et pax ab eo qui est et qui erat et qui venturus est et a septem spiritibus qui in conspectu throni eius sunt

히브리어Modern,4 יוחנן אל שבע הקהלות אשר באסיא חסד לכם ושלום מאת ההוה והיה ויבוא ומן שבעת הרוחות אשר לפני כסאו׃

성 경: [계1:4]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문안과 송영]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 본문에서 아무런 수식어 없이 ‘요한’이라고 언급한 것은 서신을 받는 일곱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요한이 아시아 교회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Mounce). 한편 ‘아시아에’는 본래 로마의 영토를 지칭하는 것으로 아타톨리아 고원에 이르는 소아시아의 서편 지역을 가리킨다(Morris, Kiddle). 당시 아시아 주에는 ‘드로아'(행20:5), ‘골로새'(골1:2), ‘히에라볼리'(골4:13) 등 많은 교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일곱 교회에만 편지하고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일곱 교회가 역사상의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Seiss, Kuyper). (2)혹자는 ‘일곱’이란 숫자가 완전 수이므로 계시록에 언급되는 다른 일곱이라는 문학적 양식을 따른 것이라 주장한다(Morris, Johnson, Moffatt, Greijdanus). (3)혹자는 일곱 교회가 처한 황제 숭배화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Mounce)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 견해는 타당하다(레4:6,17; 8:11,33; 민19:12; 롬12:6-8; 약3:17, Ford, Vincent, Canon).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아포 호 온 카이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 – ‘말미암아’의 뜻을 가진 전치사 ‘아포'(*)는 보통 소유격 명사와 함께 쓰임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주격 명사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런한 표현 방법은 본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8절; 4:8; 11:17; 16:5) 요한이 헬라어 문법상 어긋나는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영원불변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신적 성품을 손상시키지 않고 경외하려는 동시에서 비롯되었다. 즉 이러한 표현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잘 묘사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암시한다(Greijdanus, Morris, Johnson, Ladd).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분이다(8절; 4:8).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 ‘일곱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일곱 천사라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Mounce). (2)혹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Ladd, Johnson, Morris).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전자의 경우 본절과 다음절에 나타나는 삼위일체론적 인사말에 어긋나며 본서에 나타나는 ‘영’은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나 마귀의 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을 ‘일곱 영’으로 표현한 것은 성령의 속성과 권능이 완전(完全)하고 성결함을 시사한다(3:1; 4:5,6; 5:5; 슥3:9, Johnson, Morris, Robertson, Barclay, Lenski, Ladd).

카이 아포 예수 크리스투 호 마르튀스 호 피스토스 호 프로토토코스 톤 네크론 카이 호 아르콘 톤 바실레온 테스 게스 토 아가폰티 헤마스 타이 뤼산티 헤마스 에크 톤 하마르티온 헤몬 엔 토 하이마티 아우투

개역개정,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새번역,5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 ㉡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요’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씻어’

우리말성경,5 충성된 증인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처음 나시고 땅의 왕들을 다스리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분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분,

가톨릭성경,5 또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영어NIV,5 and from Jesus Christ, who is the faithful witness, the firstborn from the dead, and 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 To him who loves us and has freed us from our sins by his blood,

영어NASB,5 and from Jesus Christ, the faithful witness, the firstborn of the dead, and 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 To Him who loves us and released us from our sins by His blood–

영어MSG,5 and from Jesus Christ–Loyal Witness, Firstborn from the dead, Ruler of all earthly kings. Glory and strength to Christ, who loves us, who blood-washed our sins from our lives,

영어NRSV,5 and from Jesus Christ, the faithful witness, the firstborn of the dead, and 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 To him who loves us and freed us from our sins by his blood,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απο ιησου χριστου ο μαρτυς ο πιστος ο πρωτοτοκος εκ των νεκρων και ο αρχων των βασιλεων της γης τω αγαπησαντι ημας και λουσαντι ημας απο των αμαρτιων ημων εν τω αιματ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5 et ab Iesu Christo qui est testis fidelis primogenitus mortuorum et princeps regum terrae qui dilexit nos et lavit nos a peccatis nostris in sanguine suo

히브리어Modern,5 ומאת ישוע המשיח העד הנאמן ובכור מן המתים ועליון למלכי ארץ לו אשר אהב אתנו ובדמו גאלנו מחטאתינו׃

성 경: [계1:5]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문안과 송영]

또 충성된 증인으로. – 본문은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첫번째 수식구로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충성된 증인으로(시89:37; 사55:4) 새 언약을 성취시킨 것이었음을 나타낸다(Morris, Johnson).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까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시킨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이었다(Ladd). 이러한 사실은 당시 박해와 고난에 처해 있던 일곱 교회의 수신자들에게 위로와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2:13; 11:3; 17:6, Mounce, Johnson).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 ‘먼저 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프로토토코스'(*)는 바울의 경우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나 통치자의 의미로 사용한 반면(골1:15),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죽은 자들에 대하여 주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하고 있다(시89:27, Ladd, Mounce, Johnson).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땅의 임금들의 머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르콘 톤 바실레온 테스 게스'(*)는 문자적으로 ‘땅의 왕들의 통치자’를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왕적 직분을 표현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뛰어나시며 모든 권세자들을 지배하시는 주권적 통치자이심을 시사한다(6:15; 17:14; 19:16; 시89:27; 빌2:9,10, Johnson, Mounce, mor- ris, Ironside).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선물을 의미하며(롬1:7; 고전1:3), ‘평강’의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인들의 인사말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풍요로운 영적 상태와 화목을 가리킨다. 이 인사는 평범한 인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이 종적, 횡적으로 임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롬1:7; 고전1:3; 엡1:2; 벧후1:2, mounce, Craft, Martin, and Kiddle).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사랑하사’의 헬라어 ‘아가폰티'(*)는 현재 분사로 계속되는 사랑을 나타낸다. 이 ‘사랑’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Mounce). 한편 ‘해방하시고’에 해당되는 헬라어 ‘뤼산티'(*)는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죄에서 해방하신 공효(功效)를 시사한다(5:9; 마20:28; 요8:34-36; 갈3:13; 딤전2:6; 히9:12; 벧전1:18,19, Moffatt, Mounce, Lenski). 이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바와 같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된다(12:11).

카이 에포이에센 헤마스 바실레이안 히에레이스 토 데오 카이 파트리 아우투 아우토 헤 돜사 카이 토 크라토스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 아멘

개역개정,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새번역,6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우리말성경,6 우리를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아 주신 분께 영광과 능력이 세세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가톨릭성경,6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영어NIV,6 and has made us to be a kingdom and priests to serve his God and Father–to him be glory and power for ever and ever! Amen.

영어NASB,6 and He has made us to be a kingdom, priests to His God and Father– to Him be the glory and the dominion forever and ever. Amen.

영어MSG,6 Who made us a Kingdom, Priests for his Father, forever–and yes, he’s on his way!

영어NRSV,6 and made us to be a kingdom, priests serving his God and Father, to him be glory and dominion forever and ever. Amen.

헬라어신약Stephanos,6 και εποιησεν ημας βασιλεις και ιερεις τω θεω και πατρι αυτου αυτω η δοξα και το κρατος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των αιωνων αμην

라틴어Vulgate,6 et fecit nostrum regnum sacerdotes Deo et Patri suo ipsi gloria et imperium in saecula saeculorum amen

히브리어Modern,6 ויעש אתנו למלכים וכהנים לאלהים אביו הכבוד והעז לעולמי עולמים אמן׃

성 경: [계1:6]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문안과 송영]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나타내며(22:3; 엡1:6) 구원 사역이 삼위 하나님의 협동적 사역으로 수행되나 근원적으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요6장). 한편 ‘나라와 제사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안, 히에레이스'(*, )는 문자적으로 ‘나라, 곧 제사장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제사장들의 집합체를 가리킨다. 이는 출19:6과, 벧전2:9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왕됨과 제사장됨을 시사한다(Beckwith, Morris, Lenski).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영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돝사'(*)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으로(출33:9; 겔1:28)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삼위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본문의 경우에는 관사와 함께 사용되어 하나님의 신적 속성에 관한 찬양과 공경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Mounce). 그리고 ‘능력’의 헬라어 ‘토 크라토스'(*)는 인간이 갖는 권리나 내적 능력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능력을 나타낸다(벧전4:11). 한편 ‘세세토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은 문자적으로 ‘세대들의 세대들에’라는 의미로 ‘영원성’을 나타낸다(18절; 4:9,10; 5:13; 7:12; 10:6; 11:15; 15:7; 19:3; 20:10; 22:5, Lenski).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수신자들에게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두 에르케타이 메타 톤 네펠론 카이 옾세타이 아우톤 파스 옾달모스 카이 호이티네스 아우톤 엨세켄테산 카이 콮손타이 엪 아우톤 파사이 하이 퓔라이 테스 게스 나이 아멘

개역개정,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새번역,7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 ㉣단 7:13 ㉤슥 12:10

우리말성경,7 보십시오.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을 찔렀던 사람들도 볼 것이며 땅의 모든 민족이 그분으로 인해 통곡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가톨릭성경,7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영어NIV,7 Look, he is coming with the clouds, and every eye will see him, even those who pierced him; and all the peoples of the earth will mourn because of him. So shall it be! Amen.

영어NASB,7 BEHOLD, HE IS COMING WITH THE CLOUDS, and every eye will see Him, even those who pierced Him; and all the tribes of the earth will mourn over Him. So it is to be. Amen.

영어MSG,7 Riding the clouds, he’ll be seen by every eye, those who mocked and killed him will see him, People from all nations and all times will tear their clothes in lament. Oh, Yes.

영어NRSV,7 Look! He is coming with the clouds; every eye will see him, even those who pierced him; and on his account all the tribes of the earth will wail. So it is to be. Amen.

헬라어신약Stephanos,7 ιδου ερχεται μετα των νεφελων και οψεται αυτον πας οφθαλμος και οιτινες αυτον εξεκεντησαν και κοψονται επ αυτον πασαι αι φυλαι της γης ναι αμην

라틴어Vulgate,7 ecce venit cum nubibus et videbit eum omnis oculus et qui eum pupugerunt et plangent se super eum omnes tribus terrae etiam amen

히브리어Modern,7 הנה הוא בא עם העננים וראתה אתו כל עין גם אלה אשר דקרהו וספדו עליו כל משפחות הארץ כן יהיה אמן׃

성 경: [계1:7]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문안과 송영]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 본문은 단7:13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확증하신 바며(마24:30; 26:64) 사도 바울에 의해 입증된 재림의 모습이다(살전4:17). 여기서 재림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구름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위엄을 나타내는 초자연적 현상인 듯하다(Morris, Lenski, Johnson).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 본문은 슥12:10의 예언을 반영한 것이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공개성을 나타낸다. 현재는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실로 인식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는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눈으로 확연히 보게 될 것이다(Ladd). 한편 ‘그를 찌른 자들’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Moffatt, Plummer, Johnson, Ladd). 그리스도는 이런한 자들에게도 자신의 재림을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박해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재림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주적 주권을 소유한 분으로서 온 세상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심판주이심을 시사한다(Mounce, Lenski).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 본문은 심판의 보편성을 나타낸다.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회개치 못한 다들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낸다. 본문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회개치 않은 불신자들이 당할 두려움을 극명하게 시사한다(Morris, Mounce, Ironside).

그러하리라 아멘. – ‘그러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이'(*)는 동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히브리어 ‘아멘'(*)과 같다. 요한은 동의어인 ‘그러하리라’와 ‘아멘’을 이중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종말적인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한다(Greijdanus, Morris, Mounce).

에고 에이미 토 알파 카이 토 오메가 레게이 퀴리오스 호 데오스 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 호 판토크라토르

개역개정,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새번역,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말성경,8 주 하나님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이신 전능자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가톨릭성경,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영어NIV,8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영어NASB,8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영어MSG,8 The Master declares, “I’m A to Z. I’m THE GOD WHO IS, THE GOD WHO WAS, AND THE GOD ABOUT TO ARRIVE. I’m the Sovereign-Strong.”

영어NRSV,8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γω ειμι το α και το ω αρχη και τελος λεγει ο κυριος ο ων και ο ην και ο ερχομενος ο παντοκρατωρ

라틴어Vulgate,8 ego sum Alpha et Omega principium et finis dicit Dominus Deus qui est et qui erat et qui venturus est Omnipotens

히브리어Modern,8 אני האלף ואני התו ראש וסוף נאם יהוה אלהים ההוה והיה ויבוא אלהי צבאות׃

성 경: [계1:8]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문안과 송영]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 ‘알파’는 헬라어 문자의 첫 글자며,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이 되셔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시대와 세대의 주가 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심판주로서 모든 주권을 소유하고 계신다(21:6; 22:13, Beasley-Murray,Charles, Robertson). 이러한 하나님이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은 확실한 것이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 본문은 4절의 반복으로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즉 ‘영원히 자존’하신 하나님의 성품을(출3:14) 묘사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체 안에 존재의 기반을 가지고 계셔서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시며 영원 불변하신 심판자이심을 나타낸다(Johnson). 그 하나님은 장차 오셔서 자신이 섭리하신 심판을 이루실 것이다(Ladd).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전능한 자’의 헬라어 ‘판토크라토르'(*)는 본서에 9회나 언급되는 중심 단어로 문자적으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나타낸다. 이것은 곧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자가 분명히 가져야 될 속성이다(Johnson).

에고 요안네스 호 아델포스 휘몬 카이 슁코이노노스 엔 테 들맆세이 카이 바실레이아 카이 휘포모네 엔 예수 에게노멘 엔 테 네소 테 칼루메네 팥모 디아 톤 로곤 투 데우 카이 텐 마르튀리안 예수

개역개정,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새번역,9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 ㉥그,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우리말성경,9 여러분의 형제이며 예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인내를 함께 나누는 사람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밧모 섬에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9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영어NIV,9 I, John, your brother and companion in the suffering and kingdom and patient endurance that are ours in Jesus, was on the island of Patmos because of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영어NASB,9 I, John, your brother and fellow partaker in the tribulation and kingdom and perseverance which are in Jesus, was on the island called Patmos because of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영어MSG,9 I, John, with you all the way in the trial and the Kingdom and the passion of patience in Jesus, was on the island called Patmos because of God’s Word, the witness of Jesus.

영어NRSV,9 I, John, your brother who share with you in Jesus the persecution and the kingdom and the patient endurance, was on the island called Patmos because of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9 εγω ιωαννης ο και αδελφος υμων και συγκοινωνος εν τη θλιψει και εν τη βασιλεια και υπομονη ιησου χριστου εγενομην εν τη νησω τη καλουμενη πατμω δια τον λογον του θεου και δια την μαρτυριαν ιησου χριστου

라틴어Vulgate,9 ego Iohannes frater vester et particeps in tribulatione et regno et patientia in Iesu fui in insula quae appellatur Patmos propter verbum Dei et testimonium Iesu

히브리어Modern,9 אני יוחנן אחיכם וגם חבר לכם בלחץ ובמלכות ובסבלנות למען ישוע המשיח הייתי באי אשר שמו פטמוס בעבור דבר האלהים ובעבור עדות ישוע המשיח׃

성 경: [계1:9]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나 요한은. – 요한은 다시금 자신을 밝혀 하나님과 자신과 수신자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요한이 자신을 ‘사도 요한’이라 밝히지 않는 것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과 친분이 있음을 암시한다(22:8, Johnson).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 요한은 본문에서 자신과 수신자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너희 형제요…동참하는 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 아델포스 휘몬카이 슁코이노노스'(*)로 하나의 관사 ‘호’에 의해 두 가지 칭호 즉 ‘형제’와 ‘동참하는 자’가 연결되어 있다. 이는 ‘형제’인 까닭에 ‘동참하게 된다’는 인과 관계를 드러낸다. 한편 ‘예수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예수'(*)는 문자적으로 ‘예수 안에서’란 의미로 ‘주 안에서’란 바울의 사상과 상통하며, 문법적으로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의 세 말에 공통적으로 연결되어 ‘환난’과 ‘나라’ 그리고 ‘참음’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Moffatt, Mounce). 여기서 ‘환난’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해 온전히 충성할 때 나타나는 고난을 가리키며(요16:33; 행14:22; 딤후3:12) ‘나라’는 메시야적 통치의 축복을 말하며, ‘참음’의 헬라어 ‘휘포모네'(*)는 ‘휘포'(*, ‘아래에’)와 ‘메노'(*,’머물다’)의 합성어로 충성된 자들에게 요구되는 적극적인 인내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축복을 기다리는 가운데 환난 속에서 인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Johnson, Ironside).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 ‘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와 관련되어 요한의 밧모섬 행(行)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갔다고 주장한다(Spitta). (2)혹자는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를 받기 위해 갔다고 주장한다(Weiss, Bleek, Lucke). (3)혹자는 복음 전파에 대한 박해로 말미암아 유배되었다고 주장한다(Moffatt, Charles, Vincent, Plummer, Johnson). 세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 때 에베소 지방에서 전도하던 중 밧모섬에 귀양갔다가 후에 귀환(歸還)하였다고 역사가와 교부들이 전하기 때문이다(Irenaeus, Clement, Eusebius).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 엔 테 퀴리아케 헤메라 카이 에쿠사 오피소 무 포넨 메갈렌 호스 살핑고스

개역개정,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새번역,10 주님의 날에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 ㉦그, ‘영’

우리말성경,10 나는 주의 날에 성령께 사로잡혀 있었는데 내 뒤에서 울리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가톨릭성경,10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영어NIV,10 On the Lord’s Day I was in the Spirit, and I heard behind me a loud voice like a trumpet,

영어NASB,10 I was in the Spirit on the Lord’s day, and I heard behind me a loud voice like the sound of a trumpet,

영어MSG,10 It was Sunday and I was in the Spirit, praying. I heard a loud voice behind me, trumpet-clear and piercing:

영어NRSV,10 I was in the spirit on the Lord’s day, and I heard behind me a loud voice like a trumpet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γενομην εν πνευματι εν τη κυριακη ημερα και ηκουσα οπισω μου φωνην μεγαλην ως σαλπιγγος

라틴어Vulgate,10 fui in spiritu in dominica die et audivi post me vocem magnam tamquam tubae

히브리어Modern,10 ואהי ברוח ביום האדון ואשמע אחרי קול גדול כקול שופר׃

성 경: [계1:10]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 ‘주의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퀴리아케 헤메라'(*)는 문자적으로 주께 속한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안식후 첫날'(막 16:2; 눅24:1; 요20:19; 행20:7) 혹은 ‘매주일 첫날'(고전16:2)과 같은 뜻이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유대교의 안식일이었던 토요일이 사도 시대부터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로 대치된 것을 가리킨다(요20:19; 행20:7; 고전16:2, Morris, Lenski, Ladd). 한편 ‘성령에 감동하여’의 헬라어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는 문자적으로 ‘내가 성령 안에 있었다’는 뜻으로 이는 단순히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황홀한 상태에 있게 되었음을 암시한다(4:2; 17:3; 21:10; 행10:10; 11:5, Lohmeyer, Ladd, Johnson,Mounce).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 ‘나팔소리’는 구약 시대에 백성을 불러 소집하거나 군사적으로 경고할 때(겔33:6), 전쟁 때(겔7:14), 그리고 특별한 의미로 절기 때(레23:24)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한 징표로 나타난다(마24:31; 살전4:16). 본서에서 70회나 사용되며 종말론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본문의 ‘나팔소리’는 심령들을 일깨우는 천사의 음성으로 이해된다(Morris, Mounce, Ladd).

레구세스 호 블레페이스 그랖손 에이스 비블리온 카이 펨프손 타이스 헾타 엨클레시아이스 에이스 에페손 카이 에이스 스뮈르난 카이 에이스 페르가몬 카이 에이스 뒤아테이라 카이 에이스 사르데이스 카이 에이스 필라델페이안 카이 에이스 라오디케이안

개역개정,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새번역,11 그 음성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우리말성경,11 말씀하시기를 “네가 본 것을 책에 기록해 그것을 일곱 교회, 곧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1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영어NIV,11 which said: “Write on a scroll what you see and send it to the seven churches: to Ephesus, Smyrna, Pergamum, Thyatira, Sardis, Philadelphia and Laodicea.”

영어NASB,11 saying, “Write in a book what you see, and send it to the seven churches: to Ephesus and to Smyrna and to Pergamum and to Thyatira and to Sardis and to Philadelphia and to Laodicea.”

영어MSG,11 “Write what you see into a book. Send it to the seven churches: to Ephesus, Smyrna, Pergamum, Thyatira, Sardis, Philadelphia, Laodicea.”

영어NRSV,11 saying, “Write in a book what you see and send it to the seven churches, to Ephesus, to Smyrna, to Pergamum, to Thyatira, to Sardis, to Philadelphia, and to Laodicea.”

헬라어신약Stephanos,11 λεγουσης εγω ειμι το α και το ω ο πρωτος και ο εσχατος και ο βλεπεις γραψον εις βιβλιον και πεμψον ταις εκκλησιαις ταις εν ασια εις εφεσον και εις σμυρναν και εις περγαμον και εις θυατειρα και εις σαρδεις και εις φιλαδελφειαν και εις λαοδικειαν

라틴어Vulgate,11 dicentis quod vides scribe in libro et mitte septem ecclesiis Ephesum et Zmyrnam et Pergamum et Thyatiram et Sardis et Philadelphiam et Laodiciam

히브리어Modern,11 ויאמר אני האלף ואני התו הראשון והאחרון ואת אשר אתה ראה כתב אל ספר ושלחהו אל הקהלות אשר באסיא לאפסוס ולזמירנא ולפרגמוס ולתיאטירא ולסרדיס ולפילדפיא וללודקיא׃

성 경: [계1:11]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 ‘써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랖손'(*)은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표현이다. 이는 특별히 히브리 예언 방식으로, 본서에서 12회나 반복되어 사용됨으로 본서의 기록이 하나님의 권위로 되었음을 시사한다(Morris, Robertson).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 본문에 제시된 교회의 명칭은 1:4에서 언급된 ‘일곱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각각의 교회에 보내진 특별한 메시지는 2,3장에서 동일한 순서로 나타난다(‘일곱 교회’에 대해서는 2,3장의 주석 참조). 특별히 기록된 말씀을 일곱 교회에만 보내라고 한 것은 그 도시들이 소아시아 중서부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며(Zean) 동시에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가 보편적으로 모든 교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Mounce, Lenski).

카이 에페스트렢사 블레페인 텐 포넨 헤티스 엘랄레이 멭 에무 카이 에피스트렢사스 에이돈 헾타 뤼크니아스 크뤼사스

개역개정,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새번역,12 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 오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우리말성경,12 나는 내게 말씀하신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렸습니다. 내가 몸을 돌렸을 때 일곱 금촛대가 보였고

가톨릭성경,12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영어NIV,12 I turned around to see the voice that was speaking to me. And when I turned I saw seven golden lampstands,

영어NASB,12 Then I turned to see the voice that was speaking with me. And having turned I saw seven golden lampstands;

영어MSG,12 I turned and saw the voice. I saw a gold menorah with seven branches,

영어NRSV,12 Then I turned to see whose voice it was that spoke to me, and on turning I saw seven golden lampstands,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ι επεστρεψα βλεπειν την φωνην ητις ελαλησεν μετ εμου και επιστρεψας ειδον επτα λυχνιας χρυσας

라틴어Vulgate,12 et conversus sum ut viderem vocem quae loquebatur mecum et conversus vidi septem candelabra aurea

히브리어Modern,12 ואפן לראות את הקול המדבר אלי ויהי בפנותי וארא שבע מנרות זהב׃

성 경: [계1:12]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 요한이 처음으로 본 것은 슥4:2의 환상과 비슷한 일곱 금 촛대로 여기서 ‘촛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크니아스'(*)는 세워 놓거나 달아매는 ‘등잔불’을 가리킨다(출 25:31; 왕상7:49; 슥4:2). ‘일곱 금 촛대’는 스가랴서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반면에(슥4:2) 본문에서는 수신자들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나아가 전세계의 보편적인 모든 교회들을 나타낸다(20절, Mounce, Johnson, Kiddle).

카이 엔 메소 톤 뤼크니온 호모이온 휘온 안드로푸 엔데뒤메논 포데레 카이 페리에조스메논 프로스 토이스 마스토이스 조넨 크뤼산

개역개정,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새번역,13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 ㉧단 7:13

우리말성경,13 그 촛대들 사이에 인자 같은 분이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가톨릭성경,13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영어NIV,13 and among the lampstands was someone “like a son of man,” dressed in a robe reaching down to his feet and with a golden sash around his chest.

영어NASB,13 and in the middle of the lampstands I saw one like a son of man, clothed in a robe reaching to the feet, and girded across His chest with a golden sash.

영어MSG,13 And in the center, the Son of Man, in a robe and gold breastplate,

영어NRSV,13 and in the midst of the lampstands I saw one like the Son of Man, clothed with a long robe and with a golden sash across his chest.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εν μεσω των επτα λυχνιων ομοιον υιω ανθρωπου ενδεδυμενον ποδηρη και περιεζωσμενον προς τοις μαστοις ζωνην χρυσην

라틴어Vulgate,13 et in medio septem candelabrorum similem Filio hominis vestitum podere et praecinctum ad mamillas zonam auream

히브리어Modern,13 ובתוך שבע המנרות דמות בן אדם לבוש מעיל וחגור אזור זהב על לבו׃

성 경: [계1:13]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 ‘인자 같은 이’란 단7:13,14을 반영한 것으로 계시자이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고양시켜 표현한 것이다(행7:56). 요한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은 물론 영광으로 고양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Beas ley-Murray). 그리스도가 성전의 촛대 사이로 움직이시는 것은 그의 대제사장적 임재와 교회의 머리되심을 시사한다(Moffatt, Mounce).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 ‘발에 끌리는 옷’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착용한 예복으로(출28:4; 레16:4; 사6:1)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그의 권위와 위엄을 시사한다(Johnson, Mounce).

가슴에 금띠를 띠고. – 이 또한 대제사장 혹은 왕의 예복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출28:8; 29:5) 권세를 가지신 메시야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렇듯 요한은 구약성경에 묘사된 대제사장과 왕의 모습을 빌어 그리스도의 위엄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Bruce, Johnson, Mounce, Morris, Ironside).

헤 데 케팔레 아우투 카이 하이 트리케스 류카이 호스 에리온 류콘 호스 키온 카이 호이 옾달모이 아우투 호스 플롴스 퓌로스

개역개정,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새번역,14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우리말성경,14 그리고 그분의 머리와 머리칼은 흰 양털과 눈처럼 희고 그분의 눈은 타오르는 불과 같고

가톨릭성경,14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처럼 또 눈처럼 희고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으며,

영어NIV,14 His head and hair were white like wool, as white as snow, and his eyes were like blazing fire.

영어NASB,14 His head and His hair were white like white wool, like snow; and His eyes were like a flame of fire.

영어MSG,14 hair a blizzard of white, Eyes pouring fire-blaze,

영어NRSV,14 His head and his hair were white as white wool, white as snow; his eyes were like a flame of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η δε κεφαλη αυτου και αι τριχες λευκαι ωσει εριον λευκον ως χιων και οι οφθαλμοι αυτου ως φλοξ πυρος

라틴어Vulgate,14 caput autem eius et capilli erant candidi tamquam lana alba tamquam nix et oculi eius velut flamma ignis

히브리어Modern,14 וראשו ושערו לבנים כצמר צחר כשלג ועיניו כלבת אש׃

성 경: [계1:14]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 본문은 단7:9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성경에서 흰 색깔은 항상 ‘권위’와 ‘영광’과 ‘순결’을 상징하기에 본문은 그리스도의 성결과 영원성 혹은 그의 영원한 신성을 상징한다(사1:18, Mounce, Kiddle).

그의 눈은 불꽃 같고. – 이는 단10:6을 반영한 것으로 그분의 전지성으로 모든 악을 꿰뚫어 아시는 날카로운 공의의 눈을 상징하며(Vincent) 아울러 승리로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심판을 시사한다.

카이 호이 포데스 아우투 호모이오이 칼콜리바노 호스 엔 카미노 페퓌로메네스 카이 헤 포네 아우투 호스 포네 휘다톤 폴론

개역개정,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새번역,15 발은 풀무불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우리말성경,15 그분의 발들은 용광로에서 제련된 청동 같고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가톨릭성경,15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 같고 목소리는 큰 물소리 같았습니다.

영어NIV,15 His feet were like bronze glowing in a furnace, and his voice was like the sound of rushing waters.

영어NASB,15 His feet were like burnished bronze, when it has been made to glow in a furnace, and His voice was like the sound of many waters.

영어MSG,15 both feet furnace-fired bronze, His voice a cataract,

영어NRSV,15 his feet were like burnished bronze, refined as in a furnace, and his voice was like the sound of many waters.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οι ποδες αυτου ομοιοι χαλκολιβανω ως εν καμινω πεπυρωμενοι και η φωνη αυτου ως φωνη υδατων πολλων

라틴어Vulgate,15 et pedes eius similes orichalco sicut in camino ardenti et vox illius tamquam vox aquarum multarum

히브리어Modern,15 ומרגלתיו כעין נחשת קלל כצרופות בכור וקולו כקול מים רבים׃

성 경: [계1:15]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 ‘빛난 주석’의 헬라어 ‘칼콜리바노'(*)의 어원(語源)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금 같은 청동’ 혹은 ‘양질의 합금이나 놋쇠’로 이해된다(계2:18). 그리스도께서 빛난 주석의 발을 가지셨다는 사실은 초림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힌 발’과는 달리 재림 때에는 영광과 권능으로 오셔서 모든 더러운 무리들과 반대자들을 밟아 심판할 것을 상징한다(단10:6, Lenski, Mounce).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 본문은 10절의 ‘나팔소리 같은’에 뒤이어 나타나는 음성에 대한 묘사로 겔43:2에 똑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는 불가항력적인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이 모든 죄인들에게 두려움을 줄 무서운 음성임을 시사한다(시29:3,4).

카이 에콘 엔 테 뎈시아 케이리 아우투 아스테라스 헾타 카이 에크 투 스토마토스 아우투 롴파이아 디스토모스 옼세이아 엨포류오메네 카이 헤 옾시스 아우투 호스 호 헬리오스 파이네이 엔 테 뒤나메이 아우투

개역개정,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새번역,16 또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말성경,16 그는 그분의 오른손에 일곱 별을 들고 계셨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왔고 그분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가톨릭성경,16 그리고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계셨으며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습니다. 또 그분의 얼굴은 한낮의 태양처럼 빛났습니다.

영어NIV,16 In his right hand he held seven stars, and out of his mouth came a sharp double-edged sword. His face was like the sun shining in all its brilliance.

영어NASB,16 In His right hand He held seven stars, and out of His mouth came a sharp two-edged sword; and His face was like the sun shining in its strength.

영어MSG,16 right hand holding the Seven Stars, His mouth a sharp-biting sword, his face a perigee sun.

영어NRSV,16 In his right hand he held seven stars, and from his mouth came a sharp, two-edged sword, and his face was like the sun shining with full force.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εχων εν τη δεξια αυτου χειρι αστερας επτα και εκ του στοματος αυτου ρομφαια διστομος οξεια εκπορευομενη και η οψις αυτου ως ο ηλιος φαινει εν τη δυναμε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16 et habebat in dextera sua stellas septem et de ore eius gladius utraque parte acutus exiebat et facies eius sicut sol lucet in virtute sua

히브리어Modern,16 ויהי לו ביד ימינו שבעה כוכבים ומפיו יוצאת חרב פיפיות חדה ופניו כשמש המאיר בגבורתו׃

성 경: [계1:16]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 ‘오른 손’은 권세있는 능력 혹은 보호와 안전을 상징한다(출15:6; 사41:10; 행2:33). 그리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를 뜻하며(20절) 더 나아가 전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의 사자들을 상징한다. 따라서 본문은 일곱 교회 즉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과 보호하심 가운데 있음을 시사한다(Lenski, Johnson, Mounce).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 이는 신,구약 성경에서 흔히 사용된 비유이다(사11:4; 49:2; 눅2:35; 엡6:17; 히4:12). 혹자는 ‘날선 검’을 ‘율법과 복음’의 양면으로 해석하기도 하나(Tertullian, Victor) 본문은 단순히 날선 검의 심판적 기능을 묘사한 것으로 만국을 심판하시는 메시야의 심판권을 시사한다(19:15; 살후1:8, Charles, Mounce, Walvoord).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 ‘얼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프시스'(*)는 ‘외관’으로 이해되므로(Lenski, Mounce) 본문은 환상 전체에 대한 결론적 묘사로 보인다. 이것은 마치 과거에 변화산에서 순간적으로 체험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과 유사한 것으로(마17:2; 막9:3, Plummer)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과 우월함을 시사한다(Johnson).

카이 호테 에이돈 아우톤 에페사 프로스 투스 포다스 아우투 호스 네크로스 카이 에데켄 텐 뎈시안 아우투 엪 에메 레곤 메 포부 에고 에이미 호 프로토스 카이 호 에스카토스

개역개정,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새번역,17 그를 뵐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우리말성경,17 내가 그분을 볼 때 나는 죽은 사람처럼 그분의 발 앞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자기의 오른손을 내게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가톨릭성경,17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영어NIV,17 When I saw him, I fell at his feet as though dead. Then he placed his right hand on me and said: “Do not be afraid. I am the First and the Last.

영어NASB,17 When I saw Him, I fell at His feet like a dead man. And He placed His right hand on me, saying, ” Do not be afraid; I am the first and the last,

영어MSG,17 I saw this and fainted dead at his feet. His right hand pulled me upright, his voice reassured me: “Don’t fear: I am First, I am Last,

영어NRSV,17 When I saw him, I fell at his feet as though dead. But he placed his right hand on me, saying, “Do not be afraid; I am the first and the last,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οτε ειδον αυτον επεσα προς τους ποδας αυτου ως νεκρος και επεθηκεν την δεξιαν αυτου χειρα επ εμε λεγων μοι μη φοβου εγω ειμι ο πρωτος και ο εσχατος

라틴어Vulgate,17 et cum vidissem eum cecidi ad pedes eius tamquam mortuus et posuit dexteram suam super me dicens noli timere ego sum primus et novissimus

히브리어Modern,17 וכראתי אותו ואפל לרגליו כמת וישת עלי יד ימינו ויאמר אל תירא אני הראשון והאחרון והחי׃

성 경: [계1:17]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 본문은 인간이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한 초자연적인 환상을 보고 두려움과 떨림에 압도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는 계시를 받을 때 흔히 일어나는 모습으로(수5:14; 겔1:28; 단8:17; 10:15; 마176; 행26:14) 인간의 연약성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두려운을 시사하며 일반적인 공포와 전율의 감정과는 다른 것이다(Greijdanus, Lenski, Moffatt).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흔히 제자들을 안심시킨 것과 같이(마14:27; 17:7; 막6:50) 인자한 모습과 음성으로 요한을 위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 호 프로토스 카이 호 에스카토스'(*)는 구문상 강조 용법으로 ‘처음과 나중인 바로 나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8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나타난 ‘알파와 오메가’와 동일한 것으로 8절에서는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칭호로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자신의 칭호를 통해 위로하심으로 요한에게 절대적인 확신을 주고 있다(Mounce, Zahn, Ironside).

카이 호 존 카이 에게노멘 네크로스 카이 이두 존 에이미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 카이 에코 타스 클레이스 투 다나투 카이 투 하두

개역개정,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새번역,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 ㉨그, ‘하데스’

우리말성경,18 나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으나 보라, 나는 영원토록 살아 있는 자니 나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성경,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영어NIV,18 I am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behold I am alive for ever and ever! And I hold the keys of death and Hades.

영어NASB,18 and the living One; and I was dead, and behold, I am alive forevermore, and I have the keys of death and of Hades.

영어MSG,18 I’m Alive. I died, but I came to life, and my life is now forever. See these keys in my hand? They open and lock Death’s doors, they open and lock Hell’s gates.

영어NRSV,18 and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see, I am alive forever and ever; and I have the keys of Death and of Hades.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ο ζων και εγενομην νεκρος και ιδου ζων ειμι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των αιωνων αμην και εχω τας κλεις του αδου και του θανατου

라틴어Vulgate,18 et vivus et fui mortuus et ecce sum vivens in saecula saeculorum et habeo claves mortis et inferni

히브리어Modern,18 ואהי מת והנני חי לעולמי עולמים אמן ובידי מפתחות שאול ומות׃

성 경: [계1:18]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 ‘곧 산 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호 존'(*)은 앞절의 ‘처음과 나중’이라는 칭호를 보충하는 언급으로 늘 살아있는 ‘영원성’을 나타낸다(출3:14; 시42:2). 한편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명을 제한시킨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수여할 수 있는 구속사적 순종의 사건이다(요5:26, Lohmeyer).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음부’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두'(*)는 히브리어 ‘스올'(*)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육신의 죽음 상태와 무덤 혹은 죽은 영혼들이 가는 곳을 가리켰으며(왕상2:2,9; 욥3:13; 30:23; 시89:48; 사14:9; 겔32:28, Johnson, Greijdanus) 신약성경에서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행2:27,31), 혹은 죽어서 악인들이 거하는 곳을 의미하였다(20:13,14; 눅16:23).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부활을 통해 사망의 영역을 정복하시고(고전15:54,55, Vincent) 영원히 살아계셔서 죽음의 영역을 주관하는 열쇠 곧 권능과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그랖손 운 하 에이데스 카이 하 에이신 카이 하 멜레이 게네스다이 메타 타우타

개역개정,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새번역,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본 것과 지금의 일들과 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우리말성경,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일들과 이 일 후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가톨릭성경,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영어NIV,19 “Write, therefore, what you have seen, what is now and what will take place later.

영어NASB,19 “Therefore write the things which you have seen, and the things which are, and the things which will take place after these things.

영어MSG,19 Now write down everything you see: things that are, things about to be.

영어NRSV,19 Now write what you have seen, what is, and what is to take place after this.

헬라어신약Stephanos,19 γραψον α ειδες και α εισιν και α μελλει γινεσθαι μετα ταυτα

라틴어Vulgate,19 scribe ergo quae vidisti et quae sunt et quae oportet fieri post haec

히브리어Modern,19 ועתה כתב את אשר ראית ואשר נעשה עתה ואשר עתיד להיות אחרי כן׃

성 경: [계1:19]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 본문은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 그리고 ‘장차 될 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서의 내용을 3구분하여 ‘네 본 것’은 1장의 ‘인자에 대한 환상’을, ‘이제 있는 일’은 2,3장에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현재 상태를, ‘장차 될 일’은 4-22장까지의 내용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Charles, Sweete, Lenski). (2)혹자는 본절의 주동사가 ‘기록하라’임에 주목하여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현재와 미래에 될 일’로 구분하여 해석한다(Mounce, Moffatt, Johnso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요한이 보고 기록해야 하는 것은 본서의 전체이다.

토 뮈스테리온 톤 헾타 아스테론 후스 에이데스 에피 테스 뎈시아스 무 카이 타스 헾타 뤼크니아스 타스 크뤼사스 호이 헾타 아스테레스 앙겔로이 톤 헾타 엨클레시온 에이신 카이 하이 뤼크니아이 하이 헾타 헾타 엨클레시아이 에이신

개역개정,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새번역,20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심부름꾼이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 ㉩또는 ‘천사’

우리말성경,20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촛대의 비밀은 이것이니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가톨릭성경,20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황금 등잔대의 신비는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고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이다.”

영어NIV,20 The mystery of the seven stars that you saw in my right hand and of the seven golden lampstands is this: The seven stars are the angels of the seven churches, and the seven lampstands are the seven churches.

영어NASB,20 “As for the mystery of the seven stars which you saw in My right hand, and the seven golden lampstands: the seven stars are the angels of the seven churches, and the seven lampstands are the seven churches.

영어MSG,20 The Seven Stars you saw in my right hand and the seven-branched gold menorah–do you want to know what’s behind them? The Seven Stars are the Angels of the seven churches; the menorah’s seven branches are the seven churches.”

영어NRSV,20 As for the mystery of the seven stars that you saw in my right hand, and the seven golden lampstands: the seven stars are the angels of the seven churches, and the seven lampstands are the seven churches.

헬라어신약Stephanos,20 το μυστηριον των επτα αστερων ων ειδες επι της δεξιας μου και τας επτα λυχνιας τας χρυσας οι επτα αστερες αγγελοι των επτα εκκλησιων εισιν και αι επτα λυχνιαι ας ειδες επτα εκκλησιαι εισιν

라틴어Vulgate,20 sacramentum septem stellarum quas vidisti in dextera mea et septem candelabra aurea septem stellae angeli sunt septem ecclesiarum et candelabra septem septem ecclesiae sunt

히브리어Modern,20 את סוד שבעת הכוכבים אשר ראית בימיני ואת שבע מנרות הזהב שבעת הכוכבים הם מלאכי שבע הקהלות ושבע המנרות אשר ראית שבע קהלות הנה׃

성 경: [계1:20]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 ‘비밀’에 해당하는 ‘뮈스테리온'(*)은 원래 ‘가둔다’ 혹은 ‘닫는다’는 의미의 ‘뮈오'(*)에서 파생된 말로(10:7; 17:5,7) 단순히 ‘신비롭다’는 개념이 아니라 ‘상징적인 환상에 대한 내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셔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을 가리킨다(단2:7; 골1:26; 살후2:7, Charles, Robertson).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교회에서 가장 우세하고 지배적인 정신(the prevailing spirit of the church)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unce). (2)혹자는 ‘교회 자체’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Bleek, Sweete). (3)혹자는 일곱 교회의 감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Zahn, Weiss) (4)혹자는 이 사자가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점을 들어 교회에서 책임을 맡은 천사들이라 주장한다(Johnson, Moffatt, Charles, Rist).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단10:13,20.21). 한편 촛대로 상징된 일곱 교회는 일차적으로 소아시아의 선택된 교회를 말하나 본질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세계의 모든 교회를 가리킨다(엡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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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요한계시록 강해 김효성 목사 2020년 10월 30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요한계시록 서론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2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 (1) 3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 (2) 4장: 하늘 보좌의 광경 5장: 어린양이 찬양을 받으심 6장: 일곱 인 7장: 인 맞은 자들과 흰옷 입은 큰 무리 8장: 첫째 나팔부터 넷째 나팔까지 9장: 다섯째 나팔부터 여섯째 나팔까지 10장: 작은 책을 먹음 11장: 두 증인 12장: 사탄이 내어쫓김 13장: 두 짐승 14장: 구속받은 성도들 15장: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 16장: 일곱 대접 재앙 17장: 큰 음녀 18장: 바벨론의 멸망 19장: 백마 탄 자의 심판 20장: 천년왕국과 마지막 심판 21장: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 22장: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라 서론 요 한계시록의 저자 는 사도 요한이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인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등은 본서를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인용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대체로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인정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오랫동안 논란되었으나, 순교자 저스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은 본서를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인용했고, 특히 수리아의 위대한 교부 에브라임 시루스는 요한계시록을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반복해서 인용하였다. 본서의 저작 연대 는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때인 주후 95-96년경이라고 보인다.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유세비우스 등은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81-96년)의 통치 제15년에 밧모섬에 유배되었고(주후 95년), 도미티안 말기에(주후 96년) 그 섬에서 이 계시를 보았고, 도미티안이 죽은 후에 네르바 황제(주후 96-98년)의 통치 초기에 에베소로 돌아와 트라얀 황제(주후 98-117년) 때까지 에베소에 머물렀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적 주제 는 종말 예언이다. 본서는 장차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강조하며(1:7; 22:20) 그 재림 전에 있을 환난 시대에 대해 예언한다. 이 예언의 목적은 교회들로 환난에 대비해 믿음에 굳게 서고 인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본서에는 “내가 보았다”는 단어가 57회, “또 내가 보았다” 는 표현이 32회 나온다. 그 외에도, ‘어린양’(28회), ‘주’(21회) 등의 말이 빈번히 나온다. 본서의 6장부터 19장까지에 증거되어 있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의 해석 에 대해서는 크게 네 가지 견해 가 있다. 1. 과거적 견해 –초대교회 시대 즉 로마 제국시대에 다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의 대환난의 징조들로 본서의 내용과 같은 것들을 말씀하셨다(마 24장). 그러므로 이미 다 이루어졌다는 해석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2. 교회사적 견해 –사도 시대로부터 세상 종말까지의 교회 역사 전체에 관한 것으로 본다(루터, 벵겔, 반즈, 메이천). 그러나 본서의 내용들이 교회 역사상 어느 정도 나타날 수는 있어도 그것들을 교회역사상의 구체적 사건들과 일치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3. 영적 견해 –역사에서 악의 세력과 참 교회 간의 투쟁의 원리를 교훈하는 것으로 본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제롬, 어거스틴). 그러나 본서의 내용이 악의 세력과 참 교회 간의 투쟁의 원리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라고 보지만, 본서가 예언서인 한 어떤 미래의 구체적 사실들이나 사건들과 그것들의 전개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언은 비록 상징적일지라도 미래의 어떤 사실들 혹은 사건들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종말론적 견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사건들에 관한 것으로 본다(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터툴리안, 잔).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은 마태복음 24장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내용과 비슷한 점들이 많다. 박윤선 박사는 종말론적 해석을 중시하면서 영적 해석과 교회사적 해석도 참고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네 견해들에 더하여,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비유적 해석이 있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와 해석이 있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은 정확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1:7; 22:20)과 재림 직전의 대환난(6-19장)과 마지막 심판(20:11-15)을 대비하고 믿음과 인내로 천국을 소망하라는 교훈은 분명하다.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1-3절, 계시의 성격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啓示)이다. 요한계시록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계시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이 받은 복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었다. 갈라디아서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도 요한이 받아 요한계시록에 기록한 종말 예언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자신의 모든 뜻을 계시하셨다(히 1:1-2). 하나님의 진리들은 하나님 자신께서만 계시하실 수 있다. 창조에 대한 진리도, 구원에 대한 진리도, 종말에 대한 진리도 그렇다. 종말 예언인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말씀, 즉 신적 권위의 말씀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별되신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비가 여기에 있다. 성경은 삼위(三位)[세 인격]의 구별을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 혹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영 등으로 표현한다. 예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신적 본질]과 인성(人性)[인적 본질]을 가진 한 인격이시다. 신성(神性)에 있어서 그는 아버지와 구별되시나 한 하나님이시다. 물론, 인성(人性)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신다. 이처럼 세 인격의 구별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고 그들의 관계성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까닭은 성경이 그의 신성에 대해 부정할 수 없게, 분명하게, 충분하게 증거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요 1:1), ‘참 하나님’(요일 5:20), ‘크신 하나님’(딛 2:13)으로 불리셨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예컨대, 포도주 기적, 떡 기적, 나병, 중풍병 치료, 죽은 자들 살리심 등), 또한 하나님과 나란히 영광과 찬송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신다(계 5:13).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반드시 속히 될 일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장차 반드시 있을 일들, 즉 종말 사건들에 관한 것이다. 그것들 속에는 대환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죽은 자들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 등이 포함된다. ‘반드시’라는 말은 계시된 내용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종말 예언의 내용들은 진실하고 확실하다. 또한 ‘속히’라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본서의 계시 내용들은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이다. 이 말씀을 주신 지 2천년이 지났다. 교회는 이 말씀대로 때가 가까움을 의식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항상 종말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깨어 있는 태도이다. 사람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일이 더딘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작정하신 모든 일을 다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벧후 3:8). 계시의 목적은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즉 보이시기 위함이다. ‘그 종들’은 주의 사도들과 제자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요한계시록은 바로 하나님의 종된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다. 본서의 계시는 천사를 통해 그리고 요한을 통해 주어졌다(계 22:8). 또 그 방법은 상징으로 나타내시는 것이었다. ‘지시하신’이라는 원어( 세마이노 )는 본래 ‘상징으로 나타내다’(signify) (KJV) 는 뜻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 사건들에 대한 상징적 예언의 책이다. [2절]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계시의 증거자는 사도 요한 자신이다. 요한은 자기가 받은 계시를 책으로 기록했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주께서 친히 증거하신 진리이며, 사도 요한이 본 바이었다. 본서에는 ‘본다’는 말( 에이돈 )이 57회나 사용되었고, 그 중에 ‘또 내가 보니’라는 말( 카이 에이돈 )이 32회나 나온다. 요한은 많은 상징적 내용들을 환상 중에 보았다. ‘다 증거하였다’는 말은 요한이 기록한 본서가 하나님의 계시를 충분하게 기록하였음을 증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이다. 성경말씀은 우리를 온전케 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준비되게 한다(딤후 3:16-17).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에 무엇을 가감(加減)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계 22:18-19).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한다. 옛날에는 책이 귀하므로 한 사람이 읽고 나머지 사람들은 들었다. 그래서 읽는 자(단수명사)와 듣는 자들(복수명사)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감사하게도 모든 사람이 누구나 원하면 마음껏 읽을 수 있고 또 들을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듣고 지켜야 한다. 지킨다는 말은 성경말씀을 보수(保守)하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하나도 버리지 말고 다 보수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다. 특히 계시록을 통한 복은 환난을 대비함과 인내와 위로의 복이고(13:10; 14:12) 성도가 환난과 죄악을 이겨 마침내 천국과 영생에 이르는 복이다(22:5, 17).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인 성경은 그것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참으로 복되다. 계시된 내용은 긴급한 일들이다. “[마지막] 때가 가깝다.” 성도에게는 항상 종말의식이 필요하다. 오늘날은 더욱 그러하다. 지구의 종말이 가깝다. 본서와 성경 다른 곳들에 예언된 세상 종말의 징조들인 많은 거짓 목사들의 출현, 교회들의 배교(背敎), 전쟁, 기근, 전염병, 지진, 핍박, 세계복음화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연계에도 자원 고갈, 환경 오염, 생태계 파괴, 오존층 파괴, 지구 온난화 현상 등 이상 징조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깝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계시의 책에 주목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해석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우리가 덮어두어서는 안 될 중요한 책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내용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진 말씀인 이 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될 일들에 관한 말씀이다. 이것은 종말 예언서이다. 우리는 세상 종말에 관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셋째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되다. 성경을 사랑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되며 큰 평안을 얻는다(시 1:1-3; 119:165). 요한계시록은 특히 장차 올 대환난에서 마귀를 대적할 믿음과 인내를 준비시키며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을 소망하고 위로를 얻게 한다. 4-8절, 문안과 송영 [4-5a절]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였다. 종말 예언의 계시인 본서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아시아는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어키 지역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먼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안이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영원 자존(永遠自存)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계시하셨다(출 3:14).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그 보좌 앞에 일곱 영들’은 성령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 신들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의 영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5:6, “[어린양의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그의 충성된 증인 되심, 그의 부활, 땅의 임금들의 머리 되심을 언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충성된 증인이셨다. ‘증인’이라는 원어(말투스 mavrtu” )는 ‘순교자’라는 뜻도 가진다. 충성된 증인은 죽기까지 모든 진리를 증거하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죽기까지 증거하신 충성된 증인이셨다. 또 그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땅의 왕들의 머리가 되셨다. 그는 모든 교회의 머리이시며 온 세계의 정치가들의 머리이시다. 그는 만주의 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시다(계 17:14). 우리는 만주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긴다. 사도 요한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안이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은혜와 평안은 성도에게 참으로 복된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의 호의와 사랑이다. 사람은 은혜를 받아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더 잘 믿을 수 있고 죄 안 짓고 바르게 살며 성화를 이룰 수 있다. 평안은 은혜의 결과이며 포괄적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우선 마음의 평안을 가리키지만, 또한 몸의 건강과 일용할 양식과 가정적, 사회적 평안까지 포함한다. 그것은 현세의 평안뿐 아니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평안도 포함한다. [5b-6절]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1)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었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기쁜 소식이었다. 죄는 인생의 근본 문제이다. 범죄한 사람은 누구나 죽으며 지옥에 던지움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씻음을 받아야 하고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대속 사역으로 죄씻음 받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이다. 성도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다.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천국 백성이 되었다. 또 우리는 시시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능력을 돌려야 한다. [7절]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종말 예언의 중요한 내용이다. 예수님의 승천 시 구름이 그를 가리웠듯이 그의 재림 시에도 그는 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다. 사도행전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그의 재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다. 또 그의 재림 때에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릴 자들도 있으나, 후회와 공포 속에 부르짖을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하리라, 아멘”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히 있을 것을 증거한다. 성도들은 이 땅의 것들을 소망하지 않는다. 이 땅의 것들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다 불탈 것이다. 그것들은 다 불 심판을 받을 것들이다. 우리의 소망과 기대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그가 다시 오시면 그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8절]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주 하나님’이라는 말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신약적 표현이다. 구약성경의 ‘여호와’는 신약성경에서 ‘주’라고 번역되어 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끝 글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시작과 끝이시다. 시작은 창조요 끝은 심판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하나님이시요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 곧 영원자존자이시다. 그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제한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시다.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다. 여기에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들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자존하시며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우주와 인생의 모든 질문의 답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만 참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안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고 믿음을 지키고 성화를 이루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이 죄와 시험이 많고 슬픔과 수고로움과 고난이 많은 세상을 잘 살 수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감사하며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들로 인해 죽어야 하고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하셨다. 주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포도즙 잔을 나누시며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28).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고 제사장들이 되었고(벧전 2:9) 담대히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주께서 친히 약속하셨고 성경이 밝히 증거한 복된 소망이다.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간절히 소망하자. 9-20절, 계시를 받은 경위 [9-11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그리스도] 2)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3) 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사도 요한은 자신을 성도들의 형제라고 말했다. 이것은 노사도의 겸손한 인품을 나타낸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직분자들을 그의 직분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또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했다.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받는 환난이 있다(마 16:24; 행 14:22; 딤후 3:12). 우리는 다 그 환난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또한 그의 나라와 참음에도 동참하는 자들이다. 환난이 있지만, 그의 나라도 있고 또 참으면 영광도 있다(딤후 2:12). 그것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 뒤에 부활과 승천이 있음과 같다. 사도 요한은 또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받았는지, 그가 계시를 받은 경위를 말한다. 그는 주의 날에 계시를 받았다. 그는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날도 주일이었고(요 20:19, 26),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도 주일이었고(행 2:1; 레 23:15-16),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은 날도 주일이었다. 사도시대에 벌써 하나님께서 주일을 복된 날로 구별하시는 표들이 있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의 계시를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섬에 있었다. 전해진 말에 의하면, 그는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시를 받게 하기 위해 그를 밧모섬에 있게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어려운 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생기며 모든 일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사도 요한은 그가 보는 내용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다. 주 예수께서 요한이 본 내용을 책에 기록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더 잘 보관하고 전파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에 더 굳게 서고 더 큰 위로를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성경의 필요성과 목적이 있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과 온전함을 위해 성경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고 주야로 읽고 묵상해야 하며 그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해야 한다. [12-16절]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人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사도 요한은 일곱 금촛대와 촛대 사이에 서신 영광스럽고 엄위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그가 본 첫 번째 내용은 일곱 금촛대이었다. 그것은 일곱 교회를 가리켰다. 교회는 금촛대와 같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은 존귀하고 교회는 영광스럽다(엡 5:26-27). 교회를 촛대로 묘사한 것은 그것의 사명을 보인다. 교회는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한다. 빛은 지식과 의와 선과 기쁨을 상징한다. 사도 요한이 본 두 번째 내용은 일곱 금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人子) 같은 이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묘사되었다. 그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신 것은 그의 왕으로서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시는 것 같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것은 그의 지극히 거룩하심을 나타내신다. 또 그의 눈이 불꽃같은 것은 그의 깊고 철저한 통찰력을 나타내시며, 그의 발이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것은 그의 심판의 권세를 나타내신다. 그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은 것은 그의 말씀의 큰 권위를 나타내신다.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는 것은 그가 교회들의 목사들을 붙드시고 사용하심을 나타낸다.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쪼개는 그의 예리한 말씀을 나타내신다. 그의 얼굴이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은 것은 그의 크신 영광을 나타내신다. 십자가에 죽으셨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셨고 장차 재림하실 예수께서는 참으로 영화로우시고 엄위하시다. 그 영광의 주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인류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이시며 그의 재림 직전의 종말 사건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17-20절]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있도다. 아멘. 또] 4)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앞에 엎드러졌다. 주께서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본질에 있어서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의 신비는 성경이 증거하는 기본적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이제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망과 음부[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죄인들을 사망과 지옥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들과 일곱 금촛대들과 ‘이제 있는 일’ 즉 당시의 교회들의 일들과 ‘장차 될 일’ 즉 교회 역사상 되어질 일들과 주님 재림 직전의 일들을 기록해야 했다. 일곱 교회는 세상에 있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을 대표할 것이다. ‘일곱 별의 비밀’이라고 한 것은 목사들의 영적 상태와 충성의 정도를 교인들이 잘 모르고 주님만 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오른손에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너무 염려하거나 너무 낙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주장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위엄과 거룩, 통찰력과 능력, 영원하심, 살아계심,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심을 알아야 하고, 특히 그가 세상에 있는 모든 존귀한 교회들과, 별들과 같은 목사들을 주관하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교회들을 주께 맡기며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존귀함을 깨달아야 한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은 비록 부족이 없지 않지만 일곱 금촛대들로 간주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옷의 흉패와 견대에 있는 보석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고 교회를 귀히 여기고 또 잘 세워나가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특히 교회의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들은 촛대들로 표현되었다. 촛대는 빛을 비추는 기구이다. 주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그것은 우리의 선행을 교훈하신 것이다(마 5:16).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 선행이라고 말하였다(딛 2:14). 우리는 전도와 선행으로 지식과 의와 선의 빛을 비춰야 한다. 2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 (1) 1-7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교훈 [1-3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랍손 )[편지하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케크메카스 )[피곤하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각 편지는 그 교회의 사자, 즉 목사에게 보내졌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보내신 사자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 목사는 교회를 인도하며 장로들은 협력한다. 목사가 바로 서면 교회는 바로 서며 목사가 잘못되면 교회가 잘못될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께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신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신다. 그는 목사를 세우실 능력도, 폐하실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므로 자기의 원하시는 바를 다 이루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급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모든 일을 아뢰며 잠잠히 그의 하시는 일을 보아야 한다.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 목사의 행위와 수고와 그의 인내를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다른 이의 중심을 다 모르나, 주께서는 아신다. 특히 에베소 교회의 목사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은 많은 원수들과 싸워야 하는 힘든 일이요 낙심하기 쉬운 일이지만, 그는 이 일을 잘 수행하고 잘 참고 피곤하지 않았다. 주께서는 그의 선하고 충성된 행위를 기억하고 계셨다. [4-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의 과거에 잘한 일도 인정하시지만, 현재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책망하신다. 그의 문제점은 처음 사랑을 버린 일이었다. 그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또 사명자로서 그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의 복음을 전하고 지키는 일을 위해 수고하고 참고 충성했으나, 지금은 처음에 가졌던 그 사랑과 그 열심과 그 충성을 버렸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지금 주를 뜨겁게 사랑하고 충성함이 없다면 주의 지적과 책망을 피할 수 없다. 주께서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지만, 그 은혜는 죄인 속에 반드시 죄에 대한 회개와 구주에 대한 믿음을 일으킴으로 그를 구원한다. 하나님 없이 죄 가운데 방황하며 살던 사람이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는 일생에 한번뿐이다. 그것은 ‘생명 얻는 회개’(행 11:18)이며 그것이 구원이다. 아직 회개한 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구원을 받는다. 회개치 않는 자는 영원한 멸망(눅 13:3, 5), 곧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이런 회개를 한 자도 어떤 구체적 죄 가운데 빠졌을 때 그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이런 회개는 반복적이다. 주께서는 그에게 만일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네게 임하여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말씀하셨다. 촛대를 옮기는 것은 교회를 폐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의 교회, 그러나 그 도시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죄를 범했던 그 교회를 하나님께서 폐하신 것과 같다. 그것은 무서운 경고이다. [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는 아직도 선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이었다. 니골라 당은 14-15절에 있는 대로 우상숭배와 음행을 허용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자유를 왜곡하고 남용하였던 것 같다. 주께서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셨다. 주의 참된 종들은 이단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성령의 말씀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한 하나님이시다. 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교회들에게, 즉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사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알고 믿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가졌던 그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고 그 사랑이 날마다 더욱 많아져야 한다. 또 주께서는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신다.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악의 풍조를 이긴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죄가 많고 사탄과 악령들의 시험이 많고 죄악된 풍조들이 많다. 우리는 과거에 세상에 속하여 살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살며 죄와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악의 풍조와 싸우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긴다는 말은 죄 짓지 않고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한다는 말이고, 진다는 말은 죄 짓는다는 말이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것은 영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지는 자, 곧 죄에 지고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고 이 세상의 죄악된 풍조에 지는 자는 영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영생을 얻고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요한일서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그러나 그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성령 안에서 힘써 노력해야 한다(벧후 1:5, 10).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순종하는 자가 이긴다. 우리는 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행위를 기억하시고 인정하신다. 2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우리는 선한 일을 힘쓰고 수고하고 오래 참고 피곤해지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은 우리의 중심을 몰라주어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과 우리의 선행과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고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 힘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첫 사랑을 잃어버리지 말고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처음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가졌던 사랑과 각오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현재 우리의 사랑과 열심이 식어져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들을 것이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의 일들에 항상 힘써야 한다. 특히 우리가 우리의 죄와 연약을 깨달으면 우리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성도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을지라도 반복해 죄를 짓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신다.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악의 풍조를 이겨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불경건과 부도덕을 버려야 하고 사탄과 악령들의 시험을 물리치고 세상의 악하고 음란한 풍조를 배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성령으로 중생시켜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게 하신 자들은 다 이길 것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의롭고 선한 삶을 힘써야 한다. 8-11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교훈 [8-9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처음이요 나중[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전통사본) 5)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會)라. 주께서는 처음이시며 마지막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만 참 하나님이시며 오직 그 하나님께서만 온 세상을 주관하신다. 또 주께서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이시다.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 11:25). 우리가 그를 위해 죽는다 할지라도 그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다시 살리실 수 있고 참으로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활의 주께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큰 힘과 위로와 소망이 되신다.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 목사의 계명 순종과 충성의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아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계명 순종과 충성을 아신다. 또 주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궁핍을 경험할 것이다. 사도행전 14: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디모데후서 3:14,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비록 서머나 교회의 목사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평가하셨다. 인생의 참된 부요는 물질적인 데 있지 않고 영적인 데 있다. 물질적인 가치는 일시적이지만, 영적인 가치는 영원하다. 주께서는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다(눅 12:21). 또 가난한 자들이 믿음이 좋은 경우가 많다.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약 2:5).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만 소망하며 그를 위로로 삼고 하나님의 뜻만 행하며 사는 자이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을 받았다. 구약교회는 매우 타락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또 주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핍박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구약교회인 유대인들의 모임은 실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었고 사탄의 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죽이고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이 어떻게 참 교회에 속하겠는가? 그들은 분명히 사탄의 회에 속한 자들이었다. [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아야 했다. 고난은 기껏해야 우리의 육신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보내시며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고(마 10:28), 사도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노라”고 말하였다(고후 5:1). 서머나 교회에는 장차 10일 동안의 환난이 있을 것이며 마귀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다. 그 교회의 목사가 견고히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시험과 환난이 있을 것이다. 10일 동안의 환난은 서머나 교회에게 닥칠 문자적으로 10일 간의 환난이든지 혹은 상징적으로 어떤 제한된 기간을 가리킬 것이다.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은 영속적이지 않고 지나가는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치 말고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해야 한다.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다. ‘충성’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참 충성은 죽기 전까지는 증명될 수 없을 것이다. 충성은 죽음을 통해 참으로 증명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구원받은 성도들]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사탄]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순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확실한 표이다. 물론 참 하나님, 곧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그의 뜻을 위한 순교와 충성만이 의미와 가치가 있다. 주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는 종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생명의 면류관은 면류관의 종류들 중 하나라기보다 생명의 영광 혹은 영광스러운 생명이라는 뜻일 것이다. 죽기까지 참된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는 자는 영광스럽고 복된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 충성치 않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보장되지 않는다. 주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에게는 영생의 영광이 약속되지 않는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주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은 주 예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어야 한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 곧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성경책을 읽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모든 내용을 믿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기는 자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며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둘째 사망의 해는 지옥 형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요한계시록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해 충성치 않고 순종치 않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은 반드시 믿음과 인내, 그리고 순종과 충성의 삶을 동반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물질적으로 궁핍할지라도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 부요하신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 눅 2:24; 마 17:27; 21:2-3; 18-19). 지상 교회는 항상 고난받고 궁핍한 교회이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영적으로 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있어서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탄의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사탄의 종들의 비방과 핍박이 있고 투옥이 있고 죽음의 위협이 있지만, 우리는 담대해야 하고(요 16:33) 사탄을 대적해야 한다(벧전 5:9).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충성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주께서는 죽기까지 충성하셨다.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히 13:13). 주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말씀하셨다(요 11:25). 요한계시록 20장은 순교자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복에 대해 증거했다. 우리는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12-17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교훈 [12-13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6) 네가 어디 사는 것을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로 묘사되신다. 1:16은 그 검이 입에서 나온다고 표현한다. 그 ‘좌우에 날선 검’은 그의 예리한 말씀, 즉 사람의 죄를 지적하여 영혼을 회개시키는 말씀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칼과 같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악인을 죽이기도 할 것이다. 주께서는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과 같은 말씀을 주신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한다. 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바른 건립은 영적인 전쟁과 같다. 마귀와 불신앙과 비진리를 대항해 싸울 이 전쟁에서 우리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기록되었으되” 하며 성경말씀을 사용하셨듯이, 오늘날 우리도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때 기록된 성경말씀을 사용해야 한다. 버가모는 사탄의 위(位)가 있는 곳, 곧 우상숭배의 총본부와 같았다. 그 도시에는 제우스 신의 신전과 아테나 여신의 신전과 디오니소스 신의 신전 외에, 뱀 모양의 의술의 신 에스큘라피우스 신의 신전이 있었고, 또 로마 황제 아구스도를 숭배하는 신전도 있었다고 한다. 황제 숭배는 초대교회 시대인 로마 시대에 보편적 풍조이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혼란시켰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미혹하게 하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믿음과 순종의 행함이 있는 사람이었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에 굳게 선 사람이었다. 그는 주의 이름을 굳게 잡았고 주의 충성된 증인 혹은 순교자 안디바가 죽임을 당했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바른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순교자 못지 않게 충성된 자일 것이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런 사람이었고 주께서는 그의 믿음과 행위를 아셨고 그를 인정하셨고 칭찬하셨다. [14-15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주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책망도 하셨다. 우리에게 칭찬거리가 있으면 그가 우리를 칭찬하실 것이지만, 우리에게 책망거리가 있으면 그는 우리에게 책망도 하실 것이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책망은 그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발람의 교훈은 발람이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범죄케 한 한 방책을 일러준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그들로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며 그 신들에게 제사한 제물을 함께 먹게 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셨다(민 25:1-3). 그것이 발람의 교훈이었다(민 31:16). 이와 비슷한 교훈이 버가모 교회 안에 들어온 니골라 당의 교훈이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하는 것이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런 자들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도 교회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가 경계해야 할 우상숭배는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와,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 숭배와, 종교다원주의의 이방 종교 관용이다. 우상숭배의 용납은 하나님께 책망받을 큰 잘못이다. 오늘날 교회는 또 음행을 경계해야 한다. 현대 사회와 문화는 심히 음란하다. 오늘날 교회에는 심지어 동성애와 동성애자 결혼, 그리고 동성애 목사까지 용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인들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목사들은 바른 교훈을 전하고 가르치며 교인들을 그 교훈대로 살도록 인도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우리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멀리해야 한다.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교회 안에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는 자들을 용납하는 것은 교회의 목사가 회개할 죄이었다. 만일 목사가 회개치 않는다면, 주께서는 그 교회에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교회가 권징을 회피한다면 주께서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교인들 중에서 죄 지은 자들에게 직접 징벌을 내리실 것이다. 주께서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신다는 말씀을 보면 주의 입의 칼은 심판의 칼인 것처럼 보인다. 주님의 직접 개입은 목사에게 큰 수치가 될 것이다. 그가 돌보는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직접 징계를 당할 것이다. 그의 목회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목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상급은 크게 감소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직접 개입하시기 전에 그는 교인들을 바르게 교훈하고, 필요할 때 적절한 권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1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만나는 천국의 양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시편 78:24-25,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주님과 누릴 사랑의 식탁 교제를 가리킬 것이다. 또 흰 돌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옛 시대에 흰 돌은 운동 경기에서 이길 때에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 시에나, 큰 잔치에 입장할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과연 장차 우리가 받을 흰 돌은 그런 의미를 다 포함하는 것 같다. 그 흰 돌은 이 세상에서 영적 싸움에 승리한 자들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無罪) 혹은 의롭다 하심의 판결을 받을 자들과,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 잔치에 참여할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이 기록될 것인데, 그것은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새 이름은 구원받은 자가 아마 천국에서 사용할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천국 백성으로서 우리가 누릴 복된 신분과 영광을 나타낸다.

본문의 교훈을 다시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사탄의 위(位)가 있는 곳,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죽음의 위협이 있는 곳에서도 버가모 교회의 사자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믿음은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장차 온 세상에 임할 대환난 시대에 대비하여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상숭배와 음행의 악을 포용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에 교리적, 윤리적 죄악을 분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죄악을 정죄하면서 죄악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가 될 것이며 주 하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8-29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교훈 [18-19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가 네 사업[행위]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한 것은 그의 통찰력의 날카로움을 나타내시며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한 것은 그의 심판의 엄위함을 나타내신다고 본다. 주께서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에게 이런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주께서 그 목사의 문제점을 통찰하시고 그가 포용한 악에 대해 심판하실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시며 우리의 행위들을 판단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먼저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가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하셨다. 그 목사는 주님께 칭찬들을 일을 많이 하였다. 그는 주님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주를 사랑했고 믿었고 섬겼고 인내했다. 이것들은 다 좋은 점들이었다. 우리도 주를 위해 일하는 자가 되고 주를 참으로 사랑하고 믿고 섬기는 자 되기를 원하며 또 환난 중에도 오래 참는 자 되기를 원한다. 또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나중 행위가 처음 것들보다 많았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목사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꾸준히 주를 믿고 섬겼으며 점점 더 열심히 주를 믿고 섬겼다. [20-21절]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네 아내](전통사본) 7)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진실히 주를 믿고 섬기는 목사에게도 문제점이 있었다. 그의 문제점은 버가모 교회 목사의 문제점과 같이 잘못된 자를 포용하는 데 있었다. 그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그의 아내 이세벨을 용납하였다.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의 아내는 선지자로 자처하였을 뿐만 아니라, 옛날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처럼 우상숭배자이었다. 그 여자는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음행하게 하고 우상제물을 먹게 함으로써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이 죄악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도 포용주의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목사들이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들과 천주교회를 포용하거나 심지어 동성애 같은 악을 포용하고 있다. 주께서는 확실히 그들에 대해서도 책망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주께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믿을 기회를 주신다. 그들은 그 기회에 지체하거나 고집을 부리지 말고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음행을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자이었을 것이다. 교회 속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회개치 않는 죄인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자들을 보면 낙심할 것이 아니고, 힘써 권면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그런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말했다(고전 15:33-34). [22-23절] 볼지어다, 내가 그[그 여자]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께서는 두아디라 교회 목사 사모에게 벌을 선언하셨다. 첫 번째는 그를 침상에 던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를 병상에 눕게 하심을 가리킨다. 두 번째는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 행위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님의 공의의 징벌이었다. 이로써 모든 교회는 주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죄는 은밀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주께서는 사람의 그 은밀한 마음과 뜻을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징벌하신다. 주 앞에는 비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는 오늘날에도 공의로운 징벌을 내리실 것이다. [24-25절]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감사하게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 여자의 교훈을 받지 않고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남아 있었다. 해이해지고 넓어진 교회들 속에도 순진한 교인들이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두아디라에 남아 있는 교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그의 재림의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안에 사탄의 은밀한 활동이 많이 있다고 보인다.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이 만연하고 비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 즉 교회연합운동이 활발하고 은사주의의 혼란과 교회 음악의 타락 등이 그 증거들이다. 현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주께서 남겨두신 신실한 교회들이 어디인가에 있고 신실한 목사들과 성도들이 어디인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끝까지 속죄신앙과 개혁신앙을 지키고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하기를 원한다. [26-29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 일”이라는 말씀은 주께서 명하신 주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심판 권세이다. 주께서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자이시며(계 12:5) 이 권세를 성도들에게도 나누어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19: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사도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말했다(고전 6:2). 또 주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새벽별을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새벽별은 주님의 영광의 빛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표현하셨다(계 22:1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두라디아 교회 목사는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았다. 우리의 선한 행위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는 처음 믿었을 때보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자라고 풍성해져야 한다.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과 선행이 자라가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잘못된 교훈을 따르는 아내를 용납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잘못이 있을 때 그를 책망하고 고치게 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우상숭배와 음행의 악을 멀리해야 한다. 악의 포용은 교회를 부패시킨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 우리는 가족들 중에 있는 악이라도 용납지 말고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처음 믿을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굳게 붙잡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 교회연합운동, 은사주의, 여자 목사, CCM , 열린예배, 낙태, 동성애까지 용납하는 풍조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을 분별하고 배격하고 성경에 밝히 계시되고 증거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믿고 지키고 실천해야 한다. 3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 (2) 1-6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교훈 [1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고 계신다. 성령을 일곱 영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분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통찰력을 나타내신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자 곧 성령과 본질적으로 일체가 되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지식, 또 그의 통찰력은 완전하시고 충만하시다. 주께서는 사데 교회의 목사의 행위를 아셨고 그의 행위에 근거하여 그를 판단하셨다. 우리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혹은 불완전한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기 쉽지만, 주께서는 그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과 인격의 표현이다. 사람의 말은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감출 수 있고 심지어 위선적일 수도 있으나, 사람의 행위는 그것을 그대로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사람의 마음도 판단하시지만, 특히 행위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신다. 사데 교회 목사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다. 그와 그의 교회는 사람들의 보기에 매우 활동적이었고 또 그렇게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활동적이라는 것이 교회가 건전하다는 표시는 아니다. 이단들도 매우 열심이 있고 이방종교인들이나 공산주의자들도 그러하다. 열심이 있다는 것이 진리를 소유한 표시는 아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이냐, 어떤 성질의 열심이냐가 중요하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 죽은 자이었다. 죽었다는 말은 영적 의미이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었을지 모르나,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죽었다고 간주되었다는 말이다. 그의 활동은 바른 지식과 참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위들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하지 못했다. 의롭고 선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생명 있는 믿음으로 보기 어렵다. 의롭고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2절]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이 말씀을 보면, 사데 교회의 목사는 아직 완전히 죽은 상태는 아닌 것 같다. 그에게 죽게 된, 죽어가고 있는 남은 바가 있었다. 그것은 복음 신앙의 뿌리이었거나 중생했으나 연약한 생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죽을 처지에 있었다. 그 남은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목사는 그것을 굳게 붙잡아야 했다. 그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였다. 행위의 온전함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행위를 가리키고, 행위의 온전치 못함은 불경건하고 더럽고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행위를 가리킬 것이다. 사데 교회의 목사에게는 행위의 온전함이 없었다.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기억하고](KJV, NASB, NIV)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성도가 받았고 들었던 바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이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그것을 다시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해야 하였다. 생각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는 말이다. 과거의 기억은 유익하다. 특히 구원의 기억이 그러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찬송가 405장).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긍휼 가운데 우리를 회개시켜 구주 예수님을 믿게 하셨는지 기억하고 회개해야 한다.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은 오늘과 내일의 신앙생활에 힘이 된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셔도 그 목사가 일깨지 않으면 주께서 도적같이 그에게 임하실 것이며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4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목사의 영적 상태를 따라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데 교회는 달랐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사데 교회는 목사가 영적으로 죽은 자이었으나, 그 교회에는 자기의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주와 함께 다닐 자들이었다. 그들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들이었다. 흰옷은 순결을 의미한다.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흰옷이며 그를 믿는 속죄신앙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또 성도는 그 의 안에서 믿음을 지키고 바르고 선한 일을 힘쓴다. 그러나 흰옷을 입은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저버렸고 해이해졌고 죄의 낙을 누렸다. 노아 시대에도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는 다 죄 가운데 살다가 멸망하였다. 영생에 이르는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은 적다. [5-6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는 흰옷 입은 목사, 흰옷 입은 직분자들, 흰옷 입은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흰옷 입은 무리의 수에 들어야 한다. 성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 의 안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흰옷을 입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죄를 짓는 자는 흰옷을 더럽히는 자요 영적으로 죽어 가는 자이다. 교인들은 산 자와 죽은 자, 흰옷 입은 자와 흰옷을 더럽히는 자, 둘 중에 하나에 속한다. 흰옷 입은 자들의 구원은 확실하다. 주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지우지 아니하고 그것들을 하나님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이다. ‘이름을 흐린다’는 말은 이름을 지워버린다는 뜻이다. 주님만 바라고 죄를 대항하고 의를 행하는 자들의 구원은 확실하여 주께서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흰옷을 더럽히는 자들 곧 죄를 짓는 자들의 구원은 보장될 수 없다. 사람이 죄 가운데 살면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거짓된 확신이며 그가 구원을 소망한다고 해도 그것은 헛된 소망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고 성경의 모든 교훈들을 행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모양이나 이름이나 평판만 가지지 말고 실제로 참 믿음과 선한 행위를 가져야 한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으나 죽은 자 혹은 죽어가는 자이었다. 우리는 그런 자와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나 종교적 의식이 아니고 실제의 인격과 삶이다. 우리가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라면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에 증거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잘 파악하고 굳게 지켜야 한다. 우리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받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내용들을 다 믿고 보수하고 그것들에 합당한 경건하고 바르고 선한 행위를 가져야 한다. 특히,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 흔들리는 현시대에 우리는 성경의 바른 교훈을 굳게 붙들고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흰옷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 의의 흰옷을 입은 자는 그 흰옷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신칭의 복음 신앙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또 그 복음 신앙에 합당한 거룩과 의의 생활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7-13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교훈 [7-8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는]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아니하였음이라]. 본문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주께서는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다고 말씀하시며 또 다윗의 열쇠로 문 곧 천국문을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열린 문을 주셨다. 그것은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이다. 열린 문은 천국의 확실한 보장을 가리킨다.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위해 천국 문을 여신다. 주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신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28). 주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열린 문을 주신 이유는, 그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의 말씀을 지키며 그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린 문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인간 편에서 볼 때 그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는 큰 재능을 가진 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목사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치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하나님께서 주신 열린 문, 곧 천국의 확실한 보장이었다. 우리는 힘과 재능이 없다고 핑계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두렵고 떨릴지라도, 힘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이름을 배반하거나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순결과 절개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온전한 말씀 순종의 삶을 말한다. 그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세속의 죄악된 풍조에 물들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교회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작은 힘으로도 주를 진실하게 믿고 따라야 한다. [9절]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주께서는 유대인들의 모임을 사탄의 회라고 부르셨다. 구약교회인 유대인들의 모임은 부패되고 타락하여 사탄의 모임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였고 신약교회를 핍박하였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2:15-16에서,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하였다. 타락한 종교는 세상보다 더 악한 것 같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유대인들 중에 몇 사람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 앞에 굴복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 신실한 목사에게 내리시는 보상과 같았다. 주께서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하실 것이다.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살아계심과 그들을 사랑하시고 위하심을 종종 현실 속에서 이렇게 나타내신다.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한 가지 더 복된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주께서 친히 그를 지키어 장차 온 세상에 임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시험의 때는 대환난의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그 목사가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올리우는 것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대환난을 겪을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요한계시록 7:14,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 목사를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시험과 환난의 때를 면하는 은혜가 예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옛날 애굽에 내렸던 10가지 재앙 중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했던 고센 땅이 그 재앙을 받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은혜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대환난 중에도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11절]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주께서는 단지 한 가지를 그에게 요구하셨다. 그것은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른 신앙의 보수를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역사적 기독교,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장차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일이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장차 받을 그 생명의 면류관을 빼앗길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우리에게 예비된 천국과 영생을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주께로부터 받은 성경말씀 안에 굳게 서고 유일한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12-13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참된 성도를 가리킨다.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엡 2:21-22). 또 그들은 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꼭 필요한 기둥 같은 인물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또 주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세 가지의 이름, 즉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의 새 이름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새 예루살렘 성의 백성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들임을 확증하신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의 교훈은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이 듣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고 굳게 지키고 인내하며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능력이 크든지 적든지, 우리는 주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치 않았다. 오늘날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로부터 전달받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즉 중세시대에 로마 천주교회가 잃어버렸다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영적 어둠에서 다시 발견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 진리를 잘 이해하고 믿고 그 복음 신앙, 속죄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 실천해야 한다. 그 역사적 기독교가 옛신앙이다. 우리는 그 신앙을 지켜야 한다. 온 세상에 마지막 대환난이 올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기 백성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며 환난과 시험을 감당하게 하시든지 피할 길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를 굳게 믿고 성경 교훈을 행해야 한다. 14-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교훈 [14-16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아멘[진실]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하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 곧 만세 전에 그가 택하신 자들의 대속 사역을 이루시는 일에 충실하셨고 그의 뜻을 참되게 증거하셨다. 주께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에게 교훈하시는 뜻이 있어 보인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주께 충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주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표현하셨다. 고대의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다. 우주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며 철학자들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시다. 주께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셨다. 차거나 덥다는 표현은 주의 복음과 일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굳게 믿고 그것을 전하며 영혼들을 구원하며 바른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 열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주께서는 그의 미지근한 태도를 지적하시며 그가 분명한 태도를 가지기를 원하신다. 즉 믿는가, 믿지 않는가 확실한 태도를 취하고 믿으려면 확실히 믿으라는 것이다. 미지근한 태도는 믿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고, 오히려 참된 믿음에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자신을, 믿는 자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런 미지근한 태도를 미워하신다. 미지근한 태도는 꾸며진 불신앙이며 일종의 위선이다. 하나님께서는 위선을 미워하신다. 그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순종을 원하신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 즉 교인수나 재정에 있어서 부유했던 것 같다. 그 교회 목사는 자기 만족에 빠져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네가 가난하다’고 말씀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물질적으로 부유했으나 영적으로 빈곤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었고 벌거벗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의 목사의 경우와 정반대이었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외적으로는 빈곤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부유한 자이었다(계 2:9).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외적으로는 부유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빈곤한 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재정적 부유함을 크게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의 영적, 신앙적 부유함을 크게 여기신다(눅 12:21).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벧전 1:7).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확신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의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했고(롬 13:14), 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다(갈 3:27). 또 안약은 진리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영안(靈眼)을 밝게 하는 성령의 지혜를 가리킬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주 예수께 살 수 있다. 주님께 산다는 말은 이 모든 것이 주의 소유라는 것을 나타낸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실상,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이런 것들을 간구할 때 그는 그것들을 값없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55:1에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셨다.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책망과 권면과 회개의 촉구는 다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주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부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오래 참고 또 책망하시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버려두시거나 아니면 벌써 쳐서 데려가셨을 것이다. 부모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매를 때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충고한다. 만일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를 사랑하시며 그에게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2:5-6은,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라고 말했다. [20-22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었다. 목사인 그는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못하였다. 주께서는 그의 몸을 성전 삼지 못하시고 그를 떠나 계셨다. 그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경우이다. 그는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해야 했다. 그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그는 즐거운 식탁 교제, 즉 주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기는 자들은 심판날에 주의 보좌에 함께 앉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진리를 확신해야 한다. 라오디게아 목사의 문제는 미지근한 데 있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에게는 주께 대한 불신앙과 의심이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시력도 없었다. 그는 세상적 가치관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미지근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과 그의 복음 진리를 확신하고 의롭다 하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무슨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즉시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열심으로 회개해야 하며 주님을 마음에 영접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주님과의 교제의 회복, 즉 성경말씀의 깨달음과 기도의 문의 열림과 그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보호하심과 기도의 응답을 경험할 것이다. 4장: 하늘 보좌의 광경 [1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나팔소리 같은 음성은 주님의 음성이었다(계 1:10, 12). 본문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신약교회의 휴거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중에 천상의 광경을 보게 된 경위를 말하는 것뿐이다.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이란, 이미 1:19에서 말한 대로, 사도 시대 이후의 교회 역사와 세상의 종말 사건들을 가리킨다. [2-3절]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사도 요한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으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5:1에 그의 오른손에 책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케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그의 본체는 아무도 볼 수 없으나 때때로 그는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여전히 벽옥과 홍보석과 무지개와 녹보석 등 상징적인 말로 묘사되었다. 벽옥은 그의 거룩하신 영광을 나타내시며, 홍보석은 그의 공의와 심판의 엄위하심을 나타내시고, 무지개는 그의 신실하신 긍휼의 약속을 나타내시고, 녹보석은 그의 선하시고 아름다우심을 나타내시는 것 같다. [4절]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사도 요한은 보좌에 둘려 있는 24보좌를 보았다. 거기에는 24장로들이 앉아 있었다. 24장로들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 같다. 24라는 수는 구약교회의 12지파들과 신약교회의 12사도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요한계시록 21:12, 14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문 위에는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자손 12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고, 성곽의 열두 기초석 위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있었다. 또 24장로들이 입은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성결을 가리키고, 그들이 쓴 금면류관은 장차 교회가 누릴 존귀와 영광을 상징할 것이다. 우리의 소망과 영광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천국에 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를 바라며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며 산다. 세상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태워질 것이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이다. [5-7절]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은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나타날 능력과 위엄을 보이는 것 같다. 또 보좌 앞의 일곱 등불,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와 지식을 나타낸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신 영이시다. 그는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위를 다 아시고 그들의 은밀한 일들까지도 다 아시고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또 보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수정 같은 유리바다’는 구약시대에 성전의 바다에 비교된다. 그 바다는 제사장들의 씻는 일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대하 4:6). 천상의 ‘수정 같은 유리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흠과 점 없는 거룩함을 나타낼 것이다. 네 생물들은 천사들을 대표하는 것 같다. 그 생물들의 안에 눈이 가득한 것은 그들의 통찰력과 지식의 풍성함을 상징할 것이다. 그 네 생물들의 모습은 에스겔서의 묘사와는 다르지만(겔 1:10-11; 10:14) 그 상징하는 바는 비슷하다고 본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다. 사자는 불굴의 용맹스러움을 상징하며, 송아지는 온순함과 충성을 상징하며, 사람은 지혜를, 독수리는 쇠하지 않는 생명력과 민첩함을 상징할 것이다. 천사들은 악령들과의 전투에서 용맹스럽고, 온순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충성하며 지혜롭고 총명하며 민첩하며 쇠하지 않는 생명력을 가진다. [8-11절] 네 생물이 [둘레에]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그 안에](MT)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주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8) ](NASB, NIV) 하고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네 생물들은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찬양하기를 힘썼다. 천사들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천사들의 존재는 실재이다. 천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즐겁게 하려고 노래하는 자들이 아니고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을 찬양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허무한 가사를 지절거리는 노래들을 미워하시나, 진리에 합한 노래들을 귀히 보신다. 물론, 찬양은 가사 뿐만 아니라, 곡과 리듬과 박자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과 질서에 맞게 아름다워야 한다(시 96:9).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해야 한다. 24장로들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자신들의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던져 드렸고 오직 하나님께만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돌렸다. 성도의 찬양의 근본적인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만 우리의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과 선행에 대해 상을 주시지만, 성도는 사실상 그런 상을 받을 만한 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천상에서도 고백해야 할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만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어둡고 불완전한 현실만 보지 말고 천상의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며 또 천국의 영광을 묵상하며 그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온 우주의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엄위하시고 아름다우시며 천국의 영광도 그러하다. 고린도후서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둘째로, 우리는 장차 의의 흰옷, 즉 죄성이 전혀 없는 영광스런 몸과 금면류관을 쓸 것을 감히 소망한다. 이것이 성도가 천국에서 누릴 복된 영광이다. 빌립보서 3:20-21,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로마서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셋째로, 우리는 네 생물들의 덕, 즉 사자 같은 용맹, 송아지 같은 온순함과 충성, 사람의 지혜, 독수리 같은 쇠하지 않는 생명력과 민첩함을 배우기를 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종들과 교회 직분자들과 성도들에게 오늘날에도 필요한 덕이다. 5장: 어린양이 찬양을 받으심 [1-5절]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獅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든 책은 장차 될 일들, 즉 교회 역사와 세상 종말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쓴 책일 것이다. 안팎에 썼다는 말은 그 내용이 많고 자세함을 보인다. 일곱 인으로 봉했다는 것은 은밀히 감추어진 내용이라는 뜻이다. 이제 그 인봉이 하나씩 떼어지며 종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씩 계시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밀한 종말 계획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의인의 영들 중에도 없고, 땅 위에 살아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죽은 자들 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요한은 크게 울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고 답답하여 울었을 것이다. 그때 장로들 중 한 사람이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가르쳐 주었다. 유대 지파의 사자(獅子)요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은 창세기 49:9에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는 예언과 이사야 11:1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날 것이라”는 예언 등에 근거했다고 본다. ‘뿌리’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 22:16에도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실상 다윗은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이다. ‘이기셨다’는 말은 마귀의 시험과 죄와 세상의 악을 이기셨다는 뜻일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과 죄와 세상의 악을 이기셨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고 이제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셨다. [6-7절]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사도 요한이 본 어린양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상징한다. 그는 죽음으로 하나님의 택자들을 위한 속죄를 완성하셨고 부활로 그 사실을 확증하셨다. 어린양에게 있는 일곱 뿔은 그의 신적 능력을 보이고 일곱 눈은 그의 신적 통찰력과 지식을 보인다. 그 일곱 눈은 온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어린양은 종말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기록한 책을 취하셨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며, 어린양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심으로 인류 역사의 미래와 종말 사건들, 심판과 최종 영광까지를 계시하실 자격자가 되셨다. 미래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어린양에 의해 하나씩 계시될 것이다(계 6:1). [8-10절]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엎드렸고 장로들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9)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우리를] 10)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왕들과] 11)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어린양이 책을 취하실 때에 네 생물과 24장로들은 그에게 엎드려 경배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천사들과 성도들에게 경배를 받으실 자이시다. 24장로들은 각각 거문고와 향 대접을 가지고 있었다. 성도의 기도들은 향에 비교되었다. 성도들의 찬양과 감사, 죄의 고백, 및 소원의 간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과 같다. 새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노래하는 노래를 가리킨다. 어린양과 같으신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셔서 세계 각 나라 중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속(救贖)하셨다. 그러므로 참된 찬송은 속죄 찬송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자기의 피로 우리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송해야 한다. 또 주께서는 그의 속죄사역으로 우리를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셨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을 다스릴 왕들이 되었다. 우리는 장차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할 자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천국에서 영원히 왕노릇할 자들이다(계 20:6; 22:5).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이 되었다. [11-12절]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사도 요한은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수많은 천사들의 찬양 소리를 들었다. 그 천사들의 수는 천천 만만으로 표현되리만큼 매우 컸다. 그들은 어린양에게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돌렸다. 어린양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은 하나님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다. 특히 신성(神性)을 가지신 그가 죽임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죄의 책임과 형벌을 대신하기 위함이셨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에게 죄씻음의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천사들도 어린양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이다. 그들의 찬송은 합당한 찬송이다. [13-14절]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천지의 만물들, 즉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사람들이나 기타 모든 만물들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리는 만물의 영광스러운 합창이었다. 여기에 한번 더 성자(聖子) 예수께서 성부(聖父)와 동등한 영광과 능력을 가지신다는 삼위일체 교리가 증거된다. 만물들의 찬송에 대하여 네 생물과 24장로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경배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말 사건들을 계시해주셨다. 신적 구주이신 그는 대속 사역을 이루심으로 자격자가 되셨다. 우리는 주께서 주신 계시를 가감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고 그의 속죄사역을 감사해야 한다.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본래 다윗의 뿌리이시며 능력과 지혜가 완전하시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친히 그의 피로 온 세상의 택자들을 구속(救贖)하셨고 왕들과 제사장들을 삼으셨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토록 찬송해야 한다. 네 생물들과 24장로들과 천천 만만의 천사들과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영원한 찬송을 돌렸다. 우리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구원의 은혜를 진심으로, 그리고 영원토록 찬송해야 한다. 6장: 일곱 인 1-8절,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 [1-2절]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와서 보라 하더라.] 12) (내가 이에 보니)[그런데 보라,]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을 취하신 어린양께서 인을 하나씩 떼실 때마다 장래 일이 예언된다. 첫째 인을 떼실 때, 요한은 흰말과 그 탄 자를 보았다. 요한계시록에서 흰색은 좋은 뜻으로 사용된다. 흰색은 성결과 의를 나타낸다. 인자 같은 이의 머리털은 양털같이, 눈같이 희었다(1:14). 신실한 성도들은 흰 돌을 받았고(2:17) 흰옷을 입었다(3:4). 또 재림의 주님은 흰말을 타고 오실 것이며(19:11) 그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들도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흰말을 타고 그를 따를 것이다(19:14). 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보좌도 흰 보좌일 것이다(20:11). 그러므로 본절의 흰말과 그 탄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그레다너스, 박윤선) 혹은 그의 거룩한 심판 사역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가 면류관을 받고 이기고 또 이기려 한 것은 그의 사역이 승리적임을 말한다. [3-4절]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붉은 말과 그 탄 자는 전쟁을 상징한다고 보인다. 그가 ‘큰 칼’을 받은 것은 전쟁으로 인한 큰 살육을 뜻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볼 수 있는 대량 살상 무기를 예언한 것일지도 모른다. 말세의 한 징조는 국가 간의 갈등과 전쟁들이다. 주의 재림 전에 큰 전쟁들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요한계시록에는 본절 외에도 유브라데 강 부근에서 2억의 군사가 동원될 전쟁과(계 9:13-16), 유브라데 강이 말라 동방 왕들이 들어옴으로 세계적 연합군이 형성되어 아마겟돈(므깃도 언덕)에서 마지막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 예언되어 있다(계 16:12-16). 역사상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으나, 그 모든 전쟁들 중에서도 20세기에 치룬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처참한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죽은 군인들만 거의 1,000만명에 이르렀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군인들만 약 1,700만명이었다고 한다. 민간인 사망자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서방세계와 공산진영으로 서로 대립되었고 아직까지 그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세계 공산화의 꿈을 버리기 전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또한, 중동에서는 이스라엘 나라와 아랍 국가들 간의 종교적 갈등이 있다.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핵무기와 화학-생물학무기들을 동원한 인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매우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5-6절]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와서 보라] 하기로 (내가 보니) [보라,]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전통사본은 생략함)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검은 말과 그 탄 자는 기근을 상징함이 분명하다. 손에 저울을 가진 것은 식량의 배급을 상징하며 그것은 식량이 부족할 것을 뜻한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고, 한 되는 보통 사람의 1일분 식량이라고 한다. 하루 품삯으로 한 되의 밀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식량값이 매우 비싼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식량의 큰 부족을 나타낸다. 보리는 밀보다 품질이 낮은 식량이다. 그러나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서민들의 기본적 식용품, 의약품, 음료수가 허용됨을 보이는 것 같다. 주의 재림 전에는 기근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처처에 기근들과.” 기근은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근래에 세계적으로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월드북 백과사전 13) 에 의하면, 1870년대에 남부 인도에서 약 5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중국에서는 9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1929년과 30년에는 중국의 황허강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약 2백만명이 죽었다. 1943년 동부 인도 벵갈에 대기근이 있었다. 제2차 대전 후 150만명 이상이 기근으로 죽었다.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 특히 이디오피아 등에 심각하여 수백만명이 죽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2019년 세계에 약 8억 2천만명이 기아 상태에 있다고 보고하였다. 14) [7-8절]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와서 보라] 15) 하기로 (내가 보매)(전통사본에는 생략됨) 청황색[창백한 색, 회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陰府)[무덤]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혹은 ‘온역’(BDAG, NASB, NIV)]과 땅의 짐승[짐승들]으로써 죽이더라. 청황색 말과 그 탄 자는 사망을 상징한다. 그의 뒤를 따르는 음부는 무덤을 가리킨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4분의 1은 전쟁과 기근과 사망 혹은 무서운 전염병과 땅의 짐승들로 인해 죽을 것이다. 주의 재림 전에 많은 전염병들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기근들과 온역들(전통본문)과.” 역사상 세계적 전염병이 간혹 있었다. 14세기에 유럽에서 흑사병(페스트)으로 약 2,500만명, 세계적으로 약 1억명 이상이 죽었다고 알려진다. 20세기에 들어와, 1918년에 시작된 스페인 독감으로 약 1,500만명(약 5,000만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음)이 죽었고, 1968년에 시작된 홍콩 독감으로 약 100만명 이상이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오늘날 특히 동성애와 관련 있어 보이는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의 확산은 매우 위협적이다. 에이즈는 1981년 처음 보고된 이후 2014년까지 30여년간 그로 인한 전 세계의 사망자 총수는 약 4,000만명이고, 매년 사망자수는 약 200만명에서, 2013년 약 150만명, 2018년 약 77만명이었다. 2013년, 전 세계에 에이즈(HIV) 감염자수는 약 3,300만명으로 추정된다. 16)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 등은 오늘 시대가 이 세상의 마지막 시대라는 징조라고 보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주의 재림 직전에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24장의 주의 말씀과 일치한다. 이것은 주의 재림 직전의 대환난 시대의 징조이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치신 바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가 혹시 그 시대가 아닌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대환난에 대비하는 굳건한 믿음과 충성된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들과 우리에게 순교를 요구하신다 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참된 믿음과 충성된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9-17절, 다섯째 인과 여섯째 인 [9-11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伸寃)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죽임을 당하는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어린양께서 다섯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탄원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고 죽으면 몸과 영혼이 분리된다. 몸은 땅에 묻히지만, 영혼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간다(전 12:7).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해’ 죽임을 당한 자들이다. 즉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했더라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을 사랑하시고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몸만 죽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마 10:28). 신앙의 핍박과 순교는 종말의 징조이며 대환난 시대의 한 특징이다. 물론, 경건한 자는 항상 핍박을 각오해야 했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에 특히 그러할 것이다. 주께서는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다”고 말씀하셨다(마 24:9-10).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3장에서 한 짐승에 대해 “[저가]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고 증거했는데(계 13:7) 그것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며, 또 그는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도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라고 예언하였다(계 13:15). 순교자들의 영혼들은 제단 아래서 하나님께 공의의 심판을 탄원하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을 보응하신다는 도덕 질서를 위하여 또 기독교가 참된 진리임을 변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며 또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탄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그는 그 핍박자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영혼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셨다.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성결과 의를 상징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동료 종들과 형제들이 순교하기까지 잠시 동안 쉬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순교자들의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간청하는 기도가 있었지만 또한 참된 안식도 있을 것이다. ‘잠시 동안’이라는 말은 사람의 시간표의 수천년도 하나님 앞에서는 잠시에 불과함을 보인다(벧후 3:8). 다섯째 인의 환상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순교자들이 더 있을 것을 보인다. 교회 역사상 초대교회로부터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와 중세의 천주교회 시대, 일제시대와 공산 치하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역사상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고 마지막 심판 때 전까지 순교자들의 죽음은 더 있을 것이다. [12-14절]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모직부대]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어린양께서 여섯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은 큰 지진과 천체의 큰 변동을 보았다. 해는 총담같이 검어졌다. ‘총담’은 털실로 짠 거무스름한 부대자루를 가리킨다. 달은 피같이 되고 별들은 무화과나무가 큰 바람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졌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갔고 각 산과 섬은 제자리에서 옮겨졌다. 이런 묘사는 극심한 천재지변을 나타낸다. 큰 지진들과 천재지변들은 종말의 한 징조라는 사실이 계시된 것이다. 천재지변들은 세상의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이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주께서는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29). 요한계시록 8:12에도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고 예언되어 있다. 특히 큰 지진들은 세상의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지진들이 세상 종말과 자신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일 것을 말씀하셨다(마 24:7). 또 요한계시록 11:13은 두 증인의 승천 후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7천명이라고 증거하였고 요한계시록 16:17-20은 일곱째 대접을 쏟을 때 큰 지진이 있어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또 큰 우박이 있을 것이라고 증거한다. 큰 지진의 힘은 약 1억 8천만 톤의 티엔티 (TNT) 폭탄과 같으며, 그것은 1945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용되었던 원자폭탄의 약 만 배의 위력이라고 한다. 월드북 사전 에 의하면, 역사상 대지진들이 간혹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더 빈번해졌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들은 24개 이상이 되며, 그 중에 2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은 14개나 된다. 5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큰 지진만 열거해본다면, 1908년 이탈리아 멧시나 7만 5천명, 1920년 중국 중앙부 간서 20만명, 1923년 일본 도오꾜-요코하마 약 14만 3천명, 1932년 중국 중앙부 7만명, 1935년 인도 쿠에타(오늘날의 파키스탄) 6만명, 1970년 페루 침보테 약 6만 8천명, 1976년 중국 북동부 헤베이 24만명 등이다. [15-17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그의](전통본문) 17)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은 평소에는 담대하고 때때로 교만하기까지 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대환난의 날에 두려워 떨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할 곳을 찾기에 급급할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 날에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고 말했었다(사 2:19). 대환난은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이다. 이때에 불경건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다섯째 인과 여섯째 인은 핍박과 순교와, 큰 지진의 징조를 나타낸다. 이 세상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참된 신앙에 대한 핍박이 있고 순교도 있을 것이며 또 큰 지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징조들을 볼 때 성경의 예언들을 기억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또 고난과 핍박과 순교도 각오하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성경적 신앙, 옛신앙을 굳게 지켜야 한다. 창조자, 섭리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일들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삼위일체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7장: 인 맞은 자들과 흰옷 입은 큰 무리 [1절]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 말씀은 시간 순서대로가 아니고 환난 시대에 대한 계시의 중간에 삽입된 위로의 말씀이다. 땅 네 모퉁이, 땅의 사방의 바람 등은 온 세상을 가리키는 일상적 표현이다. 바람은 환난을 가리킨다. 네 천사가 땅 사방의 바람을 잡고 있다는 것은 성도가 감당할 만한 것 이상의 환난을 하나님께서 통제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께서는 종말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하셨다(마 24:20-22). 환난 기간의 통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2-3절]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까지 환난은 중지될 것이다. 인을 친다는 것은 확증의 표시이다. 중요한 문서들에는 확인의 도장을 찍는다. 하나님의 인은 인 맞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증하는 것 즉 구원의 보장이다. 이것은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인치셨으므로 우리를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10:28에서,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에베소서 1장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救贖)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다(엡 1:13, 14). 또 그는 로마서 8장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롬 8::35, 38, 39). 우리의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 [4-8절]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14만 4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1만 2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갓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1만 2천이라. 이스라엘 12지파 중 단 지파가 빠졌고 그 대신 레위 지파가 들어 있다. 또 에브라임 지파 대신 요셉 지파의 이름이 들어 있다. 각 지파의 인 맞은 14만 4천명은 이스라엘 사람들 14만 4천명을 가리키지 않고, 구속(救贖)받은 모든 성도의 완전 충만한 수를 상징한다고 본다. 12는 3과 4를 곱한 수로서 완전한 수를, 1,000은 충만한 수를 상징하며 12x12x1,000은 완전 충만한 수를 상징한다고 본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14만 4천명을 세상에서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근거는, ① 본문이 일반적인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며, ② 요한계시록 9:4의 황충 재앙에서 그 재앙이 이마에 인 맞지 아니한 자들에게만 임하는데, 거기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차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③ 요한계시록 14:3에 보면, 14만 4천명은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자들’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구속받은 성도들을 이스라엘 지파들에 비유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이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교회는 영적 이스라엘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29에서,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했고, 갈라디아서 6:16에서,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9-10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흰옷 입은 큰 무리는 앞에서 말한 14만 4천명과 동일한 무리라고 본다. 그들은 대환난 전에 인침을 받았고 대환난을 통과하는 자들이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는 말은 교회의 세계성을 말한다. 교회는 온 세계에 하나이며 그 구성원들은 온 세계에 흩어져 있다.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다는 말은 구원받은 자들의 수가 충만함을 말하며, 이것이 14만 4천명으로 상징되었다고 본다. 흰옷은 성결과 의를 가리키며, 종려가지는 승리와 기쁨을 상징할 것이다. 구속받은 성도들은 대환난을 무사히 통과하여 승리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힘찬 찬송이 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이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로마서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회개하거나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그러므로 구원은 결국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이시다. 그는 구원의 길을 지시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의 능력의 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11-12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서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모든 천사들은 성도들의 찬송에 화답하였다. 그들은 구원이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일임을 노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 같은 죄인을 그의 기이한 방식으로 불러주셨고 우리의 죽었던 영혼들을 그의 능력으로 살리셨고 우리가 속죄 신앙을 지키고 거룩의 열매를 맺도록 항상 우리를 보존해 주신다. [13-14절]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큰 환난을 통과해 나오는 흰옷 입은 성도들에 대한 환상은 대환난을 직면한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환난을 통과할 성도의 무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뿐이다(요일 5:4-5).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과 마귀를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알지 못하는 자는 환난에서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종교적 형식은 소유하였으나 참 종교의 실질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알곡이 아니고 쭉정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속죄 신앙을 가진 자마다 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길 수 있다. [15-17절]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대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은 천국에서 완전한 평안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위에 천막을 치셔서 더 이상 주림이나 목마름이 없이 먹을 것을 공급하실 것이며 또 더위로 인한 해가 없도록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며 또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특히 주의 재림 직전에 대환난을 통과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인치심이 있기 때문에 잘 감당하고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대환난을 통과해야 할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세상의 환난과 시험을 이겨 나가야 한다. 8장: 첫째 나팔부터 넷째 나팔까지 [1-2절]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半時) 동안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侍衛)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요한계시록의 주요 구조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이며, 그 셋의 연관은 일곱째 인이 일곱 나팔로 이어지고 일곱째 나팔이 일곱 대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일곱 인들 중 6장에 기록된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의 환상은 전쟁, 기근, 죽음, 순교, 큰 지진 등 대환난 시대에 대한 묘사이었다. 거기에는 땅 4분의 1이 죽임을 당한다는 언급이 있었다(6:8). 이제 8장에 일곱째 인은 일곱 나팔의 환상을 보이며, 그것은 좀더 구체적이고 좀더 강화된 재앙을 보인다. 마지막 시대의 재앙을 나팔로 표현한 것은 경고의 뜻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회개하라는 경고요, 믿는 자들에게는 믿음과 기도와 순종과 전도로 환난을 준비하라는 경고이다. 그러나 16장에 일곱째 나팔로 계시될 일곱 대접 환상은 하나님의 경고의 시간들이 지나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선포되는 것이라고 본다. 본문에 ‘반시(半時) 동안쯤의 고요함’은 다가올 환난과 재앙이 심히 크고 두려울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대환난 앞에서 믿음과 기도로 준비해야 하며 불신자는 이제라도 회개해야 한다. [3-6절]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金)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香煙)[향의 연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본절은 성도들의 기도들이 하나님께 올려지며 또 그 결과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시행됨을 나타낸다. 성도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다 시행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도들의 기도는 강력한 무기와 같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하며 사탄과 악령들의 일들이 파하여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게 한다. 우리는 고난의 세상 속에서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한다. [7절]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3분의 1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3분의 1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요한계시록 본문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다면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문자적 해석이 어려울 때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 나팔의 재앙은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는 것이다. 그 불로 인해 땅의 3분의 1과 나무들의 3분의 1과 모든 풀들이 태워질 것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우박 재앙이나 혹은 전쟁으로 인한 땅의 황폐화로 보인다. 땅은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므로 땅과 나무들의 3분의 1과 모든 풀들이 불태워진다는 것은 실로 사람들의 생활에 큰 타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땅과 나무들의 3분의 1만 타고 3분의 2가 남겨지는 것은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이다. [8절]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3분의 1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3분의 1이 죽고 배들의 3분의 1이 깨어지더라. 둘째 나팔의 재앙은 불붙는 큰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해 바다의 3분의 1이 피가 되고 바다의 생물들의 3분의 1이 죽고 배들의 3분의 1이 파괴될 것이다. 그것은 핵 폭탄 같은 것으로 인한 바다의 황폐화로 보인다. 바다와 배들은 특히 어부들과 상인들의 주요 생활 수단이므로 이 재앙으로 인한 타격도 매우 클 것이다. 그러나 이 재앙으로 바다와 바다 생물들과 배들의 3분의 1만 타격을 받는 것은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이다. [9-10절]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3분의 1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3분의 1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셋째 나팔의 재앙은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강들과 물샘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강들과 물샘들의 3분의 1을 쑥과 같이 쓰게 만들고 그 쓴 물을 마시는 자들은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나 혹은 화학무기 같은 것으로 인해 지구의 물들이 오염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은 사람에게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런데 물들의 3분의 1이 오염되었고 물들의 오염 때문에 세상에 큰 고통이 올 것이다. [12절]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3분의 1과 달 3분의 1과 별들의 3분의 1이 침을 받아 그 3분의 1이 어두워지니 낮 3분의 1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넷째 나팔의 재앙은 해와 달과 별들의 3분의 1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어두워지게 하실 수 있고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에게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때 지구는 태양 빛의 양이 줄어듦으로 갑자기 추운 겨울을 맞을 것이다. 참으로 두려운 재앙이다. 위의 네 가지 재앙들은 천재지변이나 천체의 큰 변화나 혹은 핵무기나 화학무기 같은 것으로 인한 육지오 바다의 변화로 보인다. 이것들은 복음서들의 예언과 일곱 인의 예언과도 일치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재림의 징조로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29). 또 일곱 인의 재앙은 전쟁과 기근과 큰 지진 등을 언급하였다. [13절]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주께서는 독수리들로 남은 세 재앙들이 사람들에게 화가 될 것을 선포하셨다. 앞에서 증거된 네 재앙들도 두렵지만, 남은 세 재앙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특히 16장에 기록된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의 재앙은 앞에 증거된 재앙들보다 더욱 두려운 재앙이 될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기도에 힘써야 한다. 성도들의 찬송과 감사와 간구는 하나님 앞에 향의 연기같이 올려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기뻐하신다. 그들의 간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될 것이다. 거기에는 예언된 종말 사건들의 성취도 포함될 것이다. 대환난도, 악인들에 대한 공의의 보응도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누가복음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우리는 기도에 힘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장차 일어날 땅과 바다와 강들을 황폐케 할 천재지변과 세계적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예언하신 바이며 다 이루어질 것들이다. 주의 재림 직전에 천재지변들과 세계적 전쟁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 할지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예언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송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말씀만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그에게는 평안과 기쁨과 영생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죽으면 즉시 하나님의 영광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담대히 원한다(고후 5:8). 그러나 우리가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까 두려울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거룩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9장: 다섯째 나팔부터 여섯째 나팔까지 1-12절, 다섯째 나팔 [1절]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많은 주석가들은 이 별을 사탄 혹은 타락한 천사로 보고 어떤 이들은 정반대로 거룩한 천사로 본다. 그러나 이 별을 말 그대로 하늘의 별로 보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고 본다. 넷째 나팔까지도 문자적으로 해석했듯이, 다섯째 나팔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 (NIV) 고 한 것은 별이 땅에 떨어져 큰 구멍을 낸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라고 본다. 하늘에서 큰 별이 하나 떨어지면 지구에 큰 충격이 생기고 땅 깊은 곳으로부터 구멍이 뚫어질 것이다. 무저갱( 아뷔쏘스 )은 지옥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땅속 깊은 곳’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권한과 허락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천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 가능성에 대해 말해왔다. 소행성이란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태양 둘레를 공전하는 수십만개의 작은 별들을 가리키며 지구에 근접하는 것들로서 지구 전체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은 240개 가량이라고 한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2002 NT7이라는 소행성은 직경이 2km로 추정되며 초속 약 28km(시속 약 10만km)로 달리고 있는데 2019년 2월 1일에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었다. 그것의 충돌 충격은 히로시마에 투하됐던 원자폭탄 2천만개의 위력이며(미 우주항공국 NASA 제트추진연구소에 의하면, 그것은 TNT 100만 메가톤[1조톤]의 폭발 충격일 것이라고 했다) 그때 엄청난 먼지 구름이 대기권을 덮으므로 태양을 가려 1년 이상 겨울이 지속될 것이며 또 충돌 지점의 국가들이 초토화되는 것은 물론, 대규모 해일이 일어나고 오존층이 파괴됨으로써 2년간 자외선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생물체들에 돌연변이와 암과 백내장 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하였었다. 18)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2-3절]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그런 별로 인해 뚫어진 땅속에서는 큰 풀무의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오고 그 연기로 인해 해와 공기가 어두워질 것이다. 그것은 역사상 유래 없는 심각한 대기 오염 사건일 것이다. 또한 그 연기 가운데로부터 황충들 혹은 메뚜기들이 올라올 것이다. 이 황충들은 문자 그대로 땅속에서 올라온 특별한 생물들로 볼 수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들 중의 하나를 위해 준비된 해로운 생물들일 것이다. [4-6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앞장에서도 나무와 풀, 바다, 고기, 배, 강과 샘, 해와 달과 별들 등을 다 문자적 의미로 보았듯이, 본문의 땅의 풀과 나무도 문자 그대로 풀과 나무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황충 재앙은 자연 세계에 내리는 재앙이 아니고 이마에 인 맞지 아니한 자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이다.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들’은 재앙에서 면제됨을 보인다. 하나님의 이 재앙은 차별적 재앙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애굽에 10가지 재앙들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였던 고센 땅에는 내리지 않으셨던 것과 같다. 시편 91:1-3, 5-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白晝)[낮]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황충 재앙은 다섯 달 동안 고통을 주는 재앙이다(5, 10절). 황충들은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전갈은 쏘는 독을 가진 생물이다.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자들에게 다섯 달 동안 이런 전갈의 쏘는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사람들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것이다. [7-10절]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戰場)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이 황충들은 보통 메뚜기들과 달랐다. 그것들은 전마(戰馬)들처럼 기동성이 있고 그들의 활동은 승리적이고 사람 같은 지혜를 보이고, 사자 같은 잔인함을 나타내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두려울 것이다. 그것들은 마지막 환난 날을 위해 준비된 생물들이라고 보인다. [11-12절]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無底坑)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사탄은 그 황충들의 왕이다. 아바돈, 아볼루온은 ‘파괴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사탄에게 해당되는 명칭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나라와 신약교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일들을 파괴하는 파괴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나라와 교회를 굳게 세우실 것이다.

두 가지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재앙이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섯째 나팔 재앙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에게 무저갱의 열쇠를 줌으로 이루어졌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게 하시고 그에게 열쇠를 주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재앙을 주기도 하시고 주지 않기도 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의로운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내가 모태에서 적신[벌거벗은 몸]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했고 고난 중에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욥 1:21-22).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5:6-7). 둘째로, 우리는 재앙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황충 재앙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않은 자들에게만 주는 재앙이다.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다. 또 그 재앙은 다섯 달 동안만 계속될 것이다. 이와 같이 재앙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가 정하신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그의 뜻만 행하며 그의 편에 서서 참고 기다려야 한다. 13-21절, 여섯째 나팔 [13-15절]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金壇)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연,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3분의 1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금단(金壇)은 향을 사르는 금향단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며 금향단의 뿔은 기도의 능력을 가리킨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와 성도들의 기도에 능력으로 응답하신다. 그 결과, 하나님의 정하신 종말 사건들은 하나씩 이루어질 것이다. 성도들의 많은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방법이다. 유브라데 강은 오늘날 시리아와 이라크를 통과해 페르샤 만으로 흐르는 강이다. 그 주위에는 중동의 아랍 국가들이 있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들을 놓아주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권한으로 억제하고 있던 것을 풀어주라는 뜻이다. 그것은 중동 지역이 세계대전의 격전지가 될 것을 암시한다. 중동은 전 세계의 석유의 주 공급원이며 게다가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나라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마지막 세계대전의 화약고가 될 만하다. 장차 유브라데 강 주위에서 일어날 세계대전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다. 여섯째 나팔을 불 때 그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의 정확한 연도와 월일과 시각을 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만세 전에 다 아실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뜻대로 작정하셨다. 전쟁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다. 중동에서 일어날 거대한 세계대전도 그러하다. 그런데 그 전쟁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죽을 매우 참혹한 전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제3차 세계대전을 암시한다. 20세기에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도 참혹한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군인들은 약 천만명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군인들은 약 1,700만명이었고 민간인까지 합하면 약 5천만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절에 예언된 이 전쟁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죽게 할 매우 참혹한 전쟁이다. 2020년 세계 인구가 약 78억명인데, 요한계시록 6장에 예언된 넷째 인으로 4분의 1이 죽으면 약 58억명이 남고 그 중에서 3분의 1이 죽으면 약 19억명이 죽게 된다는 뜻이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죽일 전쟁이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인류가 수많은 대량살상무기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3차 세계대전은 화학 무기(독가스)와 생물학 무기(세균)와 핵무기(원자폭탄, 수소폭탄)를 사용하는 전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어느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혹한 전쟁이 될 것이다. 구 소련의 의학연구소장 리콜라이 볼로킨은 핵 군비축소에 관한 과학자 회의 연설에서 “핵전쟁이 나면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죽고 나머지는 핵암으로 쓰러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19) 그의 말은 성경의 예언과 일치한다.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인류가 역사상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전쟁이 될 것이다. [16-19절] 마병대의 수는 2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3분의 1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이 거대한 세계대전에는 2억명의 군인들이 동원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는 말은 그 수가 실제적 수임을 보인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과 여전히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러시아와 중국, 또 이슬람교 신앙으로 단합될 아랍 국가들의 총인구를 생각한다면, 중동에서 발발하리라고 예상되는 이 세계대전에 참여할 군인들의 그 거대한 수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인구 78억명 중 미국이 약 3억 3천만명, 유럽연합이 약 5억명, 러시아가 약 1억 4천만명, 중국이 약 14억 3천만명, 아랍연맹이 약 3억 2천만명이다. 이 세계대전에 동원될 현역병과 예비군의 수는 매우 클 것이다. 또 본문은 이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을 묘사한다. 그 군인들은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으로 무장했고 그들의 무기들은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뿜을 것이다. 그것들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 말들의 힘이 그 입과 꼬리에 있다는 것은 그 전쟁 무기들이 전방과 후방에 화력 발사장치가 장착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20-21절]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銅)과 목(木), 석(石)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여섯째 나팔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우상숭배에 빠져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재앙보다 더 슬픈 사실이다. 이것은 부수적으로 대환난 시대의 환난들과 재앙들의 목적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죄인들의 교정과 회개를 위함이 아니다. 택함 받은 죄인들은 이미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았다. 환난과 재앙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노뿐이다. 그러므로 6:16-17에서는 이것을 ‘어린양의 진노,’ ‘그의 진노의 큰 날’이라고 불렀고, 8:13에서는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나팔을 두고 화, 화, 화라고 표현하였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화를 내리시는가?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 무슨 죄 때문인가? 로마서 1:18 이하에 언급된 대로 불경건과 음란과 불의의 죄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불경건의 죄 가운데는 성경말씀대로가 아니고 인본적, 세속적 방법으로 목회하는 목사들과 신앙생활하는 교인들의 행위들도 포함될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적인 큰 전쟁의 불행을 통과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재앙을 당한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회개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과연 회개할 기회가 올지는 미지수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행 11:18). 그러므로 사람은 회개할 마음이 들 때 회개해야 한다. 그때가 하나님께서 회개하도록 은혜를 주시는 때이다. 우리는 회개를 내일로 미루지 말고 회개해야 할 때에 즉시 회개해야 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했다(사 55:6). 우리는 죄를 깨달을 때 즉시 회개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장차 세계적 전쟁이 있을 것이다. 이 세계대전은 지구의 인구 3분의 1을 죽이는 무서운 전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대량살상무기라 부르는 화학 무기(독가스), 생물학 무기(세균), 핵무기(원자폭탄, 수소폭탄)를 사용하는 전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이다. 대환난의 여러 징조들과 세계적 전쟁들은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겠지만, 우리는 그것까지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 믿고 섬기고 그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대로 정직하고 선하게만 살고 그가 약속하신 영광스런 천국과 부활과 영생만 사모해야 한다. 이 세상은 참으로 죄악되고 헛된 세상이며 장차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불타버릴 장망성(將亡城)이다. 우리는 오직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혹시 죄를 지었을지라도 즉시 회개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완고한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영영히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10장: 작은 책을 먹음 [1-4절]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 20) 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본절의 매우 위엄 있고 영광스러운 천사는 주석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신약성경과 요한계시록 다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천사로 표현한 곳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천사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6절에 하나님께 맹세하여 말하는 것도 천사에 더 적합하다고 본다. 천사가 들고 있는 책은 펴 있는 책이었다. 사도 요한을 통해 증거될 종말 예언은 공개된 내용이다. 천사가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선 것은 그 예언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것을 보인다. 과연 그는 그 책을 들고 바다와 땅을 밟고 서서 사자같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때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했다. 이 예언의 말씀은 말세에 큰 소리로 외쳐야 할 경고의 말씀이다. 사도 요한은 일곱 우뢰의 소리를 기록하려고 했으나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그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했다. 일곱 우뢰 소리들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미래의 사건들의 계시 범위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 안에 있다. [5-7절]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혹은 “시간이 더 이상 없으리니”]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하나님께서는 세세토록 살아계시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자이시다. 그 하나님만 참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만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신다. 종말의 사건들과 심판은 그의 손 안에 있다. 세상의 창조자께서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다. 사람들이 바라고 의지할 자는 그 하나님밖에 없다. 이 세상은 창조자나 주인이 없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이 아니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가 만드셨고 그가 다스리시는 세상이다. 사람은 그 하나님 안에서 영생과 참 평안을 얻는다. 그 천사가 맹세하며 말한 내용은 일곱째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비밀이시다.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 [아버지]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 그의 대속의 죽음, 그의 부활, 승천, 재림이 다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때가 되어 이루어졌고, 이제 그의 재림 하나만 남아 있는데 그것도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남은 종말 사건들은 지체되지 않고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진실로] 오시옵소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그의 정하신 때에 다 성취될 것이다. [8-11절]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작은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들]과 나라[들]와 방언[들]과 임금[들]에게[에 관하여] 21)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하늘에서 나는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다. 천사의 손에 펴 놓인 그 작은 책은 종말 예언의 책인데, 요한계시록 전부를 가리키든지 아니면 11장부터의 내용을 가리킬 것이다. 책을 취하여 먹는다는 것은 종말 예언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뜻할 것이다. 성경은 영의 양식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힘써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성경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이것은 성도에게 거룩한 의무요 복된 특권이다. 입에 단 것은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의 즐거움을 말할 것이다. 시편 119:92, 143,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그러나 배에 쓴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의 내용을 음미할 때 오는 마음의 고통과, 이 말씀을 지키며 전하려 할 때 예측되는 고난을 나타낼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마음 속에는 그런 고통이 있었다(렘 4:19-20). 사도 요한은 이제까지 예언하였지만, 다시 온 세계의 나라들과 백성들에 관하여 예언해야 했다. 요한이 먹은 종말 예언의 말씀들은 책에 기록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말씀들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도 요한을 통해 주셔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종말 사건들에 대한 예언은 봉인된 내용이 아니고 세상에 공개된 내용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이 책의 말씀을 읽고 듣고 이해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둘째로, 이 세상과 역사의 대종말이 곧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며 시간이 더 이상 없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그런 종말 의식이 필요함을 교훈한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모든 사람은 종말 의식을 가져야 한다. 누가복음 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人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셋째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종말 예언은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즉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소식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하며 그 내용 중에는 이 세상과 역사의 종말과 심판에 대한 진리도 포함된다. 사도행전 17: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회개와 천국을 선포하셨고(마 4:17), 또 회개와 죄사함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증거하셨다(눅 24:47). 확정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죄인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11장: 두 증인 1-14절, 성전과 두 증인의 환상 [1-2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지팡이 같은 갈대는 길이를 재는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은 구약적 표현이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일차적으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지만, 또한 그의 몸된 교회인 참된 성도들도 가리켰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참된 성도들을 가리키며 ‘척량한다’는 말은 소유물의 확인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신다. 그는 대환난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보존하신다. ‘성전 밖 마당’은 성전 뜰만 밟는 중생치 못한 형식적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거나 인간적 교제나 세상적 유익을 위해 다니는 자들이다. 그들은 본질상 불신자들이다. 이런 형식적 교인들은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 밖에 있다.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 성을 가리킬지 모르나, 그보다 이름만 가진 형식적 기독교인들의 세계를 가리킨 듯하다. 그 속에는 천주교인들, 각종 이단종파 신봉자들, 자유주의자들도 포함된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의 세계이다. 이름만의 기독교 세계는 이방인에게 마흔 두 달, 즉 3년 반 동안 짓밟힐 것이다. 이 3년 반은 대환난 기간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3년 반을 의미하든지, 아니면 너무 길지 않은 어떤 기간을 상징할 것이다. [3-6절]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22)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본문은 요한계시록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 하나이다. 말씀하는 자는 그리스도이시라고 보인다. 두 증인이 나타나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간, 즉 3년 반 동안 말씀을 전할 것이다. 두 증인의 증거는 확실한 증거로 여겨진다. 예수께서는 전도자들을 둘씩 내보내셨다(눅 10:1). 굵은 베옷은 금식하며 회개할 때 입는 복장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죄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기도할 것이다. 1260일은 신약교회시대를 가리킬지 모른다. 주께서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고 예언하셨는데, 예루살렘 성은 오늘날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있다. 그러나 1260일은 여섯째 나팔로 계시된 유브라데 강에서 시작되는 전쟁이 끝난 후에 이방인들이 형식적 교회들과 교인들을 핍박하는 기간에 더 적합해 보인다. 또 아마 그 기간에 두 증인이 나타날 것이다. 두 증인들은 이 땅의 주, 곧 하나님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표현되었다. 이 표현은 구약 스가랴 4장의 환상에 나오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비슷하다. 본문의 두 증인은 3년 반 환난 기간 중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신약교회 혹은 충성된 두 명의 종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이 감람나무라 불리는 것은 성령의 끊임없는 공급을 받기 때문이며 촛대라 불리는 것은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빛, 곧 하나님의 바른 뜻을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 같은 능력을 가진 신약교회 혹은 두 명의 종들일 것이다. 모세가 물로 피가 되게 하는 기적을 행했듯이, 또 엘리야가 3년 동안 기근이 들게 하고 또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였듯이,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들을 나타내며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칠 것이다. 또 그들을 해하려는 자들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구약시대의 모세와 엘리야같이, 그들은 그 사역기간 동안 여러 능력의 일들을 행할 것이다. [7-8절]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 아마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그 두 증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무저갱’은 깊은 구덩이를 가리킨다. 짐승으로 표현된 이 자는 짐승같이 사납고 난폭하며 이성과 도덕성이 없는 인물을 나타낼 것이다. 그것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예언된 ‘불법의 사람’ 곧 ‘죄의 사람’으로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전제적(專制的), 독재적 통치자와 동일한 인물로 보인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초대교회로부터 활동해왔다. 역사상 로마제국과 로마 천주교회는 적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활동하였다. 그들은 많은 참된 성도들을 핍박하였고 또 죽였다. 그러나 마지막 날들에 적그리스도라고 불릴 특별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며 그가 나타나면 그 두 증인들과 싸워 이길 것이고 그들을 죽일 것이라고 보인다. 두 증인들의 시체가 놓여질 큰 성은 적그리스도의 본거지일 것이다.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이라고 불리었다. 소돔은 음란한 도시이며 애굽은 우상숭배의 나라이었다. 또 그 도시는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곳, 즉 예루살렘 성이라고 표현된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의 본거지는 소돔과 애굽과 예루살렘으로 표현된다. 그 도시는 뒤에 나올 음녀와 바벨론으로 묘사된 큰 도시와 동일한 도시일 것이다. 그것은 참된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도시를 가리킬 것이다. 역사상 로마가 바로 그런 도시이었다. [9-10절]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온 세상 사람들은 그 두 증인의 시체를 3일 반 동안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며 선물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 증인들의 설교는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내용들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들의 죄를 회개치 않고 구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심한 고통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1-12절] 3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즐거움도 잠시 동안뿐이었다. 3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영 혹은 생명의 기운이 들어감으로 두 증인은 다시 살아날 것이고 구경하는 자들은 크게 두려워할 것이다. 더구나 부활한 그 증인들은 예수님처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할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예언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는 모든 성도가 주를 영접하기 위해 하늘로 올리울 것이다. [13-14절]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7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두 증인의 승천이 있을 때, 그 큰 성에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파괴되고 7천명이 죽게 될 것이며, 그 남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옛날 애굽의 바로 왕이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러했듯이(출 9:27; 10:16, 17; 단 2:46-47), 이런 행위가 그들이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첫째 화와 둘째 화가 지나갔다. 첫째 화는 황충 재앙이고, 둘째 화는 유브라데 강에서의 큰 전쟁과 그 후에 있을 두 증인의 사역과 큰 지진이다. 이제 마지막 화만 남았다. 그것은 일곱째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계시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성전 뜰만 밟는 형식적 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들은 쭉정이와 같고 가라지와 같고 염소와 같다. 그들은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주의 비유에서 등만 가지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신랑을 기다리던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고, 주께서 맡겨주신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악하고 게으른 종과 같다. 사도 바울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4:3-4). 둘째로, 우리는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며 바른 목사들의 교훈을 즐거움으로 받고 믿고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로 늘 깨어 있으며 서로 사랑하고 선을 베푸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 성도들이 구원받은 표를 지닌 자들이며 환난 날에도 믿음과 인내로 승리할 자들이다. 셋째로, 우리는 참된 증인들로서 순교를 각오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증거해야 한다. 환난 날에는 고난을 각오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많은 형식적 교인들이 넘어질 것이다. 그러나 참 성도들은 승리할 것이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15-19절, 일곱째 나팔과 하늘의 찬송 [15절]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하니. 일곱 천사들의 나팔로 말미암은 종말 예언들이 하나씩 계시되는 가운데, 이제 일곱째 천사의 나팔로 말미암은 종말 예언이 계시된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의 외치는 소리이다. 그것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 하나님과 그의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며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왕노릇하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6절 이하에는 하늘에 올라간 의인들의 영혼들의 화답하는 고백의 내용이 있다. 세상 나라는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우리 주’는 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역사이다.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예언하였다(단 2:4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셨다(마 4:17). 신약교회 시대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확장의 시대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모든 영혼들이 구원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때, 또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때,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것이 인류 역사의 목표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과 완성은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목표이다. [16-18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24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 호 판토크라토르 )여, [이는]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하시도다[왕노릇하심이로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로소이다 하더라. 24장로들은 하늘의 큰 소리에 화답하여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감사의 찬송을 올렸다. 24장로들은 구약교회와 신약교회를 대표한다고 보인다. 그들은 구약시대의 열두 지파와 신약시대의 열두 사도를 대표한다고 보인다. 24장로들은 하나님을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류를 심판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장차 오실 자’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재림의 때가 다 되지는 않았지만, 재림의 시간을 미리 앞당겨 하나님의 통치권이 완전히 드러났음을 노래한 것이다.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17절에 나타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큰 권능을 가지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활동하던 사탄과 악령들의 일들이 끝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드러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통치하심은 우리의 감사와 찬송의 이유요 내용이다. 18절도 계속 감사의 이유를 말한다. 24장로들은 하나님의 통치 내용에 대해 좀더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관한 것이다. 그 내용은, 이방인들이 분노했을 때 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죽은 자들까지도 주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 심판은 철저하고 공정한 심판일 것이다. 그 심판의 결과는 보상 혹은 멸망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시지만, 세상을 멸망시키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24장로들의 감사의 내용과 이유이었다. [19절]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사도 요한은 하늘의 성전이 열리는 광경을 보았다. 하나님의 성전은 천국 자체를 상징한 듯하다. 요한계시록 21:22에 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에는 성전이 없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히브리서 9:23-24에는 하늘 성소에 대해 말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성전 혹은 성소는 천국 자체, 특히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상징했다고 본다. 사도 요한은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도 보았고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을 보았다. 사도 요한이 성전 안에 있는 언약궤를 본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언약 곧 십계명에 의거한 것임을 보인다. 하나님의 심판은 구약성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공의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운 심판이다.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은 하나님의 심판의 엄위함을 나타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다. 17절,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기 3:14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뜻이라고 본다. 시편 90:1-2,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17절,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자이시다. 창세기 18:14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욥은 욥기 42:2에서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능치 못한 일이 없사오니]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렘 32:17).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장차 왕노릇하실 것이다. 15절,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17절,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하시도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통치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시편 99:1-2,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세세토록 통치하실 것이다. 시편 93:1-2,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18절,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의인들과 악인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다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는 영생의 상을 주시고 악인들에게는 지옥의 벌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약 곧 율법에 따라 공의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시편 98:9,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義)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12장: 사탄이 내어쫓김 [1-2절] 하늘에 큰 이적[표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사도 요한은 하늘의 한 큰 표적, 즉 해를 입은 한 여자의 광경을 보았다. 이 여자는 구약교회를 가리켰다고 본다. 그가 해를 입은 것은 교회가 의의 해이신(말 4:2) 그리스도로 옷 입음을 나타내며(갈 3:27), 그의 발 아래 달이 있음은 교회가 온 세상을 복음 전파로 정복함을 나타내는 것 같고, 그의 머리에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쓴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나타내었다고 본다. 아이를 배어 해산하려 한 것은 구약교회가 메시아의 오심을 갈망한 것을 나타낸다고 보인다. [3-4절] 하늘에 또 다른 이적[표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3분의 1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사도 요한은 하늘의 또 다른 하나의 표적, 즉 큰 붉은 용의 광경을 보았다. 그 용은 사탄을 가리킨다. 그것이 크고 붉은 것은 그의 세력이 크고 심히 잔인함을 나타내며 그의 머리가 일곱인 것은 그의 지혜가 매우 큼을 보이며 그의 뿔이 열인 것은 그의 힘이 매우 큼을 암시한다. 사탄은 하늘의 별들 3분의 1을 끌어다가 땅에 던졌다. 그것은 사탄이 하늘의 천사들의 3분의 1을 타락시킨 것을 가리킨 것 같다. 사탄과 더불어 타락한 그 천사들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귀신들 즉 악령들이다. 그 용은 그 여자가 낳을 아이를 삼키려 하였다. 그것은 사탄이 헤롯 왕을 통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한 일을 가리킬 것이다(마 2장).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때부터 그를 죽이려 하였고 마침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하였다. [5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올려갔더라]. 여자가 낳은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아들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설명되었다.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는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리어 갔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켰다고 본다. [6절]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교회가 1260일 동안 사탄의 핍박을 피하도록 광야에 하나님의 예비하신 피난처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인다. 1260일은 신약시대 전체를 상징한 것이든지, 혹은 대환난 기간 중의 한 부분을 가리킬 것이다. [7-8절]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하늘에서 전쟁이 있었다. 그것은 천사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 곧 사탄과 그의 사자들과 싸운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용과 그의 사자들은 이기지 못하여 하늘에서 있을 곳을 얻지 못했다. 천사 미가엘과 사탄의 전쟁이 일어난 때는 아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완성된 직후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고(눅 10:18) 또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2:31). 사탄의 권세는 죄와 사망의 권세인데,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완성으로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났다. [9절]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속이는](KJV, NASB)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큰 용은 옛날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범죄케 했던 옛 뱀, 곧 마귀 즉 사탄이며 온 세상을 미혹하는 자이다. 사탄과 그의 미혹을 받은 천사들은 다 땅으로 쫓겨났다. 사탄과 악한 천사들은 지금 성도들을 속이고 그들을 시험에 떨어지게 하고 그들을 위협하고 핍박한다. 그들은 악하고 거짓되고 더러운 영들이다. 그들은 항상 이 세상을 속이고 더럽히고 불행케 해왔지만(엡 2:2) 특히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을 잃게 하고 범죄케 하고 멸망시키려 열심을 내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하였고(벧전 5:8), 사도 바울은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하였다(엡 6:10-12). [10-12절]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이는]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쫓겨났음이라.] 또 여러 형제가[그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때문에]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사도 요한이 들은 하늘의 큰 음성은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는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영혼들의 음성이 분명하다. 그 음성의 내용은 구원과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밤낮 성도들을 참소하던 사탄이 쫓겨났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의 음성은 진실한 성도들이 승리했음을 말하였다. 진실한 성도들은 죽기까지 주님을 따랐고 그를 믿었고 그를 사랑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증거했다(롬 14:7-8). 그들의 승리의 비결은 두 가지이었다. 첫째는 어린양의 피 때문이고, 둘째는 그들의 증거하는 말씀 때문이다. 어린양께서 피 흘려 사신 자들은 실패치 않는다. 그의 피는 효력이 있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고 말씀하셨다. 또 복음의 말씀도 성도의 승리의 힘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말했다(행 20:32).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는 성도들은 즐거워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밤낮 성도들을 헐뜯고 비난하던 사탄이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이 땅에 내려왔고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성도들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사는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13-17절]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23) 사탄은 성도들을 핍박하지만, 성도들에게는 그 핍박을 피할 길도 있다. 큰 독수리의 두 날개는 성도의 믿음과 순종 같은 것이다.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은 피할 곳을 가지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심지어 땅도 성도들을 도와 사탄의 악한 활동을 막는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신약교회시대 혹은 대환난 기간의 일부인 삼년 반 즉 1260일을 가리킬 것이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표현은 대환난의 시작과 강화와 중단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다. 사탄은 진실한 성도들과 싸우려고 준비했다.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은 이미 죽은 자들과 순교자들을 제외하고 땅 위에 살아 있는 진실한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롭게 사는 자들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큰 용, 옛 뱀, 마귀라고 불리며 온 천하를 속이는 자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지금도 하나님과 참된 교회 즉 참된 성도들을 대적하고 세상을 속여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들과 사탄의 큰 싸움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탄과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사탄과 악령들과의 영적인 싸움이다. 우리가 이 영적 싸움에서 이기려면, 우리는 강해야 하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말씀과 기도로 행해야 한다(엡 6:10-11). 셋째로,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한다. 앞서간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었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사탄을 이기고 죽기까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도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믿는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13장: 두 짐승 [1-2절] 내가 [바다 모래 위에 서서](전통사본 , vg mss , cop sa bo )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본장에는 두 짐승의 환상이 나오는데, 그 첫째 짐승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2:3에 예언한 대로, 주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불법[죄]의 사람’ 곧 적그리스도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떤 강력한 독재적 국가나 독재적 통치자일 것이다. 이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은 그 국가 혹은 인물이 열국들 중에서 나타날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은 그가 많은 지혜와 능력이 있음을 보인다. 그 짐승의 머리들에 참람된 이름들이 있는 것은 그가 심히 불경건하고 신성모독적임을 나타낸다. 옛날 로마 황제들은 신적 명칭을 자신에게 돌렸었다. 천주교회의 교황들도 신성모독적이게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자신들에게 돌렸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 때에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도 신성모독적일 것이다. 또 그 적그리스도는 표범같이 날쌔고 곰같이 덮치고 사자같이 찢는 힘과 파괴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의 배후에 사탄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자신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줄 것이다. 그 적그리스도는 사탄의 도구인 것이다. [3-4절]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본문은 적그리스도의 나라의 한 지도자가 죽게 되었다가 회복되므로 온 땅이 이상히 여겨 그 나라를 따르고 사탄이 그 나라에 권세를 주므로 온 세상의 사람들은 사탄에게 경배하며 그 나라에 경배하며 그를 높이고 추앙할 것을 보이는 것 같다. 장차 온 세상은 불경건하고 반기독교적이게 될 것이다. 사탄 숭배는 보편화될 것이다. [5-7절]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해서와 하늘에 거하는 성도들을 향해서 참람된 말들을 많이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에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15). 또 사도 바울도 주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살후 2:3-4). 또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42개월 즉 3년 반 동안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들, 즉 온 세계를 다스릴 권세를 받을 것이며 또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될 것이다. 그때 성도들은 큰 핍박과 감금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 3년 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많은 성도들이 순교하는 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참 성도들은 결코 그 악의 세력에게 지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은 죽음으로써 믿음을 지키며 승리할 것이다. [8-10절]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창세 이후로’라는 말은 ‘죽임을 당한’이라는 말에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구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짐승의 제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어느 시대에나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 속죄신앙이 참 신앙이다. 우리의 의(義)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성도가 자신의 죄와 세상의 악과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 그러나 속죄신앙이 없는 자는 실패할 것이다. 구원은 종교적 형식에 있지 않고 속죄신앙 여부에 있다. 속죄신앙을 가진 자들만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게 굴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므로 악한 자들의 악에 대해 공의로 징벌하실 것이다. 성도들을 사로잡는 적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사로잡힐 것이며 성도들을 칼로 죽이는 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의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환경 속에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와 믿음이다. 진실한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따르며 고난 중에 참고 기다려야 한다. [11-12절]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사도 요한은 또 다른 짐승을 보았는데, 그것은 새끼양 같았다. 이 둘째 짐승은 16장 이하에서 ‘거짓 선지자’로 불리며(계 16:13; 19:20; 20:10) 배교한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은 그것의 근원을 보인다. 배교한 교회는 세상에 속한다. 그것이 어린양같이 두 뿔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회인 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하는 말은 사탄의 말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배교한 교회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의 권세를 가지고 행하고 사람들을 적그리스도의 나라에 충성하고 복종하게 한다. [13-15절] [그 짐승이]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주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배교한 교회는 기적을 행하는 은사주의 교회이다. 주께서는 재림 직전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24). 사도 바울도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라”고 예언하였다(살후2:9- 10). 또 배교한 교회는 사람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하며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을 죽일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16-18절]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 그 배교한 교회는 사람들로 오른손에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그 표 없이는 매매를 못하게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장차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오늘날 벌써 이런 유의 통행증이 특별한 곳들에서는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짐승의 숫자 666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라틴어는 글자로 수를 표시한다. 예컨대, 히브리어로 ‘로마 사람’( 로미시 ), ‘로마 왕국’( 로미스 )이나 헬라어로 ‘이탈리아 교회’( 이탈리카 에클레시아 ), 또 라틴어로 교황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 비카리우스 필리이 데이 vicarius filii dei) 등은 다 666이 된다. 종교 개혁자들, 루터와 칼빈, 존 낙스 등과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등은 로마 천주교회와 교황을 그 짐승으로 보았다. 또 다른 이들은 666이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나라나 인물을 가리킬 것이라고 본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속죄신앙을 가져야 한다. 8절,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구원받은 성도들의 의와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밖에 없다. 우리는 속죄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복음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다. 둘째로, 우리는 은사주의, 기적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두 번째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했다. 주의 재림 직전에 배교한 교회의 한 특징은 은사주의적이다. 우리는 기적들과 초자연적 은사들에 미혹되지 말고, 바른 교훈을 붙들고 바른 삶을 중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특히 우상숭배를 조심해야 한다. 두 번째 짐승은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첫 번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였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도 경배하게 하였으며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다 죽이게 하였다. 주의 재림 직전에는 배교와 우상숭배가 유행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위협 속에서도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주 예수의 재림 직전에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출현할 것이며 큰 핍박의 때가 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심히 불경건하고 불법한 자이며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일 것이며 거짓 선지자도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죽일 것이며 오른손과 이마에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인 666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 매매도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과 핍박과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한다. 마지막 대 환난 시대의 성도의 덕은 인내와 믿음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그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을 굳게 끝까지 소망하며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14장: 구속(救贖)함을 얻은 자들 1-5절, 구속(救贖)함을 얻은 자들 [1-3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14만 4천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사도 요한은 어린양이 시온산에 선 것을 보았다.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시온산은 천국이다. 히브리서 12:22,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사도 요한은 그와 함께 14만 4천명의 성도들이 서 있는 것도 보았다. 이 14만 4천명의 성도들은 7장에 증거된 대로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이며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 즉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소속과 소유권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 사신 자들이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나는 큰 소리도 들었다. 그것은 많은 물소리와 같고 큰 뇌성과도 같았고 거문고 타는 자들의 거문고 타는 소리와 같았다. 그것은 분명히 14만 4천명의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 소리이었다. 참된 성도들은 지상에서도 천상에서도 찬송을 부를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 노래는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만 4천명의 성도들밖에는 배울 자가 없는 새 노래이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좋아하며 불렀던 노래들, 민요든지 유행가든지, 그것들은 다 옛 노래들이다. 우리는 이제 그것들이 헛되다는 것과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심지어 죄악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노래를 좋아하지 않으며 또 부르기를 원치 않는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새 노래를 부른다. 새 노래는 구원의 노래이다. 어린양의 피로 구속(救贖)받은 자들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속죄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새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며 감사하고 또 증거하는 노래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새 노래를 배우고 그것을 부르고 그것을 사랑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시편 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4-5절]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처녀들]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24) 구속(救贖)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사도 요한이 본 14만 4천명은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첫 열매들이다(롬 8:23; 약 1:18).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 세계의 회복을 계획하셨고 택하신 사람들을 먼저 구원하셨다. 그들은 첫 열매들과 같다. 성도들의 구원이 충만히 성취되면, 온 세상 만물이 회복되며 새로워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본문은 구속(救贖)받은 성도들의 특징들을 묘사한다. 첫째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거룩한 자들이다. 그들은 여자들로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은 자들, 정절이 있는 자들, 처녀들이라고 표현된다. 여자들은 죄악된 세상을 가리킨다(약 4:4). 또 구속받은 성도들은 흠 없는 자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흠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은 우리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었다(엡 1:4).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셔서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었다(엡 5:26-27).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시 죄악되고 멸망할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그들이 과거에 술 마시고 방탕하였을지라도, 이제 그들은 다시 그런 세상 생활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이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들이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들은 자기 몸을 더럽히는 자와 같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단순함에서(전통본문)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하였다(고후 11:2-3). 또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용납한 것을 지적하며 책망하고 믿음 생활을 바르게 하기를 권면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모든 잘못된 사상과 교리, 모든 잘못된 행위와 풍조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섬기며 경배하며 또 오직 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한 뜻만 믿고 그를 따르며 섬기고 그 성경의 교훈들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원문). 사람은 누구든지 잘못을 범할 수 있으며 거기에는 목사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며, 그의 말씀과 명령이 성경에 있으므로 성경말씀만 믿고 순종하며, 목사의 성경적 교훈을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바른 태도이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그의 말씀만 따라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의 명령이 보이는 대로, 그가 어디로 가시든지 그를 따라가는 것이 순종의 삶이다. 그러나 주를 따라가는 것이 항상 즐겁고 평안한 길은 아니다. 주를 따라가는 길에는 때때로 시험과 고난과 핍박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가시는 대로, 성경의 교훈대로 즐거이, 자원함으로 따라가야 한다. 셋째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는 자들, 즉 거짓말하지 않는 자들이다. 거짓말은 마귀의 죄악이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다. 거짓은 사탄의 종들의 특징이고, 진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의 특징이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27; 22:15).

천국에서 어린양과 함께 서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한 14만 4천명의 성도들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들이었고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대로 따라갔으며 거짓이 없는 자들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자들인가?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14만 4천명의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이다. 구주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십자가 속죄사역을 믿는 것이다. 속죄신앙이 구원 신앙이다. 여러분에게는 이 속죄신앙이 있는가? 둘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흠이 없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만 4천명은 여자로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 곧 세상의 죄와 쾌락에 빠지지 않은 자들이며 흠이 없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가야 한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한다(눅 9:23). 넷째로,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며 지옥 갈 죄악이다.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 6-12절, 세 천사들의 외침 [6-7절]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주를](전통사본) 25)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세상에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공중에 날아가는 한 천사를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을 계시하시기 위해 때때로 천사를 사용하신다(계 1:1; 8:2; 10:1; 16:1).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신속하게 수행함을 나타낸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 그것은 어느 한 시대에만 적용되는 복음이 아니고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복음이다. 그 효력은 영원하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는 소식이다. 그것은 언제나 온 세상에 증거되어야 할 소식이다. 그 천사는 큰 음성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되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천지와 바다와 샘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에게 경배하라고 외쳤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매우 근본적인 진리들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

01 요한계시록 1장

제1과, 밧모 섬에서 생긴 일

> 시작하는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 때였다. 미국 어느 마을에서는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집마다 창문이나 현관문에 별을 붙여놓았다. 어느 날 밤 아버지와 함께 동네 길을 걸어가던 아들이 감탄하면서 외쳤다. “아빠 이 집도 아들을 전쟁터에 보냈나 봐요! 이 별 좀 보세요. 저 집에도 붙어 있네요!” 그러다가 아들은 갑자기 별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빠 하나님도 아들을 보내셨나 봐요. 저렇게 많은 별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니!”

그렇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들을 이 죄악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계 1:5)하셨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1~8장까지는 서론이다. 이 부분은 전형적인 고대 서신의 양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저자와 기록목적, 서신의 성격과 핵심 주제들을 소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장은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해방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알파와 오메가 측 처음과 나중이며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자이며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 저자와 목적:

요한계시록의 처음 8절은 서론이다. 이 부분에는 이 책의 기록목적과 저자 그리고 주제가 나타나며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요약하고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또한 그 당시의 전형적인 편지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1.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누구이며 계시의 목적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계 1:1)

이 책이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명백히 밝혔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는 요한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사도 요한은 그가 본 것과 들은 것을 기록한 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글이 아니다. 하늘에서 온 계시의 말씀이다. 계시란 헬라어 ‘아포칼립시스(apocalypsis)’에서 온 말로 ‘베일을 벗기다’,’뚜껑을 열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것을 숨김없이 폭로한 책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단지 무서운 상징들만 나타나는 책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그리스도시다. 요한은 그의 책 첫머리부터 우리들을 예수그리스도 면전에 세우고 있으며 시종일관 각 시대의 역사적, 예언적, 교회사적 사건의 중심인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란 이름은 실로 심원한 의미를 갖고 있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에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심이라”(마 1:21)고 기록하여 예수라는 이름의 깊은 뜻을 알리고 있다. 또 헬라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와 같은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계시를 주신 목적이 요한계시록 1장 1절에 분명히 나와 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보여주시려고 그 계시를 요한에게 보여주셨다. 즉 미래를 보여주신 것이다. 미래를 보여주신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은 1장3절에 잘 나와있다. 즉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예언을 꼭 연구하여 그 안에 있는 복을 받아야 한다. 알 수 없는 책이라고 덮어두는 것은 계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2. 요한은 계시 중에 무엇을 보았는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계 1:2).

요한은 계시 중에 ① 하나님의 말씀과 ②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 3번 나타나는데(1:2, 9; 20:4), 하나님의 말씀은 단어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말한다. 구약 성경에서도“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말한다 (렘 1:2; 호 1:1; 욜 1:1).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로 보여주실 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된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는 예수의 증거는“예언의 영”(개정개역 판)이라고 정의하였으며 22장 9절과 비교해보면“예수의 증거”는“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과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3. 어떤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인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여기서 언급하신 복은 요한계시록 에 나오는 일곱 축복(1:3; 14:13; 16:15; 19:9; 20:6; 22:7, 14) 중 첫 번째 복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일반적으로 “봉한 책”으로 알고 있다. 신비한 상징들과 계시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느냐는 생각이다. 숨겨 진 뜻을 억지로 풀다가 잘못될 수도 있다 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자 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암 3:7)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을 읽고 연구하라고 명령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 책을“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 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계 1:1) 보여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우리가 읽고 들은 다음에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이 들어 있다. 알지 못하면 지킬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요한계시록을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고 말세에 “반드시 속히 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4. 요한은 이 계시를 누구에게 써 보내었는가?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계 1:4),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계 1:11).

요한계시록은 편지다. 일차적으로는 당시 로마의 영토였던 소아시아 에 실재하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에 속해 있는 지역이다. 일곱은 요한계시록에서 거룩한 수이며 완전 혹은 충만의 뜻을 나타내 는 상징적 숫자이다.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재앙, 일곱 우레 등과 같이 일곱이란 숫자를 거듭 사용했다(54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는 요한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실제 지명이며 요한의 편지도 실제로 그 교회들에게 보 내져 회람되었다고 본다. 당시의 일곱 교회를 지도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

1: 1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상징한다`(사 37:16; 요 17:3). “주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 이요 침례도 하나” (엡 4:5)이다.

3: 7이나 12와 함께 완전 혹은 영원을 의미하는 수이다. 두 개의 선은 면을 만들지 못하지만 세 개의 선이 비로소 넓이를 만들어낸다. 두 개보다는 세 개의 다리가 물체를 세우는데 가장 안정감이 있다. 삼위 일체의 하나님도 삼이며 예수님에게는 세 명의 수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삼분의 일이라고 하면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일부를 의미한다. 사단이 하늘 천사의 삼분의 일을 유혹했기 때문에 때로는 사단의 영향권이 미치는 사단적인 수가 되기도 한다.

4: 땅의 사방처럼 방위를 나타낼 때 혹은 상징 적으로 온 세상을 나타낼 때 쓰인다.

6: 7이 완전수인데 일이 모자라므로 불완전한 수이다. 고대의 바벨론이 육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바벨론의 수이며 666(계 13:18`)은 사단의 수이기도 하다.

7: 완전과 충만함을 나타내는 수이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 세상을 창조하신 후 안식하셨다. 요한계시록도 일곱 촛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우레 등을 사용한다.

12: 조직의 완전수이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되어 있으며, 예수님은 12제자를 선택하였고, 새 예루살렘 도성은 12기초석과 12진주문 등을 가지고 있다.

40: 훈련과 교육의 수이며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수이다. 노아홍수 때 비가 사십 주야 동안 쏟아졌으며,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지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40년을 훈련 받았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40일을 머물렀으며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고 시험을 받으셨다.

144: 3은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수이며 4는 동서남북 4방위에 근거한 땅과 우주의 수인데 이 두 수를 곱한 12는 성경에서 완전수이다. 따라서 12의 제곱인 144는 최상의 완전수를 의미한다. 거기에 충만을 나타내는 10의 세제곱을 곱하여 144,000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144,000은 충만하고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

> 저자소개

5. 요한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였는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4~5).

요한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두에 삼위 일체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축복을 구하고 있다. 참된 은혜와 평강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선재하신 분이고 현재 지금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곧 다시 오시어 이 세상 역사를 끝내실 분이다. 성령은“보좌 앞에 일곱 영”으로 소개되고 있다. 성령을 의미하는 일곱 영의 일곱은 요한계시록에서 완전하고 흠이 없음을 나타내는 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분으로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이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였고 복음의 충성된 증인이 되었다. 둘째로, 그분은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 중에 으뜸이 되는 분이시다. 제일 먼저 부활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제일 뛰어나신 분이라는 뜻이다(골 1:18).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다. 그분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단 2:21)시는 분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소개

6.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5~8).

인사를 끝낸 요한은 이제 이 모든 계시를 주신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요한 당시의 교회들은 그 당시 널리 퍼져있던 원시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이단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영지주의는 영과 육은 접촉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이원론 교리 때문에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성육신을 전면적으로 부인하였다. 요한은 그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1장에서 요한은 크게 세 가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구원은 값 싸게 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생명을 요구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그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다. 그의 피로 이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죄의 사슬사슬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므로“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행 4:12)는 것이다. 성경은 단 하나의 구원의 길만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갈 수가 없다. 기독교는 얼른 생각하면 패쇄적인 것 같지만,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기 때문에 가장 개방적이고 열린 종교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구든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복음이다. 두 번째, 예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며 하나님 나라 자체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거룩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하므로 그 특권을 빼앗겼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택하신 백성” (벧전 2:9)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있기를 간구하며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이다.

세 번째,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데려가시기 위하여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신약 성경에만 해도 300번 이상 약속되어 있다. 선악 간의 대쟁투를 계시로 보기 전에 요한은 먼저 그리스도의 재림의 광경을 본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승리의 왕을 각인의 눈이 볼 것이고“그를 찌른 자들도 볼”(계 1:7) 것이다.

재림은 온 우주적인 사건이다. 재림은 몇 사람만 볼 수 있게 은밀히 일어나는 것이거나 영적으로만 식별되는 비밀스런 사건이 아니다. 재림은 휴거처럼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사라지는 황당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목도하는 공개적인 우주의 대사건이다. 그것은“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마 24:27)이는 것같이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 때 주께서는“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것이요“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 (살전 4:16, 17)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악인들은 부활하지 않지만 십자가에서 그를 조롱하고 못 박은 자들과, 각 시대를 통하여 그분과 그의 성도들을 핍박하고 찌르듯이 고통을 준 사람들은 특별히 부활하여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때 의인들은“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라”(사 25:9) 하고 반가운 환영을 할 것이나 복음을 거절한 악인들은“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떨어져 보좌 위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계 6:15~16)워 달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 엄숙한 날에 우리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는 오늘 우리의 결심에 달려 있다.

7.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자와 마지막 자다. 즉 처음과 나중이 된다는 말이니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시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며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존재하셨고 장차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분이시다.

> 요한의 자기 소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

8.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 요한은 어떤 형편에 처해 있었는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 1:9~11).

요한은 우리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믿는 환난과 인내와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는 같은 십자가의 보혈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한 핏줄이다. 요한은 자신이 밧모라는 섬에 있다고 말한다. 밧모 섬은 에게해에 있는 작은 섬이다. 요한이 살던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에베소 유적지 근방에 있는 터키의 쿠사다스 항구에서 배로 두 시간쯤 가면 바위로 된 섬이 나타난다. 스칼라(Scala)항구에 배를 대면 하얀 집들이 파란 바다와 어울려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밧모 섬은 길이가 16km, 가장 넓은 폭이 10km, 전체 면적은 31km2쯤 되는 작은 섬이다. 밧모 섬은 한때는 터키에 속했다가,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 영이었고 지금은 그리스에 속해 있다. 산 중턱에 요한이 거하면서 계시를 보았다는 계시 동굴이 있다. 동굴 위에는 교회가 서 있다. 꼭대기에는 성요한 기념 교회가 있으며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사들이 거하고 있다.

밧모 섬은 상당 부분이 바위로 덮여 있으며 땅의 대부분이 거칠고 피폐한 황무지이다. 비가 오지 않아서 물이 귀한 곳이다. 로마 시대에는 이곳에 큰 채석장이 있어서 죄수들이 돌을 캐는 일을 위하여 동원되었다고 한다.

요한이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이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에베소에서 전도하던 시절에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밧모 섬에 유배된 것으로 보인다.

9. 요한은 밧모 섬에서 무슨 명령을 받았는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 1:10~11).

요한은“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계시를 보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날에 자신을 나타내시고 계시를 주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요한이“주의 날”에 주의 음성을 들은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어느 날이 “주의 날”인가? 사람들은 이 날이 일요일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요한 당시는 아직 일요일에 예배 드리는 일이 없었으며 주일이라는 말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은“주의 날”이란 말에 어떤 설명도 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글을 읽을 모든 사람들이“주의 날”이라고 말하면 당장에 그 날이 어느 날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교인들이“주의 날”이라고 부르는 날은 어느 날이었는가?

“주의 날”에 대한 성경의 유일한 단서는 마가복음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는 말씀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식일이“주의 날”이라는 명백한 말씀이다. “주의 날”이 일요일이라는 어떤 성서적 근거도 없기 때문에 요한이 그렇게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언급한“주의 날”은 일요일이 아니고‘안식일’즉 오늘날의‘토요일’임에 틀림없다. 일요일이란 요일 이름이 일반적으로 쓰여진 것은 A.D. 700년경이고 그 전에는 일요일을 “첫째 날”혹은“제 8일”이라고 불렀다. 일곱째 날인 안식일 바로 다음 날이기 때문이었다. 신약 성경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20여년이 지난 다음부터 기록되기 시작했지만 어떤 저자도 일요일을 주일로 부른 일이 없다.

안식일과 일요일

* 신약 시대 교회가 그렇게도 신실하게 지키던 안식일이 어떻게 해서 일요일로 바뀌게 되었는가? 무슨 이유로 A.D. 2세기 후반에 가서 안식일 대신 일요일에 모이는 일이 일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생겨났는가?

A.D. 132~135년경 다시 한번 로마에 저항하는 전국적인 유대인들의 반란이 바 코크바(Bar kochba,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지도 하에 일어난 후 유대인들의 상황은 극도로 나빠졌다.

로마 황제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개명(改名)하고 유대인들을 아예 예루살렘에서 추방해버렸으며 대대적인 핍박이 유대인들에게 가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는 분명히 달랐으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 때문에 유대인의 분파로 오해 받을 염려가 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 핍박에 포함되지 않기 위하여 유대인들과 자기들의 신앙을 명백히 구분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예배일을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옮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일로 지키겠다는 명분이었다. 초기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무리들과 일요일을 지키는 무리들이 같이 존재했다.

그러다가 밀라노 칙령(A.D. 313년)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통합을 추진하면서 A.D. 321년 일요일 휴업령을 공포하여 안식일을 이교의 태양숭배 제일인 일요일로 대체해 버렸다.

교회는 목숨을 걸고라도 그것에 반대해야 했었다. 그러나 이미 세상 권세에 융화되고 약해진 교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오히려 타협하여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 그 조치를 승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A.D. 135년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했고 그 날이 분명히 성서적인 주의 날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이 “성령에 감동하여 …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은 날은 일요일이 아니라 오늘날의 ‘토요일’인 ‘안식일’이었다 (눅 6:5, 막2:28). 안식일의 주인께서 그의 날 즉 안식일에 요한에게 나타나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 요한에게 말하기를“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 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하였다. 이 명칭들은 모두 그 당시 소아시아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던 도시들의 이름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는 이 도시들에 세워진 교회들일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10. 요한에게 말씀하신 그 분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그 분은 누구였는가?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12~16).

요한은 하늘의 일곱 금 촛대 사이에서 인자 같은 이를 보았다. 신약 성경에서 인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계시 중에 예수의 모습을 본 것이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말한다(계 1:20). 교회가 금 촛대로 상징된 것은 예수께서 교회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이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것은 예수께서 교회들을 돌보고 계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극한 관심으로 살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비체이다. 이것은 단순한 형용사가 아니라 밀접하여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표시한 것이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말 할 때 에클레시아(ekklesia)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는‘불러낸다’란 의미의 헬라어로 고대 헬라 사회에서 군중을 불러 모을 때에 사용하던 것이다. 또 이것은 히브리어 카할(kahal)이란 말과 동의어로써 여기에서 영어의‘콜’(call), 즉‘부른다’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 대저 교회란 불러낸 자의 단체이다. 교회는 촛대요, 그 주요 목적은 주위 사람들을 위하여 진리의 빛을 널리 비추며 또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사장 의 옷을 입고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으로서 봉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하여 흰색은 영광과 승리와 순결의 상징이고 (계2:17, 3:4, 4:4, 6:11, 7:9, 19:14, 20:11) 그리스도의 현현의 상징이었다(계 1:14, 14:14, 19:11). 흰색은 또한 하늘 백성들의 옷 색깔이고 하나님의 보좌도 흰색이다(계 20:11).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머리와 털은 희기가 흰 양털 같으며(계 1:14) 진실한 신앙인들은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받으며(계 2:17), 또 그들은 흰 옷을 입는다(계 3:4, 5, 18). 이십사 장로들도 흰 옷을 입으며(계 4:4), 순교자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도 모두 흰옷을 입는다(계 6:11, 계 7:9, 13). 인자가 흰 구름 위에 앉아 계시며(계 14:14), 다시 오실 때도 그는 흰 말을 타고 있으며 그를 수행하는 하늘의 군대도 흰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있다(계 19:11, 14).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꿰뚫어 보시는 통찰력과 그의 견고하심과 장엄하신 위엄을 말하고 있다.

그가 오른손에 가지고 있는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다(계 1:20). 하 나님의 교회의 복음 전도자들과 지도자들을 예수께서는 오른손으로 친히 도우시고 지키신다(사 41:10). 그분의 입에서는 날 선 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며 그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는 엄숙함과 밝음을 가지고 있다.

11. 요한은 그 앞에서 어떻게 되었으며 그 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소개하였는가?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1: 17~18).

요한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분의 사랑하는 제자였다. 요한 은 예수께서 어떻게 반대를 당하셨으며 고통을 견디셨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한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시며 땀이 핏방울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본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것을 친히 본 제자였다.

그런데 계시 중에 그가 본 예수님은 더 이상 고난의 종이 아니었다. 그를 두르고 있는 영광이 너무나 장엄하기 때문에 요한은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의식을 잃었다.

그때였다. 옛날과 똑같이 부드러운 오른손이 그에게 얹혀지면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려워 말라.” 요한은 그 목소리를 잘 알았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바다를 걸어오신 그분이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이 낙망 중에 빠져 주저앉았을 때 들려주시던 그 음성이었다. 예수께서 는 자신을“처음이요 나중” 이라고 소개하셨다. 이미 언급된“알파와 오메가”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변함없으신 그분의 존재와 품성을 잘 드러낸 말이다.

예수께서는 또한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시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인 것이다.

12. 요한은 어떤 지시를 받았는가?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 19~20).

요한은 다시 한번 계시 중에 그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것은 각 시대의 성도들이 보고 그 뜻을 알아 유익을 받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비밀의 책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거듭거듭 하늘 성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늘 성소의 식양에 따라 광야에서 맨 처음 만들었다. 후에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 지어졌지만 기본 구조는 같은 것이다. 아래의 구조도를 통해서 성소의 구조를 알아두는 것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성소의 구조

요한이 계시 중에 본 것은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였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리고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교회는 각 시대의 하나님의 촛대이다. 해변에는 등대가 있어 그 빛이 해상의 많은 선박들을 인도하고 그들의 안전한 항해를 위하여 서 있다. 교회를 통해서 비취는 하나님의 빛도 이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영속적으로 비취는 빛인 것이다.

♣ 요한계시록의 칠 복

1) “읽고 깨닫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1:3)

2)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14:13)

3) “자기의 옷을 살피며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16:15)

4)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는 복이 있나니”(계 19:9)

5)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20:6)

6)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22:7)

7) “그 옷을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계 22:14)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1장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 ‘계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시스'(* )는 ‘본래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말로 성경에서는 ‘진리에 대한 통찰력'(엡1:17)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나타냄'(살후1:7; 벧전1:7)을 의미한다(Johnson, Lohmeyer). 본문에서 ‘아포칼류시스’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언급된 것은 본서가 여러 개의 예언과 환상으로 말하고 있으나 ‘말씀’이라는 하나의 일치점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 예수 그리스투)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라고 주장한다(Hughes). (2)혹자는 주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계시라고 주장한다(Kraft, Charles, Ladd).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Tenney, Morris).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요한에게 주어진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 ‘그에게’는 앞서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를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계시의 근원임을 시사한다(Mounce, Morris, Lenski, Johnson). 즉 성부 하나님은 모든 섭리의 계획자이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의 성취자이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속설(從屬說)을 뜻하지 않는다(요3:34,35; 5:20-24; 7:16; 8:28,29; 12:49; 14:10,24; 16:15; 17:8, Alford, Morris).

반드시 속히 될 일을 – ‘반드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 )는 예언적 필연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나타낸다(Loh-meyer). 한편 ‘속히 될 일’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될 사건임을 암시한다(4:1; 22:6; 단2:28,29,45, Johnson). 여기서 ‘속히'(* ,엔 타케이)는 본서에 7회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으며(2:16; 3:11; 11:14; 22:7,12,20)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시간적 성취의 관점으로 해석한다(Vincent, Hengstenbe-rg). (2)혹자는 종말론적 임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계시의 성취의 진행과 확실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Alford, Johnson, Morris, Mounce). ‘엔 타케이’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자기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다. 즉 ‘엔 타케이’는 인간의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측면에서의 시간적 개념으로(벧후3:8) 하나님의 갑작스런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계시의 성취와 그 확실성을 나타낸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 본문은 계시의 전달 경로를 나타낸다. (1)하나님. (2)예수 그리스도. (3)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의 전달자이며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를 통해 자신의 종인 요한에게 전하셨으며, 그 종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전하였다. 여기서 세 번이나 언급되는 ‘그'(* ,아우투)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본문의 주 동사인 ‘에세마넨'(* , ‘지시하신 것이라’)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모든 계시의 근원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 계시를 전달받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종들, 천사, 그리고 종 요한에게 전달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한편, ‘그 천사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 앙겔루 아우투'(* )는 ‘그 천사를 통해’라는 의미로 천사의 매개적 역할을 나타내며(22:6,16), ‘그 종 요한에게’의 헬라어 ‘토 둘로 아우투 요안네'(* )는 수단이나 기구를 나타내는 여격이 사용되어 요한이 계시 전달의 인간적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나타낸다. 결국 본서의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기원하여 참됨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천사와 인간적 도구로 말미암아 수신자들에게 전달된다(Sweet, Moffatt, Ironside).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동일한 내용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증거되어 나타났음을 나타낸다. 즉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증거이며,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낸다. 또한 본문에서 요한 자신이 본 환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동일시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약 시대 사도들과의 연속성을 엿볼 수 있다(Johnson, Plummer).

=====1:3

본서에는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진술이 나타난다. (1)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 (2)주 안에서 죽는 자(14:13). (3)깨어 옷을 지키는 자(16:15 ). (4)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된 자(19:9). (5)첫 부활에 참여한 자(20:6). (6)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22:7). (7)두루마리를 빠는 자(22:14). 본절에 나타난 사람은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중 첫번째에 해당된다. 이 예언의 말씀을…복이 있나니 – ‘이 예언의 말씀’은 본서가 예언서임을 나타내는 것으로(10:11; 22:6,7,10,18,19) 본서의 말씀이 예언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영적, 윤리적 권면과 권고를 포함한 현재적 경고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Johnson).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과 관련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기술한다.

읽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호 아나기노스콘'(* )은 관사 있는 단수 분사로 초대교회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성경을 읽던 자를 나타낸다. 듣는 자들(* , 호이아쿠온테스)과 지키는 자들(* , 테룬테스). 이 두 부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모두 복수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행하는 회중들을 나타낸다(눅4:16; 행13:15,21; 골4:16, Johnson, Zahn, Robertson). 요한은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통해서는(느8:2,3; 눅4:16; 행13:15; 살전5:27)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때가 가까움이라 – 본문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이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 )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 )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마24:3-51; 요21:22, Johnson, Mounce).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 본문에서 아무런 수식어 없이 ‘요한’이라고 언급한 것은 서신을 받는 일곱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요한이 아시아 교회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Mounce). 한편 ‘아시아에’는 본래 로마의 영토를 지칭하는 것으로 아타톨리아 고원에 이르는 소아시아의 서편 지역을 가리킨다(Morris, Kiddle). 당시 아시아 주에는 ‘드로아'(행20:5), ‘골로새'(골1:2), ‘히에라볼리'(골4:13) 등 많은 교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일곱 교회에만 편지하고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일곱 교회가 역사상의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Seiss, Kuyper). (2)혹자는 ‘일곱’이란 숫자가 완전 수이므로 계시록에 언급되는 다른 일곱이라는 문학적 양식을 따른 것이라 주장한다(Morris, Johnson, Moffatt, Greijdanus). (3)혹자는 일곱 교회가 처한 황제 숭배화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Mounce)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 견해는 타당하다(레4:6,17; 8:11,33; 민19:12; 롬12:6-8; 약3:17, Ford, Vincent, Canon).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 아포 호 온 카이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 ‘말미암아’의 뜻을 가진 전치사 ‘아포'(* )는 보통 소유격 명사와 함께 쓰임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주

격 명사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런한 표현 방법은 본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8절; 4:8; 11:17; 16:5) 요한이 헬라어 문법상 어긋나는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영원불변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신적 성품을 손상시키지 않고 경외하려는 동시에서 비롯되었다. 즉 이러한 표현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잘 묘사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암시한다(Greijdanus, Morris, Johnson, Ladd).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분이다(8절; 4:8).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 ‘일곱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일곱 천사라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Mounce). (2)혹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Ladd, Johnson, Morris).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전자의 경우 본절과 다음절에 나타나는 삼위일체론적 인사말에 어긋나며 본서에 나타나는 ‘영’은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나 마귀의 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을 ‘일곱 영’으로 표현한 것은 성령의 속성과 권능이 완전(完全)하고 성결함을 시사한다(3:1; 4:5,6; 5:5; 슥3:9, Johnson, Morris, Robertson, Barclay, Lenski, Ladd).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 본문은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첫번째 수식구로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충성된 증인으로(시89:37; 사55:4) 새 언약을 성취시킨 것이었음을 나타낸다(Morris, Johnson).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까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시킨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이었다(Ladd). 이러한 사실은 당시 박해와 고난에 처해 있던 일곱 교회의 수신자들에게 위로와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2:13; 11:3; 17:6, Mounce, Johnson).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 ‘먼저 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프로토토코스'(* )는 바울의 경우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나 통치자의 의미로 사용한 반면(골1:15),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죽은 자들에 대하여 주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하고 있다(시89:27, Ladd, Mounce, Johnson).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땅의 임금들의 머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르콘 톤 바실레온 테스 게스'(* )는 문자적으로 ‘땅의 왕들의 통치자’를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왕적 직분을 표현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뛰어나시며 모든 권세자들을 지배하시는 주권적 통치자이심을 시사한다(6:15; 17:14; 19:16; 시89:27; 빌2:9,10, Johnson, Mounce, mor- ris, Ironside).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선물을 의미하며(롬1:7; 고전1:3), ‘평강’의 헬라어 ‘에이레네'(* )는 히브리인들의 인사말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풍요로운 영적 상태와 화목을 가리킨다. 이 인사는 평범한 인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이 종적, 횡적으로 임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롬1:7; 고전1:3; 엡1:2; 벧후1:2, Mounce, Craft, Martin, and Kiddle).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사랑하사’의 헬라어 ‘아가폰티'(* )는 현재 분사로 계속되는 사랑을 나타낸다. 이 ‘사랑’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Mounce). 한편 ‘해방하시고’에 해당되는 헬라어 ‘뤼산티'(* )는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죄에서 해방하신 공효(功效)를 시사한다(5:9; 마20:28; 요8:34-36; 갈3:13; 딤전2:6; 히9:12; 벧전1:18,19, Moffatt, Mounce, Lenski). 이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바와 같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된다(12:11).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나타내며(22:3; 엡1:6) 구원 사역이 삼위 하나님의 협동적 사역으로 수행되나 근원적으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요6장). 한편 ‘나라와 제사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안, 히에레이스'(* , )는 문자적으로 ‘나라, 곧 제사장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제사장들의 집합체를 가리킨다. 이는 출19:6과, 벧전2:9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왕됨과 제사장됨을 시사한다(Beckwith, Morris, Lenski).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영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돝사'(* )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으로(출33:9; 겔1:28)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삼위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본문의 경우에는 관사와 함께 사용되어 하나님의 신적 속성에 관한 찬양과 공경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Mounce). 그리고 ‘능력’의 헬라어 ‘토 크라토스'(* )는 인간이 갖는 권리나 내적 능력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능력을 나타낸다(벧전4:11). 한편 ‘세세토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 )은 문자적으로 ‘세대들의 세대들에’라는 의미로 ‘영원성’을 나타낸다(18절; 4:9,10; 5:13; 7:12; 10:6; 11:15; 15:7; 19:3; 20:10; 22:5, Lenski).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수신자들에게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 본문은 단7:13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확증하신 바며(마24:30; 26:64) 사도 바울에 의해 입증된 재림의 모습이다(살전4:17). 여기서 재림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구름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위엄을 나타내는 초자연적 현상인 듯하다(Morris, Lenski, Johnson).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 본문은 슥12:10의 예언을 반영한 것이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공개성을 나타낸다. 현재는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실로 인식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는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눈으로 확연히 보게 될 것이다(Ladd). 한편 ‘그를 찌른 자들’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Moffatt, Plummer, Johnson, Ladd). 그리스도는 이런한 자들에게도 자신의 재림을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박해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재림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주적 주권을 소유한 분으로서 온 세상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심판주이심을 시사한다(Mounce, Lenski).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 본문은 심판의 보편성을 나타낸다.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회개치 못한 다들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낸다. 본문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회개치 않은 불신자들이 당할 두려움을 극명하게 시사한다(Morris, Mounce, Ironside).

그러하리라 아멘 – ‘그러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이'(* )는 동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히브리어 ‘아멘'(* )과 같다. 요한은 동의어인 ‘그러하리라’와 ‘아멘’을 이중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종말적인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한다(Greijdanus, Morris, Mounce).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 ‘알파’는 헬라어 문자의 첫 글자며,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이 되셔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시대와 세대의 주가 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심판주로서 모든 주권을 소유하고 계신다(21:6; 22:13, Beasley-Murray,Charles, Robertson). 이런한 하나님이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은 확실한 것이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 본문은 4절의 반복으로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즉 ‘영원히 자존’하신 하나님의 성품을(출3:14) 묘사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체 안에 존재의 기반을 가지고 계셔서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시며 영원 불변하신 심판자이심을 나타낸다(Johnson). 그 하나님은 장차 오셔서 자신이 섭리하신 심판을 이루실 것이다(Ladd).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전능한 자’의 헬라어 ‘판토크라토르'(* )는 본서에 9회나 언급되는 중심 단어로 문자적으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나타낸다. 이것은 곧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자가 분명히 가져야 될 속성이다(Johnson).

=====1:9

나 요한은 – 요한은 다시금 자신을 밝혀 하나님과 자신과 수신자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요한이 자신을 ‘사도 요한’이라 밝히지 않는 것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과 친분이 있음을 암시한다(22:8, Johnson).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 요한은 본문에서 자신과 수신자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너희 형제요…동참하는 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 아델포스 휘몬카이 슁코이노노스'(* )로 하나의 관사 ‘호’에 의해 두 가지 칭호 즉 ‘형제’와 ‘동참하는 자’가 연결되어 있다. 이는 ‘형제’인 까닭에 ‘동참하게 된다’는 인과 관계를 드러낸다. 한편 ‘예수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예수'(* )는 문자적으로 ‘예수 안에서’란 의미로 ‘주 안에서’란 바울의 사상과 상통하며, 문법적으로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의 세 말에 공통적으로 연결되어 ‘환난’과 ‘나라’ 그리고 ‘참음’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Moffatt, Mounce). 여기서 ‘환난’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해 온전히 충성할 때 나타나는 고난을 가리키며(요16:33; 행14:22; 딤후3:12) ‘나라’는 메시야적 통치의 축복을 말하며, ‘참음’의 헬라어 ‘휘포모네'(* )는 ‘휘포'(* , ‘아래에’)와 ‘메노'(* ,’머물다’)의 합성어로 충성된 자들에게 요구되는 적극적인 인내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축복을 기다리는 가운데 환난 속에서 인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Johnson, Ironside).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 ‘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와 관련되어 요한의 밧모섬 행(行)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갔다고 주장한다(Spitta). (2)혹자는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를 받기 위해 갔다고 주장한다(Weiss, Bleek, Lucke). (3)혹자는 복음 전파에 대한 박해로 말미암아 유배되었다고 주장한다(Moffatt, Charles, Vincent, Plummer, Johnson). 세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 때 에베소 지방에서 전도하던 중 밧모섬에 귀양갔다가 후에 귀환(歸還)하였다고 역사가와 교부들이 전하기 때문이다(Irenaeus, Clement, Eusebius).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 ‘주의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퀴리아케 헤메라'(* )는 문자적으로 주께 속한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안식후 첫날'(막 16:2; 눅24:1; 요20:19; 행20:7) 혹은 ‘매주일 첫날'(고전16:2)과 같은 뜻이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유대교의 안식일이었던 토요일이 사도 시대부터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로 대치된 것을 가리킨다(요20:19; 행20:7; 고전16:2, Morris, Lenski, Ladd). 한편 ‘성령에 감동하여’의 헬라어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 )는 문자적으로 ‘내가 성령 안에 있었다’는 뜻으로 이는 단순히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황홀한 상태에 있게 되었음을 암시한다(4:2; 17:3; 21:10; 행10:10; 11:5, Lohmeyer, Ladd, Johnson,Mounce).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 ‘나팔소리’는 구약 시대에 백성을 불러 소집하거나 군사적으로 경고할 때(겔33:6), 전쟁 때(겔7:14), 그리고 특별한 의미로 절기 때(레23:24)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한 징표로 나타난다(마24:31; 살전4:16). 본서에서 70회나 사용되며 종말론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본문의 ‘나팔소리’는 심령들을 일깨우는 천사의 음성으로 이해된다(Morris, Mounce, Ladd).

=====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 ‘써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랖손'(* )은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표현이다. 이는 특별히 히브리 예언 방식으로, 본서에서 12회나 반복되어 사용됨으로 본서의 기록이 하나님의 권위로 되었음을 시사한다(Morris, Robertson).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 본문에 제시된 교회의 명칭은 1:4에서 언급된 ‘일곱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각각의 교회에 보내진 특별한 메시지는 2,3장에서 동일한 순서로 나타난다(‘일곱 교회’에 대해서는 2,3장의 주석 참조). 특별히 기록된 말씀을 일곱 교회에만 보내라고 한 것은 그 도시들이 소아시아 중서부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며(Zean) 동시에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가 보편적으로 모든 교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Mounce, Lenski).

=====1:12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 요한이 처음으로 본 것은 슥4:2의 환상과 비슷한 일곱 금 촛대로 여기서 ‘촛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크니아스'(* )는 세워놓거나 달아메는 ‘등잔불’을 가리킨다(출 25:31; 왕상7:49; 슥4:2). ‘일곱 금 촛대’는 스가랴서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반면에(슥4:2) 본문에서는 수신자들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나아가 전세계의 보편적인 모든 교회들을 나타낸다(20절, Mounce, Johnson, Kiddle).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 ‘인자 같은 이’란 단7:13,14을 반영한 것으로 계시자이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고양시켜 표현한 것이다(행7:56). 요한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은 물론 영광으로 고양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Beas ley-Murray). 그리스도가 성전의 촛대 사이로 움직이시는 것은 그의 대제사장적 임재와 교회의 머리되심을 시사한다(Moffatt, Mounce).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 ‘발에 끌리는 옷’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착용한 예복으로(출28:4; 레16:4; 사6:1)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그의 권위와 위엄을 시사한다(Johnson, Mounce).

가슴에 금띠를 띠고 – 이 또한 대제사장 혹은 왕의 예복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출28:8; 29:5) 권세를 가지신 메시야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렇듯 요한은 구약성경에 묘사된 대제사장과 왕의 모습을 빌어 그리스도의 위엄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Bruce, Johnson, Mounce, Morris, Ironside).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 본문은 단7:9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성경에서 흰 색깔은 항상 ‘권위’와 ‘영광’과 ‘순결’을 상징하기에 본문은 그리스도의 성결과 영원성 혹은 그의 영원한 신성을 상징한다(사1:18, Mounce, Kiddle).

그의 눈은 불꽃 같고 – 이는 단10:6을 반영한 것으로 그분의 전지성으로 모든 악을 꿰뚫어 아시는 날카로운 공의의 눈을 상징하며(Vincent) 아울러 승리로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심판을 시사한다.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 ‘빛난 주석’의 헬라어 ‘칼콜리바노'(* )의 어원(語源)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금 같은 청동’ 혹은 ‘양질의 합금이나 놋쇠’로 이해된다(계2:18). 그리스도께서 빛난 주석의 발을 가지셨다는 사실은 초림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힌 발’과는 달리 재림 때에는 영광과 권능으로 오셔서 모든 더러운 무리들과 반대자들을 밟아 심판할 것을 상징한다(단10:6, Lenski, Mounce).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 본문은 10절의 ‘나팔소리 같은’에 뒤이어 나타나는 음성에 대한 묘사로 겔43:2에 똑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는 불가항력적인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이 모든 죄인들에게 두려움을 줄 무서운 음성임을 시사한다(시29:3,4).

=====1:16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 ‘오른 손’은 권세있는 능력 혹은 보호와 안전을 상징한다(출15:6; 사41:10; 행2:33). 그리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를 뜻하며(20절) 더 나아가 전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의 사자들을 상징한다. 따라서 본문은 일곱 교회 즉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과 보호하심 가운데 있음을 시사한다(Lenski, Johnson, Mounce).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 이는 신,구약 성경에서 흔히 사용된 비유이다(사11:4; 49:2; 눅2:35; 엡6:17; 히4:12). 혹자는 ‘날선 검’을 ‘율법과 복음’의 양면으로 해석하기도 하나(Tertullian, Victor) 본문은 단순히 날선 검의 심판적 기능을 묘사한 것으로 만국을 심판하시는 메시야의 심판권을 시사한다(19:15; 살후1:8, Charles, Mounce, Walvoord).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 ‘얼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프시스'(* )는 ‘외관’으로 이해되므로(Lenski, Mounce) 본문은 환상 전체에 대한 결론적 묘사로 보인다. 이것은 마치 과거에 변화산에서 순간적으로 체험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과 유사한 것으로(마17:2; 막9:3, Plummer)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과 우월함을 시사한다(Johnson).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 본문은 인간이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한 초자연적인 환상을 보고 두려움과 떨림에 압도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는 계시를 받을 때 흔히 일어나는 모습으로(수5:14; 겔1:28; 단8:17; 10:15; 마176; 행26:14) 인간의 연약성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두려운을 시사하며 일반적인 공포와 전율의 감정과는 다른 것이다(Greijdanus, Lenski, Moffatt).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흔히 제자들을 안심시킨 것과 같이(마14:27; 17:7; 막6:50) 인자한 모습과 음성으로 요한을 위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 호 프로토스 카이 호 에스카토스'(* )는 구문상 강조 용법으로 ‘처음과 나중인 바로 나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8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나타난 ‘알파와 오메가’와 동일한 것으로 8절에서는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칭호로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자신의 칭호를 통해 위로하심으로 요한에게 절대적인 확신을 주고 있다(Mounce, Zahn, Ironside).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 ‘곧 산 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호 존'(* )은 앞절의 ‘처음과 나중’이라는 칭호를 보충하는 언급으로 늘 살아있는 ‘영원성’을 나타낸다(출3:14; 시42:2). 한편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명을 제한시킨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수여할 수 있는 구속사적 순종의 사건이다(요5:26, Lohmeyer).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음부’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두'(* )는 히브리어 ‘스올'(* )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육신의 죽음 상태와 무덤 혹은 죽은 영혼들이 가는 곳을 가리켰으며(왕상2:2,9; 욥3:13; 30:23; 시89:48; 사14:9; 겔32:28, Johnson, Greijdanus) 신약성경에서는 죽은자들이 있는 곳(행2:27,31), 혹은 죽어서 악인들이 거하는 곳을 의미하였다(20:13,14; 눅16:23).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부활을 통해 사망의 영역을 정복하시고(고전15:54,55, Vincent) 영원히 살아계셔서 죽음의 영역을 주관하는 열쇠 곧 권능과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 본문은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 그리고 ‘장차 될 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서의 내용을 3구분하여 ‘네 본 것’은 1장의 ‘인자에 대한 환상’을, ‘이제 있는 일’은 2,3장에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현재 상태를, ‘장차 될 일’은 4-22장까지의 내용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Charles, Sweete, Lenski). (2)혹자는 본절의 주동사가 ‘기록하라’임에 주목하여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현재와 미래에 될 일’로 구분하여 해석한다(Mounce, Moffatt, Johnso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요한이 보고 기록해야 하는 것은 본서의 전체이다.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 ‘비밀’에 해당하는 ‘뮈스테리온'(* )은 원래 ‘가둔다’ 혹은 ‘닫는다’는 의미의 ‘뮈오'(* )에서 파생된 말로(10:7; 17:5,7) 단순히 ‘신비롭다’는 개념이 아니라 ‘상징적인 환상에 대한 내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셔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을 가리킨다(단2:7; 골1:26; 살후2:7, Charles, Robertson).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이'(* )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교회에서 가장 우세하고 지배적인 정신(the prevailing spirit of the church)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unce). (2)혹자는 ‘교회 자체’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Bleek, Sweete). (3)혹자는 일곱 교회의 감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Zahn, Weiss) (4)혹자는 이 사자가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점을 들어 교회에서 책임을 맡은 천사들이라 주장한다(Johnson, Moffatt, Charles, Rist).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단10:13,20.21). 한편 촛대로 상징된 일곱 교회는 일차적으로 소아시아의 선택된 교회를 말하나 본질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세계의 모든 교회를 가리킨다(엡3:10).

제목과 문안 인사

요한계시록 1:1-8

요한계시록은 구조적으로 서론 부분(1:l-8)과 결론 부분(22:6-21)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l.문안 인사로 시작하고(l:4,5),축복기도로 끝을 맺는다(22:21)

(계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2.중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계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22:7,12,20

7-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20-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3.때가 가까움을 말씀하신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4.사자를 보내어서 종들로 알게 하셨다.

(계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계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5.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계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6.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 서론의 부분은 표제에서 시작하여 문안 인사로 나아가고 있다.

l.제목一예수그리스도의 계시

1-3절은 이 책의 서론으로 l절은 계시의 유례를, 2절에서는 계시의 성격을, 3절에서는 이 계시의 목적을 선언하고 있다.

l.제목-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묵시)

이것이 이 책의 이름이다. 요한 계시록이란 이름은 후대에 붙인 이름이지 성경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한다.

계시(묵시)-계시라는 말은 벗긴다는 뜻의 단어(아포칼룹시스)로 문학적 분류가 아니라 이 책의 성격과 목적(반드시 일어날 일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을 지적하는 말이다.

주전200-주후 100년 사이에 유대에서 묵시문학이라는 유대-기독교적 문학 장르가 있었다. 요한계시록은 여러 면에서 그 문학 장르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차이점도 있음을 알아서 무조건 묵시문학으로 취급하는 것은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묵시문학적 방법이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묵시문학과의 유사점: 인간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의 제시를 다룸

환상과 꿈을 사용

가끔 기괴하고 환상적인 상징을 사용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관심

우주의 대 이변적 종말 사건에 관심

묵시문학과의 차이점: 과거 몇몇의 위인들의 이름을 빌리지 앉고 요한이라는 생존 인물의 이름을 둔다.

계시록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일종의 편지이며 특정 지역의 교회에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묵시문학은 염세적이어서 위로를 멀리 동떨어진 미래의 것으로 보나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 용어로, 그리고 재림을 확신케 하는 용어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언이라고 한다(l:3).

요한은 천상의 실체들을 보긴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피안적이거나 거짓이 아니라 사건들과 교회의 현실 상황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그러면서 구속적 완성을 내다본다.

예수 그리스도

계시록에서는 1:1-5에서만 이중적인 칭호가 3번 나오고 나머지에서는 예수라는 말로 나온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계시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인가, 아니면 주격적 소유격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혹은 매개하여 주신)계시라는 말인가? 여기서는 후자이다. 계시의 대상은 속히 될 일이라고 다시 나오기 때문이다.

반드시 속히 될 일

계시의 내용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한다. 이 말씀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단2: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바로 은밀한 것, 후일에 될 일이라는 말을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말에서 반영하고 있다.

일이란 단순히 교회의 핍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그리고 창조와 구속 안에서 그의 목적의 제시로부터 일어나는 논리적인 필요 요건이다.

문제는 ‘속히’라는 말이다. 이 말이 과거주의를 옹호해 주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①갑자기 혹은 일단 지정된 시간이 되면 지체없이란 의미이다.

②이것은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그 일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문제는 선지자들은 연대기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미래는 항상 임박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깝고도 먼 미래를 하나의 캔버스 위에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연대기에는 거의 강조점이 없다. 그러므로 항상 미래를 임박한 것으로 보고 기대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예언의 특징이다(막13:33).

계시의 유래: 하나님-그(예수 그리스도)-천사-요한-그 종들

하나님은 모든 계시의 원천이시다(단2:28,29,45).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열어서 보이시는 계시의 매개자이시다(계5:1-7,6:l,3,5,7,9,12,8:1).

그리고 그 다음의 의미가 또 문제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는 말속에서 지시하신 분이 누구냐는 문제이다.

①그리스도이시면 천사는 22:8에 나오는 그 천사일 것이며, 22:16의 내용도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②하나님이시면 천사는 사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로(1:20,2:l,8)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계시는 요한에게 전달되었다. 이는 모종의 기호에 의하여 알려졌음을 암시한다(계시라는 말이). 그러므로 이것은 상징적이 되며, 이것은 우리에게 미래사의 문자적 계시가 아니라 앞으로 반드시 될 일에 대한 상징적 묘사를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계시는 종들에게 주어진다. 종들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선지자들인데(암3:8,계10:7,11:18) 이 책의 다른 곳에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계7:3,19:5,22:3).

2.계시의 성격::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기의 본 것

요한은 여기에서 자신을 오로지 자기의 본 것을 증거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두 가지의 것이 아니라 동격으로 같은 내용이다. 그리고 요한은 그 성격에 대하여 특히 상징적인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문자적인 것이나 들은 내용의 제시가 아니라 바로 그가 본 것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본다는 점은 상징성과 보는 이의 느낌이 중요시되며,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굉장히 곤란하게 만든다.

3.계시의 목적: 읽고 듣고 행함

요한계시록의 목적이 여기에 등장한다. 그는 예언이라고 하다. 이는 앞일을 예고하는 것 뿐 아니라 의미를 밝히는 것을 의미 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시간적인 요소는 예언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원칙들과 그것들이 다가오는 역사 속에서 예증되는 징후를 밝히며, 어떤 법칙과 그것이 작용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적용의 실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읽는 자는 유대교에서 온 습관으로(눅4:16,행13:15), 옛날에는 잘 읽는 사람이 흔하지 않았으며 후에는 읽는 자가 공직이 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공적으로 읽혀지려는 목적을 가진 서신의 성격이 있다.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본질적으로 본 서신이 주어진 목적이다. 단순히 사건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교훈으로 이 편지가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한다. 요한계시록에는 7번 복이 선언되는데(14:13,16:15,19:9,20:6,22:7,14),그 중의 첫 번째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때라는 말은 위기의 시간이나 결정적인 순간을 알리는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마8:29,막13:33,고전4:5).

2.문안 인사(4-5상)

문안 인사에는 당시 일반적인 순서를 따라서 세 가지 내용이 등장한다.

①발신자: 요한이라고 밝힌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으로 생각된다.

②수신자: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라고 밝힌다. 아시아의 로마 영토에 있는 특정한 일곱 교회의 회중들이 바로 이 서신의 독자이다. 이는 예언적으로 인간 역사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당시의 교회들이다(11절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그 외에도 많은 교회들이 있었으니 우선 7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완전이라는 뉘앙스와, 그 교회들이 가지는 특성들 속에서 전체의 다양성을 대표하기에 다른 교회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아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이 되며,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교회가 생긴 때부터 재림 시까지 모든 교회에게 주는 도덕적 영적인 진전을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③인사: 은혜와 평강-우리 성경에는 이 말이 한글 어순에 따라서 5절에 등장을 하나 원어에는 4절에 등장을 한다. 은혜라는 말은 정상적인 헬라어의 인사이며 평강은 히브리 인사의 솰롬의 종교적 변형을 결합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로 이 단어가 들어오면서 은혜는 인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가리키며, 평강은 그 은혜의 결과로 일어난 영적인 행복을 가리키는 말이다(롬l4:17).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세상에서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서 주어지는가? 은혜와 평강의 삼중 적인 출처를 4절 하반부에서 시작하여 5절 상반부에서 밝힌다.

i.첫째 출처- (계1:4)….”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부터 나온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3:14의 헬라어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문법적으로 ‘아포’ 뒤에는 속격이 나오나 요한은 하나님을 불변적으로 주격으로 써서 문법을 무시하고서라도 하나님의 위엄을 강조하고 있다). 유한한 세상적 존재가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하시는 분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영원하실 뿐 아니라 앞으로 오실 분, 즉 우리와 함께 거하실 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결국 이 말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그런데 단순히 요한은 다른 서신처럼 아버지로부터가 아니라 이렇게 풀어서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교회가 당하는 핍박 밑에 놓여 있을 때 특히 적절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는 영존의 능력으로 역사의 전 과정을 통치하시는 분을 요구한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는 것이다.

ii.둘째 출처-“그 보좌 앞에 일곱 영”

이 부분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등장한다. 특별히 재림과 연결하여 천사들이 등장하며(누가복음9:26) 때때로 성부와 성자와 연결되어서 천사들이 등장하기에(디모데전서5:21) 천사들로 보기도 한다(어떤 이는 유대 전통의 일곱 천사장-우리엘,라파엘,라구엘,미가엘,사라카엘,가브리엘,레미엘 에녹 전서20:1-8,토빗12:15,에스드라후서4:l-으로 보나 유대의 전통을 기독교에 집어넣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살펴야 한다. 계시록에는 3:l,4:5,5:6에만 이 표현이 등장한다. 3:1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고 하는데 “과”라는 말이 접속사가 아니라 보족어라면 위의 내용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일곱 별은 l:20에서 사자라고 하기에). 그러나 4:5과 5:6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하여서 구약성경 스가랴 4:2,10을 반영하며, 거기에 보면 스가랴 4:6에서 여호와의 신으로 등장하기에 성령으로 보아야 하며, 일곱이라는 것은 이사야 11:l의 일곱 가지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 성부와 뒤에 성자가 나오기에 성령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다. 지금 우리의 느낌은 성부께서 멀리 계시지만 그 앞의 일곱 영이신 성령께서 그 능력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이다.

iii.세 번째 출처-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세 번째 출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그리스도에게는 삼중의 칭호를 사용한다.

a.”충성된 증인”,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와 연결되며, 그분은 진리를 증거한 결과 죽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진리의 증인이시다. 이는 불의에 결코 타협할 수 없이 신앙을 유지하고 신실하여야 할 자들에 대한 중요한 모범이다.

b.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골l:18). 시편89:27에 의하면 먼저라는 말은 우선권(고전15:20)의 의미보다는 주권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재 주권적인 통치를 하고 계신다면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충성된 자들도 그의 통치에 참례하는 것이다(계20:4-6).

C.“땅의 임금들의 머리”시편89:27은 여기에도 적용이 되며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그러하시다(빌2:10-11).

그러므로 이러한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평강은 환난과 핍박을 능히 초월하는 것이다.

이 문안 인사는 때가 가까운 때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3.그리스도께 대한 찬미(5하, 6)

요한은 문안 인사에서 은혜와 평강의 출처를 밝히면서 그리스도의 신분(칭호)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끝날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와 현재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일을 생각할 때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과거와 현재 우리를 위하여 하신 그 일에 감사하여서 감격의 찬미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①송영-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6)

여기서 영광은 찬양과 공경이며, 능력이란 권능과 힘을 함축한다. 이 두 단어는 5:13에서처럼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돌리는 송영에 결합이 되어 있다. 그것은 곧 높아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며, 동시에 그렇게 간주하라는 권면이다.

세세토록이라는 말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말로 시간과 영원에 대한 최대의 용어이다.

②송영의 이유

a.”우리를 사랑”(현재분사)-이는 계속되는 끝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과거에 사랑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변함이 없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이다.

b.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씻었다)”(부정과거분사)-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단 한번의 사실로 과거에 일어난 예를 들라면 바로 갈보리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 해방은 그리스도의 피로 산 것이다(5:9).

C.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6)-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결과가 등장한다.

원래 이 말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이다(출19:5,6). 그런데 베드로는 그 제사장 나라라는 말을 교회에도 적용시킨다(벧전2:5,9).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던 말이 신약 교회에게로 옮겨졌다는 것은 요한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감격이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나라라고 불리우는가? 교회가 왕의 통치를 받는 이유인가, 아니면 교회가 왕적인 역할을 다하기 때문인가? 그 대답은 요한계시록5:10에 있다(계20:6,22:5 참조).

(계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라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통치를 받기 때문만 아니라 그 이상 그들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들은 제사장이다. 이것은 교회가 이방인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라는 강조점이 아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신자들은 중보를 필요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감사, 예배, 찬양 등의 제사 직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벧전2:5,롬12:l,히13:15,사61:6 참조).

집합적으로 그들은 왕국이며(그리스도가 모든 세상의 임금들의 통치자로 승귀되심과 관련된 그들의 왕권적 지위를 강조한다) 개별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다(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의 결과로 그들이 하나님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은혜가 찬양을 돌리게 한다.

4.주제의 선포

(계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두 부분을 연결하면서 우리에게 계시록이 보이려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어떻게 되실 것을 선포하고 있다.

(단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12: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막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볼지어다”라고 외친다. 이 말은 헬라어의 감탄사이다. 깜짝 놀라서 외치는 내용이다. 바로 이 부분에 요한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①”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이것은 다니엘 7:13에 의하면 오시는 분이 바로 “인자 같은 이”심을 밝히는 부분이며, 주님은 그 사실을 자신이라고 하신다(막14:62). 여기의 구름이라는 말은 하늘 구름이냐, 아니냐는 것은 관심의 초점이 아니다. 구약의 사상은 구름이란 하나님의 임재와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출13:21,16:10,마17:5,행l:9).

②공개적으로 오신다-“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를 찌른 자들도 보게 된다(슥12:10,요19:37).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된다.

③심판주로 오신다-“땅에 있는 족속들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요한계시록에서 이 사실은 계속 강조 확대된다. 이 애통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하나님의 심판이 드러나면서 일어나는 양심의 가책이다(16:9,11,21참조). 그러면 신앙인은 어떠한가? 그 대답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계시록의 문맥에서 성도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다.

④약속의 보증과 선포-“그러하리라 아멘”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긍정의 형태를 결합한 강조) – 이 대답은 교회의 회답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포로 보인다. 틀림없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 선포는 8절의 서론으로 연결이 된다.

(계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정말로 7절의 말씀이 사실인가? 그러하리라고 하였다. 어떻게 그러할지를 아는가? 그 근거를 8절이 밝힌다. 하나님의 속성상 분명히 그렇다는 것이다.

그분은 어떤 분인가?

①”알파와 오메가”-이것은 헬라어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로 그 사이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즉 그분은 그 사이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권적인 주님이시다.

②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그분이 오셔서 그 모든 일을 이끌어 가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을 틀림이 없다.

③그러면 그분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 -“전능한 자”(만물에 대한 대권을 강조한 말로 보인다)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다가오는 핍박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격려와 권면이다.

제 1막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교회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내용은 두 번째 단락이 시작하는 4:l이 시작하기 전까지이다. 일반적으로 소아시아 7교회에 대한 편지로 알려진 부분으로 그 내용이 집중적으로 2,3장에서 등장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각 교회의 편지 시작 부분에 나오는 내용들은 l:12이하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환상과 연결이 되고 있으며, 자연히 우리의 눈길을 l장의 환상의 부분으로 돌리게 하며 그 l장의 환상의 교훈 밑에서 2,3장의 내용이 정리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의 앞에 요한의 제시를 받을 때의 형편에서 어떤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이 전체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보여주는 중대한 안내판(이정표) 역할을 보게 되는데, 바로 그 상황 자체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된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동시에 그 내용은 요한계시록의 제 1막을 시작하는 서언임을 11,12절 의 연결에서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구조를 머리에 그리면서 l장의 내용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 사데,빌라델비아,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계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계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계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계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제 1막 서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교회

1.서언과 음성

요한은 다시 자신을 설명하는 내용으로부터 본문을 시작한다. 이는 참으로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내용을 등장시키고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요한은 먼저 자신을 형제라고 한다. 형제라는 말은 신자간의 공통적 명칭이었으며, 그들이 같은 신앙적인 공동체의 지체들로서 경험한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다.

그러면 그가 어떤 의미에서 한 형제임을 주장하고 있는가? 그들의 공동적인 세 가지 단어로 표현된 체험 속에서 설명이 되고 있다.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바로 이 내용이 복음 안에서 현재의 우리의 주소를 잘 설명하여 주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신앙인에게 주어진 현상태의 중요한 측면에서 시작이 되어야 한다.

①신앙인의 현주소

ㄱ)나라에 동참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의 십자가와 부활 및 승천에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상태는 현재의 눈에 보이기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벌써 놀라운 변화가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의 나라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골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얻었다는 것은 단순히 나중에 천국에 간다는 의미 이상이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동참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재림하시는 날에 영원하게 상속받게 되는 것이다.

ㄴ)예수의 환난에 동참

여기에서 동시에 따라오는 중요한 문제가 등장한다. 현재의 우리 상태는 여전히 사탄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이 땅에서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은 환난이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 땅위에서 성도들(교회)은 사탄의 미움의 대상이다.

②신앙인의 자세(요한의 권의 측면이 지향하는 방향)

ㄱ)현재의 자세-참음

그러면 신앙인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세하여야 하는가? 피할 길을 찾으라고 하는가? 아니다. 참음에 동참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요한계시록l:3의 지킴의 측면이 등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나타나는 내용도 역시 잘 견디어 예비된 복을 누리라고 한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측면에서 중요한 권고이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1: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ㄴ)요한의 동참의 모법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있었더니”라는 말은 지금 현재의 기록 때는 밧모에 있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말로 보인다.

그러면 그러한 고난이 신앙이 약한 자나 어떤 독특한 자에게만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요한은 자신도 그러한 고난에 동참하고 있음을 말한다.

어떤 고난을 받았는가?-밧모라하는 섬에 있었다고 한다. 밧모라는 섬은 나무도 없고 바위만 있는 화산활동으로 인하여 생긴 섬이다. 그러면 거기에 왜 가는가? 요사이 소아시아에 가는 여행자들은 구경을 하러 가지만 요한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갔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서라고 한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의 환난에 해당하는 내용이며, 그가 밧모에 있다는 사실은 참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바로 거기에서 요한계시록은 시작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환난과 나라의 의미와 참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요한은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로 비교한다면 독특한 일을 위하여 소명을 받은 사건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①부르심의 때-“주의 날에”

요한은 주의 날에 부름을 받았다. 주의 날을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날(요한계시록의 주요한 주제임에 틀림이 없다)로 설명하려는 주장도 있지만 그러나 종교적인 예배를 위하여 구별한 기독교인의 날인 주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안식후 첫날(행20:7,고전16:2)을 주의 날(주일)로 부른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기독교의 안식일이 주의 첫날인 주일에 주일 성수를 하게 된 것은 단순한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이미 사도 시대에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②계시의 방법-“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이 말은 바울이 말하는”성령 안에”있는 성도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롬8:9). 그것은 모든 성도들의 당연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에 의하여 독특한 사건인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된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행11:5,22:17.고후12:l,2). 이러한 경험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③주어진 사명-(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 사데,빌라델비아,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ㄱ)큰 음성의 명령

-그 음성은 요한이 하나님의 영에 실존적으로 열린 상태에서 들린 음성이었다(10).

-그 소리는 요한의 뒤에서 나는 음성이었다.

-그것은 오해할 가능성은 없는 음성이다-나팔 소리같이 분명하고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누구의 음성이었겠는가? 어떤 이는 15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리는 많은 물소리 같기에 천사의 음성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4:l처럼). 그러나 17-19에서 기록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10,11의 음성도 동일하신 분의 음성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ㄴ)방법-“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보내라”

2절(1:18,2:l,8,12,18,3:l,7,14,14:l3,19:9,21:5에도 보는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의 해석을 참조하라.

ㄷ)대상-일곱 교회인데 이는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히 7개의 교회 만이라는 의미보다는 환난과 나라에 동참하여 인내가 필요한 대상들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보인다(실제로 그 당시 7교회는 있었으며-그것은 어쩌면 7 우편 구역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그 내용은 2,3장에서 다룰 것이다). 그러나 그 특징은 분명히 7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에도 적용이 필요하며 오늘에도 주신 것임에 분명하다.

2.계시자의 나타나심-승리자이신 그리스도

요한은 여기서 단순히 계시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 설명이 되듯이 그 자체가 바로 계시였음을 보게 된다.

(계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요한은 자신에게 명령하신 분을 보려고 몸을 돌이켰다. 여기서 돌이키다는 말은 실제로 몸을 돌이킨 것이지 다른 상징적인 의미를 붙이는 것은 곤란하다. 그때에 그는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된다.

①”일곱 금촛대”

일곱 금 촛대는 성막의 하나의 금촛대의 일곱 가지(출애굽기 25:36)모양이라기 보다는 솔로몬의 성전의 촛대의 모양을 생각나게 한다(왕상7:49). 그러나 그 숫자는 7보다 많은 듯하다. 그 의미에 대하여서는 20절(교회라고 한다)에 밝힌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요한의 입장에서 살펴져야 할 것이다.

②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여기에 인자 같은 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다니엘7:13에서 나타나는 용어로,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인자라는 말을 항상 자신에게 사용하셨다. 그러나 이 명칭은 이 땅에서의 예수님을 가리키기보다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분이신 하늘의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래서 인자 “같은”이라고 한다.

바로 그 분이 촛대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주의하라. 먼 하늘에서 방관자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계시는 것이다. 그 의미의 적용은 나중에 설명부에서 다루어 보자.

그러면 그 인자같은 이의 모습은 어떠한가?

(계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계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것이 어떠한 의미인가? 여기서 우리는 Caird의 말을 듣는 것은 지혜로울 것이다. 그는 각 설명적인 구절의 근원을 조사하여서 목록을 만든다는 것은 “무지개를 풀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요한이 이러한 암시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주의를 환기시키고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며….그의 목표는 기억의 연상의 메아리를 울리게 하여……그의 독자들로부터 그가 예언적 황홀경에서 경험한 압도적이고 혼절케 하는 경이에 대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모습에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힘이 든다. 결국 어떤 의미를 붙였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100인100색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해석이 되면서 나타나는 부분에서 우리가 이 구체적인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는지는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는 구체적인 의미를 붙이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3.계시자의 명령

이제 돌아본 요한에게 일어난 반응과 바로 그 인자 같은 이가 내리시는 명령이 따라 나온다.

1]계시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바로 앞에서 본 계시의 모습에서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①(계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맨 먼저 요한의 반응이 나온다. 이 사실은 우리가 위에 본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표현이다. 그것은 그가 본 그분이 바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서 나타났던 현상들이다(사6:5,겔l:28,단8:11,10:9,11). 즉 요한이 본 분은 단순히 땅에 계실 때 고난 당하시던 그러한 주님이 아니라 신적인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나타난 계시의 장면에 대한 요한의 행동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분의 모습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이시다.

②(계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제 요한에게 들려 오는 소리는 “두려워말라!”하시던 주님의 음성이시다(마14:27,17:7). 바로 말씀하시는 분이 처음이요 나중이시다. 구약에서 이 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48:12).

그러면 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제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능력의 하나님이시기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요한에게 알리시고 계신다. 그 이유는 18절에서 계속된다.

③(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8절에서는 그분이 우리들의 그 환난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전에 죽으셨던 분이시다. 그리고 이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살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신 것이다.

바로 그분이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열쇠라는 말은 히브리 개념으로 권세를 가리킨다. 마태복음18:19참조). 그분은 무슨 열쇠를 가지시고 계시는가? 바로 사망과 음부의 열쇠라고 하신다. 물론 여기서 음부라는 말은 마태복음 16:18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바로 음부라는 말은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을 대표하는 말로 등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음부의 영역을 주관하는 권능과 권위를 가진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음부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에서는 6:8,20:13-14에서 등장하는데 꼭 죽음과 연결되어 등장한다. 이는 구약의 스올에 해당하는 단어로 사망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2]계시자의 명령

(계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여기의 기본적인 명령은 기록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보내는 것을 포함하는 명령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11).

그러면 기록할 내용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네 본 것(1장)과 이제 있는 일(2,3장)과 장차 될 일(4장 이하)이라는 세 가지 내용으로 보려고 한다. 특별히 역사적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맨 앞에 나오는 “네 본 것”이란 말은 계시의 또 다른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이미 앞부분에서부터 계속적으로 요한계시록을 통칭하여 본 것이란 말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지 않는가(2,11절)? 그러므로 여기에서 본 것을 또 다른 내용으로 뒤에 나오는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전체의 통일성을 깨뜨리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본 것이라는 말은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요한이 보고 있는 계시(묵시)의 내용들은 바로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앞으로(어떤 의미에서 이미 쓴 것도) 쓸 내용은 바로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이다.

그러면 질문은 이것이다. 어디까지가 이제 있는 일이고, 어디까지가 장차 될 일인가? 그러나 사실상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나눌 수 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본문의 의미는 네 본 것 즉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이라는 말로, 본 것 즉 묵시의 의미가 어디에 연결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이제 뿐 아니라 장차 될 일에도 적용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19절의 의미를 가지고 역사적인 방법으로 나누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노력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는 시도, 우리의 입장에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해석을 힘들게 만든다. 대부분의 내용이 미래에는 물론 과거와 현재에도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3]요한의 본 것(12-16)의 의미

(계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이제 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이 본 계시의 의미를 친히 설명하신다. 그것은 놀랍게도 강조점이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라 그의 손에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왜 일곱 별인가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촛대가 일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이를 비밀이라고 한다. 이는 10:7,17:5,7에도 나타난다. 즉 상징적 환상 자체가 의미가 아니라 내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그 비밀의 내용은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나타내는 비밀(상징)이었고, 일곱 별은 이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한다. 그러면 여기의 교회의 사자(헬라어로는 천사를 가리키는 단어인 앙겔로스이다)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유대교의 회당에서 “회당의 천사”라는 직분이 교회로 전입된 것인가, 아니면 7교회의 감독인가, 7교회에서 요한에게 혹은 요한이 7교회에 보낸 사자(메신저)인가, 교회의 수호 천사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다니엘 10장과 비교하여 보는 것도 재미있다.

요한계시록 1장 다니엘 10장

1:9 나 요한은 10:2 나 다니엘이

1:9,l0 기록 시기와 장소 10:4 기록 장소와 시기

밧모섬, 주의 날 힛데겔강가, 정월 24일

1:13 인자에 대한 묘사 10:5.6 한 사람에 대한 묘사

1:17 요한이 죽은 자같이 됨 10:9 다니엘이 실신 함

1:17 인자가 요한에게 손을 얹다 10:10 한 존재가 손으로 다니엘을 만짐

1:17 두려워하지 말라 10:12 두려워하지 말라

1:19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10:14 말일에 백성들이 당할 일을 말하라

1:20 일곱 교회의 사자들 10:13 군장(천사. 군)

이렇게 비교하면 천사로 보인다. 물론 수호 천사의 개념은 성경에도 나타난다(마18:l0,행12:15). 또한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자들을 별로 나타내는 것은 군장이란 단어와 연결이 되어서 군장은 별로 연결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민24:17 ,마2:2).

그러나 오히려 이는 교회와 동일시된 같은 자격자이거나, 교회의 지배적인 정신을 의인화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어느 누구라기 보다는 바로 교회 자체라고 이해하는 것이 또 다른 상징으로 대표를 통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이 환상의 의미가 무엇을 강조하는 것인가?

먼저 인자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의 의미부터 생각해 보자. 이는 9절의 내용과 연결하면 교회는 그의 나라이지만 동시에 환난을 받는 존재이다. 그러면 그때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인가? 그저 하늘에서 구경이나 하시는 것인가? 아니다. 그의 오른 손 안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위의 18절에 나타난 대로 사망과 음부도 감히 교회를 넘나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환난에서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자가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의 상황 속에서 교회만 내 팽개치시는 분이 아니시라 항상 깊은 관계를 유지하시면서 임재 해 계심을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

이 말은 우리의 위로이면서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조심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즉 인자는 우리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성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시기도 한다.

결국 제 1막에서는 교회의 환난 당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내용으로 신앙인들은 참음으로 그 승리를 누려야 함을 말하고 있다.

메튜 헨리 주석, 요한계시록 01장

1:1 중요 내용과 계시의 순서 (요한 계시록 1:1,2) Ⅰ. 이 책의 유래를 말해 주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모든 성서에 기록된 말씀들은 모두 그렇다. 왜냐하면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며, 모든 것이 그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그의 아들에 관해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가 어떤 원칙과 방법에 의해 그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지를 알기를 원하셨다. 그리하여 교회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는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

2. 이 책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계시이다. 비록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생명과 광명을 그의 안에 가지고 계셨지만,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가르치심을 받으셨다. 비록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크나큰 지혜와 판단력, 그리고 통찰력을 받으셨지만, 그도 인간인고로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원하시는 것을 다 깨닫지는 못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귀한 하나님의 뜻은 신성한 예지로서만 알 수 있고, 하나님은 그의 펴시고자 하시는 고귀한 뜻을 계시에 의해서만 우리 피조물에게 나타내신다. 이 때 인간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담당하시는 이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며,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우리는 오로지 우리 주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3. 이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계시의 놀라운 순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계시하셨으며, 그리스도는 교회들에게 이 계시를 전하기 위해 천사들을 부르셨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들이며 그들은 구원받을 후사들을 위한 구원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종들이다. 이렇듯 모든 주권과 능력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를 드려야 한다.

4. 천사들은 “사도 요한에게 그것을 지시하였다.”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사자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목회자들은 교회의 사자들이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받은 말씀을 교회에 전해 주어야 한다. 요한은 이러한 일을 위해 선택받은 사도였다. 그는 여러 사도들 중에서 그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도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다른 사도들은 그들의 증언을 피로써 보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복음증거를 위해 순교하였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마지막 책이 되었다. 그 때문에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의 사도에 의해 이 말씀이 교회에 전해졌다. 요한은 사랑받는 제자였다. 구약 성서에서의 선지자 다니엘과 같이 요한은 신약 성서에 있어서 “매우 사랑받는 제자였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모든 성서에 기록된 말씀들은 모두 그렇다. 왜냐하면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며, 모든 것이 그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그의 아들에 관해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가 어떤 원칙과 방법에 의해 그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지를 알기를 원하셨다. 그리하여 교회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는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이 책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계시이다. 비록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생명과 광명을 그의 안에 가지고 계셨지만,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가르치심을 받으셨다. 비록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크나큰 지혜와 판단력, 그리고 통찰력을 받으셨지만, 그도 인간인고로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원하시는 것을 다 깨닫지는 못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귀한 하나님의 뜻은 신성한 예지로서만 알 수 있고, 하나님은 그의 펴시고자 하시는 고귀한 뜻을 계시에 의해서만 우리 피조물에게 나타내신다. 이 때 인간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담당하시는 이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며,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우리는 오로지 우리 주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이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계시의 놀라운 순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계시하셨으며, 그리스도는 교회들에게 이 계시를 전하기 위해 천사들을 부르셨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들이며 그들은 구원받을 후사들을 위한 구원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종들이다. 이렇듯 모든 주권과 능력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를 드려야 한다.천사들은 “사도 요한에게 그것을 지시하였다.”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사자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목회자들은 교회의 사자들이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받은 말씀을 교회에 전해 주어야 한다. 요한은 이러한 일을 위해 선택받은 사도였다. 그는 여러 사도들 중에서 그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도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다른 사도들은 그들의 증언을 피로써 보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복음증거를 위해 순교하였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마지막 책이 되었다. 그 때문에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의 사도에 의해 이 말씀이 교회에 전해졌다. 요한은 사랑받는 제자였다. 구약 성서에서의 선지자 다니엘과 같이 요한은 신약 성서에 있어서 “매우 사랑받는 제자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었으며, 복음서 기자요, 예언자요, 사도였다. 이렇게 그는 세 가지의 소임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섬겼다. 야고보는 사도였지만 예언자도 복음서 기자도 아니었다. 마태 역시 복음서 기자요, 사도이기는 했지만, 예언자는 아니었다. 누가는 복음서 기자이기는 했지만, 예언자도 사도도 아니었다. 그러나 요한은 세 가지의 일을 수행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는 요한을 자기의 “종 요한”이라고 부르셨다. 5. 요한은 이 계시를 교회와 모든 종들에게 전할 의무가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종, 다시 말해서 목회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종들과 교회의 회원들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지켜나가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 계시를 교회와 모든 종들에게 전할 의무가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종, 다시 말해서 목회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종들과 교회의 회원들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지켜나가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Ⅱ. 여기서 우리는 속히 이루어져야 할 계시의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우리에게 지나간 일을 말해주지만, 예언자들은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서 설명하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장래의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비쳐 주는 빛 가운데서가 아니면 밝히 볼 수 있다. 오직 그 빛 가운데서만 우리는 바르게 보며, 하나님의 지혜롭고 거룩하신 뜻에 잘 응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한 그대로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면, 그러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미리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예언이 약간 희미하게 예언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성서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보다 더 이에 대해 탐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우리는 이 계시에서 교회의 관리 방법 및 거룩한 섭리의 일반적인 생각들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좋은 교훈의 말씀도 배울 수가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반드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속히” 일어날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조만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Ⅲ. 여기에는 예언의 증거가 있다(2절). 그것은 요한에게 지시된 것이었으며,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즉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다. 구약 성서의 역사적인 책들, 다시 말해서 사사기, 열왕기, 역대기 등은 그 책에 역사가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와 같이 예언의 말씀을 기록한 책들에는 항상 쓴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신약 성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요한이 자기의 첫 편지서에서는 자기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의 말씀을 대해서는 그와 반대로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예언의 말씀의 진실성을 책임지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이름뿐만 아니라, 자기의 소임까지도 밝혀 주었다. 그는 멀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즉 자기가 본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증거 하였다. 그는 목격자였으며, 자기가 본 것을 하나도 숨기지 않았다. 이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은 요한 자신이 발견한 것도, 꾸며서 하는 말도 아니며, 더하거나 뺀 것이 없이, 듣고 본 그대로의 하나님의 기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1:3 사도 요한의 축복 (요한 계시록 1:3-8) 여기서 우리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존중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도 요한의 축복의 말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보다 널리 그리고 보다 특별히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Ⅰ. 예언의 말씀을 읽거나 듣는 모든 사람들을 널리 축복하였다. 이러한 축복은 우리들로 하여금 계시록의 말씀을 연구하도록 격려하여 주며, 그 말씀 안에 있는 많은 분명치 못한 것들 때문에, 그 말씀을 상고하는데 싫증감을 느끼지 않도록 만들어 주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사도 요한은 보다 세심한 주의력과 열의를 가지고 읽는 자들의 수고에 대해 보답을 하고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읽는다는 것은 축복받은 특권이다. 이것은 다른 이방인들은 누릴 수 없었고, 다만 유대인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중요한 이점들 중의 하나였다.

2. 성서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복된 일이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잘 응한 사람들이다.

3. 성서의 말씀을 우리 자신이 직접 읽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읽는 것을 듣는 것조차도 커다란 특권이다. 그들은 그들이 읽는 말씀의 의미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우리들에게 그 말씀을 이해시킬 수 있는 자백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4. 성서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으로만으로는 그리 흡족한 축복이 되지 못한다. 거기 기록된 말씀을 지켜 나가는 생활을 하여야만 한다. 그 말씀들을 늘 염두에 두고, 마음에 깊이 새기는 생활을 하는 것이 실로 축복을 가져다준다.

5. 성서의 말씀이 뜻하는 바를 알고, 그 말씀에 가일층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커다란 관심을 쏟게 된다. 때가 가까이 임했으므로 우리는 그날이 오는 것을 더 세심하게 주시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읽는다는 것은 축복받은 특권이다. 이것은 다른 이방인들은 누릴 수 없었고, 다만 유대인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중요한 이점들 중의 하나였다.성서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복된 일이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잘 응한 사람들이다.성서의 말씀을 우리 자신이 직접 읽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읽는 것을 듣는 것조차도 커다란 특권이다. 그들은 그들이 읽는 말씀의 의미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우리들에게 그 말씀을 이해시킬 수 있는 자백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성서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으로만으로는 그리 흡족한 축복이 되지 못한다. 거기 기록된 말씀을 지켜 나가는 생활을 하여야만 한다. 그 말씀들을 늘 염두에 두고, 마음에 깊이 새기는 생활을 하는 것이 실로 축복을 가져다준다.성서의 말씀이 뜻하는 바를 알고, 그 말씀에 가일층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커다란 관심을 쏟게 된다. 때가 가까이 임했으므로 우리는 그날이 오는 것을 더 세심하게 주시하여야 한다. Ⅱ. 사도 요한은 그의 축복을 특별히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전했다(4절). 일곱 교회들의 이름은 11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교회들에 보내는 뚜렷한 메시지는 각각 2장과 3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요한의 축복이 특별히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전해진 것은 그 일곱 교회들이 모두 밧모라는 섬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 사도 요한은 그 교회들에 대한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사도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1. 이들 교회에 있는 모든 충실한 사도들에게 주는 축복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은혜와 평강,” 거룩함과 위로의 축복이었다. “은혜”라 함은 우리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친절이며, 우리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이다. 그리고 “평강”이라 함은 이러한 은혜에 대한 확신을 말함이다. 진정한 은혜가 없는 곳에 진정한 평강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은혜가 앞서 가는 곳에 평강이 뒤따른다.

2. 이런 축복이 언제 우리에게 오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자. 누구의 이름으로 사도 요한은 교회를 축복하는가? 그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이며, 하나님만이 존경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여야만 한다.

(1)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맨 처음으로 일컬어졌다. 그것은 곧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의 제일 인격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여호와로 묘사되었다. 그것은 전에 있었던 구약 성서의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신약 성서 시대의 교회에서도 그렇고, 또한 앞으로 올 승리하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없으신 분이심을 나타낸다.

(2) 성령은 “일곱 영”이라고 일컬어졌다. 그것은 숫자나,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일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계시는 무한하시며, 완전하신 영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계신다. 이는 그의 영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드신 모든 것을 관리하시기 때문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성령 다음에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 까닭은 요한이 그리스도의 품격에 대하여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를 육체로 나시게 하셨다. 그래서 전에는 그가 땅에 살으셨고 일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그를 볼 수가 있다. 이들 교회에 있는 모든 충실한 사도들에게 주는 축복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은혜와 평강,” 거룩함과 위로의 축복이었다. “은혜”라 함은 우리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친절이며, 우리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이다. 그리고 “평강”이라 함은 이러한 은혜에 대한 확신을 말함이다. 진정한 은혜가 없는 곳에 진정한 평강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은혜가 앞서 가는 곳에 평강이 뒤따른다.이런 축복이 언제 우리에게 오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자. 누구의 이름으로 사도 요한은 교회를 축복하는가? 그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이며, 하나님만이 존경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여야만 한다.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맨 처음으로 일컬어졌다. 그것은 곧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의 제일 인격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여호와로 묘사되었다. 그것은 전에 있었던 구약 성서의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신약 성서 시대의 교회에서도 그렇고, 또한 앞으로 올 승리하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없으신 분이심을 나타낸다.성령은 “일곱 영”이라고 일컬어졌다. 그것은 숫자나,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일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계시는 무한하시며, 완전하신 영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계신다. 이는 그의 영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드신 모든 것을 관리하시기 때문이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성령 다음에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 까닭은 요한이 그리스도의 품격에 대하여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를 육체로 나시게 하셨다. 그래서 전에는 그가 땅에 살으셨고 일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그를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그리스도께 대한 요한의 특별한 기록을 살펴보자(5절).

[1]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이시다.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모든 뜻을 나타내 주시는 증인이었다(요 1:18). 그리스도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맞은 때에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증인이시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을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충실한 증인이시며, 속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속이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부활하신 분이시며, 부활의 처음 열매가 되신 분이시다. 또한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부활시킨 유일하신 분이시며, 같은 능력으로 그의 백성들을 무덤에서 이끌어 내어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어 주실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생명의 소망을 품을 수 있게 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시다. 땅의 왕들은 그리스도부터 그들의 권위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그들의 권세가 제한을 받으며, 그들의 분노가 제재를 받는다. 그리스도에 의해 그들의 생각이 다스림을 받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교회에 대해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만왕의 왕이 되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해 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4] 그리스도는 교회와 백성들의 좋은 친구이시다. 그는 그들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셨으며, 이는 순전히 사랑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랑을 추구하기 위해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는 먼저 “그의 피로써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 죄는 영혼에 대해 죄의 오점과 타락의 오점을 남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 것으로도 이 영혼의 오점을 지울 수가 없다. 그의 피가 아니고서는 이를 씻어낼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그들을 위해, 그들의 용서와 순결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려주셨다.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이시다.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모든 뜻을 나타내 주시는 증인이었다(요 1:18). 그리스도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맞은 때에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증인이시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을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충실한 증인이시며, 속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속이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부활하신 분이시며, 부활의 처음 열매가 되신 분이시다. 또한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부활시킨 유일하신 분이시며, 같은 능력으로 그의 백성들을 무덤에서 이끌어 내어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어 주실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생명의 소망을 품을 수 있게 하여 주셨기 때문이다.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시다. 땅의 왕들은 그리스도부터 그들의 권위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그들의 권세가 제한을 받으며, 그들의 분노가 제재를 받는다. 그리스도에 의해 그들의 생각이 다스림을 받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교회에 대해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만왕의 왕이 되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해 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그리스도는 교회와 백성들의 좋은 친구이시다. 그는 그들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셨으며, 이는 순전히 사랑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랑을 추구하기 위해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는 먼저 “그의 피로써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 죄는 영혼에 대해 죄의 오점과 타락의 오점을 남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 것으로도 이 영혼의 오점을 지울 수가 없다. 그의 피가 아니고서는 이를 씻어낼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그들을 위해, 그들의 용서와 순결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려주셨다. 다음으로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그들을 왕과 제사장으로 삼아”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의롭게 여기시고, 정결케 하심으로 그들을 아버지 하나님의 왕들로 삼으셨다. 말하자면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허락을 받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왕들로서 그들은 세계를 정복하며, 죄를 극복하고, 자기들의 영을 다스리며, 사탄을 정복하고, 또한 기도 중에 능력을 얻는다. 그리고는 세상을 심판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을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다. 이러한 모든 것에 합당하도록 제사장들에게 필요한 자격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영원 무궁하도록 능력과 영광을 주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5] 그는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 “볼지어다. 그가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리로다”(7절). 요한 계시록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고 하는 예언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자주 묵상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믿음과 소망의 눈으로 이를 지켜보아야 한다. 요한은 마치 재림의 날을 본 것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볼지어다. 그가 오시리라. 그것은 너희의 눈으로 보는 것같이 확실한 것이다. 그는 공공연히 오실 것이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이다. “그의 백성들의 눈이 보며, 그의 대적들의 눈, 너희의 눈과 나의 눈, 모든 눈들이 볼 것이다. 그는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 “볼지어다. 그가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리로다”(7절). 요한 계시록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고 하는 예언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자주 묵상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믿음과 소망의 눈으로 이를 지켜보아야 한다. 요한은 마치 재림의 날을 본 것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볼지어다. 그가 오시리라. 그것은 너희의 눈으로 보는 것같이 확실한 것이다. 그는 공공연히 오실 것이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이다. “그의 백성들의 눈이 보며, 그의 대적들의 눈, 너희의 눈과 나의 눈, 모든 눈들이 볼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찌르고도 회개하지 않고,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를 배반함으로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며, 또 믿음이 없는 이 세상에 놀라움을 주기 위해서 오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않은 사람은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복수를 하시기 위해 오신다.

[6] 이러한 그리스도께 대한 설명을 그리스도 자신이 확증하여 주셨다(8절). 우리 주 예수는 여기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같은 영광과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되었다(4절). 그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시다. 모든 것은 그에게서 비롯되었으며, 그를 위해 있다. 또한 그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감히 지우려고 하는 사람은 생명록에서 그 자신의 이름이 도말함을 받는다. 그리스도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자들은 그의 멸시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께 대한 설명을 그리스도 자신이 확증하여 주셨다(8절). 우리 주 예수는 여기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같은 영광과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되었다(4절). 그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시다. 모든 것은 그에게서 비롯되었으며, 그를 위해 있다. 또한 그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감히 지우려고 하는 사람은 생명록에서 그 자신의 이름이 도말함을 받는다. 그리스도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자들은 그의 멸시를 받을 것이다.

1:9 요한에게 보여 준 그리스도의 환상 (요한 계시록 1:9-20)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계시를 보여 주실 때의 영광스러운 환상을 볼 수 있다. Ⅰ. 이런 환상을 본 사람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여기서 요한은 환상을 본 자기 자신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1. 요한의 현재의 위치와 상태를 보자. 그는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였다. 또한 요한은 그 당시 다른 독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당하고, 추방당하고, 또는 옥에 투옥된 사람이었다. 요한이 사도이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형제”였다. 요한은 교회에 있어서의 자기 자신의 권위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대하여 형제라고 하는 관계를 더 자랑하는 것같이 보인다. 가룟 유다는 사도가 될 수는 있었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는 한 형제가 될 수 없었다. 요한의 현재의 위치와 상태를 보자. 그는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였다. 또한 요한은 그 당시 다른 독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당하고, 추방당하고, 또는 옥에 투옥된 사람이었다. 요한이 사도이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형제”였다. 요한은 교회에 있어서의 자기 자신의 권위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대하여 형제라고 하는 관계를 더 자랑하는 것같이 보인다. 가룟 유다는 사도가 될 수는 있었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는 한 형제가 될 수 없었다. 요한은 그들의 동참자였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영적인 교섭과 교제를 선택하여야만 한다. 그는 환난의 동참자였다. 박해를 받는 하나님의 종들은 어느 누구도 혼자서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환난을 함께 받고 있다. 그는 참음의 동참자였다.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거나 혹은 고난을 당하거나, 서로가 위로하여, 고통과 기쁨을 같이 나누어 가졌다. 성도들과 같이 그런 비상한 인내를 우리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당당히, 떳떳하게 그와 같은 시련에 맞설 수 있다. 그는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였다. 요한은 주로 말미암아 교회와 세상을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왕다운 능력을 주장하고, 또 계시의 말씀에 대하여 침해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대하고, 계시록의 말씀을 지지하고, 신봉함으로써, 예수의 환난과 참음에 동참하려고 고난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설명으로 요한은 자기의 현재의 위치를 시인했으며, 그들의 공동 소유인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바에 따라,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그들에게 당부하였다. 2. 요한이 환상을 본 그 장소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는 “밧모섬”에 있었다. 그는 누가 자기를 그런 곳으로 추방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밧모섬은 에게해에 있는 섬으로 알려져 있다. 그 섬은 시클라데스(Cyclades)라고 하는 군도 중의 한 섬이었으며, 둘레가 약 35마일 가량 되는 섬이었다. 요한이 환상을 본 그 장소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는 “밧모섬”에 있었다. 그는 누가 자기를 그런 곳으로 추방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밧모섬은 에게해에 있는 섬으로 알려져 있다. 그 섬은 시클라데스(Cyclades)라고 하는 군도 중의 한 섬이었으며, 둘레가 약 35마일 가량 되는 섬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금된 상태하에서도, 악을 행한 자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임마누엘이시며, 구세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고난당한다는 사실에서 사도 요한은 크게 위안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받을 만한 고난이었다. 영광의 영광 하나님의 영은 이러한 핍박받는 사도의 머리 위에 머물러 계셨다. 3. 그가 이런 환상을 본 날과 때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것은 “주의 날”이었다. 이날은 그리스도께서 성찬식을 “주님의 만찬”이라고 하듯이, 그 자신을 위해 구분하고 성별해 놓으신 주님의 날이었다. 이날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고 지키는 한 주간의 첫날이다. 그를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하는 우리 무리들은 그의 안식일에 그를 경배해야 한다. 주님께서 그날을 제정하셨다. 그 안에서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4. 이 때에 요한의 영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가를 볼 수 있다. 그때 요한의 영은 “성령 안에 거하고 있었다. ” 요한은 환상을 보았을 때만이 아니라, 환상을 보기 전에도 놀랬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성스러우시며 인자하신 영향을 받아서, 성스럽고도 귀중한 영적인 상태 아래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영혼이 자기의 고귀한 계시를 알도록 해 주시기 위해 성령의 감화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주의 날에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이 육적인 것에서부터 멀리 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영적인 것과 교제가 잘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한다. 그가 이런 환상을 본 날과 때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것은 “주의 날”이었다. 이날은 그리스도께서 성찬식을 “주님의 만찬”이라고 하듯이, 그 자신을 위해 구분하고 성별해 놓으신 주님의 날이었다. 이날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고 지키는 한 주간의 첫날이다. 그를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하는 우리 무리들은 그의 안식일에 그를 경배해야 한다. 주님께서 그날을 제정하셨다. 그 안에서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이 때에 요한의 영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가를 볼 수 있다. 그때 요한의 영은 “성령 안에 거하고 있었다. ” 요한은 환상을 보았을 때만이 아니라, 환상을 보기 전에도 놀랬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성스러우시며 인자하신 영향을 받아서, 성스럽고도 귀중한 영적인 상태 아래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영혼이 자기의 고귀한 계시를 알도록 해 주시기 위해 성령의 감화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주의 날에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이 육적인 것에서부터 멀리 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영적인 것과 교제가 잘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한다. Ⅱ. 사도 요한이 성령 안에서 들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소리가 있었다. 그때에 요한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지금부터 계시하는 것을 기록하라고 명하시고, 즉시 이 말씀을 이미 언급한 바가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보내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이처럼 구원의 으뜸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는 나팔 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영광된 그의 모습을 주시하라고 사도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Ⅲ. 그가 본 것에 대해 설명한 것이 또 있다. 누구의 소리인지, 또 어디서부터 들려 오는 소리인지, “그 소리를 듣기 위해 그가 몸을 돌이켰을 때”에 매우 놀라운 광경이 그의 앞에 전개되었다. 1. 요한은 1장 마지막 절에서 설명된 바와 같은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그것은 곧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촛대로 비유되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의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초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빛이며, 그의 복음이 우리의 등불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으로 빛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어 준다. 교회는 금촛대이다. 왜냐하면 순금에 필적할 수 있으리만큼 교회가 귀중하며, 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사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도 그래야 한다. 그 빛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밝은 빛을 비추어야 한다.

2. 요한은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 세상 날 때까지, 교회를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면서, 그의 교회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교회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영이시다.

(1) 여기서 우리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1] 그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셨다. 그것은 정의와 명예를 나타내는 제사장과 왕의 옷이다.

[2] 그는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다. 그것은 그의 백성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대제사장의 흉배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자로서의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3]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았다.” 그는 고대의 사람이었다. 그의 서리같이 하얀 머리털은 후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면류관을 뜻하는 것이었다.

[4] “그의 눈은 불꽃같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찌르며, 그들의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대적들에게는 공포심을 가지게 하는 눈이다.

[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 그것은 튼튼하고, 견고하며, 자신의 유익을 유지하며, 자기의 대적들을 굴복시켜 가루처럼 만드는 것을 뜻한다.

[6]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다.” 그것은 찬 곳으로 흘러나오는 많은 냇물을 말한다. 그리하여 가까이 있는 자나 멀리 있는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신다. 이처럼 그의 복음의 말씀은 무한한 지혜와 지식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물줄기와 같다.

[7]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일곱 교회의 목사들이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빛과 권세를 받았으며, 주님의 보호를 받아 지탱해 나가고 있다.

[8] “그 입에서 좌우에 검이 나오고”있다. 그리스도의 검은 좌우편에 날이 서서, 한 편 상처를 입히며, 동시에 치료를 하고 죄는 좌우로 쳐서 멸망시키고 있음을 뜻한다.

[9]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의 얼굴에서 비취는 광채의 밝기가 너무나 세고 찬란한 것이었다.

(2)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도 요한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17절). 그는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요한 자신이 비록 전부터 다소 주님과 친숙했다고는 하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내는 영광과 광채가 너무나 찬란하매, 그가 압도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뵌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베풀어주신 정중한 친절이 있다. “그가 오른손을 그에게 얹으셨다”(17절). 주께서 요한을 일으켜 주셨다. 주님은 크신 능력을 가지고 요한을 꾸짖지 않으셨다. 오히려 요한에게 힘을 북돋아 주셨으며, 그에게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1] 우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두려워 말라.” 그는 그의 제자가 노예처럼 두려워하는 것을 쫓아 버려 주셨다.

[2] 요한에게 나타나신 이가 요한에게 첫 번째는 그의 신성에 대해 “처음이요 나중”임을 알려 주셨다. 두 번째로는 “내가 전에 죽었노라”고 하심으로 그가 앞서 당한 고난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그의 제자들이 본 것과 같다. 세 번째로는 그의 부활과 생명에 대해 “나는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다”고 하심으로, 그가 죽음을 정복하시고 무덤 문을 여셨으며, 영원한 생명의 동참자가 되셨음을 알려 주셨다. 네 번째로는, 그의 직무와 권위에 대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고 하셨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닫으면 열 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는 열쇠이다.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는 사망의 문을 여실 수도 있고, 행복과 자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실 수도 있다. 그는 만민의 심판자이시며, 그의 선교에 대해서는 아무도 항고할 수가 없다. 다섯 번째로, 그가 원하시고 계신 뜻을 알려주기 위해,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다. 여섯 번째로는, 일곱 별의 의미에 대해 “그것들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일곱 촛대에 대해서는 “그것들은 일곱 교회”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그들에게 특별한 소식을 전하고자 하신다.

요한은 1장 마지막 절에서 설명된 바와 같은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그것은 곧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촛대로 비유되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의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초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빛이며, 그의 복음이 우리의 등불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으로 빛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어 준다. 교회는 금촛대이다. 왜냐하면 순금에 필적할 수 있으리만큼 교회가 귀중하며, 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사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도 그래야 한다. 그 빛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밝은 빛을 비추어야 한다.요한은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 세상 날 때까지, 교회를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면서, 그의 교회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교회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영이시다.여기서 우리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그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셨다. 그것은 정의와 명예를 나타내는 제사장과 왕의 옷이다.그는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다. 그것은 그의 백성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대제사장의 흉배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자로서의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았다.” 그는 고대의 사람이었다. 그의 서리같이 하얀 머리털은 후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면류관을 뜻하는 것이었다.”그의 눈은 불꽃같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찌르며, 그들의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대적들에게는 공포심을 가지게 하는 눈이다.”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 그것은 튼튼하고, 견고하며, 자신의 유익을 유지하며, 자기의 대적들을 굴복시켜 가루처럼 만드는 것을 뜻한다.”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다.” 그것은 찬 곳으로 흘러나오는 많은 냇물을 말한다. 그리하여 가까이 있는 자나 멀리 있는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신다. 이처럼 그의 복음의 말씀은 무한한 지혜와 지식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물줄기와 같다.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일곱 교회의 목사들이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빛과 권세를 받았으며, 주님의 보호를 받아 지탱해 나가고 있다.”그 입에서 좌우에 검이 나오고”있다. 그리스도의 검은 좌우편에 날이 서서, 한 편 상처를 입히며, 동시에 치료를 하고 죄는 좌우로 쳐서 멸망시키고 있음을 뜻한다.”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의 얼굴에서 비취는 광채의 밝기가 너무나 세고 찬란한 것이었다.그리스도의 모습은 사도 요한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17절). 그는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요한 자신이 비록 전부터 다소 주님과 친숙했다고는 하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내는 영광과 광채가 너무나 찬란하매, 그가 압도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뵌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베풀어주신 정중한 친절이 있다. “그가 오른손을 그에게 얹으셨다”(17절). 주께서 요한을 일으켜 주셨다. 주님은 크신 능력을 가지고 요한을 꾸짖지 않으셨다. 오히려 요한에게 힘을 북돋아 주셨으며, 그에게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우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두려워 말라.” 그는 그의 제자가 노예처럼 두려워하는 것을 쫓아 버려 주셨다.요한에게 나타나신 이가 요한에게 첫 번째는 그의 신성에 대해 “처음이요 나중”임을 알려 주셨다. 두 번째로는 “내가 전에 죽었노라”고 하심으로 그가 앞서 당한 고난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그의 제자들이 본 것과 같다. 세 번째로는 그의 부활과 생명에 대해 “나는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다”고 하심으로, 그가 죽음을 정복하시고 무덤 문을 여셨으며, 영원한 생명의 동참자가 되셨음을 알려 주셨다. 네 번째로는, 그의 직무와 권위에 대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고 하셨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닫으면 열 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는 열쇠이다.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는 사망의 문을 여실 수도 있고, 행복과 자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실 수도 있다. 그는 만민의 심판자이시며, 그의 선교에 대해서는 아무도 항고할 수가 없다. 다섯 번째로, 그가 원하시고 계신 뜻을 알려주기 위해,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다. 여섯 번째로는, 일곱 별의 의미에 대해 “그것들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일곱 촛대에 대해서는 “그것들은 일곱 교회”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그들에게 특별한 소식을 전하고자 하신다.

요한계시록 1-9장 (주석집)

이 책은 한국 교회의 목회자와 설교자를 위해 저술된 주석이다. 또한 신학도들과 요한계시록을 깊이 있게 공부하기를 원하는 평신도들도 염두에 두었다. 이미 해외에서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이 적지 않게 출판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상황과 목회자를 염두에 두고 저술된 주석은 여전히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늘 설교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목회자들이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설교에 적용할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강단에서 더 풍성하게 외쳐지기를 원하신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1:3). 요한계시록은 설교자가 가장 기피해 온 책에 속한다. 정통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이 소홀히 다루어지자 사이비 신흥 종교가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순진한 신도를 미혹하여 왔다. 이러한 차제에 본서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학문적 토론이나 학자의 논의는 가능한 한 간략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하였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간결하고 명료하게(brevitas et facilitas)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술하였다. 필자는 가능한 한, 이전에 출판된 내용과 중복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수록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요한계시록으로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성경의 다른 책들도 제대로 주석하기가 쉽지 않지만 요한계시록은 더욱 어려운 것 같다. 두꺼운 벽에 부딪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수 없이 많았다. 그 누가 요한계시록을 수월하게 주석할 수 있을까? 아직도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많은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을 연구하고 주석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요 특권임에 틀림없다.

요한계시록의 구절과 단어 하나 하나를 연구하며 받는 은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주석을 쓰며 감격에 겨워 울기도 하고 전율하기도 하며 두려움과 안타까움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요한계시록은 참으로 매력적인 책이며 엄청난 힘이 있는 책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요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분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어린 양이 영광의 왕인 것을 보여 주는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영적인 실재와 초월적 세계를 본다는 것은 세상 어디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큰 기쁨이다. 주석을 쓰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쓸 수 없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였으며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이 부족하나마 한국 교회 강단을 더욱 풍성하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한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무엇보다도 두꺼운 분량의 책을 출판하도록 허락하신 킹덤북스(Kingdom Books) 대표 윤상문 목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목회자에게 보다 더 유익한 주석이 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방광덕 목사님, 정광욱 목사님께 감사한다. 부족한 저서에 분에 넘치는 추천사를 써주신 박형용 총장님, 김상복 총장님, 권성수 교수님, 류호준 교수님, 정창균 총장님, 변종길 교수님, 문병구 교수님, 송태근 목사님, 진재혁 목사님, 정광욱 목사님, 채영삼 교수님, 허주 교수님에게 어떻게 감사의 뜻을 다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함께 기도해 온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멘토 그룹(HMS) 학우들, 요한계시록을 수강하며 함께 토론에 참여한 합신의 학우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싶다. 분주한 학업 중에 자료를 찾고 정리한 조교 박성전 전도사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 책의 저술과 출판을 위해 묵묵히 기도로 후원해 주신 여러 기도의 동역자들, 박치원 장로님, 류효근 목사님, 이기균 교수님, 필그림 동역자님들, 배부일 집사님과 손은희 집사님에게 깊이 감사 드린다.

늘 둘째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에게도 감사한다. 나의 은사요 멘토인 카슨 박사님께 감사 드린다. 이 책이 출판되는 것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셨고 부족한 제자를 자랑스러워 하셨다. 아빠를 격려해 주는 사랑하는 하은이와 하진이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주석과 견해를 들어 주고 조직신학자로서 비평해 주는 아내 한상화 박사의 끊임없는 격려와 지원이 없었다면 이 책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Soli Deo Gloria!

추천사 … 6

저자 서문 … 21

약어 일람표 … 24

제1부 요한계시록 서론

1. 저자 … 33

2. 연대 … 38

3. 요한계시록의 장르 … 41

4. 요한계시록 해석학파 … 55

5. 요한계시록의 구약 인용 … 64

6. 요한계시록의 상징 … 70

7.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상황 … 79

8. 요한계시록의 구조 … 88

제2부 본문 주석 1장 1:1-8, 프롤로그 … 95

1. 1:1-3, 도입

2. 1:4-6, 인사와 송영

3. 1:7-8, 핵심 주제

2장 1:9-20, 영화로우신 그리스도 환상 … 137

3장 2:1-3:21, 일곱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 … 183

1. 2:1-7, 에베소 교회에 주시는 말씀

보론: “이기는 자(Tw|/ nikw/nti)”에 대하여

2. 2:8-11,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말씀

3. 2:12-17, 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말씀

4. 2:18-29, 두아디라 교회에 주시는 말씀

5. 3:1-6, 사데 교회에 주시는 말씀

6. 3:7-13,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

7. 3:14-22,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

4장 4:1-5:14, 천상의 보좌 환상과 경배 … 329

1. 4:1-1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경배

2. 5:1-14,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경배

5장 6:1-19:10, 일곱 심판 시리즈(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 406

1. 서론

1) 요한계시록 6-18장의 문학적 구조

2)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상관 관계 2. 6:1-17, 첫째 인-여섯째 인 재앙

1) 일곱 인 심판과 감람산 강화(마 24장; 막 13장; 눅 21장)

2) 일곱 인 심판 요약: 6:1-17과 8:1-5

3) 6:1-11, 첫째 인-다섯째 인

4) 6:12-17, 여섯째 인 3. 7:1-17, 제1막간(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이 많은 천상의 성도들)

1) 7:1-8,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

2) 7:9-17, 천상의 큰 무리의 경배

3) 8:1-5, 일곱째 인

4) 8:6-9:21, 첫째 나팔-여섯째 나팔

(1) 8:6-8:13, 첫째 나팔-넷째 나팔

(2) 9:1-11, 다섯째 나팔(메뚜기 재앙)

(3) 9:12-19, 여섯째 나팔(둘째 화)

(4) 9:20-21, 결론

참고문헌 … 569

요한계시록으로 박사 학위를 받으신 김추성 교수가 세계적인 학자들의 저술들을 섭렵하고 비평하면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가장 탁월한 주석을 한국 교회에 선사해 기쁘게 생각한다. 그동안 요한계시록의 난해한 이슈들에 대한 다양한 학설들이 때때로 우리를 혼란케 하여 요한계시록의 정수를 맛보지 못하도록 혼돈을 주었지만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이 책은 신학자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균형 있고 종합적인 시각을 갖도록 안내한다. 학문적으로 검증되고 입증된 본서가 요한계시록을 바로 이해하여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체험하며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큰 유익을 줄 것이라 확신하며 필독을 권한다.

김상복 박사(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 횃불트리니티신대원대학교 명예총장)

김추성 교수의 요한계시록 주해서는 신학적, 학문적, 실용적인 면에서 가장 탁월한 주석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본서를 통해 요한계시록을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구속역사 진행과 완성을 바로 알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소원한다.

박형용 박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교수)

김추성 교수님의 『요한계시록 주석』은 신학자 목회자 신학생 평신도들이 다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신학적인 논쟁의 미로에 갇히지 않고 미로에서 빠져 나와 환한 출구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책입니다. 특별히 김 교수님은 천재적인 신학자 번 에스 포이쓰레스(Vern S. Poythress) 밑에서 요한계시록을 직접 배운 제자로서 이 책을 썼기 때문에, 제가 기쁜 마음으로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권성수 박사(대구동신교회 담임목사)

ISBN 9791158861322

쪽수 600쪽

판형 152*225 (mm)

[요한계시록 1장 설교말씀] “촛대 사이의 인자”(계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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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1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촛대 사이의 인자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촛대 사이의 인자”(계 1:9-20)

♣명제: 촛대 사이의 인자가 이 시대의 교회를 통치하신다.

♣목적: 나는 지금 인자의 통치함을 받고 있는 성도인가 깨달아야 한다.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인자는 구약의 성막을 연상하게 합니다. 성막에서 흰 옷을 입고 촛대 사이에 있는 자는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예수님을 계시하고 있는데 그곳에 다니시는 인자는 바로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모든 교회를 주님께서 다니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앞으로 될 일을 주님으로부터 명령을 받게 됩니다.

(계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 요한은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에 의해 밧모 섬에 유배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고난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촛대 사이의 인자를 증거 하다가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시대에 고난이 있다고 해서 복음을 버려서는 안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전파해야 합니다.

‘밧모’는 פטיש(팟티쉬 6360) 탕탕치다. 라는 어원에서 유래하여 매질, 방망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 섬에 유배되어 세상의 황제에 의해 탕탕 망치로 방망이로 맞듯이 매질을 당한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밧모 섬에서 보내지만 예수님은 요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소망을 주시고 있습니다. 요한이 유배에서 풀려난 것이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네르바 황제 때 풀려나게 됩니다.

(계 1:10-11)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날은 바로 예수님을 만난 날입니다.

‘감동하여’ γινομαι(기노마이 1096) 생겨나다, 만들어지다, 행해지다, 일어나다, 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자신감이 생겨났습니다. 유배지에서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성령님께서는 감동을 주고 은혜를 주어 다시 새 힘을 받게 한 것이며 앞으로 펼쳐나갈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이 감동을 받은 사실이 있었으며 이 사건은 과거에 이미 있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앞으로 환난과 핍박받고 있는 교회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들은 소리는 나팔소리였습니다. 이 소리는 바로 복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나팔’ שופר(쇼파르 7782) 나팔, 뿔 나팔,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שפר(샤파르 8231) 빛나게 되다, 아름답게 되다, 기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은 바로 주님의 복음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마다 죽었던 자들이 빛 가운데로 나와 빛나게 되며 영혼이 아름답게 변하고 심령이 기쁘게 됩니다. 복음 외에는 나의 영혼을 빛나게 할 것이 없으며 나의 상한 심령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호수아 군대는 여리고성을 무너트릴 때에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 복음의 나팔은 견고한 성을 무너지게 합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도 복음의 나팔소리에 변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의 일곱 교회에 보낼 메시지를 주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상들을 편지에 적어 보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교회의 통치자입니다. 그럼 나를 통치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교회에서 주님은 나에게 메시지를 말씀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계 1:12-13)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요한이 몸을 돌이켜 자신에게 말한 음성을 알려고 할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촛대’ מנורה(메노라 4501) 등잔대, 등잔,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베틀 채, 속박, 멍에, 라는 뜻에서 온 것입니다. 또한 ניר(니르 5214) 경작하다, 기경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촛대는 성막에서 어둠을 밝혀주는 도구입니다. 이 시대의 어둠에 갇힌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죄에 속박되어 죽어 있는 자들의 멍에를 끌러주고 베틀 채와 같은 주님의 고난이 나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나는 세상의 추하고 더러운 곳에서 새롭게 복음으로 인해 경작되어 땅을 갈아 업어 기경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새롭게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이 역할을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촛대를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옷을 입고’ ενδυω(엔뒤오 1746) 옷을 입히다, 옷을 입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볼 때 성막에서 사역하는 대제사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흰 옷을 입고 사역하는 대제사장의 모습입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모든 옷을 벗고 에봇으로 갈아입고 성막에 들어가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 십자가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옷을 입었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전한 옷을 입으신 것입니다. 또한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골고다 언덕입니다.

이렇게 죽으심으로 많은 죄인들이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이 옷을 입은 것은 이미 예정된 사건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 옷을 입으시므로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역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은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옷을 입으신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죽은 영혼들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옷을 입으셨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인자는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의 복음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진리의 복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오직 진리밖에 없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나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항상 간직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꼭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사명입니다.

(계 1:14-15)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인자의 모습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다고 했습니다. 흰머리털은 대제사장이 쓰는 관을 상징합니다. 그 관에는 יהוה קדש(아도나이 코데쉬)‘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상은 오직 천국복음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룰 생각밖에 없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의 눈이 불꽃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판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제사장의 가슴에는 우림과 둠밈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판결 흉패입니다. ‘흉패’ חשן(호셴 2833) 내포하다, 번쩍이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순간적인 판단을 하셔도 잘못된 판단이 없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림’ אורים(우림 224) 밝다, 빛나다, 비추다, 영화롭다, 광채 나다, 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가슴에 흰 돌을 넣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림입니다. 이것을 판결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밝게 비추이게 되고 빛나며 영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죄가 없다고 판결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완전하게 죄 씻음 받은 자들은 우림의 판결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사람은 오직 세상에서 주님을 나타내며 주님을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둠밈’ תמים(툼밈 8550) 사망하다, 그치다, 황폐되다, 멸망하다, 진멸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돌은 검은 돌입니다. 대제사장의 판결에서 검은 돌이 나오면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죽게 됩니다. 죄가 있다고 판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멸망당하고 진멸되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판결을 내리실 때에 율법적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검은 돌의 판결을 받아 영원히 사망의 불 못으로 던져지고 영혼이 황폐하여 멸망당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둠밈은 완전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완전하게 죽음으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인자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과 같다고 했습니다. ‘단련한’ צרף(차라프 6884) 단련하다, 연단하다, 청결하다, 순전하다, 라는 뜻입니다. ‘발’ מרגלה(마르겔라 4772) 비방하다, 모함하다, 허물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발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비방하며 모함하고 허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에 오르실 때에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비방했던 것입니다. 그중에 나는 어떻습니까? 바로 나도 주님을 믿기 전에는 주님에 대해서 욕하고 비방했던 인물입니다. 이런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연단받아 선택된 모든 백성들을 청결하게 하고 순전하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빛난 주석과 같은 발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에 오르신 그 발 나를 위해 대못을 발에 박히시고 나를 순결하게 하신 그 발입니다.

(계 1:16-17)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주님께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계시고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교회에 복음을 전파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 선 검은 바로 천국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세를 떠오르게 합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에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해와 같은 천국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굴에서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나도 주님의 천국복음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이 빛을 받을 때에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권위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바로 속죄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에 속죄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오른손을 주님이 얹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주님의 영광과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계 1:18-19)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전에 죽었다가 지금은 살아 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분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어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계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깨닫고 알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계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주님이 풀어주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곱 별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의 목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은 오직 주님이 전파하셨던 천국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셨던 비밀의 계시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모든 교회의 목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현재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성도로 섬기는 자도 있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인자를 증거 해야 합니다. 그분이 교회를 통치하시며 치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와 하나가 되어 있습니까? 세상과 결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복음을 전파하시는 주님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오직 천국복음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학문을 전하는 교회입니까? 우리가 이 시간 증명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에도 주님은 현재 이 교회를 거니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예배를 보시고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예배 중에 거니시고 있는데 나의 심령을 모두 보고 계시는데 어떻게 내가 주님을 떠날 수 있으며 이 시간을 헛되게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까? 이 시간을 오직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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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설교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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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1장 설교말씀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 1:1-8)

♣명제: 계시록은 닫혀 있는 책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보여주는 계시의 책이다.

♣목적: 계시의 말씀을 통해 앞으로 될 일들을 깨닫게 된다.

요한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를 당하고 있을 때에 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당하고 고통스러워 소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소망의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보고 앞으로 될 일들에 대해서 보게 되었으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계시의 말씀을 통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닫혀 있는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밝히 열어 주신 책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시’ αποκαλυψις(아포칼륍시스 602 NNFS) 폭로, 덮개를 벗김, 드러남, 계시, 라는 뜻입니다. 계시는 예수님께서 이미 폭로하시고 덮개를 벗겨내듯이 하나님의 모든 의도를 벗겨내주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것은 계시록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너희들에게 모두 밝혀 주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계시록은 닫혀 있는 책이고 이것을 자신들만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미 주님께서 밝혀 놓으신 계시의 말씀을 누가 해석한다는 것입니까? 이단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시려고’ δεικνυμι(데이크뉘미 1166) 보여주다, 설명하다, 증명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앞으로 될 일들을 보여주시고 설명하시며 증명해 주시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말씀을 아무 때나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사도 요한을 통해 말씀으로 우리에게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이 계시는 이미 과거에 밝혀진 말씀들이고 계시록의 사건들은 이미 계획되어 이루어질 일들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계시의 말씀을 주님께서 자발적이며 능동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만 보아도 계시록은 닫혀 있는 책이 아니라 훤히 열려 있는 책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알게 하신 것이라’ σημαινω(세마이노 4591) 지시하다, 알리다, 나타내다, 선언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숨기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를 보내 종들에게 훤히 알 수 있도록 지시하고 알리고 나타내어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시의 말씀을 알게 하는 때가 있었으며 깨달았던 순간이 실제적으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선택된 백성들에게는 알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능동적으로 지시하신 것입니다. 계시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바로 내가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중에 바로 나를 깨닫게 하십니다. 내가 구원받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계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요한은 자신이 본 모든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본 십자가의 사건을 증거 해야 합니다. 계시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증언하였느니라’ μαρτυρεω(마르튀레오 3140) 증언하다, 증거 하다, 선언하다, 증인이 되다, 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증언자가 되어 세상에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증거 하며 선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증언이 과거에 이미 실제적으로 있었습니다. 이 증거는 확실한 증거이며 하나님께서 준비한 증거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증거를 능동적으로 전파해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바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데 1:1로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럼 무엇을 전하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십자가 복음의 계시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올수록 계시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데 모두 현재시제를 쓰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렇게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능동태를 쓰고 있는 것은 자발적으로 이렇게 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온전하게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읽는 자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읽고 바르게 전파하는 자들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듣는 자와 지키는 자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에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는 바로 단수로 전하는 것이고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은 복수로 받아 많은 사람들이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록한’ γραφω(그라포 1125) 기록하다, 쓰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무 때나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선택된 백성들을 위해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들은 모두 완벽하게 기록된 것들이며 만세전에 이미 기록해 놓으신 것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번복하지 않으시고 한 번으로 끝난 기록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사람이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써 놓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라도 어길 수 없고 지울 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기록해 놓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받은 백성들을 위해서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들에게 지키고 행하여 복을 주시기 위해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남녀노소 누구라도 하나님 백성 안에 있는 자들이 지키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계시의 말씀을 모두 보고 듣고 깨닫고 난 후에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주님의 편지를 쓰게 됩니다. 일곱 교회는 바로 지상의 완전한 일곱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숫자 7은 완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지상의 일곱 교회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시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직접 나에게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무엇입니까? 바로 온 세상에 보냄을 받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온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세계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성령의 임재가 충만해야 합니다. 일곱 영은 완전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완전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계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교회는 무엇을 전파해야 합니까? 바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교회에서 생명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영혼은 절대 살아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해방하시고’ λυω(뤼오 3089) 풀다, 해방하다, 석방하다, 취소하다, 폐지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자신이 피를 흘려주심으로 나의 죄를 해방시켜주시고 죄악의 감옥에서 석방시켜 주셨으며 나의 모든 죄악의 고통을 취소시키시고 주님의 피로 완전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을 폐지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때나 죄악에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하게 받아들일 때에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 해방의 사건은 이미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작정하신 일이며 선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준비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사 나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주님께서 나를 위해 직접 십자가에 자발적으로 달리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크신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고 죄악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분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죽을 자가 누구입니까?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죽을 자는 바로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주님께 모든 존귀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계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님께서는 계시의 말씀을 주시면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으며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 믿지 못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이라도 구름을 타고 왔다면 믿겠지만 이런 사실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이성으로 생각해도 구름을 타고 사람이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어진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시리라’ ερχομαι(엘코마이 2064) 오다, 나타나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이 땅에 구름을 타고 나타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주님은 반드시 나타나실 것을 실제적 사건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과거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주님의 임재는 바로 지금 현재에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도적같이 임하는 것을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은 능동적으로 오시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구름을 타고 오시는데 이미 죽었던 자들이 영화의 몸으로 부활하여 함께 오시는 것입니다.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 주님이 많은 자들을 데리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오시는 목적은 바로 이 땅에 살면서 구원받고 선택된 자들을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주님께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구원받은 자 한 사람씩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내가 되어야 합니다. 이곳에 들어가지 못하면 나는 영원한 지옥의 불 못에 던져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확실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계시의 말씀을 서론에서 주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처음과 나중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시작도 하나님이 하시고 끝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을 서론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계시로 미리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메가라’에서 ‘라’ ειμι(에이미 1510) 나는 ~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은 바로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이 실제적 사건으로 있었으며 현재시제를 쓰고 있는 것은 주님은 지금 당장 현재에 항상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능동적으로 자신 스스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바로 단수 1인칭을 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단 한 분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구름을 타고 나를 데리러 오십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찬 일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데리러 오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시록은 닫혀 있는 책이 전혀 아닙니다. 이 책은 주님께서 이미 밝히 드러내 주신 책이며 다 가르쳐 주신 책입니다. 이제 이단의 계략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단은 숨겨진 책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들만 이 책의 비밀을 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런 이단의 교리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은 나에게 계시해 주셨고 이제 계시록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자녀에게 비밀로 숨겨 놓고 풀지 못하는 문제를 내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또한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주님이 오시는 것을 비밀로 숨겨 놓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이런 하나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계시로 가르쳐 주셨는데 인간의 무지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엉뚱하게 해석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주님의 계시의 말씀을 똑바로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확실히 배우고 깨달아서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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