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1-10절 | 앉은뱅이가 걷다 (사도행전 3:1-10)_주일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160925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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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가 걷다 (사도행전 3:1-10)
주일예배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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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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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1절-10절 큐티: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

사도행전 3장 1절-10절 본문

베드로와 요한이 못 걷게 된 이를 고치다

(행 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 와 요한 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 3: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 3:3) 그가 베드로 와 요한 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 3:4) 베드로 가 요한 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 3: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 3:6) 베드로 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행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사35:6 , 행14:10

(행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행4:16 , 행4:21

(행 3: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행3:2

사도행전 3장 1절-10절 말씀묵상

3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구걸하던 한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건을 소개한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복음이 지리적으로 확산되며 전파될 것을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이야기했는데, 오늘 본문이 바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 세번의 기도시간을 갖는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런 유대인의 기도습관에 따라서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올라갔다. (1절)

[참고] 유대의 하루 개념은 우리와는 달라서, 본문에서 제구시라고 되어있는 것은 오후 3시를 말한다.

유대인은 하루를 오후 6시부터 시작하는데, 이유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실 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 8, 13, 19, 23, 3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녁이 시작되는 오후 6시를 하루 시작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낮 시간이 시작되는 오전 6시가 유대시간으로는 0시가 된다. 그래서 유대시간의 제구시는 오후3시를 말한다.

사도행전 3장에서 누가는 기도(1절)와 치유의 기적을 연결시키고 있다.

사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도 이미 예수님께서 기도로 치유하는 사건을 여러차례 밝혀주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치유를 위해 기도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물론 기도하면 치유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치유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응답되지 못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기도해도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치유되지 않는 것 조차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하는 상황들이 있고, 이런 현실은 우리를 답답하고 힘들게 한다.

그러나 믿음의 행보는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것, 내 안에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것이다.

회복의 소망, 회복의 역사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기도를 부탁했지만 그는 잠들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베드로는 기도의 용사가 되었다. 베드로처럼 정기적인 기도시간을 확보해야겠다.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말하기 전에 기도함으로 바쁨을 여유로, 피곤함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야겠다.

미문은 성소(성전)로 들어가는 10개의 문 중에서 은과 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알려져 있는 문이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인데, 그 성전 바로 앞에 앉은뱅이가 남루한 옷차림으로 구걸하고 있었다. (2절, 3절)

가장 아름다운 문 앞에서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인지!

그런데 왜 하필 이날 이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치료했을까?

베드로와 요한은 적어도 규칙적으로 성전 기도에 참여하였고, 구걸하는 앉은뱅이는 날마다 미문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과거에 분명 앉은뱅이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시간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을까?

베드로와 요한은 아마 날마다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면서 마음에 안타까움을 품고 날마다 성전에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이것은 분명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앉은뱅이가 다른 장소가 아닌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이유는 적어도 그곳에서는 자신을 불쌍히 여길 사람이 있기 때문이며, 그들의 동정을 통해 배부른 하루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전은 앉은뱅이에게 근본적인 치료를 제시해주지 못했고, 일시적인 처방에 그칠 뿐이었다.

실제로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온전히 치유되는 것,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 태어날 때부터 얻은 비참한 과거를 구속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곳에서 구걸하였지만 아무도 그에게 근본적인 치료를 제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작은 동전 하나 던지는 것으로 내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는다. 교회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오늘 필요한 것만 주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치료를 주어야 할 것이다. 물론 물질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편안한 잠이나 진정한 사랑을 만들어줄 수는 없다. 뒤틀리고 왜곡된 세상에서 제자들은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갖고 기도했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 보고 듣는 많은 것들, 어떻게 듣고 느끼고 반응하며 판단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겠다.

6절에 보면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외쳤다. 원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비하할 때 사용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은 부활시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

출신과 배경을 중요시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출신과 배경은 조롱과 천대받을만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분은 조롱하고 천대하는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다.

마지막으로 7절 이하에서 누가는 앉은뱅이에 대한 치유가 갑작스러우며 완벽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 사건이 인간의 의학으로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역사임을 말한다.

적용

1. 정기적인 기도시간 확보하기

2. 주변의 안타까운 상황들을 모른 척 하지 않고, 위해서 기도하기

3.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하며, 기도로 할 일을 하기

사도행전 3장 1-10절 말씀 묵상 [김경열 목사]

본문말씀: 행3:1-10

제 목: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해답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 (행3:6) Then Peter said, Silver and gold have I none; but such as I have give I thee: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rise up and walk. (Act 3:6)

그리스도인들은 팔자나 운명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운명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인생의 문제를 만날 때, 방법을 찾다가 안 되면 운명이나 팔자라고 체념합니다.

원수마귀도 운명이라고 속삭입니다.

마귀는 자꾸 너는 그렇게 살 팔자야!, 그 모양으로 살다 갈 운명이야, 이렇게 자꾸 속삭이면서 소망을 빼앗아 가고 체념을 하게 만듭니다.

속지마세요. 운명을 뛰어 넘는 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지옥 갈 인생이 예수 믿으면 천국백성이 됩니다.

죄인이 예수 믿으면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됩니다.

신앙인은 인생을 운명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공생애 기간에 주님이 직접 하셨던 치유사역이 오순절이후 사도들을 통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40년 동안 평생을 걷지 못하고 날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남에게 손을 내밀어 살아가는 이 사람은, 아무런 소망도 없고 꿈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내일에 대한 꿈이 있어야 어려워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똑같이 남의 도움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평생 결혼도, 가정을 가질 수 없으니, 내 집 장만할 희망도 없습니다.

요즘 젊은이 들이 3포, 5포 한다고 합니다.(연애,결혼,출산,직장,내집)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운명이라 체념하고, 팔자이러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돈 몇 푼 도와준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기를 안 갖는다고 뭐라 할 게 아니고, 양육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에게는 꿈을 갖고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 날도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구걸하고 있는데, 기도하러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습니다.

희망없이 몇 푼 구걸하기위해 내미는 손이 이제는 만성이 되었습니다.

머리를 푹 숙이고 손 내밀고 있는 이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 고 합니다.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절망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한번만이라도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날마다, 한번만 제대로 걸을 수 있다면, 별생각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로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꿈이야 생시야 하면서 영원히 깨어지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너무 신기하여 그는 걸어보고, 뛰어보고 힘도 주워보았습니다.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걷는 것 자체가 신기합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놀라워합니다.

사람들은 놀라워하면서 박수를 치며 내일인 양, 축하해 주었을 것입니다.

성전으로 들어가서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환자는 눈물범벅이 되어 빨리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운명이라 체념하던 문제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금이나 은이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해답입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가지신 가장 귀하고, 존귀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하늘에 권세를 버려두시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천국백성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입니다.

그 이름 속에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온 땅을 다스리는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만 위력 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단지 그 이름이 상징적 가치만 가질 뿐입니다. 아니 그 자리에서 물러나기만 해도 파워가 떨어집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은 십자가에서 죽음 뒤에 더욱 위력을 나타내게 되었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모든 이름위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존귀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파워를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지금도 마스터 키(Key) 로 항상 모든 곳에 통하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기도할 때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20:31에 예수께서 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이신 것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때때로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 앞에서 지치고, 넘어지고, 상처나서 주저앉아 운명처럼 체념 할 수 있는 일들을 만날 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일어날 수 신앙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본문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1.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1) 정해진 기도 시간이었습니다.(1절)

제 구시 기도시간에…라는 말은 정해져 있는 기도시간이란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시간을 정하고 기도합니다.

유대인의 정해진 기도시간은 3시(행2:15) 6시(행10:9), 9시(시55:17)로 우리 시간으로 오전9시. 낮12시, 오후 3시에 기도 시간입니다.

다니엘도 하루 기도시간에 기도한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단6:10)

제 구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입니다.

가장 바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기도시간으로 정하고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사람과의 만남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은 영적인 사건을 예비해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어도, 우리가 기도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천사들이 바빠집니다.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런 영적인 사건을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그 영적인 체험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었습니다.

규칙적인 기도나 작정기도는 굉장히 영적생활에 유익을 줍니다.

여러분도 시간을 정하고 규칙적인 기도시간을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정해진 제9시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오후 세 시는 가장 바쁜 시간입니다.

기도는 바쁘다고 미루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초대교회가 가장 소중히 여긴 특권이요, 직무였습니다.

기도할 때 오순절의 역사를 경험했고, 어둠의 영을 몰아내고, 담대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만나고 있지만, 이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매일의 삶이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문을 통해 매일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두 명일 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과의 만남이 그에게는 인생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과 기적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교회가 매일 같이 새벽예배를 중시여기고 “새벽에 너를 도우리라” 는 주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합니다.(시46:5)

하나님이 돕겠다는 시간에 목숨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아직까지는 예배를 생명같이 드렸습니다,

폭풍 주의보가 내려지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눈이 아무리 많이 싸였어도 예배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예배는 생명입니다.

예배는 성령이 임재 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코로나 펜데믹 중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울부짖었습니다.

이런 기도가 쌓여서 영성이 회복되었고, 우리 교회 영적에너지가 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성장하는 교회들은 그냥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우선순위가 예배요, 기도입니다.

여러분도 나름대로의 기도시간이 정하시길 바랍니다.

2)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기도하기 위해 올라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1절下)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 갈 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갔다는 말은 미완료 형입니다.

늘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거룩한 습관입니다.

즉, 한번으로 멈춘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늘 성전을 올라가는 거룩한 습관을 말합니다.

(1) 성도는 성전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성전보다 더 소중한 게 없습니다.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전이며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7년 동안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많은 허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대서에 보면, 솔로몬의 허물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짖느라고 수고한 공로만 칭찬하는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하7:15에 성전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인다고 했습니다,

내 이름을 이곳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음이라.(16절) 할렐루야!

솔로몬이 기도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가장 큰 위기는 성전예배가 무너지고, 성전 기도가 멀어져 가는데 있습니다.

다시 성전예배를 회복하고, 성전기도를 회복하고, 성전에서의 찬양과 사랑의 교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2. 연합하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3절)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와” 라는 글은 연합의 고리입니다.

1) 연합과 혼합은 다릅니다.

혼합은 뒤섞이고 무질서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연합은 하나가 되고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자꾸 연합해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함께 더불어 해야 합니다.

성경에 주도 하나, 성령도 하나, 믿음도 하나 라고 했습니다.(엡4:4-6)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가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연합하는 ‘와’ 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형제와 형제가, 성도와 성도가 하나가 되어 연합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여러 가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요소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1) 이들은 세 가지 차이점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는, 성격의 차이입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다혈질에 급하고, 요한은 차분 합니다.

또 하나는, 나이의 차이입니다.

베드로는 나이가 많았고, 요한은 연소한 자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지식의 차이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출신입니다.

어부의 생활을 하면서 많은 학문을 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지성인이었습니다.

성격적인 차이, 연령의 차이, 지식의 차이, 이런 여러 가지가 하나가 되기 어려운 조건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가 되어서 성전으로 늘 기도하러 둘이 합하여 같이 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2) 둘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네 가지입니다.

믿음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믿음은 항상 하나 되게 만듭니다.

영적인 속성이 같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조건들을 뛰어넘었습니다.

예수님이 중심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인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하나가 되었습니다.

모든 성격도, 나이도, 조건도, 뛰어넘어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너와 나,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성도와 성도의 “와” 의 고리가 잘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길 축복합니다.

하나가 될 수 없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역사가 일어납니다.

3.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자원입니다.(6-10절)

1) 무엇을 얻고자 할 때, 돈을 요구할 때 우리는 은과 금이 없다. 고 했습니다. (5-6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이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베드로와 요한이 은금이 있어서 돈으로 도와주려고 했으면 평생 구걸하는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앙은 은과 금으로 해결하는 것 아닙니다.

돈으로 구제나 하려고 하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은과 금이 많아 돈을 도와주었다면 그는 평생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마중물의 역할은 돈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이름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입니다.

성도는 예수의 이름이 자산이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1) 우리는 믿음의 손을 잡아줘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를 않고 지친 이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오면, 책임은 주님이 지십니다.(6-7절)

저는 이번 부흥성회 오는 모든 분들의 문제들을 주님이 해결하실 줄로 믿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내리칠 때, 갈라지게 하신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여리고성을 믿고 돌때 무너뜨린 분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돌문은 우리가 열어야 하지만, 살리는 것은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주님이 하실 일. 하나님이 하실 일까지,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고민하고 근심하고 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면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세요.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오직 믿음으로 행동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의 손을 잡고 일으킨 것처럼 여러분도 믿음으로 지치고 넘어지고 실패하여 쓰러진 인생의 손을 잡아 주시길 축복합니다.

(2) 일으키는 힘은 주님이 주십니다.(7절)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힘주시면 됩니다. 확신을 가지고 일어나세요.

난공불락이던 요단강이 갈라지고, 철옹성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무슨 질병에 있든지 주님의 뜻이라면 일어납니다.

성령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게 하세요.

모세가 홍해를 지팡이로 내리치니, 동풍이 불어와 물이갈라졌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동풍에 날아 왔습니다.

저는 이번 부흥성회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주제를 “성령의 바람 불어와” 로 정했습니다.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 같이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코로나를 완전히 몰아내고 닫혀진 교회 문들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이 땅에 성령의 바람 불어와 다시 새롭게 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이 부흥의 불길이 뉴욕뿐 아니라, 전 세계에 성령의 바람이 불길 바랍니다. 불같은 성령이 임하시길 바랍니다.

첫 것을 드리는 맥추감사절 주간에 영안교회 첫 번째 부흥회에 “에바다” 열리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이 힘주시면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패에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치료하시면 어떤 질병에서 일어납니다.

낙심하지 말고 주님의 힘을 의지하세요.

(3) 구걸하던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10절)

예수이름으로 40년간 않고 있던 근본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에 멈추지 않고, 지금도 일어났습니다.앞으로도 계속 일어 날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의 이름으로 인생의 무거운 문제가 청산되길 축복합니다

2),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12절)

앉은뱅이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왜 나를 주목하느냐? 내가 한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이 봉사를 하고, 충성을 많이 하고, 헌신을 많이 했을지라도 주님이 마음에 감동주신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더 크게 역사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의 이름을 높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인생의 해답입니다.

에수의 이름을 꽉 붙잡으세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불구자의 운명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운명에 인생을 맡기지 않습니다.

운명 철학원가서 내 운명을 고정화 시키지 마세요.

그 사람의 팔자겠지, 운명이겠지 말하지 마세요.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군 줄 아세요?

점쟁이한테 점 한번 보고, 예언자한테 예언기도 한번 받고, 운명 철학원에, 가서 한마디 듣고, 자기 일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성전 밖에서 구걸하며 운명이라 생각하면서 평생 살던 자가 인생이 고침 받고 성전 안으로 들어오게 만든 위대한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예수이름 안에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해답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문제를 맡기세요.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3장1-10절

2021년 11월 22일 월요일

◑ 오늘의 말씀 묵상 ◑

※ Hallelujah!!

– 간밤에 비가 온 후에 날씨가 쌀쌀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오늘은 한주간의 월요일 주와 동행하여 행복한 한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어제 추수감사 주일 예배를 통하여 은혜 많이 받으셨습니까? 2021 다니엘 기도회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잃었던 영성 회복으로 새 힘을 얻고 역전의 주인공들이 되기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 계속 되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과 또한 앞으로 주실 모든 것들로 인하여 항상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힘 있게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 본 문 ◑

{ 사도행전 3장1-10절 }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 제 목 ◑◑◑◑

◗◗ 베드로가 지체 장애자를 일으키심

◑◑◑ 본문 이해와 요약 ◑◑◑

◗ 3장에서는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구약에 예언 된 바 메시아 시대에 임할 축복의 성취였습니다.

– 베드로의 능력은 예루살렘 교회의 진정한 공동체로서의 탄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 이적과 함께 주의 은혜가 넘침으로 믿는 자의 수가 더해 갔습니다.

– 특히 3장에서는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으며, 교회가 갖은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놀랍게 성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 복음을 증거 하는 공동체로서의 온전함을 갖추기 위한 많은 모습을 대하게 됩니다.

◈ 이제 3장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돕는다면, 먼저 1- 8절에서 베드로가 않은뱅이를 말씀 한마디로 고칩니다.

– 그리고 9-11절에서 장애자를 고치는 이적을 보고 놀란 자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 한편 12-16절에서 베드로가 이적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 그리고 17-26절에서 베드로가 담대히 설교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 이제 본문을 적용할 수 있는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우선 1절에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성도가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 한편 2-3절에서 성도는 교회의 짐만 되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 또한 4절에서 성도들은 불신자들에게 ‘우리를 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그리고 5-7절에서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영혼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 한편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 또한 6-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어떤 보배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배입니다.

– 그리고 8-10절에서 참된 성령의 은사는 참된 열매를 맺습니다.

– 한편 11절에서 성령의 권능에는 불신자들을 교회로 흡인하는 힘이 있습니다.

◗ 결론적으로 지체 장애자를 고친 것은 사도들이 행한 많은 기사와 표적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는 과정 속에서 이 표적은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능력으로 보여 집니다.

–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이름에 의한 것임을 알 수가 있으며, 예언들의 성취와 함께 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시대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임을 베드로의 설교에서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 적용한다면 ◖◖◖

♥ 오늘의 핵심 (P.S)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능력이다. (사도행전 3장 6-8절)

◈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영혼의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능력이며, 주의 이름은 이 세상 어떤 보배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배입니다.

❥ 오늘 본문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예수를 가진 사람들과 아직 못 가진 사람입니다.

–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은 예수가 없습니다.

– 그러므로 본문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를 못 가진 사람이 예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함께 예수를 믿고 가진 이야기입니다.

– 먼저 예수를 가진 베드로와 요한의 행동을 주목해 보면, 제 구 시, 즉 우리 시간으로 하면 오후 세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 베드로가 살았던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른바 정시 기도라는 것이지요. 아침 아홉 시, 오후 세 시, 그리고 해질 무렵에 기도했습니다.

– 그래서 예수를 가진 사람들은 기도하게 되고 기쁨이 있지만, 규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지혜와 능력을 얻습니다.

– 이와 같이 예수를 가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중인데 예수 없이 사는 한 사람을 만났는데, 나면서부터 못 걷는 남자였습니다.

❥ 6-8절을 살펴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하였습니다.

–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지체 장애자 걸인을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베푸는 내용입니다.

– ‘은과 금’은 세상 보화의 대명사이기에 베드로 사도는 구걸을 하는 앉은뱅이 걸인에게 그런 은과 금은 자신들에게 없다고 했습니다.

–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돈주머니를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마태복음10장 9절에서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 사도들은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기부했어도 사도들은 그 물질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치 않고 오직 교회 공동체 유지와 구제 사업을 위해서만 사용했습니다.

– 그러므로 은과 금 같은 보배는 베드로 사도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그러한 세상 보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값진 보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 그 보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구속의 은혜이기에 베드로 사도는 그가 기록한 베드로전서에서 고백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신앙이 금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베드로전서 1장 7절에서 “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라고 하였습니다.

– 예수님의 구속 은혜도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배라고 했습니다.

– 베드로전서 1장 18절에서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라고 하였습니다.

– 바울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믿음이 보배라고 고백했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지금 나는 내 안에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 장애자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돈은 없지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 이었는지? 스스로 자가진단 해 보고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선포하여 능력과 기적이 있는 사명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내 안에 내가 갇혀 있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지 않는지? 지금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오늘 성령님은 이웃에게 무엇을 주길 원하는지? 묻고 있으니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영혼의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능력이며, 주의 이름은 이 세상 어떤 보배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배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능력입니다.

– 고린도후서 4장 6-7절에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 세상의 보배들은 사람의 육신은 즐겁게 해 줄지 모르지만, 그 영혼은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 베드로후서1장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 세상의 보배들은 영원한 것이 못되며, 쓰기 시작하면 금세 없어집니다.

– 도적질 당하기가 쉽고 사람으로 하여금 더러운 정욕과 이기적인 자로 만들게 하여 물질 때문에 이웃과 가족과 친지끼리 다투게도 만듭니다.

– 마태복음 6장 19-20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 사람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고 하나님 대신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게 만들어 멸망의 길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 디모데전서6장 9-10절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참된 보배이기에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게 되면 기적의 역사는 일어나게 되며 주의 이름을 지닌 성도는 반드시 문제해결 되며 승리하며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 시편 36편 7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그리고 세상의 보배로 얻을 수 없는 하늘의 은총을 얻게 만듭니다.

– 이사야 33장6절에서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고 하였습니다.

– 사죄함을 얻게 하고, 성령을 모시게 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만듭니다.

– 사람으로 하여금 거룩한 성품을 지닌 자로 만들어 갑니다.

– 의와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자로 성화시킵니다. 또 베드로 사도처럼 그리스도와 그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면 온갖 귀한 삶의 자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요한복음 16장24절에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 만일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그 앉은뱅이 걸인의 요구대로 동전 몇 푼만을 그에게 주었다면 그 걸인은 그것으로 하루의 끼니는 거르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 그러나 그 사람은 다음날 또 구걸하러 성전 미문에 나왔을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은혜를 나누어 준 결과 그는 장애에서 해방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자가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영생을 얻는 큰 축복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 그런즉 지금 이 세상 그 어느 부자보다 내가 더 귀한 재산을 지닌 부자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혹시 우리 가운데 부한 성도들은 육신적인 쾌락이나 그 부를 우상으로 섬기는 일을 경계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은혜를 얻고 나누고 섬기는 일에 자신의 부를 겸손하게 선용 해 봅시다.

– 누가복음16장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모두가 어렵고 힘든 상황을 대하면서 지역 사회의 소외계층에게 구제 사역도 중요하고 사람들의 육신적 물질의 구제하는 일에 그치지 말고 그들에게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으로 구속의 은혜를 전하여 영육이 구원받고 소망 중에 새 힘을 얻는 데까지 관심을 갖도록 힘쓰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할렐루야!!!

2020/09/10(목) “사도행전 3:1-10” / 작성: 김광욱

[본문] 사도행전 3:1-10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1:3).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사도들에게 사명을 주신 것과 앞으로 일어날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예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한 두 가지 위임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말씀입니다. 그 핵심 내용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것이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위임명령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하실 때에 권능을 받는다는 것과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 신비로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 일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외국어를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이 있은 다음, 성령님에 의해 말씀의 권능이 사도 베드로에게 임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 3천 명은 마음이 찔려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초대 교회에서 기적과 표적이 많이 나타나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구제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성찬과 애찬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함으로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교회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악한 세력의 공격을 받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성령님의 권능으로 기적과 표적과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지만,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갈등이 존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3장은 초대 교회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사도들이 권능을 받고 기적과 표적을 행하며 말씀의 열매를 맺으며 부흥하는 가운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약 40세의 장애인이 걷게 되는 기적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 기적은 초대 교회가 외부 공격을 받는 발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성전에 올라갈새(1-3절)]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 오늘날 시간으로는 오후 3시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갈새’는 원문에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완료되지 않고 계속 진행되는 동작이나 습관적인 동작을 뜻합니다. 즉 사도들은 습관적으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성전에 올라갔던 이유는 당시 사람들처럼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도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성전은 제사드리는 곳이지만 기도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처럼 시간을 정해서 습관적으로 기도 생활을 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사도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그 시간에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전의 출입문 중 하나인 미문 앞 입구로 나왔습니다. 그가 성전 문 입구로 나갔던 이유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날마다 성전에 나가서 구걸했던 이유는 먹고 살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로 육체노동을 통해 벌이했던 고대 사회 특성상 걷지 못한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처럼 어려웠을 것입니다.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 구걸하였는데 때마침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장애인은 그날 하루 돈 몇 푼이라도 동냥을 받아야지만 먹고 살아갈 수 있었기에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간절히 구걸하였을 것입니다. 이때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의 말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4-6절)]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구걸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주목하였습니다. 구걸하는 사람은 양반다리의 자세로 허리를 세워 앉지 않고 몸을 엎드려 손을 벌려 동냥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형식적인 적선을 위해 그 사람에게 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며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려고 했습니다.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걷지 못하는 장애인은 적선해 줄 사람이 보라고 했으니 무엇을 얻을까 기대하며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궁핍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습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 그리고 그를 도울 수 있는 돈이 없었습니다. 몇 푼의 돈이 있었을지라도 적은 돈을 그에게 적선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주고 싶었습니다.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성령님이 임하실 때 임할 권능을 이미 경험했던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이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임하기를 원하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설령 은과 금이 있어서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었던들 그 사람이 그것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성전 문 앞으로 갔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여 건강한 몸으로 자발적 경제 활동을 하게 만들어, 그가 다시는 성전 앞에서 동냥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것보다 더 값진 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치유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7-10절)]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사도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능이 사도 베드로의 손을 통해 그 사람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손은 하나님의 손이 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사도 베드로의 손을 잡고 일어났을 때 겨우 몸만 지탱한 것이 아니라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걸을 수 있었고 발과 발목의 힘으로 뛰기까지 했습니다. 이사야 35장 6절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당시 장애인을 부정하게 여겼기에 성전 안으로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던 그가 성전으로 들어갔을 때 얼마나 감개무량하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은 육신의 치유와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치유를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손이 되어 세상에서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전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나눔 물품보다 더 값진 선물을 전달해 드리는 사람이 되십시다.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성전 미문 안팎에서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의 반응이 10절입니다.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성전에 정기적으로 기도하러 다닌 사람은 성전 미문을 통과할 때면 변함없이 구걸하는 그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구걸하는 사람이 약 40세 정도였고 꽤 오래전부터 구걸을 해왔다면 성전출입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얼굴과 차림새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가 뛰는 모습을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랐다고 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놀라다’는 말이 두 번 나오지만 원문에서 서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놀랍게’는 놀라움으로 인해 마비가 될 정도라는 표현입니다. 둘째 ‘놀라니라’의 원형은 ‘엑스타시스’입니다. 잘 알려진 단어, 영어 ‘엑스터시’의 어원이며 ‘황홀경’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약 40년 동안 선천성 하반신 장애로 살았던 사람이 걷고 뛰고 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극도의 놀라움으로 몸이 마비되거나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장애인이 치유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엑스터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이지 않겠습니까? 약 40년 동안 걷지 못한 사람이 육체의 치유와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의 치유를 받도록 하나님의 손이 임하셨습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손이 될 것을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육체적 영적 치유가 예루살렘에서 그치지 않고 땅끝까지 이어가도록 제자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구걸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은 금은으로 장식된 높이 약 23미터나 되는 웅장한 성전 문과 대조적이었습니다. 아무리 금은으로 장식된 성전 문을 통해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의 원대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영적 상태는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초라하고 영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도 예수님 안에서 영적 치유를 받게 되면 영적으로 찬란한 새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문제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함을 잊지 마십시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손이 되었듯이 오늘 하루 우리 주변에 영적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볼 때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도록 하나님의 손이 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영적으로 초라하고 참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저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복과 구원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밑바닥 인생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잊지 않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손이 되게 하시옵소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보다 더 값진 구원의 손이 임하도록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손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성전 미문 앞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이 구걸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사도 베드로가 구걸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4. 내 주변에 손을 내밀어 잡아줄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봅시다.

5. 그 사람에게 힘이신 하나님의 손이 되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작성: 김광욱)

사도행전 3장 1절-10절,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였기에, 소외되었고 외로웠으며 슬픈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에게 엄청난 것들을 주었습니다.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성전 미문과 걷지 못하는 자

지금도 예루살렘의 성벽에 가면, ‘미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미문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ὡραῖος, 호라이오스) 문’이었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문헌에는 이 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오늘날의 위치를 볼 때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향해 있는 ‘분문'(Dung gate)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에 위치한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쪽에 위치한 문이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미문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었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과 음식을 구걸하기 위하여 한 사람이 이 곳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라고 본문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을 위하여 “의”(צדקה, 쯔다카)를 행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돕는 것이 “의”라고 생각하였기에, 구걸하는 이들에게 동전을 나누어 주는 경우들이 많았고 이 사람은 그 이유로 미문에 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주는 음식과 돈은 그가 한 끼를 연명하거나 하루를 먹고 살 수 있도록 돕는 정도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도 시간에 성전을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비록 그에게 음식과 돈을 주진 않았으나, 그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우리는 은과 금이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들을 얻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일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은과 금은 근본적인 우리의 문제인 ‘구원과 영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한 이 남자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준 것

본문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이 남자에게 준 것이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가장 먼저,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관심을 주었습니다.

미문을 통하여 성전에 들어가거나 나오던 사람들은 구걸하는 이 사람을 보고서 음식이나 돈을 줄 생각만 했지, 이 사람에게 관심은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사도행전 3: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에게 “보라”(βλέπω, 블레포)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관심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음식과 돈보다 갈망하는 이 사람의 영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평생 앉아 지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과 부모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몸에 장애가 있을 경우에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애가 있다는 생각이 많았기에, 스스로 큰 죄인이라는 자책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그의 눈을 맞대고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허하고 쓸쓸하며 허무함만이 가득한 사람, 날 때부터 걷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못하고 홀로 한숨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이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눈과 눈을 맞대며 “관심”을 주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타인에게 관심을 주고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외로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 사이에 함께 있어도 외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옆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가족끼리 모여서 함께 식사하고 떠들고 웃으면서도 마음 한 켠은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물며 평생 남과의 깊은 관계, 애정어린 관계를 느끼지 못했을 이 남자는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라고 말하며 그가 경험해 보지 못한 관심을 주었습니다. 눈과 눈을 마주하는 것은, 1시간 동안의 사랑 고백보다 더 많은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을 보고 위로를 받읍시다. 그리고 위로 받은 내가 또 다른 외로운 이를 찾아가 관심을 주고 위로를 줍시다. 나와 그 사람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걷지 못하며 구걸하는 외로운 이 남자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눈과 눈을 마주하며 관심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과 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고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분명히 ‘내게 있는 이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성질 급하고 예수님을 쉽게 배반했던 실패한 베드로의 마음과 삶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 갈릴리의 풍랑 속으로 빠져 들어가던 믿음 없던 그를 능력의 사람으로 바꾼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베드로를 주님의 제자가 되게 했고 교회의 기둥이 되게 했으며 능력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하고 자신이 소유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이 이름은 이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돈과 음식보다 더 큰 문제, 평생토록 안고 지내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문제인 걷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은과 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건강의 회복을 얻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의 눈을 바라보았고, 이 사람이 베드로의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으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아서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또 나눠 주다보면 내 것까지 모자라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풍성하고 부족함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나눠 주면 줄수록 내 삶도 풍성해지며 받는 사람의 인생도 풍성해지게 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주를 위하여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주의 능력을 매일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꿈이 사라지고 몸과 영혼이 피곤하며 슬픈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며 위로를 받고 주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붙잡고 일어나 걸어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눈을 맞추어 관심을 주고, 능력의 이름인 예수의 이름을 걷지 못한 자에게 준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과 함께 하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지금껏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 받음으로써 그 어떤 공동체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였던 이 남자와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도행전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일어나 걷게 된 이 남자는 너무나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해서 뛰어 서서 걸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쁨에 가득 찬 이 남자의 최초의 친구가 되어 함께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이 되어 주었습니다. 함께 예배하는 동료가 되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깐부”라는 말도 덩달아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깐부라는 말은 ‘동료’, ‘친구’라는 의미인데, 어떤 이들은 밴드나 단체를 뜻하는 영어인 ‘combo'(캄보)에서 온 말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친구 간의 깊은 우정을 뜻하는 사자성어인 ‘관포지교’의 ‘관포’에서 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하는 친구나 동료를 뜻하는 말인 깐부에 대해, 드라마 중에 나오는 등장 인물이 ‘깐부끼리는 니꺼 내꺼가 없는거야’라고 말합니다. 즉,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모든 물건을 가져와서 필요에 따라 나누었기 때문에, 일종의 깐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제 막 걷게 된 이 사람의 깐부가 되어 주었고 함께 성전에 들어가 예배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베풀고 나누어 주는 것은 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챙기고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하는 일은 어려워 합니다. 당연합니다. 내 것을 희생해야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삶은 일시적인 나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챙기고 함께 하는데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24시간 함께 하셨듯이, 우리도 성령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과 항상 교통하며 함께 해 주기위해 힘써야만 합니다. 내가 먼저 함께 하며 베풀 때, 더 많은 은혜가 나에게 되돌아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야 할 것들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 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에서 만난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그들은 눈을 바라보며 관심을 주었고,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함께 들어가 하나님께 같이 예배하는 친구요 동료가 되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눈을 마주 보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까? 가족이나 이웃 중에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또 능력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함께 하는 마음을 누구에게 나누고 있습니까? 누구의 깐부가 되어 주고 계십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었던 관심과 예수의 이름과 사랑의 교제함을 우리도 긴급히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참고할 자료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한 노예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 관찰: 본문 요약

2절을 보면 앉은뱅이에 대한 3가지 모습을 설명한다. ❶사람들이 메야 이동이 가능하다. ❷구걸사람들에게 구걸을 한다. ❸날마다 성전 미문에 온다. 사도행전의 저자(누가)는 앉은뱅이가 매일 성전에 온다고 말한다. 매일 성전에 가는 것을 보면, 비록 그가 앉은뱅이지만 왠만한 랍비보다 더 믿음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성전에 가는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구걸하기 위해서이다. 그에게 있어 성전이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물질을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장소였다. 그에게 있어 성전이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거룩한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야만 하는 최적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가 성전에 가는 목적은 다름 아닌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를 통해 회복된 그의 행동을 보면 그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그 상황을 맘껏 누리며 성전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찬송한다. 비록 그의 행동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그의 행동이 일시적이었는지 지속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9-10절을 놓고 볼 때 그 당시 상황만큼은 그가 하나님께 찬송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나아간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2. 연구: 본문 해석

󰋎 사람이 물을 많이 마시면 자연스럽게 화장실에 가게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가운데 들어오게 되면 우리 또한 변하게 된다. 그동안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인간의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100% 온전하게, 완전하게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가지는 못할지라도, 삶의 목적이 자신의 유익이었던 지난날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만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장로교에서 인준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에는 인간의 최고의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면 우리의 삶의 목적은 이처럼 변하게 되는 것이다.

󰋏 앉은뱅이가 날마다 성전을 찾았던 이유는 앉은뱅이라는 자신의 육체적 한계에 사로잡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 뿐 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의 삶 가운데 실제적으로 나타나니 그가 성전을 찾는 이유가 변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성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회복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도무지 가만히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서 성전을 찾은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성전을 찾은 것이다.

#3. 결론

󰋎 혹시 아직까지 자신이 왜 살아가야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지 답을 찾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아직까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의 본문은 그 답을 알게 해줄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완전히 변하는 은혜의 길로 이끌 것이다. 이에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적이며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께 영광돌림으로 사람 본래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사역자로써 교회를 돌아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똑같이 교회를 다니고 똑같은 섬김의 자리에 있지만, 사람마다 영적인 상태와 마음가짐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나는 분들도 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섬기러 오셨다 면서도 오히려 섬김을 받기 원하시는 분들도 있다. 이에 그분들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은 왜 이 자리에 오신 것입니까? 무엇을 얻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보기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어떠한 목적으로 이 자리에까지 나아오신 것입니까?” 혹여 아직까지 그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괜찮다. 앉은뱅이 또한 물질을 얻기 위해 날마다 성전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것 또한 이걸로 마지막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선한 마음에서 파생되는 목적일지라도 우리 내면에서 바라는 그 무엇인가를 추구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들의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180404 은과 금보다 값진 선물 (사도행전 3장 1-10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유대인들은 하루 세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오전 9시에 한 번, 정오에 한 번, 또한 오후 3시에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제 구시, 즉 오후 3시가 되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누구라도 기도하러 올라가는 길에는 마음이 너그럽고 경건하기 마련입니다. 이를 잘 아는 앉은뱅이는 늘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시간을 맞추어 성전 미문에 앉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이 동정심을 갖고 던져주는 동전을 받아 먹고 사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니 이 사람이 날마다 앉아서 구걸하는 장소는 미문 즉 ‘아름다운 문’이라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 너무도 경건하고 거룩한 장소와 반대로 가장 불쌍하고 처량한 인생을 사는 앉은뱅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후 3시가 다가오자 많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매일 같은 장소에 앉아 구걸하는 이 앉은뱅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불쌍해서 몇 번 도와줬는데 그것도 한 두 번이죠. 다들 눈을 피하고 모른 채 그를 지나갑니다. 때마침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이 앉은뱅이가 앉은 미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가는 것을 깨닫고 그들에게 구걸했습니다. “여보시오. 한 푼만 도와줍시오.” 이 앉은뱅이를 본 베드로와 요한은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우리를 보라’라고 말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기도하러 가기 바쁜데 이 두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앉은뱅이도 혹시 이들이 기도응답이라도 받아 기분 좋아 적선이라도 하려나 보다 하고 기대감을 갖고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을 주려나?’하고 생각하며 베드로와 요한을 처다 보았습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앉은뱅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그를 일으켰습니다. 곧 온 이스라엘이 놀라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앉은뱅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습니다. 그런 이 사람의 발과 발목에 힘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걸었고 뛰어다녔습니다.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육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은 부정하게 여겨져 성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평생 성전 입구에만 있었을 뿐 성전 안은 들어가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던 이 사람이 다리가 낫자, 성전에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8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행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태어나서 평생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사람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니 얼마나 신이 낫겠습니까? 아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숨이 차 오르도록 방방 뛰어다녔을 겁니다.

이 놀라운 기적의 광경을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왔던 많은 유대인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자기들 앞에서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가 바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그 사람인 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 앉은뱅이가 일어났지?” 유대인들은 알지 못했지만 오늘 성경을 읽은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병이 낫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을 주었더라면 그는 잠시 동안은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일이 되면 또 다시 남의 손에 의지하여 옮겨진 후 구걸해야 하는 비참한 인생을 계속 살아야 했습니다. 걸을 수만 있다면 천만금을 주고서라도 부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는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일말의 믿음도 가능성도 갖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아니라 앉은뱅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주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사람을 온전케 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을 이처럼 파멸에서 생명으로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하는 힘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이 사람처럼 비참한 운명에 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이름 앞에 변화되지 못할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치료 못하실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이 이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3)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이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무슨 마법의 주문처럼 사용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해졌기에 그들의 기도가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 생명의 이름, 능력의 이름, 소망의 이름, 예수가 함께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은과 금보다 더 값진 선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이 하루 이 놀라운 구세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으며,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모든 연약함과 죄악에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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