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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봉오동 전투 · 약 1220명~1230명 (대한북로독군부). 약 670명(군무도독부계); 약 550명(대한독립군과 간도국민회계+) · 약 60명 (신민단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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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5/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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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이다. 영역닫기 영역열기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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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8/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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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 다음영화

영화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첫 대규모 승리를 쟁취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처음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원신연 감독은 한 명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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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ovie.daum.net

Date Published: 6/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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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 넷플릭스 – Netflix

봉오동 전투 … 괭이 대신 총을 들었다. 살기보다 죽기를 택했다. 일본군에게 유린당한 조국의 치욕을 끝내기 위해 무명의 전사들이 봉기한다. 독립군 최초의 승리로 기록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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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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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 Google Play 영화

1919년 3.1운동 이후 봉오동 일대에서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활발해진다. 일본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월강추격대를 필두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시작하고, 독립군은 불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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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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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 한국영상자료원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영화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처음 승리를 거둔 역사를 스크린에 펼쳐낸 영화다.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홍범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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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oreafilm.or.kr

Date Published: 7/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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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 괴롭히던 일본군들 잡아 족치던 독립군들 봉오동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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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봉 오동 전투

  • Author: 고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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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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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는 1920년 6월 6일~6월 7일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일명 최명록(崔明錄)), 안무(安武)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중국 지린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이다. 병력은 교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인 독립군은 1천 3백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5백여 명 정도였다.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은 병력을 출병하여 간도 내의 독립군단 토벌에 나선다. 1920년 6월 7일 북로 제1군 사령부(간도국민대) 부장 홍범도는 군무 도독부군,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봉오동 골짜기 인근에 포위진을 짜고 제3소대 분대장[3] 이화일을 시켜 일본군을 유인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나기가 내리쳤고, 일본군 부대는 선봉으로 올라가던 일본군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하면서 교전했다. 고지 꼭대기까지 올라간 홍범도 부대는 이를 내려다보고 남은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했다.

6월 7일 오후 1시쯤, 일본군이 봉오동 상동(上洞) 남쪽 300m 지점 갈림길까지 들어오자 홍범도는 신호탄을 올렸다.[4] 삼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봉오동 전투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사상자가 늘자 월강추격대대는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강상모(姜尙模)가 2중대를 이끌고 쫓아가 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는 봉오동 승첩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만 전사했다고 발표했다.[4] 상해임시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자 157, 중상 200, 경상 100명이며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자 4, 중상 2명에 불과했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은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를 전개해 나간다.

배경 [ 편집 ]

봉오동 개척 [ 편집 ]

봉오동은 두만강 하구 도문시에서 약간 떨어진 마을이다. 이쪽 지형은 일반적인 다른 만주 지형보다는 약간 굴곡이 있으나, 10개의 작은 마을에 총 가구수가~ 200명 정도 되는 궁벽한 곳이었다. [5] 당시 최진동 독립군의 근거지가 봉오동이었고, 독립군 연합부대의 지휘관 중 한 사람인 최진동의 가족, 친척들이 봉오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봉오동은 남쪽으로는 삼둔자 등 독립군의 활동거점과 연계되어 있었고, 서북쪽으로는 약 40리 떨어진 곳에 북로군정서의 소재지인 서대파가 있었고, 봉오동 서남방으로 약 16리 떨어진 곳에 홍범도와 연합한 신민단의 근거지인 석현이 있었다. 봉오동 북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곳에는 만주로 건너온 광복단의 근거지 대감자 방향이었다. 봉오동은 세 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는데, 상촌(북촌), 중촌, 하촌(남촌) 등 3개 자연 부락에 이들 민가는 각각 흩어져 있었으며,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었다.

봉오동은 최진동이 1900년대 초 건너와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로 1908년(융희 2년) 최진동이 당시 청나라 지린성의 지방관청으로부터 이곳의 토지를 사들여 개간하면서부터 점차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어 한국인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한인촌을 구성하였다. 새로 형성된 한인 마을은 최진동이 마을의 행정과 질서를 주름잡았고, 그가 지휘하는 소규모 의병, 독립군의 활동 기반이었다. 1920년 무렵에는 동만주 지방에서 활동하는 한인 교민촌으로는 중간급 규모였고, 동시에 최진동 독립군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전투 배경 [ 편집 ]

홍범도가 이끄는 북로독군부 정일 제1사령부는 다른 이름으로 간도국민대라고도 불렸다. 당시 홍범도의 정일 제1사령부가 봉오동에 위치했고, 그 주위에는 각 독립군 부대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1920년 6월 4일, 일단 소규모의 습격대가 두만강을 넘어 국경 일본군 초소를 공격한다. 그러자 조선총독부의 소규모 부대가 과감하게 국경을 넘는다. 전투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5] 1920년초 홍범도의 부대는 병력 약3백 명에 군총 약 2백 정, 권총 약 40정, 탄약은 총 1정당 2백 발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 후 꾸준히 군력을 증가시켜 갔다.[6] 1920년 3월에는 기관총 7정, 군총 2백 20정, 탄약 1만 8천 발, 권총 22정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추가로 구입하여 간도의 본영까지 운반해 왔다. 또한 봉오동 전투를 전개하기 직전 무렵에는 국민회의 지원을 받아 약 1만 5천원의 군자금으로 군총 3백 정과 총 1정당 탄약 1천 2백 발을 구입하였다.[6]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이후 만주와 연해주, 간도 등에서 국민회군, 북로 군정서군, 서로 군정서군, 대한 광복군 총영 등의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창설되어 온성 전투, 삼둔자 전투 등 일본군 부대와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제19사단의 1개 대대를 야스가와 지로 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대로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갔다.

통합 사령부 조직 [ 편집 ]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만주에서도 여러 개의 무장 부대가 조직되었다. 그 중 국내 진공 작전을 처음 계획한 것은 홍범도의 간도국민군이었다. 3.1 만세 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이 활발해지자 일본 정부는 밀정을 파견, 이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다가 한국인 독립군들이 국내 진공을 계획한다는 첩보를 입수, 1920년 5월부터 독자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추진하였다. 1919년 8월 이후 활발히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만주 북간도(北間島) 지역 독립군의 통일과 연합에 나섰다. 그리하여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측과 계속 교섭하였다.

1920년 5월 28일 대한독립군과 국민회의 국민군 및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연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를 조직하고 군무도독부의 병영인 화룡현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강력한 국내 진입전을 계획했다.[1] 이 무렵 대한독립군의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계가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계가 약 550명으로 총 대원 1천 2백여 명으로 일제 측에 의해 탐지되었으며, 화력으로는 무기가 기관총 2문, 군총 약 9백 정 이상, 권총 약 2백 정, 폭탄(수류탄) 약 1백 개, 망원경 7개, 탄환 군총 1정 당 150발 등으로 집계되었다.[1] 이들은 간도 화룡현 봉오동에 집결, 합동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한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조직을 정치, 행정과 군사, 지휘로 분권하여 정치, 행정의 총책임자이며 북로독군부의 대표와 그 부부장은 군무도독부의 최진동과 국민군의 군무위원이었던 안무가 담임하고, 통합된 북로독군부의 군사 지휘는 의병 이래의 명장이었던 홍범도가 맡아 통수토록 하였다.[7] 이와 같은 대한군북로독군부의 성립으로 온성에서 두만강 건너 북방에 위치한 봉오동 골짜기와 그 부근에 있던 7~8백 명 이상의 북로독군부 병력과 그 밖에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이흥수(李興秀)가 거느리는 약 60명 가량의 신민단 독립군이 집결하여 봉오동 전투를 준비하게 되었다.[7] 이어 역시 대한신민단원인 한경세(韓景世)가 이끈 신민단 독립군의 1개 소대도 합류했다.

선제 공격과 유인책 [ 편집 ]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 부대와 최진동 부대의 예하 1개 소대가 각각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삼둔자(三屯子)를 출발, 월신강(月新江)을 넘어 간도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지대를 기습 공격하여 몰살시켰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 기밀을 입수하고 만주 국경 지대 주변에 활보하는 한국인 독립군 활동에 관심을 갖고,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던 중이라 이는 전투의 도화선이 된다. 이를 일각에서는 봉오동 전투와 따로 구분하여 따로 삼둔자 전투로도 부른다.

삼둔자 주둔 독립군의 기습공격을 확인한 국경초소지대의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해왔다. 독립군 연합부대 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烽火里)에 매복시키고, 이화일(李化日) 소대장이 이끄는 약간의 병력을 고지대에 배치시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인하였다.

6월 6일 오전 10시 일본군은 잠복해 있는 독립군부대 앞까지 추격해왔다. 6월 6일 점심때까지 독립군은 100m 안팎의 산악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군 남양수비대 1개 중대 병력 60명을 사살하였다. 독립군은 2명이 전사하고, 근처 마을에 거주하던 주민 9명이 유탄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소대장 이화일의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일본군 제19보병사단장은 일본군 19사단 소속 보병 소좌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인 월강추격대대를 출동시켰다. 독립군 밀정이 새다리에 편지를 묶어서 띄워 보낸 편지를 통해 1,2시간 만에 이 사실을 접한 홍범도, 최진동 등 독립군 지휘에서는 1개 대대급도 안되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이로운 꼭대기 고지에 올라가서 시야를 넓히는 것이 덜 불리하리라 판단하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조를 나누어 일부는 산 꼭대기로 올려보내고, 일부는 안산(安山) 촌락 후방고지에 진지를 만드는 한편, 인근 지역에 목책과 허수아비들을 설치하였다.

전투 경과 [ 편집 ]

일본군 월강추격대 편성 [ 편집 ]

함경남도 나남(羅南)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 국경을 수비하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이와 같은 간도 삼둔자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야스카와 소좌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넘어 중국령 북간도에 진입하여 독립군을 공격하게 했다.[2]

일본군은 300명 이상 최고 1천 명까지라고 추정된다.

여기에 삼둔자 전투에 참가했던 신미(新美) 대위의 신미중대가 합류한 일본군은 아스카와 소좌 인솔하에 6월 6일 종성군 하탄동(下灘洞)에 집결하여 6월 6일 오후 9시 이후부터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 6월 7일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본거지인 봉오동을 일거에 공격하고자 출격했다.[2] 이어 그들은 상부로부터 받은 다음과 같은 무모한 작전명령을 내렸다.

월강추격대는 즉각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다 남봉오동에 도착하였다. 당시 홍범도 등의 독립군 지휘관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예상하고 봉오동 일대에서 격전을 벌일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일제 추격대는 이 전명령대로 안산 방면을 거쳐 고려령을 향해 곧 바로 봉오동 입구로 진입하여 갔다.[8] 홍범도 사령관은 진입해 오는 일본군을 맞이해서 먼저 주민들을 전부 산중으로 대피케 해서 공동화시킨 후 전 독립군에게 작전 계획을 시달했다.[8]

안산 전투, 고려령 전투 [ 편집 ]

6월 6일 홍범도 부대 예하의 1개 중대가 기습공격을 당했다. 봉오동 마을의 중간쯤 후안산에서 일본군의 급습을 받은 것이다.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봉오동 골짜기를 따라 진격한다. 그러나 골짜기 안에는 독립군 부대가 매복하고 있었다.[5] 약 300명의 선발대 일본군은 우세한 화기를 믿고 계속 진군했던 것 같다.[5] 그 뒤를 따라 나머지 일본군도 진격하였다.

그러나 독립군 연합군단은 800명의 독립군을 봉오동 주변의 산악 고지대에 매복시켜놓고 일본군 월강대대가 안으로 진입하기를 기다렸다. 6월 6일 늦은 밤, 척후병이 이상없음을 수신호하고, 선발대가 일부 들어왔을 때까지도 가만히 있었다.

6월 7일 자정부터 새벽 사이, 야스카와 부대가 전방 300m의 텅빈 안산촌락으로 돌입할 때, 꼭대기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부가 수신호를 보내 미리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야스카와의 대대는 니히미 지로(新美二郞)가 이끄는 남양수비대 니히미 중대와 합세하여 독립군과 교전하였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날씨가 흐렸으며, 독립군 일부에게 먼저 불의의 기습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다시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의 대대는 정예군으로 편성된 야마자키 중대(山崎中隊)를 보내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야스카와 대대가 고려령(高麗嶺) 서방에 도착하였을 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 올라 미리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은 사격을 가했다. 고지에서 사격을 받은 일본군은 소수의 독립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그러나 일부 병력을 근거리에 남겨두어 일본군을 유인했다. 안산과 고려령 전투에서 일본군 120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독립군의 숫자를 고려하지 않다가 오히려 독립군이 보낸 일부병력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봉오동 골짜기까지 흘러들어갔다.

독립군의 준비와 재편성 [ 편집 ]

6월 7일 자정 무렵, 안산전투 직후 예하 1개 중대에서 보낸 사자의 보고로, 야스카와의 월강추격대대가 안산(安山) 방면을 거쳐 봉오동 입구 방면인 고려령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대한군북로독군부 사령부장 홍범도와 부부장 최진동은 봉오골의 주민들을 산악 밖으로 대피시켜 마을을 소개한 후,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들을 세워서 사람의 형상처럼 보이게 한 뒤 요지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봉오동 골짜기에 있던 독립군 연합부대는 6월 7일 새벽부터 안산과 고려령에서 있었던 교전소식을 듣고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명령 지휘체계를 재편성시킨다.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부대는 다시 재편성하였다.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하고, 안무는 사령부 부관으로, 이원(李圓)은 연대 부관장교로 정하고, 소규모의 권총과 단총으로 무장한 연대본부와 1,2,3,4,5,6중대 등 7개로 중대로 재편성, 1중대장은 이천오(李千五), 2중대장은 강상모(姜相模), 3중대장은 강시범(姜時範), 4중대장은 조권식(曺權植)을 임명하고, 나머지 2개 중대는 별도로 편성하였다.

제1중대는 상촌 서북방에, 제2중대는 봉오동 동부 산악고지에, 제3중대는 북부 산악고지에, 제4중대는 서산 남부 나무 숲속에 매복하고, 연대장 홍범도는 별도로 편성된 2개 중대를 서북북단에 매복해 있다가 이들 2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 선발대 시야에서 보이도록 천천히 움직이면서,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도록 계획을 짰다. 또한 유인책을 잘 썼던 소대장 또는 분대장 이화일(李化日)에게 다시 약간의 병력을 주어 고려령 북쪽 1200m 고지와 그 북쪽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나타나면 교전하는 척하면서 일본군을 각 중대들의 포위망 안으로 유인해오도게 했다. 이어 일본군 선발대와 주력부대가 모두 봉오동 골짜기 안에 들어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 안에 들어오면 사방에서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도록 정하였다.

제3차 전투 [ 편집 ]

1920년 6월 7일 북로군 제1군 사령부 부장 홍범도는 군무 도독부군,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봉오동 골짜기 인근에 포위진을 짜고 제3소대 분대장 이화일을 시켜 일본군을 유인해 오도록 하였다.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는 6월 7일 오전 6시 30분 봉오골 골짜기 입구에 도착하여 전위중대를 보냈다. 이화일 소대는 일본군 19사단 월강대대를 유인하기 위한 교전을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적극적으로 교전, 일본군 전위중대가 참패를 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월강대대는 다시 대오를 정렬하여 당일 오전 11시 30분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골짜기로 왔는데 봉오동 상촌부락에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안에 들어왔다.

6월 7일 새벽, 일본군 제19보병사단 예하 1개 부대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대대가 봉오동 어귀에 들어섰다.[9] 연대장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남산 중턱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인했다. 거짓으로 교전하는 척 하면서 일본군 주력 부대를 봉오동 골짜기 안쪽으로 서서히 유인했다. 곧이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골짜기와 산기슭에 안개가 자욱히 서려 일본군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홍범도는 서둘러 북쪽을 향해 퇴각하되 될 수 있는 대로 높은 산봉우리로 오르라고 명령했다.[9]

일본군 월강대대 선발대의 척후병이 6월 7일 오후 1시 독립군 포위망 안에 진입하고, 아무도 없음을 알리자 일본군 월강대대 본대는 안심하고 봉오동 골짜기로 진입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자 소나기가 엄청나게 쏟아졌다고 한다. 이 틈을 타 매복군은 일본군의 시야에서 사라진다.[5] 이어 그날 오후 내내 우박이 쏟아지고, 안개가 끼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상촌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다. 추격해온 일본군이 봉오동 골짜기 내 독립군 포위망에 들어오자 오후 1시부터 홍범도의 사격 개시 명령에 따라 3면에서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고 3~4시간여의 교전이 이루어졌다.

교전 결과 [ 편집 ]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올리고 병력보강과 군비확충에 활력을 주었다. 한편 조선총독부와 일본은 독립군의 전력을 새로이 평가하고 대토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독립군을 대한제국 말기의 의병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얕보던 일본군은 경악했다.[4] 야스카와의 월강대대는 결국 함경북도 온성군 유원진(柔遠鎭)으로 퇴각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피해를 주고 승리했다.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었다’고 기록하였다.이 때문에 봉오동대첩이라고도 불린다[10] 봉오동전투의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었으며, 계속적인 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만주 내 독립군 군벌의 군사적 통일과 아울러 병력보강과 군자금 조달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편 일본군 끼리 서로 교전한 것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일본군 관계자들은 줄줄이 문책을 당하고, 작전훈련 미숙으로 전보 또는 강등 등의 징계 조치를 당했다.

한일합방 후 만주와 시베리아, 연해주에서는 무장독립군이 여러 곳에서 조직되었다. 그 중에서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가장 용맹하고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독립군으로 명성을 드날렸다.[11] 그 해, 7월 11일 홍범도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는 노두구에서 간도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일본 영사관 경찰대와 교전하여 다수의 부상자를 내고 승리하였다. 일본군은 이후 만주의 독립군 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계획을 세웠고, 이에 필요한 군대 동원을 위해 훈춘 사건을 일으켜 관동군 2개 사단을 파병하게 되었다. 이때 밀린 홍범도의 부대는 김좌진, 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본부와 연합하여 청산리 대첩에 참가한다.

홍범도 부대의 이동 [ 편집 ]

봉오동 전투 후 독립군 부대들은 더욱 심해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하나씩 둘씩 만주를 떠나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12] 당시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 후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파와 혁명을 지키려는 적군파가 싸우고 있었다. 일제는 백군을 지지했으며, 러시아 혁명정부는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 독립군들을 지원했다.[12] 만주에서 무기도 식량도 더 이상 구하기 어려워진 독립군들이 러시아로 가려는 것은 그곳에서 장기적인 항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12]

홍범도 부대는 아직 만주에 남아 있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중 북로군정서 부대를 찾아 화룡현(和龍縣) 청산리로 향했다. 북로군정서는 본래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西大波溝) 산간지대에 있었는데, 일제의 압력에 못 이긴 중국 관청에서 떠나라고 강요하자 청산리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12]

북로군정서는 당시 만주 최고의 병력과 무장력을 자랑하는 부대였다.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 김규식이 이끄는 보병대 450여 명, 이범석이 이끄는 사관생으로 구성된 연성대(硏成隊) 150명, 기타 약 100여 명 등 총 700여 명의 병력에 전원 일식 보총으로 무장하고 프랑스제 기관총도 한 문씩 갖고 있었다. 김좌진은 안동의 양반가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12]

평가 [ 편집 ]

봉오동 전투는 조선과 만주의 국경 지역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교전은 아니었지만 대규모 전투로는 첫 전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는 한국인 독립군 연합부대가 승리를 거두어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으며, 이는 만주의 의병조직의 확대와 참가자 증가, 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13] 그러나 이 사건으로 중국에 본격 침투를 계획한 일본군은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중국 출병의 빌미를 만든다.

홍범도 일지 [ 편집 ]

홍범도는 말이 없고, 자신의 기분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그는 봉오동 전투를 기록한 홍범도 일지를 남겼다.

그는 무척 과묵한 사람이었다.[14] 일설에는 봉오동 전투의 실황을 기록한 ‘홍범도일지 라는 그가 자술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를 단지 봉오동 전투의 일자무식의 장군이라고 알았을 것이다.[14]’라는 시각도 있다.

기타 [ 편집 ]

후일 한중 수교 이후 중국 지린성 투먼에 봉오동 전투 기념비가 세워졌다.

홍범도의 일지에 의하면 이 전투에 3명의 소련 적군(赤軍) 병사들도 있었다고 한다.[5] 봉오동 전투는 한국인 독립군의 선제공격과 골짜기 유인책, 험준한 골짜기 지형, 기후 조건을 이용한 전투였다. 이후에 1920년 8월까지 거듭된 소규모 전투와 습격작전에서 번번히 북로군에게 패하거나 기습공격을 당하자, 결국 일본 제국 육군은 1920년 10월 초, 독립군 소탕을 위한 간도 출병을 결정, 작전을 개시했다.

관련 서적 [ 편집 ]

윤병석, 《간도역사의 연구》(국학자료원, 2006)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실천문학사, 1997)

이야기한국역사편집위원회, 《이야기 한국역사 11》 (풀빛, 1997)

한국일보사, 《한국독립운동사 1》(한국일보사, 1987)

박성옥, 《신민족주의론》 (살림터, 2009)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아카데미, 2009)

동북동지회,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코람데오, 2009)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박은봉, 《한국사 편지. 5: 대한제국부터 남북 화해 시대까지》 (웅진닷컴, 2003)

해오름, 《초등학생이 꼭 읽어야할 교과서 속 한국인물 100》(대교출판, 2001)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5》(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1973)

관련 작품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대안(對岸)의 독립군의 활발한 활동에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烽火里)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다. 일본군이 잠복해 있는 독립군 부대 앞까지 추격해왔을 때가 6월 6일 오전 10시였다.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독립군 2명이 전사하고 재류동포 9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이화일(李化日) 소대장의 교묘한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제19사단장은 보병 소좌 야스카와(安川二郎)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켰다. 홍범도·최진동 등 독립군 수뇌부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요지를 점령하는 것이 최상책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안산(安山) 촌락 후방 고지에서 수세를 취하였다. 6월 7일 새벽야스카와 부대가 전방 300m의 텅빈 안산 촌락으로 돌입하자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야스카와부대는 니히미(新美) 중대와 합세하여 응전했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불의의 기습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 부대는 야마자키(山崎) 중대를 주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야스카와 부대가 고려령(高麗嶺) 서방에 도착했을 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소수 독립군의 치열한 사격을 받고 참패를 당하였다.

일본군은 안산과 고려령 두 전투에서 120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도 거듭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봉오동으로 유인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삼둔자 부근 전투에 이어 전개되었다.

Google Play 영화

임무는 단 하나! 달리고 달려, 일본군을 죽음의 골짜기로 유인하라! 1919년 3.1운동 이후 봉오동 일대에서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활발해진다. 일본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월강추격대를 필두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시작하고, 독립군은 불리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봉오동 지형을 활용하기로 한다. 항일대도를 휘두르는 비범한 칼솜씨의 해철(유해진)과 발 빠른 독립군 분대장 장하(류준열) 그리고 해철의 오른팔이자 날쌘 저격수 병구(조우진)는 빗발치는 총탄과 포위망을 뚫고 죽음의 골짜기로 일본군을 유인한다. 계곡과 능선을 넘나들며 귀신같은 움직임과 예측할 수 없는 지략을 펼치는 독립군의 활약에 일본군은 당황하기 시작하는데… 1920년 6월, 역사에 기록된 독립군의 첫 승리 봉오동 죽음의 골짜기에 묻혔던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봉오동 전투 – 한국영상자료원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영화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처음 승리를 거둔 역사를 스크린에 펼쳐낸 영화다.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첫 번째 대규모 승리를 거뒀다. 김한민 감독이 승리의 역사를 기획하고, <용의자>(2013) <살인자의 기억법>(2017) 등의 원신연 감독이 그 역사를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의 배경은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활발해지는 1919년 3·1운동 이후로, 일본은 정예병으로 구성된 월강추격대를 진군시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진행한다. 어린 시절 동생을 일본군에 잃고 독립군이 된 해철(유해진)은 마적 출신 저격수 병구(조우진) 등 동료들과 함께 독립자금을 운반한다. 해철이 동생처럼 아끼는 독립군 분대장 장하(류준열)는 월강추격대를 봉오동 일대로 유인하는 작전을 수행 중이다. 개봉이 끝난 뒤 3개월 지난 10월28일 원신연 감독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봉오동 전투> 제작기를 자세하게 들었다.

김성훈 실제 역사인 봉오동 전투의 어떤 점에서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나.

원신연 시기적으로 지금도 늦게 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즉 만들어졌어야 했다. 일본 배우인 기타무라 가즈키가 한국에서 “일본은 역사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라는 얘기를 한 적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 한국과 관계가 안좋아지면 왜 안좋아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과거를 모르니까. 그래서 이런 시나리오를 보고 일본에서도 개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야 일본인들이 과거에 어떤 행위를 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으니까. 또 역사적 실화를 근거로 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봉오동전투와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잘 모르는 이야기다. 더 깊이 들어가다보니 이 전투야말로 독립전쟁사에서 큰 도화선이었다. 봉오동 전투가 없었으면 과연 청산리전투가 있었을까. 우리에게 승리라고 이름 붙여진 역사가 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훈 전력이 열세인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라는 점에서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영화화하는데 영향을 끼쳤을까.

원신연 여러 영화사에서 홍범도 장군에 대한 기획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여러 시각에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바라보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일본군, 독립군, 중국군이 기록하는 병력 규모가 제각각 달랐다. 그럼에도 보편적으로 설득력을 갖춘 기록이 일본군 500명과 독립군 700명이다. 독립군 숫자가 더 많기 때문에 쉽게 이길 수 있는 전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당시 일본군은 일개 분대 7~8명이 불령선인이라 불리는 독립군 오십명, 백명씩 쓸어버릴 정도로 전투력의 차이가 많이 났다. 훈련의 질도, 화력도 크게 달랐으니까.

김성훈 이 영화 속 독립군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궁금하다.

원신연 역사적 사실을 영화로 만들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실화를 기반으로 무대로 옮기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역사적 사실과 그 시대를 놓고 상업영화로 만드는 방법이다. <암살>과 <밀정>같은 영화들은 상업영화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봉오동 전투>는 상업적인 장르로는 읽히지만 그 시대의 이야기를 될 수 있는 한 역사적 사실 그대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반영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잘 알려진 영웅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그려내고 싶었다.

김성훈 <용의자>(2013) 같은 전작에서 보여준 액션을 고려했을 때 <봉오동 전투>의 액션은 많이 자제한 느낌을 받았다.

원신연 총을 쏘는 순간보다 누군가를 겨누고 있을 때, 총을 쏜 뒤 맞는 동적인 액션의 순간보다 쏘기 직전 방아쇠에 손이 걸려있는 긴장감이 더 서스펜스가 있지 않나. <봉오동 전투>는 액션감이 아니라 정적인 것에서 장르적 쾌감을 찾고 싶었다. 또 스스로 생각했을 때 이 영화는 상업적 장르영화보다 기록적 장르영화에 해당되기 때문에 기록에 충실하자라고 생각했다. ‘기록 액션’이라고 부를 만큼 당시에 사용한 유인책이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방식을 이야기에 많이 반영시켰다. 일본군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영화의 초반부는 실제 봉오동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전했던 ‘야스카와 지로’라는 인물이 실제로 상부에 보고한 문서를 충실히 반영하려고 했다. 이처럼 당시 여러 사료들을 찾아보면 실제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학살이 자행된 사진 자료들이 너무 많다. 그것을 고스란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진에서 나온 앵글과 인물배치까지 맞춰 똑같이 찍었다. 사람의 목을 베어 말을 탄 상태에서 칼에 꽂아 빙빙 돌리는것도 있고, 임산부 배를 찌르는 것도 있다. 전부 다 똑같이 찍었는데 블라인드 시사와 모니터 시사를 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이 너무 잔인해 견디지 못했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다는 것 이전에 먼저 시선의 폭력, 정서적 폭력을 당한다고 느껴버린다. 많은 시사와 편집을 통해 표현의 수위를 점점 낮춰야했다.

김성훈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군과 적, 피아가 확실한 전쟁영화라고 이야기 하지만 영화는 일본인 소년병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수시로 환기시키는데.

원신연 정확히 봤다. 큰 틀에서는 이 영화는 저항을 다룬 이야기다. 지키고자 하는 자는 모든걸 걸고 지키지만 빼앗는 자는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 지키고자 하는 자의 저항을 다룬 이야기다. 현재도 지구상 모든 곳에서 크고 작은 저항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 이러한 역사적 반성의 고리를 유키오라는 일본인 소년병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우리가 왜 저들의 입으로 반성에 대한 주제를 들어야 되냐고 하고, 저들이 반성하는 자체를 봐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도 있었지만 일본인을 통해 반성하는 장치를 꼭 보여주고 싶었다.

김성훈 일본군들이 봉오동 협곡에 들어오자 매복하던 독립군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는 영화의 후반부는 꽤 쾌감이 컸다.

원신연 목적은 뚜렷했다. 헌팅하면서 더 뚜렷하게 느꼈다. 실제로 그 공간에 가보면 삼면에서 각각의 독립군 부대들이 등장할 수 있는 구조였다. 대한독립군, 신민단, 군무도독부가 그때 그 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각각의 병력들이 각각의 산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들이 들어왔을 때 한 번에 일어났다. 실제 기록에 다 있는 사실이다.

김성훈 이 시퀀스에서 화룡점정으로 홍범도 장군이 막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나. 배우 최민식씨가 홍범도 장군 역할을 연기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원신연 처음부터 홍범도 장군 역에 특별출연으로 최민식 선배님을 생각했었다. 이 역을 탐냈던 배우들이 많았다. 현장에서 최민식 선배가 카메라에 담겼을 때 모두가 ‘아후’ 하고 감탄했었다. 감동이었다. 존재 자체가 뿜어내는 어떤 드라마가 있는 배우니까. 대사 없이 설명이 되는 배우가 있지 않나. 그게 최민식이다.

김성훈 의상과 무기를 기증해주셨다. 촬영 전 의상감독과 어떤 얘기를 나눴나.

원신연 기록의 액션영화라고 말씀드린 것처럼 ‘기록의 의상, 기록의 소품, 기록의 무기’였다. 기록이 있는것이면 무조건 똑같이 해야된다고 얘기했다. 기록에 남아있다면 최대한 똑같이,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면 최대한 기록에 근접한 걸 찾아내 배우들을 입히고 무기를 들게 해야 된다고 고집했다. 헤어스타일 또한 그때 그 시절에 충실해야 했다. 의상, 소품, 분장에 있어서 고증에 충실하려고 했다. 의상의 경우, 각종 기록에서 형태는 남아있지만 흑백 사진이다보니 색감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어려움도 있었다.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전문가가 없는 분야는 여러 ‘덕후’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최대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하고 기록에 근접해서 만들었다.

김성훈 조우진씨가 입은 옷은 독립군 의상 중에서도 눈에 확 들어오더라.

원신연 중국인들이 많이 입던 치파오다. 당시 사진자료들을 보면 독립군들이 중국에서 활동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구할 수 있는 옷들을 입었다. 유해진 배우가 입고 있는 겉옷은 원래 일본군 장교복이다. 무시무시한 칼로 일본군을 없애고 빼앗아 입은 모습을 통해 일본군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한 의도로 설정한 것이다.

김성훈 다음 영화는 무엇인가.

원신연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코미디를 만들고 싶다.

김성훈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유산 수집캠페인에 참여해준 소감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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