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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7 [하루 한 장]“그러하오나” (시41편)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http://sungminch.com
오늘의 시편 41편은
시편의 첫 번째 권의 결론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한
시편 1권은 41번째 시에서
다시 ‘복이 있음이여’라고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편 1권은
복에 관한 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복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확실히 밝혀서
‘여호와’께서 우리의 복이심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질병과 범죄,
원수와 친구의 배신 등 온통
고통과 고난의 제목이 가득하지만
‘그러하오나’의 은혜가 있기에
여호와의 일으키시는 은혜,
나를 기뻐하시는 응원이 있기에
우리는 영원히 여호와를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께 피하는 것이 참 복입니다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오늘도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아멘, 아멘!
오늘의 시편 41편은
시편의 첫 번째 권의 결론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한
시편 1권은 41번째 시에서
다시 ‘복이 있음이여’라고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편 1권은
복에 관한 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복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확실히 밝혀서
‘여호와’께서 우리의 복이심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질병과 범죄,
원수와 친구의 배신 등 온통
고통과 고난의 제목이 가득하지만
‘그러하오나’의 은혜가 있기에
여호와의 일으키시는 은혜,
나를 기뻐하시는 응원이 있기에
우리는 영원히 여호와를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께 피하는 것이 참 복입니다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오늘도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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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강해 – Daum 블로그
(1)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분은 그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위해 위대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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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9(토) “시편 41:1-13”/ 작성: 김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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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본문 및 주석 정리, 질병과 원수들 속에서 구원을 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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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 성경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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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시편 41편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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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131
복 있는 사람(시편41:1-13절) – 네이버 블로그
41편 13절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으로 끝납니다. 이 구절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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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4922
시편 41편.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는 복이 있다 – 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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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schurch.net
Date Published: 1/27/2021
View: 6988
시편 4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9/5/2021
View: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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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시편 41 편 강해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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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8. 3.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Wh0aXEC-bd8
시편 41편 강해
[개 요] 주제-“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이 머리말은 앞에서도 흔히 등장한 것이며, 우리에게 이 시편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비천한 가수에게는 이 노래를 맡기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기자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한다. 그는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예언적인 노래를 지었으며, 따라서 이 노래에서는 다윗 자신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이 소개된다. 다윗은 얼마나 폭넓은 경험을 하였던가! 그에게 비통스러웠던 일들이 신실한 이후 세대들에게는 사라지지 않는 향기의 원천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 이 시편의 큰 주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점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분은 다윗의 원형이시며, 그분의 모든 백성은 나름대로 그분을 닮아야 한다. 따라서 위대한 대표자에게 적절한 말씀은 그분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잘 적용될 수 있다. 다른 이들에게 오래도록 자비를 베풀고 파렴치한 대우를 받는 자들은, 이 노래를 읽고서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뛰어난 신앙인들도 거룩한 관용을 베풀고서 오히려 잔혹한 경멸을 당하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죄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겸비해질 때, 그들은 낮아짐을 통해 유익을 얻게 된다. 그들은 선행이 잊혀지고 가장 비열한 악의가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것을 인내해야 한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3절 시편 기자는,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은총들을 묘사하며, 이를 자기 자신의 개인적 구조 요청을 위한 서두로 사용하고 있다. 4절-9절그는 자신의 경우를 진술하며, 10절간구드리고, 11-13절감사로써 마감한다. [강 해] 1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2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 시편은 축복으로 시작되는 찬송들 중 세번째이며, 앞의 두 편들보다 더 진전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일이 맨 먼저 나오고, 죄사함이 두번째로 나오며, 이제 죄사함받은 죄인이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유용한 결실을 하나님 앞에 맺고 있다. 여기 사용된 단어는 앞의 두 경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강조적이며, 이에 따르는 축복들 역시 강조되어 있다. 본절의 “빈약한 자”란, 재물에 있어 궁핍하고, 육체적 건강에 있어 연약하며, 명성에 있어 경멸당하며, 또한 영적으로 낙심한 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대체로 기피 대상이며 종종 멸시를 당한다. 세상의 격언도 몰인정한 자를 가장 비난한다. 병들고 슬픈 자들은 가련하며, 세상은 마치 아말렉인이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아랑곳하지 않았듯이 그들을 저버린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총에 참예하는 자들은 보다 너그러운 성품을 지니며, 자신의 혈육에 대해 완악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짓밟힘당하는 자들을 변호하며, 그 가련한 자들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은 가련한 자들에게 동전 한 닢을 던져 주고는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슬픔을 소상히 알아 보며,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자세히 조사하고, 그들을 구해낼 최선의 방도를 연구하며, 또한 그들을 구출하는 일에 실제로 뛰어든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표시를 분명히 지니고 있으며, 마치 그 이마에 소인이 찍히기라도 한 듯이 그들은 여호와의 초장에서 노니는 양들임에 분명하다. 그들은 수년 전에 가련한 자들을 권고한 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오래전의 케케묵은 선행을 자랑하는 것은 현재의 인색함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궁핍한 자들을 그 누구보다 긍휼히 여기사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처지를 기억하사, 자신은 부요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궁핍해지셨다. 그분의 모든 관심사는 우리를 이끌어올리시는 일에 집중되었다. 그분은 우리의 처지를 헤아리시고 충만한 지혜로써 놀라운 은총을 베풀기 위해 오셨다. 바로 그 은총에 의해 우리는 파멸로부터 구속함을 받는다. 불행한 광경이 그분의 연민을 자극했고, 곤궁함이 그분의 자비심을 움직였으며, 또한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세심한 배려와 지혜로우신 행동에 대해서는 성도들이 아무리 찬양을 드려도 부족하다.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빈약한 자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은 다른 이들을 생각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은 그분을 권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측정 도구로써 우리를 판단하신다. 가장 관대한 자들에게도 곤경의 날이 닥친다.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놓였던 다른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던 자들은, 가장 지혜롭게 궂은 날을 준비한 셈이다. 확실한 약속인즉, 관대한 성도에게 아무런 곤경도 닥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가운데서도 보존되며 또한 정해진 때가 이르면 건지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경우는 이 사실이 참으로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그분보다 더 심한 곤경을 당하거나 더 위대한 승리를 얻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사신 자들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신다. 궁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일에 있어서 그들 모두는 그분을 닮아야 한다. 자선금을 내놓기 아까워하는 자들은 엄청난 축복을 놓치는 셈이다. 선행의 기쁨, 다른 이의 행복에 대해 흡족하게 여기는 마음, 비록 가진 것은 없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에 천상의 미소를 늘 간직하는 일 등은 인색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기심은 그 자체 속에 저주를 담고 있으며, 그것은 마음속에 자리잡은 암이다. 반면에 관대함은 행복이며 뼈를 살지게 한다. 암울한 날에 우리가 자선의 미덕에 의지할 수는 없지만,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고 죄수들과 병든 자들을 도와주었던 기억은 우리에게 적잖은 위안을 준다. 2절.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그의 고귀한 삶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죽을 운명에 처한 이생의 삶마저도 여호와의 권능에 의해 보호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이를 때까지 이 땅에서 살아가셨고, 간교한 헤롯의 계략도 정해진 시점이 다가올 때까지는 그분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해진 때가 이르렀어도, 그분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넘겨 주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것을 빼앗지 못했다. 주님을 닮아가는 모든 이들의 운명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복을 베풀고 또한 복을 받을 것이며, 보호하고 또한 보호를 받을 것이며, 그리고 다른 이들의 삶을 배려하고 또한 그들 자신은 여호와의 보시기에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수전노는 돼지와 같아서 죽기 전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그런즉 죽도록 내버려두라. 의인은 황소와 같아서 살아 있는 동안 일을 한다. 그런즉 그를 살리자.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그에게는 형통함이 함께한다. 그의 기름 항아리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궁핍한 선지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옷을 잘라도 오히려 그것이 더 길어짐을 보게 될 것이다.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자기 것을 포기할수록 그는 더 많이 소유했다. 그가 설령 일시적인 이득을 얻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영적 유익은 갑절이나 얻을 것이다. 그의 적은 소유가 복을 받고, 한 조각 떡과 물이 그에게는 잔치 음식이 될 것이다. 관대한 자는 이 땅에서도 복을 받으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미래의 몫뿐만 아니라 현재의 몫까지 갖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이 마음속에 기쁨으로 간직한 행복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그것이 모든 관대한 성도들의 갈망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축복일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그는 낙심한 자를 도왔으며, 이제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실 것이다. 만일 의인의 대적들이 그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면, 그들이 그에게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핍박자들의 연민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독사 구덩이에 빠지는 편이 더 낫다. 이 문장은 우리 주 예수님의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 그분은 축복에서 제외되신 적이 허다하며 심지어 우리를 위해 저주를 당하셨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혹은 영원히 버림받으신 것은 아니다. 정해진 때가 이르렀을 때, 그분은 모든 대적들 위에 높이 들리셨다. 3절.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다정한 손과 부드러운 베개가 병든 몸을 받쳐 주듯이, 여호와의 영원하신 팔이 그의 영혼을 받쳐 주실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 얼마나 다정하며 또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병약함을 외면치 아니하시고 너무도 가까이서 보살피신다. 주피터가, 인도나 중국의 신들이 이렇게 하였던가? 이 구절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만 독특하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그분은 의인들을 간호하고 보살필 계획을 세우신다. 그분은 한 손으로 치실지라도 다른 한 손으로는 붙드신다. 여호와의 품안에서 실신했다면 그것마저 복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 품으로 받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는 최선의 회복제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만성적인 환자를 위한 가장 소중한 격려이다. 그것은, 뼈가 부러져 살갗을 헤집고 나오는 고통 속에서도, 그 영혼을 거인처럼 강건하게 만든다. 여호와 같으신 의사는 없으며, 어떤 강장제도 그분의 약속 같지는 않고, 또한 어떤 포도주도 그분의 사랑 같지는 않다.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참된 사랑이 여기 있다. 만일 이러한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면 누가 궁핍한 자를 권고하지 않겠는가? 침상에서 몸을 뒤척이다 보면 침상이 이내 딱딱해지지만, 은혜는 인내를 공급하며, 하나님의 미소는 평화를 제공하고, 또한 그 사람의 마음이 만족스러워지는 까닭에 침상은 부드러워진다. 머리 속이 평화롭기 때문에 베개가 푹신푹신하게 느껴진다. 여호와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르는 그의 침상 전체를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라. 그 얼마나 세심하고도 끈질기신 배려인가!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서 이 약속을 유업으로 물려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그 축복을 포기하셨으며, 침상에서 편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하지만 거기 달리신 상태에서도, 잠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을 받치사 기운을 북돋워 주셨고, 그래서 그분은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돌아가셨다. 우리는, 이 세 구절 속에서 선포된 축복이 궁핍한 자에게 무심코 돈을 주거나 혹은 그것을 사회 단체에 기부하는 이들 모두에게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런 행위도 선하다. 혹은 그런 행동이 단순히 습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그런 행동이 아니다. 여기서의 축복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습관을 지닌 자들을 위한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배고픈 자를 먹이며 벗은 자를 입히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궁핍한 자를 생각해 줄 역량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자를 성도로 여기는 것은, 마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바람직스럽게 여기는 것과 같다. 왕께서 영광 중에 오시는 날에 이 점과 관련하여 신앙인이라 자칭하는 자들이 날카로운 검증을 받게 될 것이다. 4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5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6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7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9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탄원자와 그의 하나님간에 벌어지는 논쟁을 접하게 된다. 그는 궁핍한 자에게 친절한 친구였지만, 정작 자신이 궁핍에 처한 때에는 약속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주님의 경우에도, 본문의 항변과 매우 잘 어울리는 어둡고 황량한 밤이 있었다. 4절. “내가 말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께서 이전에 내게 은총을 베푸사 나로 하여금 형통한 때에 관대하게 행동하도록 하셨으므로, 이제 역경에 처한 나의 영혼에게 은혜 베푸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소서. 이는 공의를 호소하는 내용과는 무관하다. 탄원자는 단지 약속된 상급만을 암시하며, 하나님의 은총에 입각하여 탄원을 올린다. 우리 구속주의 경건한 입에서 그러한 간구가 나올 수 있었을 때에는, 그분의 입술에서 쓰디쓴 몰약이 떨어질 때에는 그분의 낮아지심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슬픔의 근원이 여기에 있었다. 죄와 시련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이다. 시편 기자에 있어 죄란 하나님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악함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여기서 참된 회개의 진수를 파악할 수 있다. 만일 무흠하신 구주께서 성도의 죄를 스스로에게 전가시키지 않으셨다면 이러한 표현을 결코 사용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로서는, 전가된 죄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직접 범한 죄를 분명히 지적하는 이 구절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이 간구를 다윗과 다른 죄악된 신자들에게 적용해 보면 이상하게도 참으로 복음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내가 결백해서가 아니라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이것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모든 탄원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것은 얼마나 은혜와 일치하는가! 인간적인 공적과는 또 얼마나 무관한가! 탄원자가 궁핍한 자를 기억했다는 사실도 단지 간접적으로만 암시될 뿐이며, 커다란 범죄로 말미암아 은총에다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 계시하신 선례이므로, 이를 좇아야 한다. “내 영혼을 고치소서.” 내가 점점 쇠약해져 가는 때가 이르렀으니, 이제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고, 나를 강하게 하시되 특히 내 영혼을 강하게 하소서. 우리는 몸의 평안보다는 영혼의 치유를 더 간절히 소원해야 한다. 우리는 영혼의 치유에 관해 많이 듣지만, 종종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을 망각한다. 5절.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악을 행하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특성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다. 더 훌륭한 사람일수록 더 독한 비방의 표적이 된다. 악한 혀는 분주하며, 결코 진리를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비방을 당하셨다.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그가 사라지기 전에는 그 원수들이 만족할 수 없었다. 악인들이 보기에 세상은 의인들을 남겨 둘 수 있을 정도로 넓지가 않다. 성도들의 몸은 사라질 수 있지만, 그들에 대한 기억은 그 대적들에게 거침돌이 된다. 바울의 경우에 대적들은,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외쳤다(행 22:22). 만일 핍박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교회는 참으로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도둑들은 어떻게든 양초들을 모조리 꺼버리려 할 것이다. 세상의 빛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다. 가련하고 눈먼 박쥐들은 등잔에 날아들어 그것을 넘어뜨리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살아 계시며, 성도들과 그들의 이름을 보존하신다. 6절.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가 찾아온 것은 조롱하기 위함이다. 여우가 병든 양을 찾아와서 부드럽게 말하지만, 여우는 양을 잡아먹으려는 바람에서 그 입술을 핥는다. 친절한 척하지만 그 마음속에 악의를 지니고서 남의 침실에 몰래 잠입하는 것은 야비한 일이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위선적인 말이 항상 지긋지긋하며 역겹다. 시련당하는 성도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꼬투리 잡으려고 접근한 거짓된 자들에게서 그런 말을 많이 들으셨다.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새는 깃털로 둥지를 만든다. 화학자들은 가장 달콤한 향기를 발하는 꽃들로부터 독을 추출할 수 있다. 악의에 찬 눈으로 보면, 가장 순수한 언행들 속에서도 비방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거미가 아무런 외부 재료도 없이 거미집을 짓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비열한 자들이 당신 주위에 둘러서서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말을 악한 쪽으로 돌릴까 하고 기다리고 있다면, 이는 결코 작은 시련이 아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곤경을 끊임없이 당했다.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그는 거짓말을 만들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같은 곳에서 두루 퍼뜨리고 다닌다. 그는 집을 나서자마자 그 거짓말을 퍼뜨리며, 친구로서 보살펴야 할 병든 자에 대해 그렇게 한다. 사실, 일관성 없고 닥치는 대로 발하는 병든 친구의 말에 대해서는 비방할 것이 아니라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마음이 시커먼 야바위꾼이 아닌가! 마귀의 자식이 아닌가! 비방을 전하는 일이라면 그 얼마나 먼 곳까지 나아가려 하겠는가! 그들은 거짓말을 기록한 플래 카드를 기꺼이 공중에 매달 것이다. 자그마한 결함도 크게 과장되고, 말을 잘못하면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다. 그것은 실수이자 범죄이다. 만일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면 대개 사람들은 그 중에서 나쁜 의미를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다. 무할례자의 딸들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드에 가서 말하고 아스글론에 가서 선언하라. 쓰러진 사람을 치는 것은 비열한 짓이지만, 사람들은 기독교 위인들을 그처럼 비열하게 대해 왔다. 7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첩자가 비밀 장소에서 자기 동료들을 만나 함께 수군거린다. 왜 그들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는가? 그들은 병든 전사를 두려워했는가? 아니면 그들의 계획이 너무도 반역적이어서 은밀하게 음모를 꾸며야 했는가? 악인들의 만장일치에 주목하라:”다.” 수탉을 쫓기 위해 개들이 얼마나 흔쾌히 마음을 모으는가! 우리가 거룩한 일을 도모함에 있어 악의에 찬 계교를 꾸미는 핍박자들의 절반만큼이라도 합심하면 좋으련만! 우리의 지혜가 그들의 간교함의 절반만큼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그들의 수군거림은 비겁할 뿐만 아니라 간교했고, 모든 준비가 끝나기 전에는 그들의 음모가 알려지지 않는다.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그들은 머리를 모아 계교와 음모를 꾀한다. 아히도벨과 압살롬의 나머지 모략가들이 그러했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그러했다. 악인들은 계교에 능하며 깊이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신실한 자를 해치는 것이다. 풀 속에 숨은 뱀들은 결코 좋은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8절.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그들은 수군거리기를, 그에게 어떤 저주가 임했다고 한다. 그들은 넌지시 말하기를, 추잡한 비밀이 그의 성품을 더럽히고 유령이 그의 집에 출몰한다고 한다. 이처럼 음험한 말 주위에는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에워싸고 있어서, 악의에 찬 수군거림이 얼마나 은밀한지를 암시한다. 심지어는 우리 주님도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았다”는 말을 들으셨다(사 53:4). 그분의 대적들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고 그를 영원히 그들의 손에 넘기셨다고 생각했다.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그들은 그의 질병이 치명적이기를 바랐으며,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 근사한 소식이었다. 의인의 거룩함이 그들의 죄를 은근히 꾸짖었던 만큼, 이제 그들은 의인의 경건함으로 인해 당했던 제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었다. 위클리프(Wickliffe)의 침상 주위에 모인 수도사들처럼, 그들의 예언은 정확하다기보다는 스스로 기쁨에 겨워하는 것에 불과했다. 병든 자에게는 그것이 쓰라린 고통이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을 잠시 동안 곤경의 회초리로 치실 때, 대적들은 그들이 사형 집행을 당하기를 기대하며, 그들의 장례를 자축하기 위해 기뻐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성급했고 자신의 노랫가락을 다른 곡조로 바꿔야만 한다. 우리의 구속주께서 이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즉, 그분은 무덤을 떨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신 것이다. 그분의 무덤을 큰 바위로 막고 인봉하며 또한 감시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분이 다시 일어나심으로 대적들을 혼비백산케 하셨다. 9절. “그렇습니다.” (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역자 주.) 여기서 시련의 절정이 암시된다. 이 표현을 통해 기자는, 마치 그와 같은 악행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강조적으로 확언하고 있다. “나의 신뢰하는 바.” 유다는 주님을 위시한 사도 일행의 회계를 맡은 자였다. 큰 신뢰를 받았던 자가 불성실하게 행동하면 그 행동은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내 떡을 먹던.” ‘손님으로서뿐만 아니라 의존하는 자로서 내 상에서 먹던.’ 유다는 주님과 같은 접시에 놓인 음식을 먹었으며, 따라서 노예의 몸값을 받고서 주님을 팔았던 그의 배신 행위는 더욱더 저주받은 것이었다. “나의 가까운 친구.” 원문을 직역하면, “나의 화평의 사람”이다. 즉, 나와 아무런 불화도 없고, 나와 연합한, 그리고 내게 평화와 위안을 주기 위해 일했던 사람을 가리킨다. 다윗에 대해 아히도벨이 그러했고, 우리 주님에 대해 가룟 유다가 그러했다. 유다는 사도였고, 위대하신 스승과 함께 생활했으며, 그분의 비밀스러운 생각을 들었고, 또한 그분의 마음을 읽기까지 했다. 케사르는 숨을 거두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도?”라고 말했다. 십자가에 박은 못이 우리 주님의 손을 상하게 하였듯이, 배신자의 입맞춤은 우리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내게 등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마치 난폭한 말이 뒷발길질하듯이 나를 심하게 차버렸나이다. 곤경에 처한 우리가 예전에 우리 상에서 함께 먹었던 자들에 의해 발길질당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구속주께서 본절의 끝 부분만을 유다에게 적용하셨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아마도 이는, 그분이 유다의 이중성을 미리 알고 온전한 의미에서 그와 더불어 친교를 나누지는 않으셨고 또한 그를 깊이 신뢰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극악무도한 악의로 가득했던 제반 상황은 예수님의 죽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며, 배신은 가장 쓰디쓴 고통들 중 하나였다. 예전의 친구가 대적해 올 때, 자신의 신뢰가 배신당할 때, 그리고 호의와 친절을 베풀고 배은망덕한 경우를 당할 때, 우리는 참으로 낙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처럼 한탄스러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할 수 있다. 언약의 머리 되신 예수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의 모든 수혜자들을 일일이, 그리고 즉각적으로 도와주신다. 10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10절. “그러하오나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쫓기며 놀란 영혼이 하나님께 돌이키고 있다. 그 영혼은 “그러하오나 여호와여”라는 말로써 한숨을 돌린다.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동정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은총의 소망에 매달린다. “일으키사.” 나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나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소서. 예수님은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그분은 무덤에서 살아나사 승천하심으로써 겸비하신 추락을 마감하셨다.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이는 분명 구약적 간구로서 기독교 정신에서 현저히 벗어난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윗이 사법상의 직무를 수행했던 사람이라는 점과 또한 그가 자신의 개인적 보복심과는 상관없이 그의 권위를 모욕하고 그의 공적 성품을 훼손시킨 자들을 징벌해 주십사 하고 간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위대한 사도이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개인적 증오심을 전혀 갖지 않으셨지만, 부활을 통해 사망과 지옥에 대해 보복하셨고, 그분의 취지와 인격을 비열하게 공격했던 모든 악의 권세들에게 복수하셨다. 나는 이 시편의 매 구절을 억지로 그리스도께 적용하고 싶지는 않으며, 옛 경륜을 넘어 복음의 더 밝은 빛에 이 내용을 비춰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11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2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13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11절. 우리 모두는 선에 대한 증거를 보면 즐거워한다. 시편 기자는, 깊은 낙심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대적의 손에 완전히 넘겨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상서로운 징조로 여겼다.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신자는 설령 대적들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그들에게 패배하지 않은 사실을 기뻐해야 한다. 설령 바라는 바를 모두 얻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들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한다. 우리 속에는 불신자들이 의기양양해 하며 비웃는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만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개들의 입이 닫힌다면, 우리는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한다. 마귀가, 궁핍한, 과오를 범한, 몸져 누운, 버림받은, 그리고 비방당하는 성도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온갖 악한 말을 늘어놓아도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며 마침내는 슬그머니 달아나고 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장 연약한 성도라도 승리할 것이다, 설령 사망과 지옥이 그의 길을 가로막을지라도.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내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며, 나는 그 점을 마음으로 확신합니다. 또한 나는 주께서 나를 다루시는 방법에 대해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주께서 그 모든 일들 중에 나를 사랑하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절.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주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나는 순결하고 의로운 삶을 통해 비방자의 손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백함과 일관성은 하나님의 뒷받침에 따른 결과이다. 우리는 굽이 없는 유리컵과 같다. 그것을 바로 세우려면 손으로 잡아 주어야 한다. 스스로 방치되면 우리는 넘어지고 쓰러지며 또한 엉망진창이 된다. 만일 우리가 큰 죄에 빠지지 않고 보존된다면, 우리는 매일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 다른 이들이 죄를 범할 때, 우리는 자신이 은총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죄에 빠지는 것을 볼 때마다, 성도는 오늘은 그 사람이지만 내일은 내 차례라는 마음을 지니고서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완전함이란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상대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누릴 때 겸손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에 의해 제시되는 결함들과 무관하다 해도, 우리에게는 비난받아 마땅한 면들이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자랑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울 뿐이다.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그는, 자신을 돌보시며 자신에게 미소를 던지시는 하나님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했다. 세상 군주 앞에 서는 것도 더없는 영광으로 간주되는데, 하물며 영원하신 왕의 궁전에서 영원토록 섬기며 살아간다면 어떠하겠는가? 13절. 이 시편은 송영으로 마감된다. “여호와······찬송할지로다.” 그분께 영광을 돌리자. 서두에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축복은 이제 종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으로 화답된다. 우리가 여호와의 복되심을 더하게 할 수는 없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원을 피력할 수는 있다. 그분은 이를 기뻐하신다. 이는 마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부터 우리가 자그마한 꽃을 선물받을 때 기뻐하는 것과 같다.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적 칭호로서, 택하신 백성을 향한 그분의 특별한 관계를 시사한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무한히 지속할 것임을 최대한 강조한 표현이다. 우리는 죽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끊임없이 지속된다. “아멘 아멘.”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백성들은 거룩한 확언을 거듭함으로써 이 시편 내용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자. 이 마지막 구절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가 적용할 수 있는 기도이지만, 이를 가장 감미롭게 노래할 수 있는 자들은 다윗처럼 극한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주해와 설명들] 머리말. 아람어 역본에는, “이는 다윗이 궁핍한 자들을 감독할 자들을 임명할 때 지은 시편이다”라고 되어 있다. -아담 클라크. 시 41편 전체. 그리스도와 배신자 유다에 관한 예언.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닐에 의해 인용됨).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주해가들은, 곤궁에 처한 자들을 돌봄으로써 그들에게 자비와 동정심을 나타내는 일을 이 시편이 추천하고 있다는 데에 대체로 일치된 의견을 보인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여기서 역경에 처한 자들을 지혜롭고 자비롭게 판단하는 자들의 공평함을 추천하고 있다고 하는 주장도 매우 설득력이 있다. 사실, 분사형 “마스킬”(lykcm)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아울러 고찰되어야 할 사항은,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는 곤경과 관련하여 지혜롭고 신중하게 판단하는 자들을 다윗이 복되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의심의 여지 없이, 다윗에게 임한 곤경은 의로운 욥에게 닥친 것과 같은 곤경이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이 그를 너무도 혹독하게 다루시는 것을 보고서, 그를 가리켜 가장 악한 자들 중 한 사람으로 여겼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이 곤경에 시달리는 자들을 정죄와 비난을 받아 마땅한 자들로 여기는 오류를 너무도 흔히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대체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관련하여 성급하고 분별 없이 말하는 편이며, 말하자면 곤경 속에서 괴로워하는 자들을 가장 깊은 나락으로 빠트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처럼 성급하고 방자한 마음을 제지하기 위해 다윗은 이르기를, 말을 함부로 하여 자기 이웃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한다. 그런 자들은 이웃에게 닥친 곤경을 올바로 분간하며,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이 너무도 쉽게 이끌리기 쉬운 냉정하고 부당한 판단을 지혜롭게 누그러뜨린다. -존 칼빈.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궁핍한 처지를 권고하셨듯이, 우리도 궁핍한 처지에 계신 그분을 권고해야 하며, 그분이 당하신 고난을 권고해야 하고, 또한 가련하고 곤궁한 지체들 가운데서 당하시는 그분의 고난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우리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해 여호와의 축복과 구원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그분을 위해 자기 형제들을 사랑하고 구하는 자들에게 축복과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조지 혼.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빈약한 자”란, 세상의 궁핍한 자들 전체를 가리키거나 궁핍한 성도들을 특별히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한 개인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단수형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사한다. 40편 마지막 절에서는 그분을 가리켜 “가난하고 궁핍하오나”라고 표현한다. -존 길.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성경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궁핍한 자를 돌보는 일에 참여케 하는가 하는 점이다.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궁핍한 자를 동정하라’고 명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단지 그런 식으로만 언급되어 있다면, 충동적이고 성급한 동정심의 분출로 인해 그들의 필수품들까지 내어놓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단순한 동정이라고 하는 감정보다 더 나은 보증을 제공해 준다. 그 감정은, 흥분시키는 데에 아무리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통제되고 억제되어야 한다. 감정이란 애매하고 변동이 심한 보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공상에 의해 그릇 이끌릴 수 있다. 삶의 엄연한 현실이 그것을 역겹게 만들 수도 있다. 낙심이 그것을 소멸시킬 수 있다. 배은망덕이 그것을 악화시킬 수 있다. 기만은 그것을 잘못된 대상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다.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그것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지각 가능한 대상에 대한 느낌을 필요로 한다. 추상적이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혼의 결핍 상태가 열정과 생기를 지닌 감정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성경은, 궁핍한 자를 돕는 것을 단순한 본능적인 동정심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권고’의 주제로 삼고 있다:”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권고한다는 것은 신중하며 따분한 일이다. 그것은 어떤 친절을 베풀고 떠들썩하게 감사를 받는 일과 별로 상관이 없다. 성경은 그 취지를 부주의하거나 무분별한 마음으로 인해 빠질 수 있는 폐해로부터 구해 준다. 성경은 그것을 보다 높은 인식 역량에다 맡긴다. 그 인식 역량인즉, 선행에 싫증내지 않고 보다 꾸준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며, 또한 역겨움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보다 꿋꿋하게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우리에게 빈약한 자를 ‘권고하라’고 명하며, 그 덕목을 실천함에 있어 단순한 정감뿐만 아니라 치밀한 생각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 일을 추진함에 있어, 우리는 여러 가지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어떤 때에는 권고 대상의 실질적 관심사보다 단순한 연민에 더 이끌리는가 하면, 자신이 기대했던 사의나 정직한 태도를 마주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분한 마음과 실망에 사로잡혀 지레 물러나는 때도 있다. 또 어떤 때에는 영원을 망각하고서 조바심과 염려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권고’는 우리를 이 모든 오류들로부터 구해 주는 역할을 한다. 권고를 길잡이로 삼을 때, 궁핍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탄탄한 원리로 성숙되어 간다······. 우리 모두에게 분명한 사실은, 돈을 주거나 자선 기부자들의 명단에 우리 이름을 첨가시키는 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일을 판단력을 가지고서 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과 관심을 투자해야 한다. 우리는 곤경에 처한 형편이 과연 어떠한지를 직접 느끼며 조사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색으로부터 깨어나서 선행을 베풀 대상과 친숙해져야 한다. 우리는 그 빈약한 자의 병상으로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친히 자신의 손을 뻗어 지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하고 순수한 인자이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문서에도 기록될 수 없다. 하지만 만일 그 일이 기독교적 원칙에 따라 행해지면, 한마디로 말해 만일 그 일이 예수께 행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늘의 책에 기록되며, 그분의 제자들이 고대하는 면류관에 새로운 광채가 더해질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 면류관을 영원토록 쓰게 될 것이다. -토머스 찰머스(Thomas Chalmers, D.D., LL.D., 1780-1847), 성 앤드류 교회에서 극빈 환자 구제 협회(the Society for Relief of the Destitute Sick) 모임 때에 행한 설교.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언젠가 함께 동행했던 피에몬테(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역자 주) 출신의 어느 귀족이 토리노(피에몬테 지방의 주요 도시-역자 주)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나는 삶이 지긋지긋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죠. 목숨을 끊고 싶어서 강을 향해 서둘러 달려가는 중에, 나는 갑작스럽게 뒤에서 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한 어린 소년이 내 외투자락을 붙잡고서 무엇인가 간청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표정이나 태도는 막무가내였죠. 그 아이가 배운 것이라고는 매달리는 일뿐이었습니다. ‘우리 식구는 모두 여섯 명인데, 양식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답니다’라고 그 아이가 애원했어요.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습니다:’이 불쌍한 가족을 내가 왜 구제하지 않겠는가? 내게는 돈이 있고, 이 가족을 돕는 일은 불과 몇 분이면 될 것이다.’ 그 비참한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죠. 나는 그들에게 지갑을 던져 주었고, 그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했지요. 그 모습은 줄곧 내 눈에 선했으며,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강심제 역할을 했습니다. 나는 ‘내일 다시 찾아가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한 기쁨을 그토록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이 세상을 내가 떠날 생각을 했다니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사무엘 로저스(Samuel Rogers, 1763-1855), 이탈리아에서.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가 독수리처럼 활기차듯이, 기독교적 사랑은 뜨거운 심령을 동반한다. 우리가 슬퍼하며 한숨을 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간청하는 자에게 결핍된 것을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며, 시련당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며, 또한 치유해 줄 마음은 없이 고통스러워 하는 말을 들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질병이나 고통이나 재난에 시달리는 자들에게는, 이런 것들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독교적인 심령은 사랑으로 도움을 베푼다. 도움을 호소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며, 행할 바를 찾아나선다. 아니, 궁핍한 상황을 미리 예방한다. 온갖 불행에 처한 자들을 최선을 다해 도우며, 장차 닥칠지도 모를 곤경에 대처할 구제의 나무를 심는다. -조지 크래브(George Crabbe, 1754-1832). 1절. 부를 나누어 줌으로써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할 뿐 그것을 움켜잡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지는 않는 자들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가! 재물을 쌓아 두는 자는 선한 ‘간수’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나누어 주는 자는 선한 ‘청지기’이다. 상인들은 자기 상품의 희소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프랑스로 가져가기 위해 영국에서 포도주를 사지는 않으며, 인도로 가져가기 위해 프랑스에서 향료를 사지는 않는다. 힘든 사역과 노고 혹은 회개와 고행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천국에는 그런 것들이 없으며, 평안과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뿐이다. 나름대로 귀중한 상품을 지니지 않은 상인은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천국문에 도착하는 자들에게, “네가 일한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것이다. 각 사람은 자신이 행한 일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이다(계 22 :12). 우리는 이 땅에서 재물을 지니고 있으며, 이 땅에는 우리의 재물을 필요로 하는 궁핍한 자들이 있다. 하늘에는 부요함만 있을 뿐 궁핍함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당신의 돈을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당신은 내세에서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재물을 재량껏 사용할 수 있는 동안에 선을 행하라. 자신에게 재산이 있는 동안에, 억압받는 자를 구원하고 고아를 구제하라. 당신이 죽을 때 당신의 재물은 다른 이들의 소유가 된다. 등불 하나를 앞에 들고 가는 것이 스무 개의 등불을 들고 뒤에서 따라오는 것보다 밤길에 더 유용하다. 낙심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당신의 눈으로 직접 살피고, 또한 당신의 손으로 직접 도움을 베풀어라. -프란시스 라워스(Francis Raworth)의 장례식 설교, 1656. 1, 3절. 부족한 무엇을 공급받는 것은 복된 일이다. 하지만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한층 더 복되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누구를? 빈약한 자를! 세상은 그에게 냉혹하다. 그에게 선을 행하는 방법이 따로 정해져 있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을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입장도 세심하게 배려해 주라. 그 궁핍한 자가 만족해질 때까지 주라. 배고픈 자에게 곡식단을 나누어 주며, 심지어 자신의 영혼까지라도 나누어 주라. 하지만 만일 곤경이 닥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돈을 혼자 보관해 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러나 돈이 사람을 구원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돕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반면에 만일 어떤 사람이 관대하다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되’, 그분께서 친히 구원하시거나 혹은 다른 어떤 사람이나 수단을 통해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한편, ‘질병’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신다.” 이 얼마나 크신 자비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신다.” 빈약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여기 있다. 그들은 “나는 빈약한 여자이니, 내가 무슨 자비로운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병든 자들의 침상을 가장 잘 펴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라는 말씀에 비추어 보건대, 그들의 행위는 매우 큰 자비를 나타내는 일이다. 병든 자의 침상을 펼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리처드 캐플(Richard Capel). 1, 5절. “권고하는 자.” “나의 원수.” 스트리겔리우스에 의하면, 이 시편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소수 사람들과 그들을 괴롭히는 다수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대조되고 있다고 한다. -윌슨. 2절.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빈약한 자를”, 특히 병들고 궁핍한 자를 권고하는 인정 많은 자들이 자기 자신의 자애로운 행실로 인해 해를 당하는 법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들은 빈약한 자를 찾아내기 위해 지하 창고, 다락방, 비좁은 뒷길 등을 두루 살피며, 심지어는 전염병이 도는 곳도 지나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을 살리시며 보호하신다. 그 반면에 전염병을 피해 멀리 달아난 자들이 오히려 그 병에 걸리고 만다. 하나님은 자애로운 사람을 사랑하신다. -아담 클라크. 2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경건한 자에게 닥치는 그 어떤 곤경도 이 세상에서 이미 그에게 임하기 시작한 복을 훼방하거나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데이비드 딕슨. 3절.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여호와께서 친히 펼치시는 자비의 손길은 그 얼마나 세심하고 감동적인가! 여기서 우리는, 구주께서 베드로에게 가서 그 발을 씻기려 하셨을 때 그가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요 13:8)라고 말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 느낌을 받는다:’주께서 내 침상을 절대로 펴지 못하시리이다.’ 하지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의 병상을 펴지 아니하시면 거기에는 평화나 위안이 전혀 없다. 다윗은, 마치 자녀의 입에서 나오는 희미한 소리까지 포착하려고 귀를 기울이는 어머니처럼, 여호와께서 겸비하게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요청한 바 있다(시 40:1 참조). 이러한 이미지는 가장 감미로운 동정심과 겸손으로 가득 차 있다.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고 말씀하셨거니와, 이제 여기서도 병든 자를 부지런히 돌보시는 자애로운 사역을 성취하는 종의 모습으로 언급되고 있다. -바르통 부시에. 3절.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본문의 의미는 오히려 다음과 같다:”그것은 더 이상 병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의 질병을 치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스튜어트 퍼론. 3절. 의인이 질병에 걸려 불편할 때, 하나님은 그의 잠자리를 친히 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베개와 덧베개, 머리쪽과 발치와 옆구리쪽 등, 침대 자리를 모두 펴주시는 것이다. 그의 키나 성향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은 그의 잠자리를 편안하게 펴실 수 있다. 한편, 주께서 침상을 그에게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를 침상에다 맞추신다는 데서, 그분의 탁월한 솜씨가 드러난다. 만일 내게 펼 자리가 없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내 자리를 펴주실까? 내게 펼 자리가 없어도 그분은 편안한 자리를 마련해 주실 수 있다. 야곱이 땅바닥에 누워 잠들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보살펴 주지 않으셨다면 어찌 그가 천상의 꿈을 꿀 수 있었겠는가? -토머스 풀러. 3절. 하나님께서 펴시는 자리는 안락할 것임에 분명하다. -토머스 왓슨. 3절. 동양식 침상을 서양식 침상과 똑같은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동양식 침상이란 매트리스나 두텁게 솜을 넣은 누비이불 그 이상이 아니었으며, 불편해지면 그것을 뒤집어서 깔았다. 본문이 나타내는 의미도 바로 그것이다. -C. H. S. 3절. 나의 사랑하는 친구 벤자민 파슨즈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 무렵에, 나는 그를 찾아가서 “여보게, 오늘은 어떤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 머리 밑에는 세 가지 안락한 베개들이 받쳐져 있다네. 무한하신 권능, 무한하신 사랑, 그리고 무한하신 지혜 등이 바로 그것들이지”라고 말했다. 얼마 후에 브라이턴에 있는 캔터베리 홀에서 설교하면서, 나는 그가 했던 말을 언급하였다. 몇 달 후에 나는, 가난하지만 경건한 어느 젊은 여성의 임종 자리에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죽기 전에 목사님을 뵐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목사님이 벤자민 파슨즈와 그의 세 가지 베개들에 관해 하신 이야기를 저도 들었답니다. 끔찍스러운 수술을 받는 동안 나는 베개를 배고 있었는데, 의사가 베개를 치우려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베고 있으면 안 되나요?’ 하고 물었더니, 의사는 ‘아가씨, 안 돼요. 치워야 한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하지만 선생님이 벤자민 파슨즈의 세 가지 베개들을 치울 수는 없을 겁니다. 나는 무한하신 권능과 무한하신 사랑과 또한 무한하신 지혜를 벨 수 있습니다.'” -팩스턴 후드(Dark Sayings on a Harp, 1865). 3, 4절. 다윗은 질병 가운데서 자기 마음의 깊은 바닥으로부터 무슨 말을 했는가? 그는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만 간구하지 않았다. 병든 다윗은 먼저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라는 약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고 나서,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라고 덧붙인다. ‘여호와여, 내 영혼의 질병인 나의 탐욕을 멸하사 내 영혼을 치료하시며, 또한 생명을 회복시켜 주님과 새롭게 교제하게 하소서. 그렇게 할 때 내 영혼이 강건하나이다. 이 질병과 죽음에서 벗어나게만 하지 마시고, 이 죄를 없애 주소서. 이 죄는 주를 욕되게 하였고 주님과 저를 서로 분리시켰나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토머스 굿윈. 4절.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가 구한 것은 공의가 아니라 긍휼이다! 지극한 곤경에 처한 자를 위한 지극하신 긍휼이다. 공의로 말하자면 그는 마치 더러운 누더기와 같았다. 육체 가운데는 선한 것이 전혀 거하지 않는다. 또한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은 채소도 아니고 석고 붕대도 아니며, “만물을 치유하시는 주의 말씀이다”(솔로몬의 지혜서 16:12). -토마스 아퀴나스, 닐에 의해 인용됨. 4절.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은혜로운 성향이 쇠하여지고 죄가 점점 기세를 더해갈 때, 하나님은 그를 치유하며 회복시키사 힘이 되어주신다. 그리스도인은 은혜 가운데서 행할 때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지만, 죄로 인해 상처를 입는다. 따라서 다윗은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다윗이 간구한 바를 그분의 백성에게 약속하셨다:”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호 14:4).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은혜가 쇠약해지면, 그는 즉시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다윗과 에브라임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 하나님이 의사가 되사 그 질병을 고치실 것이다. 다윗 역시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했으며, 이로 인해 찬양을 드렸다(시 103:3). -사무엘 블랙커비(Samuel Blackerby). 4절 하반절. 사울과 유다는 “내가 범죄하였사오니”라고 말했지만, 다윗은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라고 말했다. -윌리엄 플러머. 5절.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여기서의 악담이란 저주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존 칼빈. 5절. “그 이름.” 하나님의 참된 종의 이름과 성품과 특권 등은 불신자들의 증오를 불러일으키며, 불신자들은 그를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윌슨. 6절.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럴 듯한 말을 많이 하지만, 그 중 하나도 참된 것이 없다. -데이비드 딕슨. 6절. 나는 브로미아르두스(Bromiardus)에게서 들은 멋진 우화를 기억하고 있다:매우 추운 어느 날 아침에, 한 새 사냥꾼이 오랫동안 주시해 왔던 자그마한 새들을 많이 잡고는 또 그물을 쳐서 낚아챌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지바퀴 새끼 한 마리가 혹한 때문에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서 엄마새에게, “가련한 새들의 재난 때문에 저토록 비통하게 우는 것을 보건대, 저 사람은 매우 자비롭고 온정적임에 분명해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엄마새는 새끼에게 지혜롭게 이르기를, 그 사람의 본심을 그의 눈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의 손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배신의 손으로 몰래 내려친다면, 아무리 그럴 듯하게 말하고 동정적으로 운다 할지라도 그를 결코 친구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6절.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1) 죄 위에 죄를 보태는 방식으로, 그는 끔찍스러운 위선으로 자신의 악의를 덮는다. (2) 나를 올무에 빠트리기 위해 그리고 내게 해악을 끼치기 위해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온갖 방식을 다 궁리함으로써, 그의 부패한 탐욕을 만족시키고자 한다. (3) 가능한 한 내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살피고 끌어내어 그것을 자신의 마음속에 쌓아 둠으로써, 나와 관련하여 부당한 추측과 비판을 내리는 근거로 삼는다. -아서 잭슨. 8절.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벨리알의 악한 행위가 그에게 달라붙었다.’ 문법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벨리알’이라는 단어는 “벨리”(ylb)와 “야알”(l[y)이 합쳐진 것으로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벨리알의 일'(‘악한 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한 것임)이라는 표현은, 결코 사함받을 수 없다고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날 가능성도 없다고들 흔히 말하는 특별하고 가증스러운 범죄를 의미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를 곤경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의 대적들은 곤경에 처한 그를 가리켜 불치병에 걸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존 칼빈. 8절. “악한 병.” 여기서 ‘다바르-벨리알'(l[ylbArbd)이 무슨 뜻인지를 규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고대의 주해가들은 대체로 이를 ‘왜곡된 말’, ‘해로운 말’, 혹은 ‘사악한 말’로 번역한다. 갈대아역은 ‘왜곡된 말’로, 아람어역은 ‘불법의 말’로, 칠십인역은 “로곤 파라노몬”(logon paranomon)으로, 라틴어역은 ‘사악한 말'(iniquum verbum)로, 그리고 아라비아어역은 ‘율법에 반대되는 말’로 각각 번역했다. 따라서 그것은 ‘심한 비방’ 혹은 ‘중상’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벨리알의 사람들’이 중상하는 자들이듯이, ‘벨리알의 말’도 중상하는 말을 뜻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말은 어떤 사람에게 달라붙어 악한 자국을 남기는 경향이 있다. -헨리 해먼드. 9절. “나의 가까운 친구.”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구속주의 고난처럼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의 공개적인 대적들은, 그의 친구로 가장하는 자들이 그를 손아귀에 넣기 전까지는, 그에게 해를 가하지 못한다. 부자연스러운 듯한 일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환대를 받은 자들이 때로는 가장 먼저 그를 대적하여 그에게 “발꿈치를 든다.” -조지 혼. 9절. “나의 가까운 친구.” 그는 나를 방문하여 사랑과 존경의 입맞춤으로 내게 줄곧 문안하였으며, 평안의 안부를 물었다. -헤르만 베네마. 9절. “내 떡을 먹던.” 오늘날의 아랍 베두인들간에는 함께 떡과 소금을 먹는 자나 그의 소유물에 대해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러한 정서가 당시 히브리인들간에도 퍼져 있었다면, 본문은 매우 강렬한 의미를 담은 표현인 셈이다.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뒷발꿈치로 공격하는 말의 모습에서 이끌어낸 은유이다. 우리 주님도, 수사학적 예증이나 강조의 일환으로, 요한복음 13:18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 -조지 노이스(George R. Noyes, D.D.). 9절.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는 자기 주인을 발길질하는 짐승을 암시하는 듯하다. 혹은, 땅에 넘어진 자를 경멸하는 뜻에서 걷어차거나 짓밟는 행위를 암시하는 듯하다. -아서 잭슨. 9절.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버릇 사나운 짐승이 뒷발질하듯이 나를 걷어찼으며, 곤경에 처한 나를 모욕했나이다. -다니엘 크레스웰. 10절.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이는 다음 두 가지 의미들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1) 해를 끼치는 자에게 친절을 베풀게 되기를 간구함(시 35:13처럼). 자신의 손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선을 베풀며, 심지어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자들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은, 선하고 용감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2) 악행에 대한 징벌을 간구함. ‘나로 하여금 그들을 징벌할 수 있게 해주소서.’ 그가 그들의 재판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집행하는 자라는 것이다. -마틴 가이어. 10절.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다윗은 평범한 백성들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왕으로서 권위를 부여받은 인물이었다. 그가 대적들에게 응분의 징벌을 선언하고자 한 것은, 육신의 충동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자기 직무의 성격 때문이었다. -존 칼빈. 11절.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게 대적들이 없기 때문이 아니며, 또한 나를 압도하는 곤경이 전혀 내게 닥치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따라서, 수많은 곤경들이 기록되었을 때 그는, 마치 빚을 갚은 상인이 그 금액을 채무 장부에서 지워버리듯이 그것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많은 곤경’이 적혔던 자리에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고 적었다. 그분은 모든 죄들을 사하셨기 때문에, 모든 곤경들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그분 이외에 다른 어떤 구속주나 조력자 혹은 위안자도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 주실 것이다. -헨리 스미스. 11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알 수 있다. (1) 다윗이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확신하였는가 하는 점. (2) 다윗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신시켜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렸는가 하는 점. 먼저, 다윗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두 가지 논거를 통해 확신했다. 첫째 논거는 그의 대적들로부터 이끌어냈다. 즉, 그들의 기대가 제지당했으므로 주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둘째 논거는 그 자신의 상태로부터 이끌어냈다. 즉, 그의 상태는 대적들에 의해 전혀 훼손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나아졌다는 것이다······여기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깨달음에 관해 이야기하며, 비록 자신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점은 알고 있노라고 말한다. 또한 그 점을 알고 있는 한, 그는 다른 문제들을 크게 염려하지 않았고, 세상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할까 하는 점도 염려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점을 확신하는 자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창조주로서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시며, 자신이 지으신 것들 중 어느 하나도 미워하지 않으신다. 특히 택하신 자녀들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서 다른 피조물들에 비해 더욱 각별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는 모든 것에 대해 확신을 지닌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좋은 것을 하나도 아끼지 않으시며 심지어 당신의 독생자까지도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다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 어느 자녀가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확신할 때, 그는 아버지에게 이것 저것을 담대히 구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그분께 무엇이나 담대히 구할 수 있다. 이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리스도께 단 두 가지 사항만 상기시킨 것과 같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는 점이고, 둘째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 11:3). 그분이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를 그분께 말씀드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이 그를 사랑하시므로 꼭 필요한 조치를 취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도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주님,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그 영혼이나 육신을 위하여 이것 저것을 원하나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께 무엇을, 언제, 혹은 어떻게 해달라는 식으로 정해 드릴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일을,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행하실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실을 알고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또한 그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할지라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역시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실만은 우선적으로 확신해야 하며, 다른 모든 것을 확신하지 못해도 이것만은 확신해야 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택함받은 사실을 확신하라고 권면한다. 욥은,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욥 19:25)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구속함받은 사실을 확신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여기서 다윗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도록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그 점을 확신한다면, 우리가 택함과 구속을 받은 것도 확실하며, 우리의 소명도 확실하고, 또한 우리의 구원도 확실하다. -윌리엄 버턴(William Burton, 1602). 11절.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들의 손에서나 다른 어떤 곤경으로부터 구원하실 때, 이를 통해 우리는 다윗처럼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은총을 확신할 수 있다. 한편,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를 사랑하신다면 교회가 대적들로 인해 곤경과 괴롬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인즉,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분의 사랑이 교회를 구원하시는 가운데 더욱 분명히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친구는 어려운 시기에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듯이,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우리를 도우시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아담의 타락은 한편으로 징벌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사함을 통해 그분의 자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분의 공의와 사랑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닥치는 곤경들은, 먼저 죄로 말미암은 우리의 황량한 상태를 드러내며, 둘째로, 우리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과 무능함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셋째로,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찬송과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로만 돌릴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는 대적들에 의해 시달릴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는 나사로가 비록 병에 걸리긴 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과 같다. 주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셔서 그를 회복시키셨던 것처럼, 그분은 교회를 사랑하시므로 교회를 회복시키신다. -윌리엄 버턴. 11절.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된 자들을 지키시며, 그 대적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신다. 고난 주간이 지나면 부활절이 도래한다. -J. P. Lange’s Commentary. 12절. “완전.” 이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것이다. 방주 밖의 모든 사람들이 멸망당할 때, 노아는 방주 속에서 보호를 받았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주었던 붉은 줄(수 2:18)과 같다. 여리고 성의 다른 모든 이들이 진멸을 당했을 때 그 줄은 라합의 생명을 보존해 주는 특허장 역할을 했다. 이러한 “완전”은, 이 땅 이외에 하늘나라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칼이 들이닥쳤을 때 라합의 줄이 다른 모든 것들보다 그녀에게 소중했듯이, 죽음이 임할 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완전”이 온 세상보다 더 귀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자신 속에 이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은 염려하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어떤 일이 닥칠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만일 사탄이 공격을 해오면, 이것이 증거하는 투구의 역할을 한다. 만일 사탄의 화살이 날아오면, 이것이 그것들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한다. 만일 고난의 홍수가 우리를 휩쓸어 가려고 하면, 이것이 우리를 태워 줄 배의 역할을 한다. 설령 온 세상이 우리 얼굴에다 진흙과 오물을 던진다 해도, 우리는 더 이상 흉하게 일그러지지 않으며,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딸”(시 45:13), 곧 그리스도의 교회는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윌리엄 버턴. 12절. “나를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혹은, ‘나를 주의 앞에 확고히 세우시나이다.’ 주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게 하신다는 뜻이다. 혹은, 주의 성전에서뿐 아니라 주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혹은 주께서 특별히 임재하시는 땅에서 주를 섬기게 하신다는 뜻이다. -매튜 풀. 13절.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얻는다. (1)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분은 그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위해 위대하고 자비로운 일들을 행하셨고, 더 좋고 더 많은 일들을 예비하고 계신다. (2)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의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분의 존재와 복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 (3) 큰 사랑과 열정으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아멘 아멘”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사실에 대해 이중으로 확증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하며,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게 하자. -매튜 헨리. 13절. “아멘 아멘.” 시편의 기자가 여러 사람이듯이, 이들 전체는 한 권의 책으로 구성되지도 않는다. 사실상, 시편은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을 구분해 주는 경계선은 매우 분명하다. 41편, 72편, 89편, 그리고 106편의 끝 부분에서, 송영에 이어 엄숙한 “아멘”이 한 번이나 두 번 언급되고 있다. 이는 한 책이 끝나고 다음 책이 시작되려 함을 암시한다. 시편들을 보다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각 책에 나름대로의 특징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제1권에서는 “야웨”(여호와)라는 성호가, 그리고 제2권에서는 “엘로힘”(하나님)이라는 성호가 각각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플럼프트(E. H. Plumptre, M.A., Biblical Studies, 1870). 또한 시편의 제1권과 제2권간에는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차이가 있다. 제1권에서는 머리말이 딸린 모든 시편들을 다윗의 저작이라고 분명히 밝히는 반면에, 제2권에서는 일련의 시편들이 레위 지파에 속한 노래하는 자들의 저작으로 언급된다. -스튜어트 퍼론. 이러한 구분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현재로서는 확언할 수 없다. 제롬은 마르셀라(Marcella)에게 보낸 서신에서, 시편이 히브리어 원문상 다섯 권으로 구분되어 왔다고 언급했다.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도 같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언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그들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각 권의 맨 마지막에 첨부된 찬양 형식이 칠십인역에 나오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구분이 칠십인역 번역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한 구분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여 새 성전에서의 여호와 예배를 확립하고 난 무렵에 에스라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에스라는 모세 오경의 구분을 본떠서 그렇게 구분했을 것이다. 히브리어 원문상의 시편을 이처럼 구분함에 있어서, 주제별 모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 -존 칼빈. 시편 제1권을 구성하는 41개의 시편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연관된 내용이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대망했던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42편에서 시작되는 제2권은 주로 그리스도의 유아교회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윌슨. 현대 찬송가들이 해마다 몇 편씩 첨가되는 경우를 시편에도 적용해볼 수 없을까? 그러한 적용이 가능하다면, 순전히 다윗의 저작인 시편 제1권은 급속히 첨가된 다른 성가들에 비해 핵심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C. H. S. [설교힌트] 1절 상반절. 경건하고 빈약한 자를 권고함으로 말미암아 부수적으로 수반되는 축복들. (1) 감사를 배운다. (2) 인내를 배운다. (3) 종종 위대한 은혜의 승리를 목격한다. (4) 기독교적 체험을 얻게 된다. (5) 우리의 권고를 받는 자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준다. (6) 선행의 즐거움을 누린다. (7) 겸비하신 구주와의 친교에 들어간다. 1절. 스몰 폭스(Small-Pox) 병원들의 지원 현황은 추천할 만하다.-스콰이어(Squire) 주교(1760). 이런 종류의 수많은 설교들이 이 본문을 기초로 행해졌다. 2절.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경건한 자들에게 보장된 지상적인 축복은 어떤 것들이며, 이생과 관련된 축복이란 대체로 어떤 것인가? 2절 중반절. 곤경 중에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급함으로부터, 절망으로부터, 죄악된 수단들로부터, 난폭한 공격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하는 폐단으로부터. 3절. 연약한 가운데 얻는 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며,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끝까지 지속되며, 죽음을 맞아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은혜의 실재를 입증하고, 또한 다른 이들을 믿음에로 이끄는, 내적인 힘. 3절 하반절. 천상적인 시중. 4절 상반절. 반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말:“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회개, 겸손, 진지함, 믿음, 끈기, 하나님 경외 등을 표현하는 말이다. 4절. “내 영혼을 고치소서.” (1) 유전성 질병으로서, 수많은 장해들을 야기시킨다-노골적인 범죄, 불신, 은혜의 쇠퇴 등. (2) 그 질병에 맞서 싸우는 영적 건강-영적 고통, 소원, 기도, 노력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3) 능력을 입증받으신 의사. 그분의 말씀으로, 그분의 피로써,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써 치유하셨고 또한 치유하실 것이다. 4절. “내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이 고백은 개인적이며, 분명하며, 핑계를 대지 않으며, 또한 포괄적이고도 이해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주께.” 5절.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대적들은 무엇을 바라는가? 우리는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가? 예컨대, 기독교적인 삶과 이름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것을 기도로 주께 고하라. 악인들로부터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6절 상반절. 천박스러운 방문의 어리석음과 죄악됨. 6절 중반절. 본문에 대해 ‘넝마주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모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모은 것을 어디에 두는가-“그 중심에.” 그것으로써 무엇을 하는가? 그것을 통해 그는 무엇을 얻는가? 그것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7-12절. 사람이 병상에 누워 있으면, 자신의 대적들과 친구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더욱 소상하게 알게 된다. 9절. 가룟 유다의 변절. 11절. 시험으로부터의 구원, 이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표시이다. 12절. 본문은 은혜받은 자들의 표시를 드러낸다. (1) 그들의 완전함이 밝혀진다. (2) 하나님이 그들의 성품을 보존하신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거한다. (4) 그들의 신분은 안정되고 지속적이다. (5) 그들의 영원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 13절. (1) 찬양의 대상-여호와, 언약의 하나님. (2) 찬양의 성격-시작도 끝도 없음. (3) 찬양에의 참여-“아멘 아멘
2018/06/09(토) “시편 41:1-13”/ 작성: 김대인
본문 : 시편 41:1-13
찬송 : 456장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가난한 자를 향한 위로와 회개(1~5)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41편은 다윗의 시로 인도자의 지휘에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그 기도가 응답된 이후에 드리는 감사의 찬양시로서, 함께 부르는 회중들의 신앙과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주는 시편입니다. 기록 시기와 배경에 대해서 밝히는 내용은 없으나, 본문의 내용으로 보건대 시인은 범죄함으로 인해 질병을 얻었으며, 원수들의 비방속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본문 9절에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 하였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대적자로 바뀌는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많은 학자들은 시인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유랑하는 가운데 지은 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절은 복이 있다는 히브리어 ‘에세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이 시작될때에도 ‘에세르’ ‘복 있음이여’로 시작하고, 제 1권의 마지막인 시편 41편도 ‘복 있음이여’로 문을 열고 있습니다. 즉 시편의 제 1권이 말하는 전체적인 주제는 누가 복이 있는 자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복된 삶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각 시편마다 다양한 복과 복된 삶에 대해서 기록하였지만, 오늘 본문인 41편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삶이 곧 복된 삶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경제적인 궁핍, 형편의 어려움, 실패와 절망, 갑질과 억압에 고통당하는 이들을 향해 마음다해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친절을 베풂이 나의 선행에 되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향하기는 쉬우나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향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더구나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말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물질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고, 넘어지고 실패한 이들은 누군가의 일으켜 세워줌이 필요하며, 억압에 시달린 이들은 억압으로부터 자유함을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보살피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사칼’은 연민의 마음 뿐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까지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어려운 형편과 상황에 처한 이들을 구체적인 행위로 돕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시간과 열정 뿐만 아니라 물질도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 다해 가난한 이를 돕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재앙에서 건져주십니다. 잠언 19장 17절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백성의 삶 전부를 지켜주시고 복을 내려주시며,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십니다. 본문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것은 되돌려받을 수 없는 낭비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소비를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며, 하나님께서 대신하여 갚아주신다면 베푸는 자의 삶은 활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병상의 자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싸매어주심으로 인해 회복하고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사실 시인의 상황은 누군가를 도울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4~5절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나의 원수가 네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자신의 형편 또한 넉넉하지 못하고 평안한 상황이 아닐지라도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음을 아는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가난한 자들이 생기고 아픔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흉악한 범죄가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는 총과 칼을 들고 싸우며, 배를 굶주리며 말라가는 사람이 있고, 목숨을 걸고 난민생활을 하게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무관심하셔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악때문입니다. 내 욕심이 누군가에게 주어져야 할 것을 빼앗았습니다. 더 편안하고자하는 마음이 누군가를 더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쓰지 않을 물건이나 상품을 사느라,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아픔을 외면했습니다.
이 인식이 있다면 고통스런 세상을 보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용서, 사랑과 자비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욕심으로 뭉쳐있는 나도 그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원수를 향한 기도(6~13)
6~13절에는 다윗이 원수들을 향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병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도 원수들은 다윗이 더욱 더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도록 악담을 일삼았습니다. 누군가의 파멸을 고대하며 저주와 악담을 하는 원수의 마음은 얼마나 처참하고 황폐하겠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하면 미움을 받는 사람이 상하기 전에 미워하는 이의 마음이 먼저 무너지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다윗의 파멸을 고대하는 원수의 마음이 그럴 것입니다. 그럼에도 원수는 끊임없이 다윗을 향한 저주와 거짓, 증오와 헛된 꾀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본문 6~8절입니다.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혹독한 질병속에서 원수의 간악한 계획들을 온몸으로 받아야하는 다윗은 시를 노래하는 동안에도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알고 당하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지만, 더 괴롭고 아픈 상처는 가깝게 믿음과 마음을 나누던 친구가 나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가까운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3년동안 함께 먹고 마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야기하였고, 많은 추억들을 공유하던 관계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진 관계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안에서 나눌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나누며 살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가룟 유다는 거짓 입맞춤으로 스승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대제사장 무리들에게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가룟 유다만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사랑하는 제자 외에 모두 주님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1-23절입니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원수들의 적대, 친구의 배신, 끝을 알 수 없는 투병생활속에 있다면 누구도 위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만이 구원임을 알고 기도합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사람은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제든 내 발등을 찍을 수 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인생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 할수 있습니다. 자신있던 건강도 갑자기 찾아오는 질병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십니다. 시인 다윗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하나님을 대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신실하게 반응하고자 다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사업도, 가정도, 친구도 우리의 목적이자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삶에 찾아오는 어떤 어려움도 견디고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원수에 둘러쌓이고 육체의 질병에 신음하고 있어도 ‘여호와의 은혜’라는 반석 위에서 견고하게 서며 시편 41편의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많이 가졌으나 영혼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육체적인 질병과도 싸우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의 질병과도 싸울 것입니다. 원수는 물론이거니와 믿었던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같은 삶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께 매여 살아갈 때, 삶의 목적 되신 하나님께서 환경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영원의 기쁨과 희락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려야만 찬송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오늘도 말씀을 통해 봅니다. 원수가 미워하고, 질병이 나를 억누르며, 친한 친구가 배신하여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아침이 우리 삶을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세우는 아침이 되게 하옵시고, 주님께 매임으로 세상의 것들에 자유하며 영원을 누림으로 유한한 것들에 미련을 버리는 결단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와준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때 그 경험이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습니까?
2.현재 내 주변에 가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가난한 자를 도우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말씀(잠19:17)을 읽고 내가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4. 다윗처럼 나도 원수들을 향해 기도한다면 어떤 기도를 할지 기도문을 적어봅시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라는 신앙의 고백도 적어봅시다.
(작성: 김대인)
시편 41편 본문 및 주석 정리, 질병과 원수들 속에서 구원을 간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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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개역개정성경 본문 및 주석
시편 41편 개요
시편 41편은 고뇌와 한탄이 가득 담긴 시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으로 시작하여 찬송으로 마치기 때문에 찬송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편 41편은 다윗의 시로서, 심각한 육체의 질병 속에서 겪는 고통과 아픔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러한 고통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함께 사단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 줍니다.
시편 41편을 네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1-3절), 둘째, 다윗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묘사들(4-9절), 셋째, 주께서 주시는 소망에 대한 표현들(10-12절), 그리고 주님에 대한 찬송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고통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1절, 복 있는 사람 : 이 단어는 시편 1편을 시작하는 단어와 같습니다. 같은 단어가 제1권의 첫번째 시인 1편과 마지막 시인 41편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축복에 대한 동사가 13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함께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칭찬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시 103:1-2 참조). 하나님을 향하여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축복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재물이 부족한 사람뿐 아니라 자신의 잘못 없이 질병이나 불행을 겪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보호자가 되시며 인도자가 되십니다(10:2, 9 ; 35:10 ; 69:33 ; 109:16 ; 140:12).
2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2-3절,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 : 이 땅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건강이나 재물, 장수와 영적인 강건함, 하나님과의 교제 등을 포함하여 한 사람의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하심을 말합니다. 본 시편의 괴로움은 육체적인 질병을 의미합니다.
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4절, 범죄하였사오니 : 본 시편의 맥락 속에서 이 고백은 곧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바라는 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요한일서 1:9).
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5-8절 : 때때로 시편의 적들이 시편 속에 언급될 때가 있습니다(3:1). 하지만 더 많은 시편들에서는 적들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상황과 함께 시편을 읽는 사람의 상황 속에서의 원수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라는 기도는, 고대 근동의 문화 속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 자는 결국 존재한 적이 없다라고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의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영원히 남겨지길 바랬으며, 위대한 이름을 가지고 싶어했습니다(창 12:2). ” 거짓을 말하고 “의 의미는, 다윗의 원수들이 자비함을 가지고 병문안을 왔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악한 의도가 가득해 있다는 뜻입니다.
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9절, 가까운 친구 : 친밀하고도 깊은 관계의 친구를 말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가까운 친구에 의한 배반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하게 만듭니다(마 26:14-16). 예수님에 대하여 가룟유다의 배반이 바로 이 구절을 성취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룟유다는 함께 식사했을 뿐 아니라(마 26:21-25, 막 14:18-21, 눅 22:21),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겟세마네에서 배반할 때에도 주님은 그를 “친구”라고 불렀습니다(마 26:50). 게다가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이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요 13:18).
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10절, 나를 일으키사 : 이 구절은 다윗이 질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유해 주시길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다른 의미에서, 이 단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해 볼 수도 있습니다(시 16:10-11, 118:17-18).
11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1절, 이기지 못하오니 : 다윗의 원수들이 다윗의 생명을 멸망시키지 못한 것은, 다윗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기뻐하시는 줄 : 다윗 자신의 성실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보호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시편 41편에서 고난을 받는 사람은 의인이며, 영원히 회개하지 않는 죄인(26:1)이 아니라 의인인 다윗이 이 땅에서 오래 살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12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2절, 영원히 주 앞에 :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왕국과 생명이 영원하길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궁극적인 소망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13절, 송축할지로다 : 원어적으로는 “복되도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편은 의인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축복으로 시작하여서, 의인들이 자신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축복)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13절의 “축복”이라는 단어는 1절의 단어와는 다릅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축복의 근원이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멘”이라는 단어는 “분명하게” 그리고 “그대로 될 것이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확신의 표현입니다.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두 번 반복된다는 것은 영원히 순종하겠다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NKJV STUDY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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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 성경주석
<시편 41편 서론>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시 41편은 시인이 그의 생애에서 중병에 걸려 있던 때를 다룬 시이다. 시인은 이전에 자기의 친구였던 자들이 지금은 배신자가 되어 있는 것을 깨닫고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고통을 느낀다. 이 시는 궁핍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복에 대한 기술로 시작하여, 계속해서 이전에 친구였던 자들의 배반을 묘사하고, 마침내는 회복을 염원하는 소망 기도로 끝을 맺는다. 이 시는 시 38편을 닮은 시이다.
<시편 41편 개역한글>
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2.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11.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2.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13.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아멘 아멘
<시편 41편 성경주석>
41:1 빈약한 자.
히브리어 달(dal), “낮은 자들”, “무력한 자들”, “풀이 죽은 자들”, “가난한 자들.”
41:1 권고하는.
곧 “주의를 기울이는.” 그는 도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연구한다. 이것은 그저 베풀기만 하는 자선 행위가 아니다. 이 동사에는 가난이나 질병 등과 같은 문제의 적절한 해결책을 포함한 사회 경제학의 기본 원칙이 내포되어 있다.
41:1 복이 있음이여.
참조 시 1:1 주석.
41:1 재앙의 날.
문자적으로 “악의 날.”
41:2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이 약속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세우셨던 본래의 계획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만 한다(참조 신 28:1~14; 시 1:3; 37:3, 4, 11, 23~26, 37).
41:2 뜻.
히브리어 네페쉬(nepes∨). 참조 시 16:10; 27:12 주석.
41:3 저를 붙드시고.
그가 이제까지 병자들의 필요를 보살펴 왔기 때문에 대체로 그 역시 자신이 병들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선은 선으로 보답된다.
41:3 고쳐 펴시나이다.
히브리어 하파크(hapak), “전환하다”, “바꾸다.” 만일 이 말이 문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병자의 침구를 바꿀 때 그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을 뜻한다. 경험 많은 간호사의 가장 큰 특징은 환자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그의 잠자리를 펴 주는 것이다. 만일 이 말이 비유적인 표현이라면, 시인은 지금 고통의 경감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 침상을 고통의 침상에서 회복의 침상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하나님은 어느 때라도 항상 고쳐 주실 것을 약속하지는 않지만, 고통의 경감과 위로는 약속하신다(참조 고전 10:13).
41:4 내가 말하기를.
히브리어에서 대명사 “나”가 문두에 위치한 것은 이 문장에서 이 단어가 강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지금 자신이 아플 때 한 말들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탄원한다.
41:4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시인은 병을 자신이 지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와 형벌로 여긴다(참조 시 38:3 주석).
41:4 내 영혼을.
히브리어 네페쉬(nepes∨), 단순히 “나를”(참조 시 16:10 주석). 육체적 질병 이외에도 다른 어떤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는 아니다.
41:5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그의 대적들은 그가 곧 죽을 것과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이 다 사라질 것을 예상하면서 흡족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41:6 나를 보러 와서는.
원수들 중 하나에 관한 언급이다. 그가 만일 환자를 방문하면 위선적인 말들을 늘어놓고, 환자에게 나쁜 짓을 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며, 병실을 나와서는 중상모략적인 말들을 퍼뜨린다. 이것은 실상은 가장 사악한 원수이면서 겉으론 친구인 체하는 사람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다.
41:6 거짓을 말하고.
곧 “헛된 것을 말하고.” 그의 호의는 모두 다 겉치레에 불과하다.
41:7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6절의 묘사가 계속되고 있다. 그 위선적인 방문객이 환자의 다른 원수들과 연합하여 환자의 비참한 상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최악의 상태로 빠지기를 소망한다.
41:7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절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거짓 소문을 내는 일과 위선적 행위가 어느 정도까지 이를 것인가!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은 실제로 그를 가장 사악한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비난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참조 욥 22:5~10 등).
41:8 악한 병.
문자적으로 “벨리알(Belial)의 것” 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참조 삿 19:2; 시 18:4 주석). 도덕적 측면에서의 악을 일컫고 있는 듯하다.
41:8 눕고.
원수들은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에 관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해댄다. 그들은 그의 병을 그가 무서운 죄악을 범한 죄인임을 보여 주는 증거로 여긴다. 바로 이 일이 시인의 고통을 한층 가중시킨다.
41:9 내 떡을 먹던.
여기에 언급된 행동은 매우 수치스러운 행동이다(참조 삼하 9:10~13; 왕상 18:19). 이 구절은 유다에게 적용되었다(참조 요 13:18). 이 시의 일부분은 더욱 명백한 당시 상황에서의 한정적 적용 외에 또 다른 적용도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이 시 전체가 본래 예언적 성격을 지닌 시로 쓰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고대의 저술들에 대한 최선의 해석은 우선 그것들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 안에서 해석하고, 그 다음에 후에 영감받은 저자들이 그중 장차 일어날 사건들에 적용시킨 부분들에 한정해서만 추가적 적용을 하는 것이다(참조 신 18:15 주석).
41:9 나의 가까운 친구.
문자적으로 “나의 평화의 사람.” 이 시를 압살롬의 반역을 배경으로 다윗이 쓴 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절을 아히도벨에게 적용시킨다(삼하 5:31; 참조 시 55:12 주석).
41:9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비유적 표현을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을 차는 말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이것을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의미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께서 3년 동안이나 은총을 베푼 가룟 유다가 바로 이 같은 비열한 배은망덕을 저질렀다.
41:10 나를…일으키사.
원수들의 소망과는 정반대로 나의 병상에서부터(참조 8절).
41:11 내가 아나이다.
참조 시 20:6. 시인은 고통의 참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로(참조 4절; 시 38:3 주석) 번영이나 건강도 하늘이 베푸는 특별한 은총의 표로 잘못 생각하였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이러한 복들을 내려주는 것은 사실이다(참조 약 1:17). 하지만 이 복들은 의인과 악인 구분 없이 모두에게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마 5:45) 하늘이 주는 이 같은 선물들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가납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이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이 시 73편에 나오는 일련의 기술들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는 자신이 시련을 겪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는 삶과 성령의 확실한 증언이다(롬 8:16; 히 4:12).
41:12 나를(and as for me).
문자적으로 “그리고 나.” 이 문장은 마감이 되지 않은 문장이다. 혹은 다른 문법 형태로 완성된 문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인은 1인칭으로 시작한 후, 돌연히 자기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께로 주의를 돌린다.
41:12 완전.
(「제임스왕역」에는 “intergrity”[고결함]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완성이라는 측면에서의 “완전.” 이 절은 시인이 자신의 병에서 회복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41:12 영영히.
이 생각은 그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원수들의 소망(5절)과는 정반대이다.
41:13 여호와…하나님을…찬송할지로다.
시편 제1권을 마감하는 송영. 하지만 이 송영은 또한 2절의 말씀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송영이기도 하다. 시편 각 권을 끝맺는 다른 송영들을 참조하라.
41:13 아멘.
히브리어 아멘(’amen), “확실히.” 엄숙히 단언할 때 쓰이는 용어. 여기서는 반복을 통하여 그 중요성이 이중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 반복은 또한 이 시가 공중 예배에서 사용될 때 회중이 이에 응답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히브리어 시편 41편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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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메낯체아흐 미즈모르 레다위드
아쉐레 마스킬 엘 달 베욤 라아 예말테후 아도나이
개역개정,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새번역,1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재난이 닥칠 때에 주님께서 그를 구해 주신다.
우리말성경,1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 주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고통당할 때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실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 행복하여라, 가련한 이를 돌보아 주는 이! 불행의 날에 주님께서 그를 구하시리라.
영어NIV,1 For the director of music. A psalm of David. Blessed is he who has regard for the weak; the LORD delivers him in times of trouble.
영어NASB,1 {For the choir director. A Psalm of David.} How blessed is he who considers the helpless; The LORD will deliver him in a day of trouble.
영어MSG,1 A David psalm. Dignify those who are down on their luck; you’ll feel good–that’s what GOD does.
영어NRSV,1 To the leader. A Psalm of David. Happy are those who consider the poor; the LORD delivers them in the day of trouble.
헬라어구약Septuagint,1 εις το τελος εις συνεσιν τοις υιοις κορε
라틴어Vulgate,1 in finem in intellectum filiis Core
히브리어구약BHS,1 לַמְנַצֵּחַ מִזְמֹור לְדָוִד׃
히브리어구약BHS,1 אַשְׁרֵי מַשְׂכִּיל אֶל־דָּל בְּיֹום רָעָה יְמַלְּטֵהוּ יְהוָה׃
성 경: [시41:1]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빈약한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달'(*)로서 시계추 혹은 나뭇가지들처럼’ 매달려 있거나 흔들리는 어떤 물건’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는 ‘연약한’, ‘가냘픈’, ‘힘없는’ 등의 뜻이 된다. 결국 이 단어는 빈곤이나 질병으로 인하여 바싹 마르거나 도움받을 곳이 없는 자, 그리고 열등한 환경에 처하여 이웃의 도움이 필요한 자를 가리킨다(창 41:19 출 30:15 ; 삼하 13:4).
권고하는(*, 마스킬) – 원어의 의미는 크게 둘로 나뉜다. 그 첫째는 ‘동정의 눈을 가지고 보다'(느 8:13 ; 잠 16:20 ; 21:12)이며, 둘째는 ‘의로운지혜를 가지고 의롭게 대하다'(14:2)이다. 우리는 이 두 의미 중에서 70인역의 지지를 받는 전자를 취할 수 있다. 즉 ‘권고하는 자’란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굳은 마음이나 냉정한 마음이 아닌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빈약한자를 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Barnes, Pero-wne). 한편, 본 시편은 애가(哀歌)가 그 바탕이 되고 있는 일종의 저자의 신앙 고백문이라고 볼수 있다(Anderson).
아도나이 이쉬메레후 위하예후 예숄 웨웃살 바아레츠 웨알 티트네후 베네페쉬 오예바우
개역개정,2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새번역,2 주님께서 그를 지키시며 살게 하신다. 그는 이 세상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원수의 뜻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성경,2 여호와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살려 주실 것입니다. 그가 땅에서 복을 받을 것이며 주께서 그의 적들의 뜻대로 그를 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 주님께서 그를 보살피고 살려 주시어 그가 땅에서 복을 받으리라. 그를 원수들의 탐욕에 내주지 않으시리라.
영어NIV,2 The LORD will protect him and preserve his life; he will bless him in the land and not surrender him to the desire of his foes.
영어NASB,2 The LORD will protect him, and keep him alive, And he shall be called blessed upon the earth; And do not give him over to the desire of his enemies.
영어MSG,2 GOD looks after us all, makes us robust with life– Lucky to be in the land, we’re free from enemy worries.
영어NRSV,2 The LORD protects them and keeps them alive; they are called happy in the land. You do not give them up to the will of their enemies.
헬라어구약Septuagint,2 ον τροπον επιποθει η ελαφος επι τας πηγας των υδατων ουτως επιποθει η ψυχη μου προς σε ο θεος
라틴어Vulgate,2 quemadmodum desiderat cervus ad fontes aquarum ita desiderat anima mea ad te Deus
히브리어구약BHS,2 יְהוָה יִשְׁמְרֵהוּ וִיחַיֵּהוּ [כ= יֶאְשֹּׁר] [ק= וְאֻשַּׁר] בָּאָרֶץ וְאַל־תִּתְּנֵהוּ בְּנֶפֶשׁ אֹיְבָיו׃
성 경: [시41:2]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여호와께서…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 이것은 경건한 자의 행위는 부분적으로 땅위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혹은 이웃에게 친절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난다는 신적 통치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법칙이다. 이 법칙에 관해서 성경은 1:3 ; 37:3, 4, 11, 23-26, 37 ; 마 5:5 ; 딤전 4:8 등에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법칙을 본 시편에 적용해 본다면 누구든지 질병으로 연약해진 자를 긍휼로 돌볼 경우 그가 동일한 상황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상황에 개입하셔서 보존하시고 생명을 유지시키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적용은 일반 원리하에서만 가능한 진술로 보아야 한다.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 이것은 방금 전에 살펴본 원리와 조화를 이룬다. 시편과 성경 여러 곳은 경건에 기본을 두고 이웃을 돌아보는 행실이 이생에서의 행복과 번영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원수의 뜻에 맡기소서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원수의 욕심에 나를 넘기지 마소서’로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27;12에서 볼 수있다. 이것은 저자를 해롭게 하여 어떤 이익을 보려는 대적의 욕심을 저지해 주기를 원하는 저자의 소원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단순한 소원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악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저자 편에서의 확신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40:14 주석 참조).
아도나이 이스아덴누 알 에레스 데와이 콜 미쉐카보 하팤타 베홀요
개역개정,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새번역,3 주님께서는,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돌보시며 어떤 병이든 떨치고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우리말성경,3 그가 아플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힘을 주시고 병상에서 일으켜 다시 건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가톨릭성경,3 주님께서 그를 병상에서 받쳐 주시고 그가 아플 때 모든 고통을 없애시리라.
영어NIV,3 The LORD will sustain him on his sickbed and restore him from his bed of illness.
영어NASB,3 The LORD will sustain him upon his sickbed; In his illness, You restore him to health.
영어MSG,3 Whenever we’re sick and in bed, GOD becomes our nurse, nurses us back to health.
영어NRSV,3 The LORD sustains them on their sickbed; in their illness you heal all their infirmities.
헬라어구약Septuagint,3 εδιψησεν η ψυχη μου προς τον θεον τον ζωντα ποτε ηξω και οφθησομαι τω προσωπω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3 sitivit anima mea ad Deum *fortem; vivum quando veniam et parebo ante faciem Dei
히브리어구약BHS,3 יְהוָה יִסְעָדֶנּוּ עַל־עֶרֶשׂ דְּוָי כָּל־מִשְׁכָּבֹו הָפַכְתָּ בְחָלְיֹו׃
성 경: [시41:3]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 이의 문자적인 뜻은 ‘고통의 자리 위에 있는 그를 힘있게 하시고’이다. 여기의 ‘힘있게 하시고’에 해당하는 원어 ‘사아드'(*) ‘지지하다’, ‘후원하다’, ‘유지하다’, ‘강하게 하다’, ‘원기를 되찾다’ 등을 의미한다. 문맥에서는 저자의 육체가 쇠해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가 병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해주시거나 힘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를 앞서 언급된 바와 연결시켜 볼때 연약하고 병들고 도움없는 자에게 자비(1절)를 베푸는 자는 그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돝아보신다는 좀더 구체적인 적용을 도출해 낼 수 있겠다(18:25).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저가 병 중에 있는 그의 자리 모두를 바꾸셨다’이다. 여기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자리’인데 상반절의 ‘병상’이 단순히 침대를 의미하는 반면이 ‘자리’는 오랫동안 병들어 누운 환자의 상태를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Perowne). 한편, ‘고치다'(*, 하파크)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그 전자는 단지 쿠션이 있는 벼개 같은 것을 환자의 머리 밑에 받쳐 주어 기분전환과 안락함을 공급하는 행위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리고 후자는 하나님이 그 환자의 병을 완전이 고치셨기 때문에 더 이상 환자의 침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근거는 계속적으로 아파왔던 상황이 완전히 끝났음을 암시하는 바, 원어상 ‘고치다’의 시제가 과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제는 단순한 어떤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인 경혐을 표현한다. 즉 저자는 본절에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경우에서도 보았던,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병든 상태로부터 완전한 고침을 받은 사실들을 회상하며 이 같은 고백을 하고있는 것이다.
아니 아말티 아도나이 한네니 레파아 나프쉬 키 하타티 라크
개역개정,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새번역,4 내가 드릴 말씀은 이것입니다. “주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나를 고쳐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말성경,4 내가 “오 여호와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내 영혼을 고쳐 주소서.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했습니다.
가톨릭성경,4 저는 아뢰었습니다. ”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고쳐 주소서.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영어NIV,4 I said, “O LORD, have mercy on me; heal me, for I have sinned against you.”
영어NASB,4 As for me, I said, “O LORD, be gracious to me; Heal my soul, for I have sinned against You.”
영어MSG,4 I said, “GOD, be gracious! Put me together again– my sins have torn me to pieces.”
영어NRSV,4 As for me, I said, “O LORD, be gracious to me; heal me, for I have sinned against you.”
헬라어구약Septuagint,4 εγενηθη μοι τα δακρυα μου αρτος ημερας και νυκτος εν τω λεγεσθαι μοι καθ’ εκαστην ημεραν που εστιν ο θεος σου
라틴어Vulgate,4 fuerunt mihi lacrimae meae panis die ac nocte dum dicitur mihi cotidie ubi est Deus tuus
히브리어구약BHS,4 אֲנִי־אָמַרְתִּי יְהוָה חָנֵּנִי רְפָאָה נַפְשִׁי כִּי־חָטָאתִי לָךְ׃
성 경: [시41:4]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내가 말하기를(*, 아니아마르티) –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내가 말하였나이다’이다. 여기의 ‘아니’는 대명사로서 1-3절의 긍율이 넘치는 자에 대한 칭송으로부터 저자 자신의 개인적 감정과 소원에 대한 아룀으로의 전한을 두드러지게 구분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다음절의 ‘원수’에 대한 대립을 분명히 밝혀주는 강조사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 나에게 고통이 임한 것은 나의 죄 때문이라는 저자의 회개적인 고백이다. 여기서 저자가’나의 영혼을 제하소서’ 즉 ‘나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역경을 만났을 때 그 원인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닌가 하여 자신을 살피기 보다는 단지 그 역경이 물러가기만을 기대하고 소원하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이 사실은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오예바이 요메루 라 리 마타이 야무트 웨아바드 쉐모
개역개정,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새번역,5 나의 원수들은 나쁜 말을 지어서 “저 자가 언제 죽어서, 그 후손이 끊어질까?” 하고 나에게 말합니다.
우리말성경,5 내 적들이 내게 악담을 합니다. “그가 언제 죽을까? 그의 이름이 언제 사라질까?” 하며
가톨릭성경,5 제 원수들이 저에게 몹쓸 말을 합니다. ” 저자가 언제 죽어 그 이름이 사라질까?”
영어NIV,5 My enemies say of me in malice, “When will he die and his name perish?”
영어NASB,5 My enemies speak evil against me, “When will he die, and his name perish?”
영어MSG,5 My enemies are wishing the worst for me; they make bets on what day I will die.
영어NRSV,5 My enemies wonder in malice when I will die, and my name perish.
헬라어구약Septuagint,5 ταυτα εμνησθην και εξεχεα επ’ εμε την ψυχην μου οτι διελευσομαι εν τοπω σκηνης θαυμαστης εως του οικου του θεου εν φωνη αγαλλιασεως και εξομολογησεως ηχου εορταζοντος
라틴어Vulgate,5 haec recordatus sum et effudi in me animam meam quoniam transibo in loco tabernaculi admirabilis usque ad domum Dei in voce exultationis et confessionis sonus epulantis
히브리어구약BHS,5 אֹויְבַי יֹאמְרוּ רַע לִי מָתַי יָמוּת וְאָבַד שְׁמֹו׃
성 경: [시41:5]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 저자의 대적들이 저자의 슬픔을 더하게 할 목적으로 그의 연약하고 유약한 상태에 대해 악하게 말하기 위하여 자리를 마련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러한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여기 ‘악담’에 해당하는 원어 ‘아마르'(*)는 단순히 ‘말하다’, ‘발언하다’를 뜻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대적들의 ‘중상’ 및 ‘비난’을 의미한다.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 함축적인 이 표현을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저 사람은 병들어 있소. 그의 죄때문에 병든거요. 저 사람이 죽는 일은 분명한 일일 것이오. 아니 저런 사람은 죽는 것이 낫소. 그러나 저 사람은 죽은 후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 생명이 끊기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것이오’이다. 참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에 대해 이보다 더 신랄하고 혹독한 비난은 없을 것이다(Bar-nes).
그 이름이 언제나 언제나 멸망할꼬 – 이것은 한 특정인과 그의 가문의 멸망(109:13 ; 신 14 ; 25:5 ; 삼하 18:18). 또는 본절의 예와 같은 불행한 한 인간의 단순한 죽음(9:5)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본 시편 저자의 이름이 더 이상 언급되기를 원치 않는, 그의 삶의 향력이 더 이상 존재하기를 원치 않는 그의 대적의 바램을 엿볼 수 있다.
웨임 바 릴오트 솨웨 예다벨 리보 이크바츠 아웬 로 예체 라후츠 예답베르
개역개정,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새번역,6 나를 만나러 와서는 빈 말이나 늘어놓고, 음해할 말을 모아 두었다가, 거리로 나가면 곧 떠들어댑니다.
우리말성경,6 나를 보러 와서는 빈말이나 늘어놓고 마음 가득 악을 모아 두었다가 밖으로 나가서 퍼뜨리고 다닙니다.
가톨릭성경,6 찾아와서는 거짓을 이야기하며 속으로는 못된 것을 모아서 밖에 나가 이야기합니다.
영어NIV,6 Whenever one comes to see me, he speaks falsely, while his heart gathers slander; then he goes out and spreads it abroad.
영어NASB,6 And when he comes to see me, he speaks falsehood; His heart gathers wickedness to itself; When he goes outside, he tells it.
영어MSG,6 If someone comes to see me, he mouths empty platitudes, All the while gathering gossip about me to entertain the street-corner crowd.
영어NRSV,6 And when they come to see me, they utter empty words, while their hearts gather mischief; when they go out, they tell it abroad.
헬라어구약Septuagint,6 ινα τι περιλυπος ει ψυχη και ινα τι συνταρασσεις με ελπισον επι τον θεον οτι εξομολογησομαι αυτω σωτηριον του προσωπου μου ο θεος μου
라틴어Vulgate,6 quare tristis es anima mea et quare conturbas me spera in Deo quoniam confitebor illi salutare vultus mei
히브리어구약BHS,6 וְאִם־בָּא לִרְאֹות שָׁוְא יְדַבֵּר לִבֹּו יִקְבָּץ־אָוֶן לֹו יֵצֵא לַחוּץ יְדַבֵּר׃
성 경: [시41:6]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나를 보러와서는(*, 임 바 리르오트) – 원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만일 그가 보기 위하여 온다면’이다. 유사한 구절인 삼하 13:5 ; 왕하 8:29 등에 의하면 이러한 표현은 병든 친구나 친척의 방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상기의 구절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병자 방문의 대표적 예는 욥 2:11인데 이 구절에 의하면 방문의 목적은 애도를 표시하고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고통받는 자가 스스로 대화의 문을 열 때까지 위로자는 그 어떤 말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Anderson).
거짓을 말하고 – 문자적인 뜻은 ‘공허한 것으로 말하고’이다. 이것은 방문자가 방문 목적대로 위로하고 위안을 주지 않고 방문 목적과는 상관없는 쓸데없는 공허한 말들을 늘어 놓은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것을 살펴볼 때 결국 방문자의 목적은 위안 주기를 가장하여 피방문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Barnes).
그 중심에 간악(奸惡) 쌓았다가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그의 마음은 부정을 모으고’이다. 이것은 악한 위로자가 나쁜 소문을 퍼뜨릴 목적으로 자료들을 수집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아마도 이 사악한 방문자인 친구는 피방문자의 질병의 증상을 자세히 살핌으로써 피방문자의 질병의 원인을 그의 죄 때문이라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굳혔을 것같다(8절).
야하드 알라이 이트라하슈 콜 소네아이 알라이 야흐쉐부 라아 리
개역개정,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새번역,7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모두 나를 두고 험담을 꾸미고, 나를 해칠 궁리를 하면서
우리말성경,7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모두 합심해 나를 두고 수군거리고 어떻게 하면 나를 해칠까 계획을 세우면서
가톨릭성경,7 저를 미워하는 자들이 다 함께 저를 거슬러 수군대며 저에게 해로운 일을 꾸밉니다.
영어NIV,7 All my enemies whisper together against me; they imagine the worst for me, saying,
영어NASB,7 All who hate me whisper together against me; Against me they devise my hurt, saying,
영어MSG,7 These “friends” who hate me whisper slanders all over town. They form committees to plan misery for me.
영어NRSV,7 All who hate me whisper together about me; they imagine the worst for me.
헬라어구약Septuagint,7 προς εμαυτον η ψυχη μου εταραχθη δια τουτο μνησθησομαι σου εκ γης ιορδανου και ερμωνιιμ απο ορους μικρου
라틴어Vulgate,7 Deus meus ad me ipsum anima mea conturbata est propterea memor ero tui de terra Iordanis et Hermoniim a monte modico
히브리어구약BHS,7 יַחַד עָלַי יִתְלַחֲשׁוּ כָּל־שֹׂנְאָי עָלַי יַחְשְׁבוּ רָעָה לִי׃
성 경: [시41:7]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수군거리고 – 저자의 대적들이 예정된 악행과 관련된 최근의 정보를 토론하고 서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삼하 12:19).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를 일삼고 즐거워한다. 마 7:1-4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사실이 진리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한편, ‘수군거리다'(*, 라하쉬)는 ‘주문을 걸다’, ‘속삭이다’, ‘중얼거리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대적들이 고통 당하고 있던 시편 기자가 확실히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유치한 행위를 하였던 것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An-derson).
데발 베리야알 야추크 보 와아셀 솨카브 로 요시프 라쿰
개역개정,8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새번역,8 “몹쓸 병마가 그를 사로잡았구나. 그가 병들어 누웠으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하고 수군댑니다.
우리말성경,8 “그가 몹쓸 병에 걸려서 자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가톨릭성경,8 “불운한 일이 그를 덮쳐 드러누운 저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어 버려라.” 합니다.
영어NIV,8 “A vile disease has beset him; he will never get up from the place where he lies.”
영어NASB,8 “A wicked thing is poured out upon him, That when he lies down, he will not rise up again.”
영어MSG,8 The rumor goes out, “He’s got some dirty, deadly disease. The doctors have given up on him.”
영어NRSV,8 They think that a deadly thing has fastened on me, that I will not rise again from where I lie.
헬라어구약Septuagint,8 αβυσσος αβυσσον επικαλειται εις φωνην των καταρρακτων σου παντες οι μετεωρισμοι σου και τα κυματα σου επ’ εμε διηλθον
라틴어Vulgate,8 abyssus *ad; abyssum invocat in voce cataractarum tuarum omnia excelsa tua et fluctus tui super me transierunt
히브리어구약BHS,8 דְּבַר־בְּלִיַּעַל יָצוּק בֹּו וַאֲשֶׁר שָׁכַב לֹא־יֹוסִיף לָקוּם׃
성 경: [시41:8]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 문자적인 뜻은 ‘벧리야알(*)의 것이 그에게 쏟아 부어졌으니’이다. 우선 악한 병을 가리키는 ‘벧리야알의 것’은 ‘어떤 충격적인 것’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육체적인 혹은 도덕적인 악’을 의미한다. 그러나 후자 ‘도덕적인 악’이 좀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이다. 이와 동일한 형태의 표현이 101:3 ; 신 15:9에서도 등장하는데 그곳에서도 도덕적 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있다. 그러나 ‘벧리야알의 것’은 어떤 육체적인 악한 결과를 동반한 ‘도덕적 악에 대한 징벌’이라는 포괄적 의미로 보아야 한다(Perowne, Ra-shi). 왜냐하면 문맥이 악 자체보다는 그 악으로 인한 ‘결과’ 혹은 그 악 때문에 임한 ‘징계’따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쏟아붓다’에 해당하는 ”야차크'(*)는 왕상7:24, 30 ; 욥 41 :15, 16에서도 볼 수 있으며 아마도 렘 42:18에 그것과 동일한 상징으로도 볼 수 있겠는데 어떤 녹인 금속이 주조(鑄造)를 속으로 구석 구석 흘러들어 가듯이 인간의 몸전체를 덮고 몸 속으로까지 스며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상의 소찰(小察)을 통해 볼 때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다’는 것은 도덕적인 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몸 외부뿐 아니라 그 피부 속 깊숙한 곳까지 육체적인 질병이 임했다는 말이다.
감 이쉬 쉘로미 아쉘 바타티 보 오켈 라흐미 힉딜 알라이 아켑
개역개정,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새번역,9 내가 믿는 나의 소꿉동무, 나와 한 상에서 밥을 먹던 친구조차도, 내게 발길질을 하려고 뒤꿈치를 들었습니다.
우리말성경,9 내가 믿던 가까운 친구, 내 빵을 나눠 먹던 그 친구조차 나를 대적해 발꿈치를 들었습니다.
가톨릭성경,9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영어NIV,9 Even my close friend, whom I trusted, he who shared my bread, has lifted up his heel against me.
영어NASB,9 Even my close friend, in whom I trusted, Who ate my bread, Has lifted up his heel against me.
영어MSG,9 Even my best friend, the one I always told everything –he ate meals at my house all the time!– has bitten my hand.
영어NRSV,9 Even my bosom friend in whom I trusted, who ate of my bread, has lifted the heel against me.
헬라어구약Septuagint,9 ημερας εντελειται κυριος το ελεος αυτου και νυκτος ωδη παρ’ εμοι προσευχη τω θεω της ζωης μου
라틴어Vulgate,9 in die mandavit Dominus misericordiam suam et nocte canticum eius apud me oratio Deo vitae meae
히브리어구약BHS,9 גַּם־אִישׁ שְׁלֹומִי אֲשֶׁר־בָּטַחְתִּי בֹו אֹוכֵל לַחְמִי הִגְדִּיל עָלַי עָקֵב׃
성 경: [시41:9]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떡을 먹던 – 이것은 주인의 환대를 받았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삼하 9:10 ; 왕 상 18:19). 본 구절의 일부분이 제자 가룟 유다의 반역적인 소행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에서 발견되기 때문에(요 13:18) 본 시편을 메시야 시편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바람직하지 못한 이유는 본절에 ‘ 나의 신뢰하는’이라는 중요한 구절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유다가 어떤 자인줄 알았고 따라서 그를 신뢰하지 않으셨다(Pdrowne).
나의 가까운 친구(*, 이쉬 쉴로미) – 문자적인 뜻은 ‘나의 평안의 사람’이다. 이는 서로 가슴으로 안을 수 있는 친구라고 볼 수 있는(Anderson),그리고 서로 항상 평안을 주고 받고 소원(蔬猿)하지 않으며 최고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우정은 언약의 식사(covenant meal)나누고 어떤 약조를 맺음로써 시작되곤 하였다(창 26:28 ; 31:53 ; 삼상 18:3, Pedersen). 그렇다면 ‘떡을 먹던 가까운 친구”란 이 같은 언약의 식사를 나누고 약속을 나눈 언약적 친구라고 볼 수 있다.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가 그 벌꿈치를 크게 만들었다’이다 이 표현은 말이 그 주인을 차버리고 도망하는 모습에서 따온 것인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주석가는 ‘그가 그 발로 그를 밟았다’라고 본절을 번역하기도 한다 (Lu-ther). 한편, 이 표현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에 대한 예언(요 13:18)으로 신약 이후부터는 이 표현이 주인을 배신하는 행위를 암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웨앝타 아도나이 한네니 와하키메니 와아솰레마 라헴
개역개정,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새번역,10 그러나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니,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도 그들에게 되갚을 수 있도록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십시오.
우리말성경,10 그러나 오 여호와여,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나를 일으켜 내가 그들에게 갚아 주게 하소서.
가톨릭성경,10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저를 일으키소서. 제가 그들에게 앙갚음하오리다.
영어NIV,10 But you, O LORD, have mercy on me; raise me up, that I may repay them.
영어NASB,10 But You, O LORD, be gracious to me, and raise me up, That I may repay them.
영어MSG,10 GOD, give grace, get me up on my feet. I’ll show them a thing or two.
영어NRSV,10 But you, O LORD, be gracious to me, and raise me up, that I may repay them.
헬라어구약Septuagint,10 ερω τω θεω αντιλημπτωρ μου ει δια τι μου επελαθου ινα τι σκυθρωπαζων πορευομαι εν τω εκθλιβειν τον εχθρον μου
라틴어Vulgate,10 dicam Deo susceptor meus es quare oblitus es mei quare contristatus incedo dum adfligit me inimicus
히브리어구약BHS,10 וְאַתָּה יְהוָה חָנֵּנִי וַהֲקִימֵנִי וַאֲשַׁלְּמָה לָהֶם׃
성 경: [시41:10]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이 같은 기원은 그리스도인의 선한 양심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소원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윗이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의 공법(公法)을 집행하는 왕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소원은 정당화될 수 있다. 즉 다윗의 주 관심사는 개인적 앙갚음에 있다기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보는 데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모반자들의 반역적 거사에 의해 일단 폐위되었었던 다윗은 이 같은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 당연하였다고 여겨진다.
베조트 야다티 키 하파츠타 비 키 로 야라아 오예비 알라이
개역개정,11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새번역,11 내 원수들이 내 앞에서 환호를 외치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이로써,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나는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1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압니다. 내 적들이 나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1 제 원수가 저를 두고 환호하지 않는다면 당신께서 저를 좋아하심을 제가 알게 되리이다.
영어NIV,11 I know that you are pleased with me, for my enemy does not triumph over me.
영어NASB,11 By this I know that You are pleased with me, Because my enemy does not shout in triumph over me.
영어MSG,11 Meanwhile, I’m sure you’re on my side– no victory shouts yet from the enemy camp!
영어NRSV,11 By this I know that you are pleased with me; because my enemy has not triumphed over me.
헬라어구약Septuagint,11 εν τω καταθλασαι τα οστα μου ωνειδισαν με οι θλιβοντες με εν τω λεγειν αυτους μοι καθ’ εκαστην ημεραν που εστιν ο θεος σου
라틴어Vulgate,11 dum confringuntur ossa mea exprobraverunt mihi qui tribulant me dum dicunt mihi per singulos dies ubi est Deus tuus
히브리어구약BHS,11 בְּזֹאת יָדַעְתִּי כִּי־חָפַצְתָּ בִּי כִּי לֹא־יָרִיעַ אֹיְבִי עָלָי׃
성 경: [시41:11]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승리치 못하므로 – ‘숭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로 ‘소리치다’, ‘소동하다’,’개가를 울리다’, ‘경종을 울리다’등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편이 지르는 기쁨의 환호를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된다(삼상 17:20). 그렇다면 이 구절은 다윗의 대적이 승리를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그가 곧 죽으리라는 기대 속에 있었던 다윗의 대적들은 매우 실망하게 될 것이다.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 좀더 분명하게는 ‘주께서 다윗의 친구가 되시는 줄을’이라는 뜻이다.
내가 아나이다(*, 야다티). – ‘내가 알았나이다’가 문자적인 뜻인데 번역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시제가 과거로 되어 있다. 이처럼 시제가 과거로 되어있다는 것은 비록 본 시편을 저술하는 시점의 상황은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이지만 저자는 하나님과 친구인 자신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을 미리 알고 확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와아니 베툼미 타맠타 비 와탗치베니 레파네카 레올람
개역개정,12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새번역,12 주님께서 나를 온전하게 지켜주시고 나를 주님 앞에 길이 세워 주십시오.
우리말성경,12 내 진실함을 보신 주께서 나를 붙드시고 주의 얼굴 앞에 영원히 세우십니다.
가톨릭성경,12 당신께서는 제가 온전하도록 붙드시고 저를 당신 면전에 영원히 세워 주십니다.
영어NIV,12 In my integrity you uphold me and set me in your presence forever.
영어NASB,12 As for me, You uphold me in my integrity, And You set me in Your presence forever.
영어MSG,12 You know me inside and out, you hold me together, you never fail to stand me tall in your presence so I can look you in the eye.
영어NRSV,12 But you have upheld me because of my integrity, and set me in your presence forever.
헬라어구약Septuagint,12 ινα τι περιλυπος ει ψυχη και ινα τι συνταρασσεις με ελπισον επι τον θεον οτι εξομολογησομαι αυτω η σωτηρια του προσωπου μου ο θεος μου
라틴어Vulgate,12 quare tristis es anima mea et quare conturbas me spera in Deum quoniam *adhuc; confitebor illi salutare vultus mei *et; Deus meus
히브리어구약BHS,12 וַאֲנִי בְּתֻמִּי תָּמַכְתָּ בִּי וַתַּצִּיבֵנִי לְפָנֶיךָ לְעֹולָם׃
성 경: [시41:12]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 ‘완전’은 ‘톰'(*)으로서 문자 그대로 ‘죄없는 완전한 상태’ 혹은 ‘무죄’를 가리킨다(욥 27:5 ; 31:6). 그렇다면 이러한 표현은 4절 상반절의 자신이 죄인이라는 저자의 고백과 모순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의 주석을 통해 보았듯이 저자가 고통을 받았던 이유는 죄악 때문이었지만 이제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승리하고 회복될 것을 확신하는 마당에서, 저자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반복적인 고통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바루크 아도나이 엘로헤 이스라엘 메하올람 웨아드 하올람 아멘 웨아멘
개역개정,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새번역,1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주님, 찬양을 받으십시오.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을 받으십시오. 아멘, 아멘.
우리말성경,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합니다. 아멘, 아멘.
가톨릭성경,13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영원에서 영원까지! 아멘, 아멘!
영어NIV,13 Praise be to the LORD, the God of Israel, 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 Amen and Amen.
영어NASB,13 Blessed be the LORD, the God of Israel, 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 Amen, and Amen.
영어MSG,13 Blessed is GOD, Israel’s God, always, always, always. Yes. Yes. Yes.
영어NRSV,13 Blessed be the LORD, the God of Israel, 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 Amen and Amen.
헬라어구약Septuagint,13 (없음)
라틴어Vulgate,13 (없음)
히브리어구약BHS,13 בָּרוּךְ יְהוָה אֱלֹהֵי יִשְׂרָאֵל מֵהָעֹולָם וְעַד הָעֹולָם אָמֵן וְאָמֵן׃
성 경: [시41:13]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여호와…아멘 아멘 – 원래의 시편에 없던 것으로 시편의 큰 단위 하나가 종결되는 대목에서 결론조로 후대에 첨가된 찬양으로 이 마지막 구절을 보는 일부의 경향이 있다(A. A. Anderson). 이러한 견해는 아멘 찬양(72:19 ; 89:52)이 시편의 큰 다섯 단위(개역 성경엔 제 일권, 제 이권…제 오권 이런 식으로 구분되어 있다)의 종결 부분에 각각 등장함을 볼 때 그럴듯 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된 찬양은 히브리 시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강조해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에 꼭 이렇게 볼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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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의 아멘(시 41편)
주제 : 고난 중의 아멘
본문 : 시편 41편
설교자 : 최종혁
총 150편으로 이뤄져 있고 5권의 책으로 나뉘고 41편이 1권의 마지막 시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읽거나 강해를 할 때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 몇 편은 편안하게 읽다가 어느 순간 반복되는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고난, 고통, 괴로움 등이 그것입니다. 계속되는 내용에 읽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편에서는 복 있는 자와 악인에 대해 말하면서 인생의 두 길에 대해 말합니다. 2편으로 가면 인생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께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편부터 고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할 때 쓴 시입니다. 4,5편은 공정치 못한 일로 인한 고난 가운데 기록한 시편이고, 6편은 여러 원인으로 절망하고 낙심할 때, 탄식할 때 기록한 시편, 7편은 억울한 상황에서, 9-10편은 악인의 형통 중에 괴로워하는 의인의 시편, 11편은 터가 무너질 때, 사회의 근본이 흔들릴 때 기록한 시편, 12편은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13편은 버림 받았다고 생각될 때, 17편은 목숨의 위협 속에서, 계속 하다보면 한참 얘기해야 할 듯합니다. 전쟁과 육체와 정신적인 괴로움 중에,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쓴 시도 있고 아비멜렉 왕 앞에서 미친 척하다가 쓴 시편, 초조할 때, 죄로 인해 징계받을 때, 어쩔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기록한 시편 등 고난에 대한 주제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41편 중에 28편이 이렇듯 고난 중에 쓰여진 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많으실텐데 왜 이렇게 고난과 어려움에 대한 말씀이 많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편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시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을 생각해 보면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때를 찾기가 더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없는 상황은 우리에게 많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어려움 뿐 아니라, 가정, 직장, 교회, 사회적, 국가적인 어려움이 계속해서 우리 삶 가운데 있습니다. 누구도 그런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평안한 삶을 원하고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어려움 없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내 생각대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너희가 (혹시) 시험을 당하게 되면”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가 시험을 당할 때 마다”라고 말합니다(약 1:2). 모두가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일하게 고난을 통과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낙심 중에 불평하고 원망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인내하고 승리하여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시편 1권을 통해 볼 수 있는 다윗 한 사람의 반응만 봐도 다양합니다. 다윗은 때로는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며 낙심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기도하고 감사의 찬양을 올렸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기대하고 인내했던 모습도 있었습니다.
시편 1권의 마지막 시편인 41편을 통해 그런 고난의 상황에서 우리가 꼭 기억하고 인정해야 할 사실에 대해 세 가지를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그 3가지가 고통 중에 우리가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고, 결과적 승리에 대환 확신을 줍니다. 그 전에 다윗이 이 시편을 기록한 상황을 먼저 보겠습니다.
고통 중의 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힘든 일들은 함께 올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은 한 번 있고 끝나는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은 여럿이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 다윗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동시에 당하고 있습니다.
질병(8절)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8절)
본 시편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고난은 질병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3절에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시는 일 중 병 고치시는 일을 언급하고, 4절에서도 병 고침 받기를 원합니다. 원수가 다윗에 대해서 하는 말도 그의 병에 대한 것입니다.
이 병이 어떤 병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그런 죽을 병에 걸린 사건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다만 이 병은 꽤 중한 병이어서 다윗이 살아서 침대를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은 육체를 가지고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 언제나 큰 시험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금방 나아질 것을 아는 감기 같은 것도 우리를 괴롭게 할 때가 있습니다. 왜 하필 이 중요한 때에 감기에 걸리는지 원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삶 자체를 뒤흔드는 질병은 우리의 육체만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도 힘들게 합니다.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는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하고 기도도 하지만, 사실 그 고통은 내가 겪어보지 않으면 그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이 지금 그런 병 중에 있습니다.
범죄(4절)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4절)
이 말은, 내가 범죄해서 이런 질병에 걸렸으니 지금 내가 회개하오니 나를 고쳐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질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고 있습니다. 죄가 모든 질병의 원인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질병의 원인이 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의 원수들도 다윗의 병을 ‘악한 병’(악한 데서 오는 병)이라고 하여 어느 정도 다윗의 죄가 병의 원인임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스스로도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의 치유를 구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명백한 다윗의 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죄는 언제나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인인 우리는 죄는 원하지만 그 결과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은밀하게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죄는 어떤 식으로든 그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때로 그 결과는 양심의 가책일 때도 있습니다. 죄에 대한 양심의 소리에 괴로울 수 있습니다. 때로 정반대로 양심의 무뎌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죄를 낳는 결과를 얻게 되기도 합니다. 때로 죄는 소중한 관계를 순식간에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부부 사이, 부모 자녀 사이가 작은 죄의 결과로 무너지기도 합니다. 때로 나의 죄가 다른 사람을 죄로 이끌기도 합니다. 때론 여기 다윗의 경우처럼 죄의 결과로 질병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원수(5~8절)
자신의 죄로 인해 병 중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 상황이지만, 여기에 더해서 다윗에게는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원수”(5절), “나를 미워하는 자”(7절)라고 표현합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병 중에 누워있는 다윗을 찾아옵니다.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6절)
그들은 다윗이 금세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와서는 중심에 악을 쌓아두고 입으로는 거짓을 말합니다. 그들은 다윗 앞에서는 나쁜 말을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다윗을 위로하면서 금방 나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다윗의 뒤에서 그를 비방하고 해를 입히려고 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7-8절)
그들은 다윗이 낫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정말 원했던 것이기도 합니다(5절). 그들은 다윗이 죽을 뿐 아니라 그의 이름도 이 땅에서 없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더 이상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길 원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숨기고 그들은 다윗을 찾아왔고 나가서는 이제 다윗은 끝났다고 소문을 냈던 것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가 찾아 온 것입니다. 다윗이 누리던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그들에게 왔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최악인 것 같지만, 아직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친구(9절)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9절)
“발꿈치를 들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야곱”의 이름 뜻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속이고 배신하는 것에 대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해서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이 사람은 다윗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심이 가고 불안한 사람이 아니라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떡을 나눠 먹는 것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가까운 관계를 말합니다. 공적으로 혹은 일적으로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도 가까이 교제하는 친밀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 사람은 가까운 친구인데, 문자적으로는 “나의 평강(샬롬)의 사람”입니다. 정말 배신은 추호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다윗이 죄로 인해 병들고 대적들에게 비방을 받고 공격을 당할 때에 그를 배신한 것입니다. 다윗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믿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오히려 다윗을 배신한 것입니다.
당신이 다윗을 찾아 간다면 뭐라고 위로하고 힘을 주겠습니까? 혹,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이겨내겠습니까?
다윗의 시편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이런 고난은 다윗이기 때문에 더 자주 당했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윗처럼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만나고 비슷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원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살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 내 편은 하나도 없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육체의 한계를 느끼며 견디기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죄가 반복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고통 중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고난 자체가 즐겁고 기쁠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 행복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안함을 유지하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기본적으로 심지가 굳은 사람이 있고 연약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보다 더 감성적이고 예민한 사람이 있고, 이성적이고 둔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런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가 같은 어려운 상황을 더 큰 어려움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난 중에 넘어지고 낙심하고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이 당연하거나 합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내가 연약하다는 것은 내가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중요한 사실로 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있는지,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잴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때로는 원인을 나로 보고 자책할 수 있습니다. 여기 다윗의 경우라면 왜 내가 그런 죄를 지어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끊임없이 자책하며 죄책감에 낙심할 수 있습니다. 혹은 반대로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바라보며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내가 남보다 뭘 잘 못했다고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사람이 아무리 악해도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럴 수 있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원망하고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나를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고통 중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합니다.
고통 중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1~3절)
첫 번째로 그리고 이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1절)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그렇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포하는데, 예수님도 그렇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야고보는 반대로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서 경고했습니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다윗은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라는 넓은 범주에서의 약속을 언급하고 조금씩 그 범위를 좁혀 자신의 상황까지 갑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2~3절)
다윗은 일반적인 얘기를 하고 있지만, 자신의 상황과 직결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의 뜻은 위에서 본 것처럼 다윗이 죽고 그 이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히려 병상에서 붙드시고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지금 그렇게 해주실 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4, 10절)
다음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4절)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10절)
다윗은 내가 이런 것들을 잘 했으니 이제 나를 고쳐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고 약한 자들을 잘 돌봤으니 이제 나를 고쳐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갈 때 우리는 그 약속을 바라보고 나가지만 동시에 은혜에 기대서 나가는 것입니다. 확신의 또 다른 근거는 은혜입니다.
사실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을 보면,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억울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다윗은 하나님 앞에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은 병들어 죽게 되었고 사람들은 비방하고 친구는 배신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 노력해온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상황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 우리는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힙니다. 이런 상황이 나에게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권리를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나가지, 나의 공로를 힘입어서 나가지 못합니다. 다윗도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11~12절)
세 번째로 다윗이 고통 중에 기억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11절)
원수가 결국 나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원수가 아닌 나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시면 결국 승리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고 영원히 안전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2절,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약속, 은혜를 기억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내 편에서 나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면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혹 하나님의 능력이 내 상황이나 대적의 능력보다 부족해도 확신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이 믿고 있고 은혜를 구하고 있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다스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고통 중에 그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을 의지하세요’라는 말을 합니다. 어려움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은 그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론에 그치는 일도 아닙니다. 실제로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 얼마나 큰 능력으로 일하시는지 기억하고 그것을 사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꼭 우리가 그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이겨낼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하시며 동시에 우리의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이든, 죄의 문제든,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든, 어떤 상황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는 상황은 없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악으로 드러나는 상황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길 원하시고 이루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여러 문제가 되는 상황들 속에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불평하고 때로 원망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니면 혹 알고 있어도 제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정말 그런 것처럼 사는 것이 정말 복 있는 자의 삶입니다.
도전
시편 1권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13절)
시편의 각 권 끝에는 이런 짧은 송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해야할 말이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아멘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앞서 사용했던 표현을 가져오면 ‘인정’입니다. 정말 그렇다고 인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니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것이 시편의 전체 메시지입니다. 누구나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말입니다.
주일 예배 시간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말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 그렇습니다. 별로 찬양 같은 것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때도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것을 정말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난 중에서는 이 말에 아멘 아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아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이 내 상황에 신경쓰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시려고 구원하셨고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시려고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삶이고 복 있는 자의 삶입니다.
시편 1권을 통해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았는지 배웠습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했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는 때로 당황하고 괴로워 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여전한 신뢰 가운데 결국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참 우리같은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당황하고 불평하고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의 가장 기초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약속에 대한 신뢰, 은혜에 대한 신뢰,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에 대해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때로는 견디기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아멘’이라고 우리의 삶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 있는 사람(시편41:1-13절)
본문 : 시편 41:1-13절
제목 : 복 있는 사람
1. 1권이 끝나는 시점에
시편 1편부터 41편까지를 흔히 시편 의 첫 번째 권이라고 부릅니다.
시편은 모두 다섯 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다섯 권의 시편은 시편이 점진적으로 모아져서 구성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다섯 권은 모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으로 끝납니다.
1권은 1-41편까지입니다. 41편 13절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으로 끝납니다. 이 구절은 1권 전체의 송영입니다.
2권은 42-72편까지로 72:18-19절은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마칩니다.
3권은 73-89편으로 89:52절은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4권은 90-106편입니다. 106편48절도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로 마칩니다.
마지막 5권은 107-150편입니다. 150:6절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합니다. 그래서 다섯 권의 시편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마쳐지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 권 모두 항상 끝마칠 때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하라는 송영으로 끝나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입니다. 시편 전체를 열어주는 관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시편입니다. 그런데요? 1편과 41편이 복으로 시작해서 복으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라고 할 때 그 말은 에쉐르(rv,a,)입니다. 그리고 41편에서 복이 있음이여 할 때도 역시 에쉐르(rv,a,)입니다. 이 말은 누차 말씀드리지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의 핵심 사상을 전달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번 주일에 살피게 될 안식일과 함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시려는 복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 바로 이 복이라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아쉐르( rv’a;)에서 왔습니다. 아쉐르는 똑바로 걷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평탄하고 행복하다는 의미에서의 곧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계속 전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행복이 쭉 이어지는 삶을 복 있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하나님이 주시려고 했던 바로 그 복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바로 참된 안식입니다. 평안입니다. 그 평안으로부터 나오는 행복감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요?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을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시편이 처음 시작되면서 인간들의 진정한 평안, 하나님이 주시려는 진정한 축복은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의 가리에 앉지 않는 것이며 더 나아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 즉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41편에서는 거기서 더 나아갑니다.
시편 41편은 뚜렷한 세 단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단락은 서로 성격이 다릅니다. 1-3절은 첫 단락으로 지혜 시입니다. 4-10절까지는 병자의 말로서 탄원 시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11-13절은 찬양과 송영입니다.
그런데요? 첫 번째 단락인 1-3절에서 시인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사람이 복 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악에서 떠나고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이었다면 이제는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디로 나아갑니까? 사람들과의 관계로 나아갑니다. 시편까지도 이런 성숙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그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성장이 시편에도 들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신앙생활이 성장과 성숙할 때 그 방향이 개인적인 경건에서 점점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런 시편의 웅장한 방향을 이해하면서 41편을 살펴보겠습니다.
2.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의 복(1-3절)
우선 우리는 가난한 자가 누구인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 가난한 자라고 번역된 말은 가난과 질병, 실패와 절망 등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본래 의미는 매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위태로운 상태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삶이 위태로운 사람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물질 때문에 위태로울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삶의 문제로 삶이 위태롭게 걸려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 실패와 좌절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살피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살핀다는 말도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튼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상담일 수도 있고 물질을 나누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보살핀다는 것은 마음을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한 사람, 건강을 잃은 사람, 물질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보살피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요, 평안이며 안식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세 가지로 구체적인 복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져 주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복 있는 사람의 삶에도 재앙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앙의 날’이란 재난이나 핍박 등으로 인한 고난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다윗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삶을 살아가는 시인이라고 할지라고 재앙의 날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재앙의 날이 찾아올 때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를 권고하시고 건져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자에게 재앙의 날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복은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셔서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복을 받게 된다는 말도 처음에 사용한 복과 동일한 말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재앙의 날이 찾아올 때에도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셔서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 즉 평안과 감사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절은 건져 주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전히 재앙의 날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그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감사와 기쁨을 누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비록 재앙의 날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사람들을 건지시고 보호하셔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병상에서 붙드시고 고쳐주신다는 것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으면 가장 좋겠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나신 황수관 박사의 사망원인은 급성 패혈증이었습니다. 간농양으로 인한 급성 패혈증으로 건강하게 사시던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얼마나 신바람 건강을 설파하시면서 즐거운 인생을 사시던 분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살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든지 무슨 병이든지 하나님이 다 고쳐 주신다고 본문을 읽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쉬운 성경으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아플 때에 여호와께서 붙들어 주실 것이며, 병상에서 그를 일으켜 다시 건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라는 말은 다윗의 육체가 쇠해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가 병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힘을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연약하고 병들고 도와줄 사람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는 사람은 그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돌아보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 자리를 고쳐 펴신다는 것은 시인의 경험으로 하나님이 그가 병들어 고통스러울 때 위로해 주셨고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모든 병을 고쳐주신다는 의미보다 시인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견딜 수 있는 힘과 평안을 주시고 치료해주셨다는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믿음으로 살기를 기꺼워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시며 평안으로 인도하시고 병상에서 고쳐 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황수관 박사나 김자옥씨와 같은 믿음 좋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지 않고 데려가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여기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셨다는 말씀은 모든 병이라고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윗은 지금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을 이야기하면서 과거 자신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이 병상에서 고쳐주신 사실을 간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병자의 기도(4-9절)
이제 시인은 이 모든 재앙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고백하며 겸허하게 회개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흔히 이 부분을 병자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즉 3절의 상황으로 돌아가 병중에 있을 때 시인의 신앙을 고백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이해하고 있는 병상에 눕게 된 이유와 하나님의 회복하심에 대한 묵상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질병이 죄로 인한 것으로 이해하고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이런 자세는 성도에게 꼭 필요한 자세입니다. 모든 병이 죄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찾아온 질병의 문제 앞에서 가장 먼저 죄를 보고 회개하는 것은 깨어 있는 성도가 가야할 길인 것입니다. 주께 범죄 했다는 것은 주님께만 범죄 했다는 의미보다는 주님 앞에 살아가는 삶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구절은 3절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무튼 다윗에게도 질병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보고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그런데요? 문제는 대적들입니다.
처음 이 시편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가 복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병들었을 때 원수들이, 다윗을 미워하는 자들이, 심지어 친구들까지도 보살피고 위로하기는커녕 악한 말로 모함하고 나쁜 소문을 퍼트리더라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원수가 말하기를 언제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 없어질까 하더라는 것입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미 병이 들어 고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파하고 있는데 보살피고 위로해 주기는커녕 독한 말을 하고 나쁜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다윗을 보러왔다고 합니다.
유사한 구절인 삼하 13:5 ; 왕하 8:29절 에는 병든 친구나 친척의 방문을 가리키는데 이런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방문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욥 2:11절 이하입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그럽니다. 이들이 방문한 목적은 애도를 표시하고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은 찾아와서 거짓말을 합니다. 무슨 병자를 찾아와서 거짓말을 합니까? 이 말은 문자적으로 ‘공허한 것으로 말하고’ 입니다. 그러니까 위로하러 찾아와서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공허한 말들입니다. 결국 이런 방문은 병자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그 중심에 악을 쌓습니다.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그의 마음은 부정을 모으고’입니다. 그러니까 위로하겠다고 와서는 공허한 말을 잔뜩 늘어놓다가 나쁜 것들을 찾아 자료를 수집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뒤에 이어지는 나쁜 소문을 퍼트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 때문에 그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수군거리고 악한 소문을 퍼트립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기는커녕 더 힘들고 어렵게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수근 거립니다.
더구나 9절에 의하면 다윗을 배반하고 대적한 이들을 “나의 가까운 친구”라고 말합니다.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를 말합니다. 그런 친구가 배신을 한 것입니다.
4. 믿음으로 사는 복(10-13절)
그런 상황에서 다윗의 간구가 바로 10-12절까지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내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나를 일으켜 주셔서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보응은 다윗이 건강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악하게 모함하는 자들 앞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보응이 아니겠습니까? 원수가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확신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복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렇게 주께서 온전한 중에 다윗을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실 것을 확신하며 시편은 끝납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신앙생활의 복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병에서 고쳐 주시는 하나님을 신앙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에서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돌보아주는 삶으로의 성장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3절과 4절 사이에서 놀라운 논리적인 발전을 합니다.
병상에서의 기도는 4절부터 시작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사람이 누리는 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병상에서의 기도로 주제가 전환되어 그들이 찾아와서 고통스럽게 하고 거짓 소문을 퍼트리며 가난한 사람에 해당하는 다윗을 더 고통스럽게 만든 이야기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을 확신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이 확신이 바로 1-3절이 말씀한 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은 13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12절은 그 복은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성도가 누리는 복! 그 평안과 안식, 그 행복은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결국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병상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여 평안으로, 확신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진정한 복은 다윗과 같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이 병상에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붙잡아 줍니다. 그 믿음이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
시편 41편.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는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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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내용
41편.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는 복이 있다. (찬 394)
1. 41편은 다윗이 가난한 자들을 감독하고 돌아볼 자들을 임명하면서 지은 시로 보인다(아람어 역본의 머리말). 교회는 늘 가난한 자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는 교회 안의 사람들이고 다음으로 교회 밖의 사람들이다. 1~3절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볼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4~9절은 다윗 자신의 경험이다. 10~12절은 다시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복 있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을 표현한다. 13절은 제1권(1~41편)의 모든 내용에 대한 화답 송영이다. 제1권은 복있는 사람으로 시작해서(1:1) 복있는 사람으로 마친다(41:1).
2.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육체적으로는 건강이 약하거나 장애가 있고 가정적으로는 기댈 가족이 없거나 적어서 외롭고 명성으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며 영적으로는 낙심에 처한 사람들이다(1). 주님의 말씀대로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있다(요 12:8). 이런 자들을 알아주고 찾아 돌보아 주는 자는 복이 있다(행복하다). 여기서 ‘보살핀다’는 말은 그런 사람들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행에 싫증 내지 않고 보다 꾸준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며 역겨움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인내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 이상으로, 신중한 판단력으로 시간과 관심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1절이 말하는 ‘복’은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일차적 보상이고 약속이다. 그는 적은 것으로 큰 것을 얻는 사람이다. 다윗은 이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을 소개한다. 그것은 “재앙의 날에 저를 건지신다”는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이다. 이것은 재앙을 만나지 않고 어려움이 없다는 약속이 아니다. 재앙이나 어려움이 닥쳐올 때 하나님께서 건지시겠다는 약속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행한 모든 숨겨진 선행과 봉사는 하늘의 창고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과 같다. 2절은 부차적으로 주어지는 복을 언급한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고 생명을 보존하신다. 그를 원수에게 맡기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주시나이다(3).” 얼마나 자상하고 감미롭고 부드러운 말씀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 우리의 간병인이 되어주시고, 우리가 병에 걸려있을 때 우리를 고쳐주시는 의사시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알았고 이것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가 누릴 복이다.
3. 다윗은 자기 경험을 회상한다. 다윗은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며 살았으나 막상 자기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아무도 곁에서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하나님 만이 그의 도움이 되어주셨다. 인간적으로 큰 외로움을 경험했겠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특권을 누렸다. 4절은 다윗의 고통이 그의 범죄와 관련되었을 보여준다. 이때 원수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몸이 아픈 다윗을 저주하며 죽기를 바랬다(5). 그들은 다윗에게 거짓을 말했고 나가서 그를 비방했다(6). 그들이 말한 ‘악한 병’은 귀신 들림처럼 못된 병을 일컫는다(8). 그들은 다윗이 다시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했다(8). 신자는 결코 이런 악인들의 자리에 설 수 없다.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다윗을 배신하여 그를 향해 발꿈치를 들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9). 이것은 주님께서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는 상황에 적용하신 말씀인데(요 13:18). 다윗 자신도 이런 배신을 경험했다. 자기는 가난한 자를 살피고 살았는데 자신이 곤궁하게 되자 아무도 자기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으니 불평이 나올 만 하지만, 다윗은 세상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보심을 경험한다.
4. 10절의 기도는 보복적으로 읽힐 수 있다.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구약의 이런 기도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을 향한 배역과 거부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분노와 심판의 정서를 공유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개인적 차원의 보복이 아니라 왕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려는 마음을 드러낸다.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던 원수들이 그들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고 주께서 자신을 기뻐하고 계심을 확인한다(11).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진실함(integrity)이다. 그것이 12절에 ‘온전한 중에’라는 말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진실함을 아시고 나를 붙들어주시며 나를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신다고 다윗은 확신하여 고백한다(12).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다.
5. 41편은 그리스도인이 가까운 친구의 배신으로 외로울 수 있지만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친밀하심과 도움을 경험하는 복을 누린다고 말한다.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어준 사람들에게 말이다. 당신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가? 이것은 돈이 많고 적은 문제가 아니다. 주의 말씀을 기억하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가난한 사람은 늘 교회 안팎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다.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며 그들이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셨다(마 10:40~42). 그 작은 자는 누구인가? 주님은 또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지고 바다에 빠지는게 낫다고 하셨다(마 18:6). 사람들이 무시하고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마 18:10,15).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우리도 이렇게 이 말씀에 화답하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6.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희 가난함을 아시고 찾아와 보살피시듯이 저희도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삶을 살도록 믿음과 은혜를 더해주시옵소서. 그리고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약속하신 복을 충만히 누리게 하옵소서.”
시편 4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2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11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2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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